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동 본당

南山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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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명도회관을 개축해 사용했던 남산동 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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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명도회관을 개축해 사용했던 남산동 본당


대구대교구 소속 본당. 대구시 중구 남산3동 225-1 소재. 1926년 5월 30일 대구 본당(현 계산동 주교좌 본당) 에서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요셉. 관할 구역은 남산3동 전역과 남산1 · 2 · 4동 일부. 〔교 세〕 1927년 600명, 1952년 2,000여 명, 1967년 5,057명, 1990년 3,894명, 1993년 4,154명. 〔역대 신부〕 초대 석종관 (石鍾寬) 바오로(1926. 5~1928. 5), 2대 델랑드(L. Deslandes, 南大榮) 루이(1928. 5~1933), 3대 파이에(A. Paillet, 方) 아우구스티노(1933. 10~1940.5), 4대 코르데스 (M. Cordesse, 孑L) 마리오(1940. 5~1941.9), 5대 파이에 아 우구스티노(1941. 9~1945. 4), 6대 장병화(張炳華) 요셉 (1945~1948) 7대 이종필(李鍾弼) 마티아(1948. 8~1953.4), 8대 강찬형(姜贊亨) 파스칼(1953. 4~1955. 1), 9대 이 성만(李性萬) 이냐시오(1955. 1~1960. 3), 10대 서정도(徐 廷道) 벨라도(1960. 3~1962. 7), 11대 박재수(朴在秀) 요 한(1962. 7~1966. 12), 12대 강찬형 파스칼(1966. 12~1967.12), 13대 신현옥(申鉉玉) 치릴로(1967. 12~1972. 10), 14 대 박원출(朴元出) 토마스(1972. 10~1976. 5), 15대 김규 태(金圭泰) 디모테오(1976. 5~1977.7), 16대 최병선(崔炳 璇) 요한(1977. 7~1981. 12), 17대 장병보(蔣柄補) 베드로 (1981. 12~1983. 1), 18대 박상태(朴相泰) 루도비코(1983.1~1987. 6), 19대 서정덕(徐貞德) 알렉산드로(1987. 6~ 1991. 4), 20대 이정우(李廷雨) 알베르토(1991. 4~1994. 9), 21대 박광호(朴光鎬) 베드로(1994. 9~현재). 〔성당 건립〕 남산동 본당은 대구 본당에 이어 대구에서 두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1920년대만 해도 한 도 시에 두 개의 본당이 설립된 경우는 서울의 종현(현 명동) 본당과 약현(현 중림동) 본당을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그 당시 대구 본당은 관할 지역이 넓고, 신자수도 많아서 유 스티노 신학교와 계산동 방면에는 두 집 중 하나가 교우 집일 정도였다. 때문에 1926년 대구 본당 관할이던 대 명동과 남산동(현 1 2동 일부와 3 · 4동)을 분할하여 남산 동 본당(처음의 명칭은 성 요셉 본당)으로 설정하고 초대 본 당 신부로 성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인 석종관(일명 石允 學)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대구 본당 의 부속 본당으로서, 성당 건물은 우선 주교관 안에 있던 명도회관(옛 대건고등학교 신관 자리)을 개축하여 1926년 8월 8일(음 7월 1일)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의 집전으로 성당 축성식을 거행했다. 이 본당이 독립 본당 이 된 것은 두 해 뒤인 1928년 2대 델랑드 신부 때였다. 델랑드 신부는 새 성당 신축을 위해 대명동에 있던 옛 효성여자중학교 자리에 부지를 확보하였고, 3대 파이에 신부 때인 1937년, 마침내 새 성당이 완공되면서 '대명 동(大明洞) 본당' 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 전이 치열해지면서 일제는 성당을 강제 징발하여 서양인신부들의 수용소로 사용하였다. 이에 따라 본당은 다시 남산동 창설 당시 자리로 이전하였고 해방이 되자 또다시 대명동에 있던 성당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1952 년, 교구에서 5,500평에 달하는 넓은 성당 부지가 학교 로서 더욱 적합하다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그 자리에 효 성여자대학이 개교를 하게 되었고, 다시 현재의 남산동에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함과 동시에 '남산동 본당' 으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후 본당 회관 건립(1974), 사제관 증축(1979), 제의실 수리(1982), 성당 대 수리 공사(1983), 사목 회관 수리(1988), 정원 대공사 (1992.4) 등을 통하여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남산동 본당은 신자들간에 여러 가지 별칭으로 불렸다. 처음에 명도회관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한 까닭에 명도회관 주보인 요셉 성인의 이름을 따서 '성 요셉 본당' 또는 '성 약실(요셉의 한자 표기) 본당' 이라 불렸다. 또 남산동 본당의 위치가 대구에서 화원이나 고령 쪽으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고, 또 처음으로 지나가는 길 목이기 때문에 '앞고개 본당' , 대구 본당보다 위치상 위 쪽에 있다고 해서 '웃고개 본당' 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주변에 교우 서상돈의 큰 농원이 있어서 항상 꽃이 많았 기 때문에 '화원본당' 이라고도 하였다. 〔성장과 변모〕 남산동 본당은 70여 년이라는 오랜 역 사와 함께 대구 지역의 신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며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이미 1920~1930년대에 신자 교리 교육(교리 및 성가책 발행과 보급 등), 청소년 종교 문화 활동(연극제, 성가 발표회 등), 평신 도 사도직 활성화(위령회, 성모회, 청년 동지회, 데레사회, 대 이웃 사회 구빈 활동, 갱생원, 유년반 운영 등)에서 많은 효과 를 거두었다. 또 주교좌 성당이 아니었으나 본당이 교구 청 바로 곁에 위치한 덕분에 초창기에는 대구 본당과 함 께 격주로 주교 대례 미사를 봉헌하는 혜택도 누릴 수 있 었다. 남산동 본당은 설립 후 세 차례의 이전을 거쳐 1952 년, 현 성당 자리에 자리를 잡은 후 1956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분원이 설치되면서 점차 안정된 분위기에서 내실을 다져가게 되었다. 1968년, 본당 구역을 정 리하여 반으로 조직하고, 1976년에는 1972년부터 실시 하던 반모임 대신 각 반별로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27개를 창단하여 신심 생활과 봉사에 주력하였다. 그러 나 1988년 1월, 다시 구역과 반을 재조직하여 본당 공 동체의 화목과 사목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이 같은 조 직의 정비와 함께 사순절과 대림절에는 특강과 피정, 불 우 이웃 돕기를 전개하였고 경로 잔치, 청년 연합회 구 성, 장학금 지급, 연도 경연 대회, 본당의 노래 제작, 젊 은이 묵상 학교 개설, 가족 성가 대회, 성경 가훈 전시회 등 다양하게 전개된 행사들은 본당 공동체의 내실화에 많은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1991년 6월부터 매월 본당 사목 계획을 발표하여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효율적인 사목 운영에 노력하고 있다. 특히 1990년 5월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본당의 날 행사는 보수성이 짙은 구교 신자 들과 최근 아파트 건립으로 새로 입주해 오는 아파트 내 신자들과의 융화와 친교의 장으로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본당의 꾸준한 발전은 1972년 소화 본당, 1973년 대 명 본당, 1985년 성 토마스 본당을 분할시킴으로써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한편 약 20여 년 동안 전교와 유치 원 교육을 담당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분원은 1976년 8월, 대구대교구 산하에서 창설되고 회원들을 배출하기 시작한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에 소임을 물려 주고 철수하였다. 오랜 역사와 함께 사제 성소자가 많은 남산동 본당은 1994년 8월 현재 총 29명의 사제가 배출 되었으며, 1992년 4월 2일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사용한 오르간이 1944년 신학교가 폐교됨에 따라 남산 동 본당에서 사용, 보관해 오던 것을 대구의 가톨릭대학 교 신학부로 보내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당 구역 내에 아파트가 건립되고 지역 환경이 변화되어 입주자의 전입이 늘면서 새로운 발전의 전환기를 맞게 된 남산동 본당은, 오는 1996년 본당 설립 70주년을 맞게 되면서 본당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따라서 1992년 3월 19일, 성 요셉 본당 주보 축일을 맞아 본당 70년사 준비 위원회를 구성, 매달 회합을 가지면서 자료를 수집, 정리 하고 준비지를 발간하고 있다. 대구대교구의 신앙 역사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해 온 남산동 본당은 이제 본당사 를 편찬함으로써 역사로 다져진 신앙의 유산을 보전 · 계 승 · 발전시킬 것을 다짐하면서 전신자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 대구대교구 ; 계산동 본당) 〔白仁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