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이 다카시 (1908~1951)

永井隆

글자 크기
2
병상의 나가이 다카시와 어린 두 자녀.

병상의 나가이 다카시와 어린 두 자녀.


일본 작가. 세례명은 바오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적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킨 《나가사키(長崎)의 종》의 저 자. 나가이 다카시는 1908년 2월 3일, 일본 주고쿠 지 방의 시마네(島根) 현 이이시 마을에서 의사였던 아버지 히로시와 무사 가문의 어머니 쓰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사고력이 치밀하고 관찰력이 예리하여 주 변 사람들에게 친절하였고, 남의 위에 서는 것을 싫어하 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독서를 하거나 친구와 조용한 담 화를 즐겨 하였다. 마쓰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8 년 나가사키 의대에 진학, 방사선학(放射線學)을 전공하 였다. 1945년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의 피해를 입고 원자병으로 쓰러진 나가이 다카시는, 그 후 자신의 증상 (症狀)을 근거로 연구에 헌신하였다. 병상 생활을 하면 서 귀중한 생활 기록을 발표하였는데, 그가 남긴 저서 《원자병 개론》, 《로사리오의 쇠사슬》, 《만리무영》, 《이 자식을 남겨 놓고》 등은 모두 인간애 넘치는 작품들이 다. 오랜 동안의 투병 생활을 마치고, 1951년 5월 1일 43세로 생을 마쳤다. 〔가톨릭 신앙으로 전향] 고등학교 시절 유물론에 매료 되었던 나가이 다카시는, 의대에서 시체 해부를 하면서 이것이 인간의 본태(本態)라고 배우게 되자, 인간은 물 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쉽게 믿게 되었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그에게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나를 사랑 하시던 어머니가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나를 바라보시던 그 눈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엄마는 죽어도 영 혼은 언제까지나 너의 곁에 남아 있을거야' 라고. 영혼을 부정하고 있던 내가 그 눈을 보았을 때 아무런 의심도 없 이 '어머니의 영혼은 있다. 그 영혼은 육체를 떠나지만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고 직감하였다. 나는 파스칼의 《팡세》를 읽었다. 나의 흥미는 절로 가톨릭으로 이끌렸 다." 그런 마음의 변화를 겪은 후 그는 우라카미로 하숙 을 옮기면서 가톨릭 신앙에 직접적으로 접할 기회를 갖 게 되었다. 순수한 가톨릭 마을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우라카미는, 일본 성인 26명이 형장으로 끌려가던 길목이기도 해서 그곳 사람들의 신앙심은 뿌리 가 깊었다. 1933년 2월 1일, 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한 나가이 다 카시는 군의관으로서 만주 사변에 종군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미 미도리라는 여인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 였다. 미도리는 그에게 보내는 위문대에 《공교 요리》를 넣어 보냈고, 1934년에 귀환한 나가이 다카시는 바오로 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8월에 마리아 미 도리와 결혼하여 우라카미에 살림을 차렸다. 〔고통의 시절〕 나가이 다카시는 대학 병원에서 그 당 시 망국병으로 불리던 결핵성 질환을 근절하기 위해 바 쁜 나날을 보냈다. 학교, 공장 등에서 집단 검진이 행하 여졌고, 뢴트겐 간접 요법에 의해 하루에도 수백 명씩이 나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그러던 가운데 그는 백혈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아나필락시스 증세(알레르기의 일 종인 과민증)를 일으켜 위독 상태에 빠지자 병자성사를 받 았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물리 요법실에서 뢴트겐 필름을 선별하고 있던 나가이 다카시는 번쩍하는 빛과 청천 벽력 가운데 허공으로 몸이 날리면서 온몸에 유리 파편을 맞았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던 것 이다. 목숨은 건졌으나 피투성이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그의 아내 미도리는 이미 죽어 있었고, 그의 아 들 마꼬도(당시 12세)와 딸 가야노(당시 6세) 두 아이만 살아 있었다. 일순간에 깊은 절망에 빠졌으나, 그 후 그 는 두 아이와 함께 폐허가 된 집터에 사방 6자(1평)짜리 움막을 짓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남을 자기같이 사랑한다는 뜻으로 그 집을 여기당(如己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여기당의 바로 앞은 길이어서 지나가는 사람들 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그는 웃으면서 "나 는 동물원의 곰이 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나가이 다카시는 방사선 의학 학자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문필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 재능과 움직일 수 있는 팔 하나와 연필 한 자루로 백혈병 특유의 내출혈이 오른쪽 어깨뼈에 일 어나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되기까지 5년 반 남짓한 동안 에 무려 14권의 책을 썼다. 자기가 죽은 뒤 고아로 남겨 질 두 어린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겨 줄 책의 인세라고 하 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며 병고를 무릅쓰고 열심히 글을 썼던 것이다. 그는 나라의 복지 정책과 일반인의 복 지에 대한 관심도의 문제를 호소했으며 무엇보다도 진실 한 신앙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그의 감성과 논리로 전개하여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파고들었다. 피 폭 전부터 이미 백혈병이 침범되어 있던 그는 차츰 백혈 병 골수증이 악화하여 비장(脾臟)이 만삭의 임산부처럼 부어 올라, 여기당에서 내 사랑하는 신부' 라고 부르던 죽음을 맞게 되었다. 나가이 다카시는 핵 공포 · 직업병 · 환경 오염 · 자연 파괴 등이 인간성의 파괴를 자초하였으며 인류는 그 비 극을 자작 자연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런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인류애라고 역 설하였다. 그는 직업병(백혈병) 환자였고, 원자병 환자였 으며, 하루 아침에 과거와 미래를 말살당한 아픈 삶을 살 다가 간 사람이었다. 그는 이 시대에 고통받는 인류의 대 표자로서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이었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향잡지》 1452호(1989.3).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