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大學生聯合會

[영]Federation of Catholic Stu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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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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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대학생 연합회는 가톨릭 대학생 운동(CSM)의 조직체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활동하는 평신도 대학생 사도직 운동 단체이다. 현재 서울을 비롯한 전국 14개 교구에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가 조직되어 있다. 전국 180여 개 대학교와 전문대학 가운데 약 150여 개 단위 대학(교)에 가톨릭 대학생회가 조직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약 130여 개 학생회가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다. 전국의 회원수는 약 3천 명 정도이다.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는 1955년 대한 가톨릭 학생 총연합회 시절 세계 조직인 국제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International Movement of Catholic Students)에 가입하였다. '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을 슬로건으로 전세계 80개국 이상에 지부를 두고 있는 국제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I.M.C.S.)는 파리에 세계 본부가 있으며 홍콩에 아시아 사무국이 있다. 국제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는 국제 지성인 단체 연합(ICMICA)과 함께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불리는데 가입 이래 직접 · 간접적으로 한국의 가톨릭 학생 운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 대학생회의 활동은 시대에 따라 활동의 형태와 목표를 달리 해왔는데, 그래도 대개는 첫째, 단위 대학(교) 가톨릭 대학생회 서로간의 형제애적 우의와 연대성을 높이고, 둘째, 평신도 사도직 활성화를 통한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추구하며, 셋째, 사회 복음화와 사회 정의 구현을 통해 공동선을 확대하면서 한국 사회의 발전과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주요 방향이다.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는 그 운동의 뿌리가 일제 시대에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연합체로서의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가톨릭 학생 총연합회(총연)의 설립을 결의했던 1954년부터이다. 1950년대에는 성가대, 주일 학교, 레지오 마리애 등 본당에 기반한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을전개하였는데 1960년 4· 19 학생 혁명과 이듬해 5 · 16 군사 쿠데타를 겪으면서 활동의 중심이 본당에서 대학 캠퍼스로 전환하였다. 대학으로 활동의 중심이 옮겨지면서 조직 활동도 레지오 마리애 방식에서 소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셀(Cell) 방식으로 바뀌었다. 1960년 나상조(羅相朝,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최초로 대학생 사목 전담 신부로 임명되었고, 1961년에는 중고등부 학생회와 대학생회가 분리되어 독자적인 조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학 캠퍼스를 기반으로 한 전문적 평신도 사도직 운동으로 자리를 잡은 총연합회는 1960년대 초반 전국 115개 대학(교) 가운데 58개 대학에 가톨릭 대학생회를 조직할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가 알려지기 시작한 1964년에 열린 제10차 전국 대회는 '그리스도교의 재일치' 즉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제로 다루었고 이듬해인 1965년에는 대학 사회에서의 가톨릭 학생 운동이란 주제로 가톨릭 대학생 운동을 평신도 사도직 운동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주제들을 통해 가톨릭 대학생의 사회 정치적 의식이 급속하게 고양되었고 사회 참여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64년 11월 독자적인 총연합회 기관지 를 창간하였고 이는 1968년 3월 월간 《팍스》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1967년 9월 30일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재정적 도움으로 건립한 명륜동 가톨릭 학생 회관은 안정적인 활동 공간을 제공하였고 1970년부터는 주교 회의와 각 교구로부터 공식적인 재정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반 학생 운동과 접하게 된 가톨릭 대학생회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사도직 운동의 틀을 넘어서 점증하는 사회 경제적 모순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운동의 과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가톨릭 대학생회는 교회 당국과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1968년 열린 전국 대회에서는 민주주의와 저개발국의 민족주의 주제를 탐구하였고 1968년 발생한 강화도 '심도직물사건' 과 주교단의 적극적 의사 표명은 이러한 노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편 교회 당국의 관심과 지원도 증가하였다. 1969년 10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가톨릭 학생 사목 지도자 회의' 에 참가한 나길모 주교(W.J. McNaughton, 당시 총연 총재 주교)와 나상조 신부(총연 지도 신부)는 귀국 후 학생 사목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이를 계기로 체계적인 대학생 사목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이 결과 1971년 서강대에서'전국 지도 신부 회의' 가 열렸다. 1970년대 초반 총연은 이미 13개 교구 연합회 산하에 75개 단위 학생회 소속 1만여 명을 포괄하는 방대한 조직으로 성장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참여 속의 성화' 를 슬로건으로 활동을 전개한 총연은 1970년 7월 광주에서 열린 제16차 전국 대회에서 '사회 변동과 가톨릭 학생 운동' 을 주제로 다루면서 사회 참여의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하였다. 1970년 4월에는 한국 기독학생 총연맹(KSCF)과 공동으로 '부활과 4월 혁명'이란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이후 이 강연회는 80년대 말까지 4· 19 혁명을 기념하는 대표적 행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972년 '크리스챤 사상 및 문화 운동' 사업을 총연 사무국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데 대해 학생 대표들이 이의를 제기하였고 이를 계기로 총연이 60년대 확대 발전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조직적 문제들이 폭발하여 결국 총연은 해체되었다.
총연의 중앙 집권적 구조에 대하여 교구 학연을 강화하는 대안으로 전국 의장단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의도와 달리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결국 가톨릭 학생 운동은 유례없는 침체기를 맞이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국 회장단 회의가 1975년 2월에 열렸고 이는 '대한 가톨릭 학생 전국협의회' (전협)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전협은 협의회라는 조직적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전국 성지 순례, 대학인 본당 찾기 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가톨릭 학생 운동의 내실화를 도모하였다. 과거 다소 방만했던 조직을 정비하고 혼란한 가톨릭 학생 운동의 이념을 체계화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운동의 이념과 실천 사이의 괴리를 쉽게 극복하지는 못했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은 다른 일반 학생 운동처럼 가톨릭 학생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사건 이후 전협 내부에서 보다 체계적인 현실 인식과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 방법론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높아졌고 운동의 방향과 내용도 이에 따라 변화하였다. 1970년대의 개인적 또는 추상적 실천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운동의 내용이 변화하였고 당시 학생 운동의 이념과 방법론이 적극 도입되었다. 당시 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왔던 서울 학연은 1981년 학생 대회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 , 1982년 '제3세계와 그리스도교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가톨릭 학생 운동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소그룹 운동이 의식화의 주된 방법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급진적 사회 변혁 이론을 학습하면서 서울 학연은 전협과 함께 성명서 발표와 가두 시위 등을 통하여 점차 정치적인 문제에 직접 참여하였고 이로 인하여 정부 및 교회 당국과의 마찰이 잦아지게 되었다. 한편 내부에서는 가톨릭 운동과 학생 운동의 두 축 사이에서 가톨릭 학생 운동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한 논쟁이 가속화되었다. 교회 당국과의 잠재적 갈등은 1983년 8월 한동안 중단되었던 전국 대회를 개최하기로 한 전협의 결정을 당시 학생 사목 담당 주교인 경갑룡 주교가 반대하자 드디어 폭발되었다. 교회 당국의 가톨릭 학생 운동에 대한 몰이해와 학생의 급진적 입장 사이에서 해결점을 찾기 위한 당시 전협 지도 신부인 박기주 신부의 중재와 전협 지도부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1984년 10월 전협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바로 다음해 학생 지도부는 전협의 대안으로 '대한 가톨릭 학생 총연맹' (총연맹)을 결성하여 오랜 숙원인 전국 대회를 개최하지만 소위 '프락치 사건' 으로 불미스럽게 끝나면서 총연맹의 실질적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게다가 1987년 춘계 주교 회의에서 전국 가톨릭 농민회, 전국 평신도 사도직협의회와 함께 전국 단위 사도직 단체의 활동 정지 결정이 내려지자 가톨릭 학생 운동은 더욱 깊은 좌절과 침체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서울과 인천을 비롯한 7개 교구 대학생 연합회 대표가 1987년 10월 대전 가톨릭 농민 회관에 모여 비공식으로 전국 조직의 재건을 논의하고 '대한 가톨릭 대학생 전국협의회 준비위원회' 를 결성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 가톨릭 학생 운동은 당시 학생 운동의 대표적 기구인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전대협)-현재는 '한국 대학생 총연합회' (한총연)-의 종교 분과에 소속되어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1987년부터 약 5년 동안 준비를 거친 후 1992년 10월 24일 정식으로 '전국 가톨릭 대학생협의회' (전가대협)를 발족하고 제1기 집행부가 출범하였다. 내용적으로도 토착화된 전례 양식의 개발과 실천, 신학 공부 및 평신도 영성 개발 등을 통하여 신앙 공동체 건설에 주력함으로써 과거와 달리 가톨릭 운동으로서의 신앙적 측면을 강화하는 데 주력 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의 새롭게 변화된 상황 속에서 나타난 전반적인 일반 학생 운동의 침체는 가톨릭 학생 운동에 영향을 주어 전가대협은 가톨릭 학생 운동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둘러싸고 다시 진지한 모색을 하고 있다.
※ 참고문헌  《가톨릭 대학생》 제4호, 서울대학교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1989/ <전가대협 창립 총회 및 제1기 출범식 자료집>, 제5기 전국 가톨릭 대학생협의회 준비위원회, 1992/ <가톨릭 학생 운동사>, 《예수 없이는》 자료집 3, 대한 가톨릭 학생 전국협의회, pp. 245~253. 〔李成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