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위 본당
羅岩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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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경에 세워진 나바위 옛 성당 모습.
전주교구 소속 본당. 일명 화산 본당(華山本堂) ) . 1897년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 심.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 1158 소재. 관할 구역은 익산군 망성면(무형 리 · 내촌리 · 어량리 · 신작리 · 장선리 · 화산 리)이고, 소속 공소로는 신덕(화산리) · 금지(화산리), 신용(부현리), 관산(신작 리) · 낭청(신작리) 등 5개소가 있다. 〔교 세〕 1898년 1,514명, 1910년 3,020명, 1953년 1,823명, 1963년 1,788명, 1973년 1,281명, 1983년 1,180명, 1993년 971명. 〔역대 신부〕 초대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요 셉(1897~1919), 2대 소세(H. Saucet, 蘇 世德) 히폴리오(1919. 8~1921. 10), 3대 파르트네(T. Parthenay, 朴德老) 테오필 로(1921.10~1922. 5), 4대 카닥스(J. Cadars, 姜達淳) 요셉(1922.5~1929.6), 5 대 이약슬(李若瑟) 요셉(1929. 6~1936. 6), 6대 서병익(徐丙翼) 바오로(1936. 6~1938. 6), 7대 김영호(金永浩) 멜키올(1938. 6~1942), 8 대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1942. 5~1944. 12), 9대 김명제(金命濟) 베드로(1944. 12~1947. 4), 10대 김영구 (金榮九) 베드로(1947. 4~1948. 8), 11대 김후상(金厚相) 바오로(1948. 8~1954. 10), 12대 김재덕(金在德) 아우구스 티노(1954. 10~1955. 7), 13대 허일록(許日錄) 타대오 (1955. 7~10), 14대 김영태(金永泰) 도미니코(1955. 10 ~1960. 7), 15대 이대권(李大權) 바오로(1960. 7~1964. 6), 16대 고경훈(高暻勳) 프란치스코(1964. 6~1966. 4), 17대 오기순(吳基順) 알베르토(1966. 4~1969. 4) 18대 김영일 (金永一) 발타사르(1969. 4~1971. 4), 19대 송남호(宋南 浩) 요셉(1971. 4~1975. 1), 20대 김진소(金眞召) 안드레 아(1975. 1~1977. 6), 21대 권영균(權寧均) 안토니오 (1977. 6~1982. 9), 22대 박종상(朴鍾祥) 가브리엘(1982. 9~1986. 1), 23대 김종길(金鍾吉) 라파엘(1986. 1~1989. 1), 24대 범석규(范錫圭) 마티아(1989. 1~1992. 1), 25대 엄기봉(嚴基奉) 베드로(1992. 1~현재). 〔설립과 발전] 전북 익산군 망성면 화산리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현종 11) 10월 12 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입국한 황산포에서 2Km 거리에 위치한다. 1897년 본당 이 설립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는 강경 지역에 교우가 없었으므로 용안군 안대동(安大洞) 공소에 거주하면서 성당 부지를 물색, 김여산의 12칸 기 와집를 매입하여 안채는 사제관으로, 사랑채는 성당으 로, 행랑 사랑은 성당 사무실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또 한 경기도 서순환 판서 소유의 화산과 그 산에 딸린 전답 을 매입하여 본당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1899년 4월 천주교 신자 김치문(金致文)과 외교인 조 흥도(趙興道) 사이의 사소한 시비로 베르모렐 신부와 본 당 신자들이 한때 위험에 빠졌고, 베르모렐 신부가 풀려 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전주 전동 본당 보두네 신부의 전 보를 받은 뮈텔 주교가 프랑스 공사를 통해 외부(外部) 에 선교사의 구출과 사건의 조사를 요청함으로써 '강경 포 사건' 은 외교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3명의 주모자 들에게 징역형이 선고됨으로써 6개월 만에 마무리된 이 사건은 지방민의 교회에 대한 편견, 치외 법권을 바탕으 로 한 선교사 보호권과 조선의 외교 문제, 일부 신자들의 교회 의탁 등이 얽혀 일어난 것이었다. 1906년 베르모렐 신부는 전교에 주력하는 한편 성당 을 건립하였다. 순수한 한식 목조 건축으로 지어진 이 성 당은 정면 5칸, 측면 13칸이었는데, 내부 열주(列柱) 사 이에는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칸막이를 하였으며, 제 대가 있는 부분에서는 중앙 열주를 멈추어 넓게 하고 양 기둥 사이에 영광의 문(triumphal arch)을 설치하여 지성소 와 회중석의 공간을 분절시켰다. 1911년 9월 18일 드망 즈 주교가 방문하여 축성한 이 성당은, 그 후 1916년 성 당 전면에 양식 벽돌조 종탑을 증축하면서 한양 절충식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때 정면에는 종탑과 5칸의 개방 된 벽돌조 포치를 덧붙였으며, 이형 벽돌을 사용한 장식 등이 완전한 서양식 교회 건축의 입면을 이루었다. 한편 1908년 8월 계명(啓明)학교(1937년 1차 폐교, 1947년 11월 6일 완전 폐교)를 개설하여 문명 퇴치에 주력 하였고, 본당 부근의 가옥과 토지를 매입하여 신자들에 게 분배하고 인근 부락을 교우촌으로 만드는 등 활발한 전교 활동으로 1910년 안대동(현 함열) 본당, 1929년 군 산(현 둔율동) 본당, 1935년 이리(현 창인동) 본당 등을 설 립, 분리시켰다. 일제 강점기 동안인 1937년에는 계명 학교가 폐교당하였고, 1941년 여름에는 김영호 본당 신 부가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 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49년 8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이 개설되어 본당 전교에 주력하면서 유치원과 시약소를 설립 · 운영하였다. 1954년 베르모렐 신부 공훈 기념비를 마련하였고, 이듬해 10월 12일에는 김대건 신부의 황산포 상륙 100주년을 기념하여 김대건 신부 순교 기념비 제막식 및 성당 건축 5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1957년 강당을 신축하고 극빈자를 위 한 진료소를 개설하였으며, 1959년에는 여산 본당을 신 설 · 분리하였다. 1967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서 울과 대구 관구로 나뉘면서 이듬해 2월 서울 관구에 소 속된 수녀회가 철수함으로써 본당에서 운영하던 진료소 와 유치원도 문을 닫았다. 1989년 2월 화산과 나바위로 병칭되던 본당 이름을 본당 설립 초기의 '나바위' 로 확 정하였고, 그 해 3월 5일 '나바위 본당 100주년 기념 사 업 준비위원회' 를 조직하여 100주년 기념집을 준비하고 있다. 1989년 10월 사랑의 씨튼 수녀회 분원이 개설되 었고, 성당 구내에 교구에서 건립한 '나바위 피정의 집'이 있다. (→ 강경포 사건 ; 베르모렐) ※ 참고문헌 《위텔 주교 일기》/《드망즈 주교 일기》 金九鼎 · 金 榮九, 《天主教湖南發展史》, 천주교 전주교구, 1964/ 金正新, <韓國 가톨릭 聖堂建築의 受容과 變遷에 관한 研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공학 박사 학위 논문, 1989/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연표》, 호남교회사연구소, 1993. 〔尹善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