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혁 (1802~1839)

南明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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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의 제의가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남명혁 다미아노(탁희성 작).

앵베르 주교의 제의가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남명혁 다미아노(탁희성 작).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은 다미아노. 일 명 문화. 성 이연희(李連熙, 마리아)의 남편. 서울의 양 반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 으나, 30세에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교회의 가르침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34년 초 서울에 들어온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에게 영세 입교한 뒤부터 는 더욱 열심하여 외교인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는 동시 에 교리 연구에 몰두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 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이웃에 거주하던 이광헌(李光 獻, 아우구스티노)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서는 자신 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냉담자들이나 외교인들도 보살폈 고,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거나 외교인 어린이들에 게 대세를 주는 데도 열심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보 고 하루는 어떤 사람이 "훗날 사람들이 그대를 무엇이라 고 부르기를 원하는가?" 하고 물으니, 그는 "성의회(聖 衣會) 회원 순교자 남 다미아노라고 불러 주면 족하겠 다" 고 대답하였다(《기해일기》 19b). 이처럼 그는 일찍부터 순교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 러던 중 1839년 부활 축일을 보낸 다음 주 4월 5일(음 2 월 22일),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의 지시대로 신자 들을 자신의 집에 불러 모아 성사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 나 예상보다 많은 신자들이 몰려들었고, 그중 한 예비자 의 밀고로 인해 4월 7일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치게 되었다. 다행히 앵베르 주교는 숙소로 돌아간 뒤였다. 포 졸들은 이때 남명혁의 집에서 주교의 제의류와 경본 1 권, 주교관(主敎冠)을 탈취하고, 그와 이광헌의 가족, 그 리고 다른 교우 등 20명 가량을 체포하여 포청으로 압송 하였다. 이로부터 13일 뒤인 4월 18일 조정에서는 공식 적으로 박해를 승인하는 '사학 토치령' (邪學討治令)을 발표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기해박해(己亥迫害)이다. 남명혁은 포청에서 특히 서양 선교사의 물건이 그의 에서 나왔다는 점으로 인해 앵베르 주교의 거처를 알 려는 포졸들에 의해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 나 주교의 거처를 대기는커녕 그 성물들이 1801년에 순 교한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것이라 하고는 모든 형벌과 고문을 참아내며, 아내에게도 모든 학대와 모욕을 참도 록 하고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의 12세 된 아들도 고문을 겁내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 그 후 남명혁은 죽음이 임박하자 아내에게 서한을 보내 "이 세상은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 우리의 본향(本鄕)은 천 국이니 주를 위해 죽어서 광명한 세상에서 영원히 만나 기를 바란다" 고 부탁한 뒤 사형 선고를 받고, 5월 24일 (음 4월 12일) 이광헌, 권득인(權得仁, 베드로), 박희순 (朴喜順, 루시아) 등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에 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 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기해박해 ; 이광헌 ; 이연희) ※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기해일기》/ 《달레 교회사》 中.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