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테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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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Ναβαταῖος · 〔라〕Nabataei · 〔영〕Nabatea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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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테야인의 수도 페트라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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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테야인의 수도 페트라의 중심지.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지역에서부터 시리아 남부 지역 사이에, 그리고 이스라 엘 남부 지역 네게브(Negeb) 사막에 살던 아랍 유목민 들. 그들은 기원전 4세기부터 사해 남동부에 자리잡은 천연 요새 페트라에 모여 살면서, 사우디아라비아산 향 료를 사서 지중해 각지로 내다 파는 중개상들을 상대로 징세도 하고 손수 중개상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중동 사막의 유목민들 가운데서는 비교적 빨리 기원전 2세기 에 페트라를 도읍으로 삼아 나바테야 왕국을 세웠다. 바 오로는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서 말하기를, 자기는 개 종한 다음 아라비아에서 전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 언 급된 아라비아는 나바테야 왕국을 가리킨다. [왕조사] 시조 아레다 1세(Arethas I, 기원전 170~160 경)는 하스모네 가문의 유다와 요나단의 유대 독립 운동 을 도왔다(1마카 5, 24-28 ; 9, 35 ; 15, 22 ; 2마카 12, 1012). 오보다스 1세(Obodas I, 기원전 93~85경)는 하스모 네 가문의 알렉산델 얀네우스 임금과 싸워 그에게서 사 해 동쪽의 모압 땅과 요르단 강 동쪽의 길르앗 땅을 빼앗 았다(요세푸스, 유대 고사 13, 357-382). 아레다 3세(기원 전 85~62경)는 왕국을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근처에 이르 기까지 확장하였다. 그는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 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다음부터는 로마에 예속되어 선린 관계를 유지하였다. 아레다 4세(기원전 9~기원후 40) 때 나바테야 왕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 티파스는 아레다 4세의 딸과 결혼했다가 기원후 27경에 이혼하고 자기 조카딸이면서 제수인 헤로디아와 재혼하 였다. 이에 아레다 4세는 헤로데 안티파스와 싸워 안티 파스의 군대를 무찔렀다(유대 고사 18, 109-125 ; 참조 : 마르 6, 17-29). 39년경 바오로는 개종한 지 3년 만에 다 마스커스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지만 아레다 4세 의 총독이 다마스커스 성문을 지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광주리에 담겨져 성벽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내려와서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한다(2고린 11, 32-33 ; 異文 사도 9, 23-25). 말리쿠스 2세(40~70)는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66~70) 때 기병 1천 명과 보병 5천 명을 팔레스티나로 파견하여 로마군을 도와 유대 독립군을 진압하는 데 일 조하였다(요세푸스, 유대 전쟁 3, 68). 106년 시리아의 로 마 총독 코르넬리우스 팔마가 나바테야 왕국을 로마 제 국에 합병하였다. 〔언어 · 문화와 그리스도교 전래〕 나바테야인들은 일 상적으로 아랍어를 사용하였으나 지도 계급은 행정 문서 나 기념물 각명 때 중동 국제어인 아람어를 썼다. 기원전 1세기부터는 그리스어도 사용하였다. 이들의 건축물과 예술은 그리스 ·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 리스 · 로마식으로 신상을 만들지 않고 최고신 두샤라 (Dushara)를 상징하는 표석〔라틴어로 bætylus, 靈石, 神石〕을 다듬어 놓았는데, 이는 사람 모양을 그리지도 새기지도 않은 이스라엘 종교와 상통한다. 알렉산드리아 출신 오리제네스(185-254경)는 페트라 북쪽에 위치한 보스라(지금의 부세이라) 교회 회의에 참석하여 그곳 주교 의 이단 사상을 검토했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에우세비오, 교회사 6, 33) 콘스탄틴 대제 때(306~337) 페트라 에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에우세비오, 이사야 주석서 42, 11 = PG 24, 392). 325년 니체아에서 개최된 공 의회에는 아카바와 보스라와 암만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유 적〕 ① 나바테야인들의 수도 페트라는 요르단 왕국 최대의 관광 명소이다. 페트라는 붉은 사암이 병 풍처럼 둘러쳐진 도읍이라 방어하기 안성맞춤이었다.입 구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길(Siq)은 약 5리, 때에 따라서 는 100m나 되는 높은 절벽들 사이에 뚫린 좁은 골짜기 인데 그 넓이가 2m밖에 안되는 곳도 있다. 골짜기 양편 에는 사암을 뚫어 만든 방 모양의 무덤들이 많다. 나바테 야인들은 망자의 기일에 그곳에 모여 추모제를 벌였다. 골짜기를 걷는 도중에, 나바테야인들의 최고신 두샤라를 상징하는 표석을 볼 수 있다. ② 골짜기가 끝나는 지점에 다다르면 페트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건물 엘 카즈 네(El Khazneh, 높이 40m, 너비 28m)와 마주친다. 건축 연대 는 미상. 유목민들은 이 무덤 건물 꼭대기에 보물이 숨겨 져 있다고 해서 아랍어로 엘 카즈네(보물)라 부른다. ③ 엘 카즈네에서 시내로 들어가다 보면 왼쪽에 반원형 극 장이 보인다. 돌을 하나하나 쌓지 않고 바위를 깎아 만든 게 돋보인다. 무덤들을 깎았기 때문에 뒤쪽 석벽에 구멍 이 뱅뱅 뚫려 있다. 좌석은 3~4천 석. 아레다 4세 때 만 든 것 같다. ④ 극장을 조금 지나면 샘터가 있고 샘터에 서부터 카스르 엘 빈트(처녀 성채)까지가 돌로 잘 포장된 중앙통이었다. 샘터에서 목욕탕까지의 중앙통 양편에는 주랑이 있었고, 주랑 끝에 이르면 왼편에는 고린토 신전 과 목욕탕이, 오른편에는 궁전이 있었고, 목욕탕 근처 중 앙통에는 삼중 성문이 있는데 여기서부터가 성역(聖域, Temenos)이고, 그 끝 왼쪽에 카스르 엘 빈트 신전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나바테야 만신전의 최고신인 두샤라를 상징하는 표석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이 신전에서 좀더 가면 바위 언덕 위에 작은 박물관이 있는데 그리스 · 로 마 신화를 소재로 한 인물 부조와 조각 등 소품들밖에 별 로 볼거리가 없다. ⑤ 박물관에서 한 시간 이상 걸어가면 바위산을 수직으로 뚝 잘라서 만든 거대한 무덤 건물 에 드 데이르(Ed Deir, 높이 49m, 너비 47m)가 나타난다. 페트 라에서 가장 큰 석조물인데 아랍어로 에드 데이르(수도 원)라 부르는 까닭은 비잔틴 시대에 그리스도교 은수자 들이 이 안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David F. Graf, 《ABD》 4/ Jordanie(Guides Bleus), Paris : Hachette, 1986, pp. 169~178/ Aland Millard, Treasures from Bible Times, Lion Publishing, 1985(정태현 역, 《성서 시대의 보물들》, 성바오로 출 판사, 1992, pp. 256~260).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