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서
- 書
〔라〕Prophetia Nahum · 〔영〕Book of Nah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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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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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람에서 발견된 나훔서의 주석서 일부.
니느웨의 멸망이라는 단 하나의 사건을 내용으로 한 구약의 특이한 예언서. 고대 근동 지역의 최강대국 아시 리아는 아슈르바니팔이 죽은(기원전 626) 다음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북부의 메대와 남부 바빌론의 연합군이 수 도 니느웨를 함락(기원전 612)하자 아시리아 대제국은 종말을 고하였다. 강대국의 파멸을 기뻐하는 이 예언서 를 이해하려면 거의 3세기에 걸친 아시리아 지배의 잔혹 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니느웨가 "피로 절은 저주받 을 도시"(3, 1)라고 불려질 만큼 정복당한 이들에 대한 그들의 잔인성과 비도덕성은 악명이 높았다. 다시는 아 시리아가 유대를 농락하지 않으리라고 선언하는 나훔서 에는 오랜 세월에 걸친 백성의 불 같은 격분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나훔보다 몇 세기 뒤인 요나서의 저자는 니느 웨를 동정하나 나훔은 니느웨의 파멸을 정의의 심판으로 간주한다. 나훔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이다. 엘코스 사람 인 그는 성전 예언자로 간주되기도 하나 그의 활동이 예 루살렘에 한정되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이 책의 저 자는 오로지 이름만 알려져 있고, 엘코스(1, 1)가 어디인 지 그 위치조차 확실하지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이 예언서의 저술 시기를 데베스가 멸 망(3, 8)한 기원전 663년, 또는 아슈르바니팔이 죽은 기 원전 626년경으로 본다. 왜냐하면 나훔서가 쓰여질 당시 는 아시리아가 아직 세력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나훔이 니느웨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기원전 660~ 630년경에 유대의 동족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이 예언서 를 썼으리라고 한다(1, 1). 그 이유는 이 예언서가 예루 살렘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반면, 니느웨의 멸망을 생 생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예언서에 묘사된 물 이 빠지고 있는 웅덩이(2, 9), 사자 굴(2, 12-14), 매춘(3, 4-6), 무화과나무(3, 12), 메뚜기 떼의 재앙(3, 15-17) 등 은 니느웨를 배경으로 한다. 한편 이 책은 유대에서 요시 야의 개혁(기원전 612경)부터 요시야가 죽기(기원전 609) 전, 아시리아의 멸망을 다행으로 여기던 시기에 쓰 여졌으리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 책에는 유대의 죄악 들에 대한 저주가 없기 때문이다. 〔문학 유형과 책의 구조〕 나훔서의 저자는 아시리아 멸망의 이유와 주님의 심판을 빼어난 시어(詩語)로 묘사 한 천재적인 시인이다. 여러 가지 문학 유형으로 이루어 진 이 예언서는 그 전체가 이방 민족의 파멸을 묘사하는 어두운 문체로 쓰여졌다. 나훔서의 일부(1, 2-8)는 아크 로스틱(acrostic : 히브리 철자의 순서에 맞추어 쓴 시의 형태)이 며, 장송 애가(殃禍, 3, 1-7)와 빈정대는 노래(3, 8-19)를 포함한다. 이 책의 가장 충격적인 특성은 말 놀이(wordplay)와 소리의 놀라운 사용이다. 그 도시의 최후 파멸을 기술한 2장 11절을 히브리어로 소리내어 읽으면 종소리 처럼 들린다. 히브리어 본문으로 2장 8절을 읽으면 조곡 소리와 시종들이 가슴을 치는 소리로 들린다. 역설적인 물음이 나오는 3장 7절의 히브리 원문은 '이도드''' (ㄱㄱㄱㄱㄱ, 피해 가다)와 '아누드' (ㄱ)그구, 가엾게 보다)라는 말과 '사다 드' (ㄱㄱ♡, 망하다로 번역)라는 어근으로 말 놀이를 하고 있다. 그 소리는 3장 10절에 "내던지다, 내쫓다" 를 뜻하 는 '아다드' (ㄱㄱㄱ, 끌어가다로 번역)의 반향이다. 번역하기 에 지극히 어려운 구절인 1장 10절을 히브리 원문으로 낭송하면 불의 '쉿' 하는 소리, 또는 술취한 이의 '쉬이 쉬이' 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이외에 몇 구절들은 두운체(頭韻體)이다(1, 2 ; 2, 3. 6. 9 ; 3, 4). 주님의 오심과 심판(1, 2-2, 13), 니느웨의 함락(2, 2 -3, 19)으로 양분된 이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1 : 제목 1, 2-8 : 복수하는 하느님 1, 9-2, 1 : 희망의 신탁
2, 2-14 : 니느웨의 함락
도입(2, 2-3) 도시 안의 혼란(2, 4-10)
그 사자의 운명(2, 11-14)
3, 1-19 : 마지막 묘사
매춘의 도시를 위한 장송곡(3, 1-7)
비아냥거리는 노래(3, 8-19)
데베스와의 비교(3, 8-11)
쓸모 없는 방어(3, 12-15a)
메뚜기 떼와의 비교(3, 15b-17)
최종 운명(3, 18-19) [메시지] 나훔서는 성실한 하느님이 유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오직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니느웨가 상징 하는 압제자의 파멸은 하느님의 백성과 억압당하던 모든 백성들에게 기쁨이 된다. 하느님이 계약의 백성에게 분 노하였던 한때 하느님의 도구였던 아시리아는(이사 10, 5-16) 민족들을 밭갈듯이 갈았고 사자가 먹이를 찢듯 여 러 민족을 그의 구미대로 먹어 치웠다. 그 아시리아가 이 제 갈아 헤쳐지겠고 다른 이의 먹이가 되리라는 예언이 이 책의 전체 내용이다. 원수가 영원토록 승리하지 못할 것이며 책벌이 끝날 날이 오리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역에서 구해 주었음과 같이(그래서 출애굽기 1-15장에서 이집트를 동정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아시리아 역시 그러하다), 이제 하느님은 아시리아에 눌려 있던 사람들 을 구원하리라. 기쁜 소식은 이미 선포되었으니 감사의 . 축제를 지내야 한다(2, 1)고 예언자는 환호한다. 나훔은 주님이 불의와 부도덕을 책벌하는 복수의 신이 라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자비롭고 파멸의 시기에 보루가 되어 주는 주님, 분노에 더딘 하느님(1, 3), 선하고 의로운 하느님임을 강조한다(1, 7). 근동 지 역의 약소 민족들이 아시리아의 멸망을 보고 환호함을 나훔은 하느님의 선함이 즉각적으로 나타난 결과로 간주 한다. 나훔의 그와 같은 생각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 느님의 정의를 규정하려는 좁은 견해로 여겨진다. 나훔 서에서 가장 큰 결함은 그 예언이 너무나도 근시안적이 라는 점이다. 나훔은 원수의 멸망을 무조건 기뻐할 뿐, 그와 동시대의 예언자 예레미야와 달리 이스라엘을 향해 어떤 비판도 하지 않는다. 한 압제자로부터 자유로워진 유대는 곧 전자와 별 다를 바 없이 파괴적인 다른 압제자 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었다. 나훔이 안전을 선포한 지 겨우 15년 만에 예루살렘은 다시 포위되고 말았다. 사악 한 도시 니느웨가 심판받은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예 루살렘 역시 그와 같은 심판의 의미를 배우게 될 것이었 다.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나훔의 환호는 신약에서 로마의 멸망을 예견한 파트모스 섬의 요한에게서 반향된다(묵시 17-18장). 요한은 나훔서 3장 4절에 나오는 매춘의 상징 을 사용하여 로마의 점차적인 멸망과 다른 제국이 그 자 리를 차지하게 될 것을 예언한다. 이러한 예언의 배후에 는 어떤 권세도 영원히 지속하지 못함을 의식함으로써 받게 되는 위로가 있다. 아시리아의 멸망은 당장이든 좀 늦게든 간에 모든 압제자들이 무너지리라는 교훈을 준 다. 세상에 위력을 떨치는 어떤 권세도 영원한 보장이 없 다는 사실은 억눌린 사람들에게 희망의 이유가 된다. 공 포를 불러일으키던 힘의 상징이며 모든 사람을 두려움으 로 떨게 하던 아시리아가 얼마나 맥없이 무너지는가! 이 는 현대의 강대국들과 강한 힘으로 위세를 떨치는 모든 권력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는 모든 악의 세력과 영화와 권세는 한낱 풀포기처럼 사그 라지고 말리라. 〔이해와 영성〕 나훔서는 3장밖에 안되는 짧은 내용이 거의 저주에 가까운 독설로 가득하다. 이러한 책을 어떻 게 성서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무조건 두호하고 다른 민족은 가차없이 벌하는 편협한 분은 아니다. 여기서 나훔서와 같은 구약성서의 부정적 인 대목들을 어떻게 읽으며 이해하여야 할지에 관한 물 음이 이어진다.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역사의 인물과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 하느님의 계 시는 여러 측면에서 그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본 다. 세계사의 한 사건을 두고 쓰여진 나훔서는 오늘의 우 리에게 하나의 커다란 비유와 같다고 본다. 비유는 글자 나 말에 얽매이지 말고 그 본의도를 바로 알아들어야 한 다. 나훔서의 기록은 현대의 상황과 많이 다를지라도 당 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며 약속에 성실한 하느님, 언제 어 디서나 약하고 의로운 이들과 함께하는 하느님을 보여 준다. 하느님을 의인화하는 이 예언서는 질투하는 신이요, 복수하고 분노를 터트리며 무서운 책벌을 내리는 신(1, 1)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 는 구약의 하느님은 마침내 신약에서 인간으로 강생하여 사람이 되었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느냐?" (3, 18) 는 나훔서의 마지막 구절은 자식의 못된 행위에 채찍을 들면서도 가슴 아파하는 부모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사랑의 매를 들고 나무라는 부모와 같이 "나 이제 너를 치리라" (2, 14)는 표현에서 잘못을 바로잡고 억울함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엿볼 수 있다. "어쩌 다가 이 모양이 되었느냐? 알아듣고 깨달으라!" 이처럼 하느님의 자비라는 시각에서 이 예언서를 읽을 때, 빗나 간 인간을 바로잡기 위해 징벌의 도구를 쓰는 하느님의 정의와 자상한 배려를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암담하고 척박한 돌밭과 같은 상황에서는 나훔서의 말씀처럼 극단적 인 표현이 필요하다. 부정적인 사건과 말씀으로 사람들 마음의 밭을 갈아엎는 하느님의 능력이 거대한 바위처럼 앞을 가로막는 장애를 없앤다. 나훔서는 인 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바뀌지 않는 현 실에서 대적할 수 없는 세력을 꺾는 하 느님을 묘사한다(1, 2-8). 바위는 크고 힘이 있으나 그 안에는 생명이 없다. 그 러나 그 바위가 산산이 깨어져 돌멩이 가 되고 마침내 가루가 되기까지 부서 져서 흙이 될 때 비로소 그 안에 생명을 배태할 수가 있다. 이 책에서 거대한 바 위와 같은 아시리아가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깨부수는 하 느님의 능력이 당장에는 큰 재앙으로 여겨진다.그러나 그 파괴가 실은 아시리아라는 바위를 생명이 움트는 흙 으로 만드는 하느님의 자비임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나 훔서의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신 안에서 온갖 결함과 병폐, 나쁜 습관, 욕심과 이기심, 집착, 오 만 등 니느웨적인 요소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깨어져서 파멸됨은 아프고 고통스럽더라도 은총이요 축복이다. 화산이 폭발하면 땅이 흔들리고 무서운 불길이 치솟 고, 뜨거운 용암이 흘러내리고, 열기에 닿는 모든 생명체 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만다. 나무든 풀잎이든 다 타버리고, 사람도 짐승도 그 열기 속에 죽어 없어진다. 바닷물을 말리고 거대한 산을 부숴뜨리고 화산이 터지는 것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재앙이라 여기지만, 화산으 로 인해 높은 산꼭대기에 아름다운 호수가 생겨나고, 기 암 절벽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생태계가 활기를 띠게 된 다. 작게 국소적인 부분만을 보지 않고 높은 데서 화산이 터짐을 내려다보듯 전체를 보며 모든 것을 대할 때 넓은 마음이 된다. 여하한 것에도 놀라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조금도 변화시킬 수 없는 거대한 주님의 능력에 감탄하 며 주님께 신뢰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편안하고 일상 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안에서 더 큰 주님의 손길을 느끼 게 된다. 그러기에 파멸의 신탁으로 가득한 나훔서 한가 운데서도 이 기쁨을 노래할 수가 있다. "희소식을 전하 는 발길이 산을 넘고 넘어 달려온다. 광복의 소식을 안고 온다. 유대야, 축제를 마련하여라" (2, 1). ※ 참고문헌 Donald Senior(eds.), The Catholic study Bible, Oxford University Press, Inc., 1990/ 《NJBC》/ Lawrence Boadt, Reading the OT, New York, Paulist Press, 1984/ K.J. Cathcart, 《ABD》4, pp. 998~ 1000. 〔趙和璿〕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