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長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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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초기 교회의 중심지요 26성인의 순교지. 현재 나 가사키 대교구(長崎大敎區)의 주교좌 본당인 우라카미 (浦上) 본당과 1953년에 국보로 정해진 오우라(大浦) 성당, 일본 26성인 기념관 등이 있으며, 이곳의 사또와 키(里脇淺次郎) 추기경이 규슈(九州) 서쪽 지역인 나가 사키 현 전체를 관할하고 있다. 이 중 우라카미 성당의 종탑에는 '나가사키의 종' 이 있는데, 이것은 원폭으로 희생된 나가이 다카시(永井隆)가 저술하여 패전 후의 일 본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나가사키의 종》을 기려 명명 되었다. 한편 나가사키와 한국 교회와의 관계는 멀리 임 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가 천주교 신자가 된 조선인들의 순교에서 찾아볼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메이지 (明治) 시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이곳에 진출함 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교회 창설과 박해〕 현 나가사키 대교구 지역에 처음 으로 복음이 전래된 것은 예수회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Franciscus Xaverius)가 1549년 일본에 상륙한 이듬해 8 월경, 규슈 서쪽 해안을 따라 히라도(平戶)에 도착하면 서였다. 이때부터 이 지역에는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람 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사베리오의 뒤를 이어 예수 회의 장상인 토레스(Comede Torres) 신부가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과 함께 열심히 전교에 노력한 결과 마침내는 나가사키에서도 신자(즉 기리시탄)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에 토레스 신부는 1568년 나가사키 를 방문하고 이곳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한편 영주들을 개종시키는 데 힘썼다. 그 후 나가사키에 큰 변화가 있게 된 것 은 1578년 이래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 (巡察使) 발리냐노(Alesandrdro Valignano) 신부가 이곳을 여러 번 방문하고 오오무라(大村純忠) 영주로부터 항구 일부의 땅을 할애받아 예수회의 근거지 로 삼은 뒤였다. 발리냐노의 활약으로 일본 교회는 1581년에 인도 예수회 관구로부터 분 리되어 부관구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기리시탄 보호책을 취해 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87년에 이르러 선교 사 추방령을 내리는 동시에 전국적인 박해를 명하면서 교회가 전멸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만,초대 일본 예수 회 부관구장 코엘료(Coelho)의 슬기로운 대처로 난국을 극복하고 히데요시로부터 현상 유지를 인정받을 수 있었 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593년 에 입국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공공연한 선교 활동 과 1596년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의 표 착 사건으로 히데요시가 다시 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박해로 1597년 2월 5일, 프란치스코회 수사 6명을 비롯하여 3명의 예수회 수사, 미끼(三木, 바오로)를 비 롯한 일본인 17명 등 도합 26명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西坂)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들은 모두 1862년에 시성되었으며, 위에서 말한 니시사카의 기념관은 바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한편 일 본의 26성인 가운데 레오 가라스마루(烏丸), 바오로 이 바라키(茨木), 루도비코 이바라키(茨木) 등이 한국인이 라는 주장도 있지만, 후자의 2명은 분명 한국인이 아니 었고, 비오 9세의 시성 칙서 가운데 한국인으로 설명되 어 있는 레오 가라스마루도 입교 시기로 볼 때 한국인은 아니었다. 1595년 예수회원 마르티네즈(Pedro Martinez) 신부가 일본의 주교로 임명되고, 이듬해 나가사키에 정착하였 다. 그러나 박해로 인해 포교 활동이 어려웠고, 1608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어떤 선교 단체이든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인정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 정권 때 일본에 여러 선교 단체들이 진출함에 따 라 전교의 통일성을 잃고 말았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 스는 초기의 묵인을 철회하고 1614년 기리시탄에게 금 교령을 내리는 한편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박해는 1630년대까지 계속되어 교토(京都), 오사 카(大阪), 규슈 등지에서 많은 수의 신자들이 순교하였 으며, 이 박해로 인해 나가사키의 신자들도 거의 전멸되 었다. 1867년에 시복된 205명은 바로 이때 순교한 사람 들이다. 그리고 일부 기리시탄 집안들은 규슈 도서 지방 으로 피신하여 비밀리에 신앙 생활을 하였는데, 이들을 가리켜 '가쿠레 기리시탄' (隱九切支丹)이라고 한다. 한 편 이때의 박해로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가 천주교 에 입교한 한국인 신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수가 체포되 거나 순교하였다. 그중 1867년에 시복된 9명은 모두 나가사키에서 처형 되었는데, 그중 고스마 다케야(武谷)는 1619년에 화형, 그의 아들 프란치스코 다케야는 1622년에 참수형, 안토 니오는 1622년에 화형, 그의 장남 요한은 1622년에 참 수형, 차남 베드로는 1622년에 참수형, 가이오(Caïo)는 1624년에 화형, 옥중에서 예수회원이 된 권(權) 빈천시 오 가베에(嘉兵衛)는 화형, 가이오 지에몽(Jiyémon, 次衛 門)은 1627년에 화형, 가스팔 바즈(Gaspar Vaz)는 1627 년에 화형으로 각각 순교하였다. 이 밖에도 나가사키에 서 순교한 한국인 신자들로는 1627년에 참수형을 받은 토마스 오(大) 진에몬(Jinyemon) , 1633년에 화형을 받은 요한, 1643년에 구멍형(六弔り)을 받은 토마스, 1622 년에 참수형을 받은 안드레아 구로베에(黑兵衛) 등이 있 다. 〔박해 후의 변모〕 도쿠가와 정권의 박해가 시작된 지 2세기가 지나면서 유럽의 여러 선교 단체들은 다시 일본 전교를 꾀하게 되었다. 이때 파리 외방전교회가 프랑스 정부의 후원을 얻게 되면서 가장 먼저 일본 진출을 서둘 렀으며, 1844년에는 포르카드(Forcade) 신부를 유구(琉 球)에 상륙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1846년에 일본이 대 목구로 설정되고 포르카드 신부가 초대 대목으로 임명되 었으나 나가사키에 상륙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858년 일본이 개국하고 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맺게 되 자 유구에 체류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지라르(G.S. Girard) 신부가 일본 대목으로 임명되었다. 지라르는 이 듬해 8월 에도(江戶, 즉 東京)에 도착하였다. 이때 그는 요코하마(橫濱)에 거처를 정하고 1862년에는 이곳에 성 당을 건립하였으며, 무니쿠(Mounicou) 신부의 도움으로 요코하마 성당 안에 활판 인쇄소를 개설하여 1865년에 처음으로 《성교요리문답》(聖教要理問答)을 간행하였다. 이로써 다시 일본 전교의 문이 열리면서 1864년에는 파 리 외방전교회의 프티쟝(Petitjean) 신부가 박해 시대 기리 시탄의 중심지였던 나가사키에 진출하게 되었다. 프티장 신부는 1865년 2월 나가사키에 오우라 성당을 건립, 이를 축성하였다. 그러자 3월에는 기리시탄의 후 손임을 자처하는 3명의 여인이 그를 찾아와 신앙을 고백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박해 후 2세기 만에 있은 '신자 재발견' 이었다. 이후 우라카미, 고시마(五島), 히라도 등 에 잠복해 있던 기리시탄 가운데 약 1만 명이 교회로 돌 아오게 되었으며, 새로운 선교사들이 입국하였고, 1866 년 프티장 신부는 일본 대목으로 임명되었다가 10년 후 남북으로 분할됨에 따라 나가사키는 남대목구의 주교좌, 도쿄는 북대목구의 주교좌가 되었다. 그러나 1868년 6 월 새로 들어선 메이지 정부가 국금(國禁)을 어겼다는 이유로 나가사키와 고시마 신자들에게 박해를 가하는 동 시에 우라카미의 신자들을 유배에 처하거나 배교를 강요 하였다〔浦上崩れ. 이후 약 5년 간 박해가 계속되는 가운 데서도 선교사들은 전교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뿐만 아 니라 프티장 주교는 박해 전에 이미 현재의 주교관 자리 에 있던 목조 가옥을 매입하여 거처를 정하고 그 안에 신 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1868년에 활판 인쇄소를 개설하 였다. '로' (Rotz, Claude-Marie de) 신부가 설립한 이 인쇄 소는 이후 한국 교회와도 깊은 관련을 맺게 되는데, 여기 서는 1868년에 간행된 《성교일과》(聖教日課)를 비롯하 여 '프티쟝 판 이라고 불리는 여러 서적들을 출판하였 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 이 무렵 한국 교회는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인해 피폐된 상황이었다. 그러다 가 1876년 4월,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Ridel, 李福明) 주교의 인도로 블랑(J. Blanc, 白圭三) 신부와 드게트 (Deguette) 신부가 한국에 입국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중국으로 돌아가 있던 리델 주교는 한국인 신자들의 도 움을 얻어 이전부터 준비해 오던 《한불자전》(韓佛字典) 과 문법서인 《한어문전》(韓語文典)의 편찬을 마무리하 던 중, 1876년에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가 한국 선 교사로 임명되자 이 작업을 그에게 일임하였다. 코스트 신부는 이 원고를 갖고 1878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인쇄소에서 이를 간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 직 조선어에 능통하지 못했으므로 요코하마로 온 리델 주교의 도움을 얻어 작업을 완성하고, 다른 인쇄소를 물 색한 끝에 1880년 《일본의 소리》(Echo du Japon)라는 잡 지를 발간하고 있던 레비(Lévy) 인쇄소에서 《한불자전》 을 간행하고, 다음해에 《한어문전》을 간행하였다. 이후 코스트 신부는 1882년 초까지 요코하마와 도쿄에 머무 르면서 사전 간행 준비 때 최지혁(요한)이 만든 활자들 과 새로 구입한 활자들을 바탕으로 조선교구의 인쇄소를 설립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마침내 요코하마에 활판 인쇄 소를 설립하고 《신명초행》(神命初行, 1881)과 1권으로 된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를 간행하였다. 그러 나 1882년 2월에는 이를 나가사키로 이전하고 '성서 활 판소' (聖書活版所)라 명명하였다. 인쇄소를 이전한 이유 는 요코하마보다 나가사키가 한국과 가까워서 일하기에 편리했고, 프티장 주교로 인해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격이라 할 정도로 동 회의 활동 중심지가 되어 있 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가사키는 한국 교회와 밀접해지게 되었다. 한편 리델 주교는 1881년 인쇄소 이전에 앞서 나가사키 를 방문하고 이곳에 조선교구 대표부라고 할 수 있는 기 구를 설치함과 동시에 코스트 신부에게 그 업무를 담당 하도록 하였다. 이때 리델 주교는 뇌일혈로 나가사키 병 원에 입원하였다가 홍콩의 베타니아 요양소로 갔다. 코 스트 신부는 여기서 인쇄 작업을 계속하고자 한글 자모 를 추가로 만들고 곧 4권으로 된 《천주성교공과》의 간행 에 착수(1886년 간행본으로 추정됨)하였고, 아울러 《성찰 기략》(省察記略, 1882) , 《진교절요》(眞敎切要, 1882) , 《성교감략》(聖教鑑略, 1883), 《영세대의》(領洗大義, 1883) , 《회죄직지》(悔罪直指, 1883), 《천당직로》(天堂直 路, 1884), 4권의 《주년첨례광익》(周年瞻禮廣益, 1884) , 《성교백문답》(聖教百問答, 1884), 《성교요리문답》(聖敎 要理問答, 1886) 등을 간행하였다. 코스트 신부는 이후 1885년 11월 8일 서울에 도착하여 인쇄소 이전 준비를 하였고,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 체결 이후 인쇄소 를 이전함과 동시에 활판 인쇄 작업을 시작하여 우선 《성 요셉 성월》, 《성모 성월》 등을 간행하였다. 이 밖에도 나가사키와 한국 교회는 또 다른 일로 관계 를 맺은 적이 있었다. 우선 1883년 7월 8일에는 우라카 미 성당에서 프티장 주교의 집전으로 블랑 주교의 성성 식이 거행되었고, 1882년과 1884년 사이에는 21명의 신학생들이 나가사키를 거쳐 페낭(Pennang) 신학교로 갔 다. 뿐만 아니라 1882년 3월 블랑 신부의 지시로 홍산 (洪山) 서들골에 묻혀 있던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 교, 오매트르(Aumaître, 吳) 신부, 위앵(Huin, 闕) 신부, 장주기(張周基, 요셉)의 유해가 발굴되어 동년 11월에 나가사키로 옮겨졌다가 1894년에 다시 서울 명동 성당 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 일본 교회사 ; 일본 교회의 한국인 순교자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달레 교회사》 上/ Compte-Rendu, 1883, 1884, 1886, 1887/ Léon Pagés 저, 吉田小五郎 역,《日本切支丹宗 門史》, 東京 : 岩波書店, 1939/《カトリック大辭典》 4, 東京, 1954/ 松 田毅一, <일본에 있어서 한국인 복자와 치명자>, 《경향잡지》 제54권 9~10호(1962. 9~10)/ 片岡彌吉,《日本キリシタソ 殉教史》, 東京, 1982/ 崔奭祐, <日本敎會의 한국인 순교자들>, 《敎會史研究》 제6집, 한국 교회사연구소, 1988/ 野下千年, 《長崎の敎會》, 長崎 : 大司教區, 1989.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