가경자

可敬者

[라]Venerabilis · [영]Vener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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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1][2]의 '가히 공경할 만하다' 는 뜻. 시복(諡福) 전 단계에서 복자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지던 경칭(敬 稱). 이 경칭은 해당 교구나 수도 단체[3][2][1]에서 시복에 대한 조사 수속의 결과를

로마에 보내면 예부성성(현 시성성의 전신)에서 그것을 심의한 후, 시복 후보자의 영웅적 덕행

또는 순교자일 경우, 그 순교 사실이 어느 정도 인정될 때 교황청 수속을 시작할 수 있다는 이른바 시복 접수령 의 공포와 동시에 주어졌다. 그러나 이 경칭이 동시에 공 적인 공경을 허가한다는

뜻은 아니었다(1917년 구교회법 전, 제2084조 2항, 2115조 2항).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 의 순교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1857년에 82명의 가경자

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위의 절차를 거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조선교구에서는 계속되는 박 해 때문에 그러한 조사 수속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자들에

대한 거의 완벽한 순교 전기만은 작성해서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1839년과 1846년에 조선 왕국에서 발생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 와 이 토마스가 수집하고,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번 역한 것을 최 토마스 부제가

라틴어로 옮긴 것"이란 아 주 긴 제목의 문헌이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부제는 홍콩에서

입국의 기회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즉 1847년 봄에 조선에서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이 순교 전 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로 보냈고, 파리 본부에서는 같은 해

그것을 다시 예부성성 으로 보냈다. 한편 예부성성에서는 조선의 박해 사정을 고려하여, 그

문헌으로 조사 수속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 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시복 후보 순교자 중 82명을 가 경자로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가경자 명단은 당초 83명이었으나 박 루시아(희순)의 언니 박 마리아 (큰아기)가 경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중복되어 있음이 밝 혀져 82명으로

확정되었다. 이 82명의 가경자 중 79명만이 1925년에 복자 위에 올랐고, 정 아가다, 김 발바라, 한 안나 등 3명은 증언 부 족으로 시복에서 탈락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가경 자가 된 이

3명의 가경자 칭호까지 무효화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후 1968년 병인박해(1866) 순교자 중 24명이 또 복자가 되었는데, 그들은 가경자의 단계를 거치지 않 은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시성 · 시복 절차가 간소화되면서 이미 그 단계가 폐지된 때문일

것이다. (→ 시복 ; 복자) ※ 참고문헌 Coreana, Beatificationis···Positio super validitate proces- suum, Roma, 1910, pp. 60~63(《103위 시복 시성 자료 1》,

한국 천주교 회 2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 1983)/ Adrien Launay, Martyrs Frangais et Coréens(1838-1846), Béatifiés en 1925, Paris, 1925, pp. Ⅶ~ X Ⅱ / 아드리 앵 로네,

안응렬 역, 《한국 79위 순교 복자전》, 가톨릭출판사, 1959, pp. 7~14/ 《기해일기》, 서울, 1905/ 임충신 · 최석우 역주, 《최양업 신 부 서한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崔奭祐]

[1] 수도 — 2026년 표기 변경

[2] 또있어요 — 사유는요

[3] 또야? — 응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