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라〕participatio · 〔영〕distrib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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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 명을 먹인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야기는 나눔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
I . 성서학에서의 나눔 '나눔' 은 '나누어 주다' 라는 분배와 '참여하다' 라는 교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나눔' 이란 주고받음을 의미 하는 어휘라 할 수 있다. 성서에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어휘로 디아이레시스(διαίρεσις : 분여)가 있으나 신학적 인 내용이 잘 부각된 어휘로서 메토케(μετοχή : 참여), 또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 교제)가 더 적절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표현하 는 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코이노니아는 나타나지 않 고, 다만 형제적 교제나 참여를 의미하는 말들이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이 말은 주로 신약적인 용어라 할 수 있 다. 〔의 미〕 첫째로, 단순히 분배를 의미하는 디아이레오 (διαιρεω : 나누다)라는 어휘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 가 아들에게 그의 재산을 분배할 때(루가 15, 12) 언급되 어 있고, 또한 바오로가 고린토 교회에 나타난 성령의 다 양한 은사를 나타낼 때(1고린 12, 11) '분여' 의 의미로서 언급하고 있다. 명사형인 '디아이레시스' 는 고린토 전서 12장 4절 이하에서 세 번 연속해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 를 언급하는 어휘로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나눔' 이란 큰(많은) 것에서 작은(적은) 것으로의 이전을 의미 하긴 하나 일체적 참여라는 의미는 강력하게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구체적인 참여를 의미하는 메테코(μετεχω)는 신약에서 고린토서와 히브리서에 등장하고 있다. 대체로 소유격을 목적어로 취하는 동사이다. 특히 성찬 예식의 문맥에서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빵이 하나이 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고린 10, 17 ; 10, 21. 30), "의 로움과 불법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2고린 6, 14). 또 한 히브리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구 절은 2장 14절이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도 다른 인간처 럼 혈과 육을 지녔고 이로 인해 죽음의 권세를 지닌 마귀 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육화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메테코와 코 이노네오(κοινωνεω)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2고린 6, 14 ; 히브 2, 14). 셋째로, 코이노니아는 복음서보다는 바오로 서간에 압 도적으로 많이 등장하는데, '함께 또는 더불어' 라는 동 참의 의미를 갖고 있다. 형용사적 용법으로는 베드로 후 서 1장 4절에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 가 될 수 있다는 말로서, 독립적인 명사적 용법으로 는 '동료' (2고린 8, 23 ; 필레 1, 17 등)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다른 명사와 소유격 형태로 연결되면서 부정 적, 긍정적인 의미에 개의치 않고 쓰인다. 예를 들어, 이 방인의 우상 제물을 먹고 마시는 것은 마치 귀신들과 친 교를 맺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며(1고린 10, 18. 20), 그 반대로 수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2고린 1, 7)하는 것으로서 이해할 때 쓰여지기도 한다. 동사 형태로 쓰이는 코이노네인(κοινωνειν)은 사람과 연관하여 쓰여지고 있다. 사람과 연관된 예를 들면, 말씀 과 물질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에 대한 것들이다(갈라 6, 6 ; 필립 4, 15 등). 명사형의 코이노니아는 하느님과 인 간, 신앙 공동체 안에서의 사귐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된 다. 〔바오로의 나눔〕 바오로에게 '나눔' (코이노니아)은 포 괄적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론적으 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를 의미한다. "아 들과 친교를 맺는다"(1고린 1, 9), "성령과 친교를 맺는 다"(2고린 13, 13), "복음에 참여한다"(필립 1, 5), "계속 적인 고난에 참여한다" (필립 3, 10), "신앙에 참여한다" (필레 1, 6)는 바오로의 표현이 바로 '나눔' 이란 어휘가 지닌 신학적 의미를 잘 알게 한다. 예를 들면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베드로 · 야고보와 교제의 악수를 했다는 것 은 단순한 계약 체결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자가 서 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존재임을 확인하였다는 것 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 는 것으로 부활한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의미한다. 이 러한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이란 하느님의 창조적인 간섭 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며, 인간의 전적인 변화에 의해서 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존재가 된 다는 것은 그리스 신비주의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신 성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 수의 고난과 죽음에, 그리고 그의 부활과 그 영광에 '참 여하는 것' 을 의미한다. 이는 각 인격의 상실이나, 사라 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용서받 는 새로운 관계에 참여함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바 오로의 새 피조물에 대한 사상이다. 따라서 바오로의 '나눔' 이란 함께 사는 것이며(로마 6, 8 ; 2고린 7, 3), 함께 고난받는 것이며(로마 8, 17),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며(로마 6, 6), 죽은 이들 가운데서 함께 일으킴을 받고 사는 것이며(골로 2, 12. 13 ; 3, 1 ; 에페 2, 5. 6), 함께 영광받는 것이며(로마 8, 17), 함께 유 업을 받는 것이며(로마 8, 17), 함께 다스리는 것이다(2디 모 2, 12). 따라서 바오로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 난을 채움으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기다림인 것이다(필립 3, 10 ; 로마 8, 17 ; 골로 1, 24 ; 1데살 4, 17). 〔초대 교회의 나눔〕 초대 교회의 경우 '나눔' 이란 물 질들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곧 초대 교회는 성령의 사랑 을 받아 스스로 이루어낸 공유적 공동체로서, 부족한 자 의 것을 서로 채우고, 자발적으로 개인 소유를 공동체에 내놓음으로써 이루어진 물질의 나눔 사회(Gütergemeinschaft)였었다. 그러나 그 공동체가 공동 생산과 공동 소 유를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즉 경제 체제로서 조직 화된 공동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를 통해서 모든 죄악과 근심과 걱정에서 해 방된 자유를 통해 발생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인간의 소 유보다 더 큰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의 자리에서(마 태 6, 25-34)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시작한 공동체의 연속으로 파악 해야 할 것이다(루가 8, 1-3 ; 요한 12, 4 이하 ; 13, 29). 단순히 사회주의적인 동등성에 대한 추구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르나바의 토지 헌납이나 아나니아와 삽 피라의 이야기(사도 4, 36-37 ; 5, 1 이하)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그것을 물질의 공유 공동체만으로 쉽게 이 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또한 마리아의 집이라는 표 현(사도 12, 12)은 헌납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음도 보여 준다. 어쨌든 초대 교회의 '나눔' 은 공동체의 전례 속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빵을 땜 과 사귐 등(사도 2, 40-47 ; 4, 32-37)이 그것이다. 더 중 요한 것은 성령을 통한 일치성과 하나 됨의 모습이었다. 물론 초대 교회는 경제적인 조달을 해야 할 필요를 갖고 있었다. 갈릴래아에서 온 어부와 농부 출신들이 많았기 에 예루살렘이라는 대도시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일이 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더욱이 당시 팔레 스티나에 몰려든 기근으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상황은 더 욱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바오로가 그의 선 교 여행 중에 갖고 돌아온 헌금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 를 위해 중요한 '나눔' 의 표시였다(2고린 9, 13). 이는 영 적이고 육적인 주고받음의 일로서(로마 15, 26) 교제의 표시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온 영적인 선물에 대해 다시 물질적인 선물로 이방인 교회들이 응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나눔의 원형은 예수의 삶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예 수에게서 나눔이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예수의 삶의 형태였던 것이다. 하느님 나라 의 보화를 지상에 분여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죄인 들 · 소외된 자들 ·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찾아가 용서를 베풀고 그들과의 식탁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친교를 나누며 질병 들린 자에게 치유 를 허락하였다. 즉 예수의 삶이란 하느 님의 것을 나누는 연대성의 표시였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나눔의 사건' 은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는 섬김의 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십자가의 고 난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궁극적인 평화가 나누어진 것이다. '나눔' 의 모 범과 실제가 바로 예수 자신이었던 것 이다. 〔金枝喆〕 II . 실천 신학에서의 나눔 〔그리스도교적 의미〕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나눔은 '참여' (μετοχη)와 '함께 함' (κοινωνια)에서 그 의미가 보다 분 명해진다. 이는 나눔이 사회 · 정치 · 경 제적 분배의 의미를 넘어선 차원의 것 임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바로 '나눔' 의 삶 자체였고, 그 원형을 보여 준다 하겠다. '나눔' 으로써 증거 하였고 체현하였던 예수의 삶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나눔' 의 삶을 완성한다. 인류를 위한 대속, 그것은 온 전한 나눔' 이요, '완전한 봉헌' 이며, 동시에 우리의 신앙 이 어떻게 완성, 구원에 이르는가를 보여 주는 귀감이기 도 하였다. 그리스도교적 나눔의 깊은 의미는 나눔을 필 요로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함' , '온전히 하나가 됨' 의 체험으로 그 완성을 이룬다(사목 31항 참조). 그리스도교 적 의미의 나눔이, 자비심에 기초하여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준다는 불교적 의미의 보시(布施, Dana)와 다른 근 본적인 차이는 보시가 시혜(施惠) 차원의 미덕적 행위라 면, 나눔은 존재 전체를 요구하는 함께함〔同參〕이고 함 께 살아감〔親交〕을 의미한다. 즉, 나눔의 삶 그 자체가 신앙인의 삶이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요청에 근거한다 는 것이다. 나그네 된 자, 헐벗고 배고픈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명백히 당신 자신과 하나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해준 것 이 바로 곧 당신 자신에게 해준 것이라는 것이다(마태 25, 31-46). 겉옷을 달라는 이에게는 속옷까지 주라고 말 한다. 사람(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루가 10, 25-28). 친히 천대받고 학대받 는 이들에게 보여 준 각별한 사랑과 관심(마태 25, 3146)은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 의 체험이 바로 우리 모두가 온전한 하나라는 연대성, 공동체성의 확인 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왜냐하면, 예수 에게서 나눔이란 바로 다름아닌 하느님의 나라를 이 지 상 위에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당신의 삶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신과 우리가 하나 되기를, 우 리 모두가 하나임을 깨닫게 하도록 기도(요한 17, 1-26) 한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탄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다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나눔〕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 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처럼 살아가겠다고 자유로이 약속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 인의 실제는 그들의 신앙이 참다운 의미의 '나눔' 과 얼 마나 멀리 있는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이웃' 이란 도움 과 나눔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누가 강도 맞은 사람 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루가 10, 29-37)라는 예수의 준엄한 요청은, 나눔을 막는 오늘 날의 탐욕과 이기심의 만연에 대하여 심원한 반성을 촉 구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자유와 해방 의 세계로 이끌어 올린다. "여러분은 자유를 (누리기) 위 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갈라 5, 13). 바로 예수 그리 스도 친히 소유와 지배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침으로써 (루가4, 1-13)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오늘날은 급격한 경제 발전이 가져온 심각한 후유증으 로 전통적 미덕이 뿌리째 파괴되어 버리고, 물질 만능적 사고가 사회 전체에 만연하여 그 병리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물질 만능적 사고와 가치관은 그 어떠한 반사회적 이데올로기보다도 더 무섭게 인간을 직접적으 로 파괴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몰락이 유물론에 기초한 사상의 필연적 귀결이라면, 자본주의 사회를 풍미하는 물질 만능의 사조는 물질을 숭배하는 양상 속에서 또 하 나의 유물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산주의 유물론이 정신적인 가치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믿는 교조였다 면, 자본주의 유물론은 정신적 가치마저 물질로 환원, 질 식케 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의 물질 만능 사조로 인해 탐욕과 이기심으로 병들어 있 는 마음 안에는 영성(靈性)이 존재할 수 없다. 존엄하고 고귀한 하느님의 모상을 한 인간이 물질에 의하여 규정 되고 평가되는 역전된 비극이 현상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 사회의 경제 수준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사회 정의의 결여 · 부의 불평등 분배 · 상대적 박탈 감 및 소외감의 정도는 위험 수위를 육박, 사회 불안의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 소비가 만연하고 상류층의 사치와 탐욕이 행해지는 현실 에 최소한의 문화 생활은 고사하고 인간 생존을 위한 최 소한의 물질적 조건마저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수많은 이웃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사목 27항). 자본주 의 사회의 일반적 병폐로도 설명하기 힘든 불의와 비리 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여 기서 '도덕성의 부재(不在)' 가 공공연히 말하여진다. 종 교적 · 윤리적 호소조차 이제는 냉소 거리가 된다. 어떠 한 구호나 운동으로도 이 깊은 병을 치료하기는 불가능 하다고 공공연히 말하여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유일 한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그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하는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그대로 살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대안일 것이다(마태 7, 21).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행위는 구체적 인 나눔으로 나타난다. 이런 나눔의 행위는 사회적 지위 를 위하여, 부와 명예를 위하여,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평화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기적 '소유욕' 과 '제도적 구조악' 의 악 순환 속에 신앙이 매몰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평가 및 의의〕 그리스도가 걸어갔던 나눔의 삶은 절 박한 요청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분명한 응답을 호소 한다. '나눔' 은 이기심을 부수고, 무관심을 눈뜨게 한다. 또한 우리 안에 탐욕의 뿌리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여실 히 보여 주고, 너와 내가 하나임을 체험하게 한다. 그리 고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진리가 우리 를 자유롭게 하듯이, 나눔은 그리스도에게 한걸음 한걸 음 다가서는 과정이며, 모든 인간이 진정한 자유와 해방 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나눔은 마침내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기쁘게 내어 놓을 수 있을 때(요한 15, 13) 비로 소 완성된다. 이 안에서 비로소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가 당신 삶을 온전히 나눔으로써, 모든 생명이 하느 님 안에 하나 되게 하였듯이 '나눔' 이란, 바로 이 시대가 절실히 목말라 하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구체적 응답 이며 실천이다. ※ 참고문헌 한현 편집, 《참사람 되어》 31~34호, 1994/ 《하나 되 어》 합본 1~41 정학근 외 편,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 분도출판사, 1973/ 서인석,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분도출판사, 1979/ 앨버트 노 울런, 정한교 역,《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분도출판사, 1980/ 쟈크 뢰브, 이성배 역, 《그리스도라 부르는 예수》, 분도출판사, 1980/ 한스 큉, 정한교 역, (왜 그리스도인인가》, 분도출판사, 1982/ 존 허기 편, 성염 역, 《정의를 실천하는 신앙》, 분도출판사, 1977/ <사목 헌장>/ <평신도 교령>/ <구원에 이르는 고통〉 <자비로우신 하느님> <세계 정의에 관하여>/ <자유와 해방>/ <현대의 복음 선교>/ 정호경, 《밥도 먹고 말도 하고》, 분도출판사, 1994. 〔吳將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