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과 천주교

南人 - 天主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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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남인의 학통>

<기호 남인의 학통>


조선 시대 대표적인 붕당(朋黨)의 하나인 남인의 성격 은 정치적 측면과 학문적 측면이 함께 설명되지만, 천주 교와의 관계는 학문적 측면에서 이루어져 정치적 측면으 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 시기적으로 볼 때 남인은 16세 기 말에 형성되어 조선 후기까지 존속되었지만, 천주교 와의 관계가 부각되는 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까지였다. 물론 천주교와의 관계가 모든 남인들에게 해 당된 것은 아니었다. 남인 중에서도 영남 남인(嶺南南 人)의 경우는 거의 천주교와 관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그 교리에 대해 알게 된 경우에도 대부분 이를 배척 하였다. 그리고 기호 남인(畿湖南人) 가운데서도 천주교 를 새로운 신앙으로 받아들인 경우는 일부에 지나지 않 았고, 그들도 천주교가 사회 ·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면 서 교회에서 이탈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이 기호 남인들에 의해 수용되고 또 이들에 의해 한 국 천주교회가 이룩되었다는 점에서, 그 교리가 그들의 새로운 학문 ·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남인과 천주교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다음에서는 먼저 남인의 형성과 변모 과정을 학문적 측면과 관련하여 살펴보고, 이어 천주교와의 관 계를 단계별로 설명하고자 한다. 〔남인과 학통〕 붕당 정치와 남인 : 조선의 정치사를 보 면, 선조(宣祖) 초 사림들이 정계에 재등장한 뒤 1575년 (선조 8)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1584년 서인의 영수 인 이이(李珥)의 병사를 전후하여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면서 본격적인 붕당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때 그 이름들은 남인의 영수인 우성전(禹性傳)의 거처 가 남산 아래에 있고, 북인의 영수인 이발(李潑)의 거처 가 북악 산록에 있다 하여 붙여지게 되었다. 남인은 이후 정치적으로 부침을 거듭하다가 1659년(효종 10)의 기해 예송(己亥禮訟)으로 실세하였으나,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으로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 자 남인 안에서는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로 논의가 분분 하였는데, 특히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에 대해 엄한 논 의를 견지하는 준론(峻論)과 완화된 논의를 펴는 완론 (緩論)으로 나뉘어 전자의 허목(許穆) 계열을 청남(淸 南)이라 하였고, 후자의 허적(許積) 계열을 탁남(濁南) 이라 불렀다. 1694년(숙종 20) 남인 출신 희빈 장씨(嬉嬪張氏)의 왕 비 책봉과 민비(閔妃) 복위 문제로 발생한 갑술옥사(甲 戌獄事) 이후 남인은 다시 정계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남하정(南夏正)이 지적 한 것처럼 문내파(門內派), , 문외 파(門外派), 과성파(跨城派)로 다시 분리되었다(《棟巢謾 錄》 권3). 물론 그 원인은 여러 가지였지만, 이 중 문내파 는 탁남 계열인 반면에 문외파는 허목을 추종하는 청남 계로서 문내파와 달리 스스로 별파〔門外〕임을 자인하였 고, 과성파는 일종의 중도적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경종 연간에 문외파인 심단(沈檀), 오광운(吳 光運), 강박(姜樸), 이중환(李重煥) 등이 척신 정치를 반 대하는 청류를 표방하면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계속하여 이들은 영조(英祖) 초기 완론을 중심으로 한 탕평책(蕩平策)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때 영조나 소론 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정치의 전면에 서서히 등장하였 다. 영조대에 남인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지게 된 것은 1728년(영조 4) 남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당해 오광 운, 홍경보(洪景輔) 등이 공을 세운 때문이었으며, 이후 그들은 소론 준론과 정치적 의리를 함께하다가 1755년 (영조 31) 을해옥사(乙亥獄事)로 소론이 몰락하면서 그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남인의 중심에 등장한 인물들이 채제공(蔡濟恭)과 홍명한(洪明漢)이었 고, 이들과 함께 이헌경(李獻慶), 정범조(丁範祖), 목만 중(睦萬中)도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어 정조대의 준론 탕평이 이루어지면서 남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되는데, 이 시기에 채제공을 위시하여 그 다 음 세대인 이가환(李家煥), 이익운(李益運) , 이승훈(李 承薰), 정약용(丁若鏞) 등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 속에서 남인들은 일찍이 1689 년(숙종 15)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희빈 장씨의 아 들 균(즉 景宗)의 세자 책봉(建儲)에 반대하던 송시열 중 심의 노론이 탄핵되면서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숙종의 세자 책봉을 옹호하는 기사의리(己巳義理)를 내세웠다. 그러나 정권을 잡게 된 남인들도 노론과 같이 민비 폐위 만은 반대하였다. 이후 기사의리는 남인의 정치 의리로 계속 견지되다가, 영조 즉위 이후 남인 청류를 중심으로 기사의리보다는 왕권 옹호와 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의리로 변모되었다. 당시 노론에서는 1721년(경조 2)과 이듬해에 걸쳐 이루어진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노론 4 대신에 의해 제기된 의리, 즉 경종이 병약하므로 영조를 왕세자로 책봉하여 정론에 참여토록 하는 것이 옳다는 신임의리(辛壬義理)를 견지하고 있었다. 남인의 정치 의 리가 변화된 것은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思悼世子) 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였다. 이때 노론은 사도세자의 죽 음을 애석히 여기는 시파(時派)와 영조를 동정하는 벽파 (僻派)로 나뉘었는데, 남인과 소론의 경우에는 주로 시 파 쪽에 가까운 주장을 폈다. 이와 같이 사도세자의 억울 한 누명을 벗겨 주어야 한다는 임오의리(壬午義理)는 처 음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1792년(정조 16) 채제공이 주도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와 이듬해 채제공의 상 소를 통해 남인의 공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채제 공은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영조의 후회가 담긴 금등(金 藤, 《시경》의 편명) 문자를 공개하고, 임오의리를 표방함으 로써 신임의리를 주장하는 노론에 대항하였다. 이 금등 문자는 영조, 정조와 채제공만이 알고 있던 사실로 채제 공의 신임을 확인시켜 준 것이기도 하였다. 남인의 학통과 성호학파 : 학문적으로 볼 때, 동인 가 운데는 본래 이황(李滉)과 조식(曹植)의 학통을 이은 사 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분당되면서 남인에는 이황의 학통을 잇는 인사들이 많았고, 북인에는 조식의 학통을 잇는 인사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청남 · 탁남 분열 이 후에는 모두가 이황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변함이 없었 고, 이 시기에 이르러는 북인 가운데서도 이황의 학통임 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술옥사 이후 남인이 큰 타격을 받게 되면서 영남 남인 들은 향촌의 근거지로 은둔하여 산림화의 길을 걷게 되 었고, 크게 김성일(金誠一)과 유성룡(柳成龍)의 제자로 나뉘어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이 기 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학(禮學)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주자학풍이 깊이 연구되었다. 반면에 기호 남인의 경우에는 이미 청남을 표방하였 던 허목이 영남의 정구(鄭逑)로부터 이황의 학통을 이 어받은 뒤, 다시 이익(李潔)이 이를 이어받음으로써 '이 황 → 정구 → 허목 → 이익' 으로 이어지는 기호 남인의 학통, 즉 근기학파(近畿學派)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기 호 남인의 학통은 그 후 허목계의 문외파가 정계에 등장 하면서 더욱 굳어지게 되었으며, 문내파인 경우에도 허 목의 학통을 잇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들이 오광운 · 채제공으로 이어지는 정치가들로부터 측면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이익의 문하에서도 정계 진출자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남인 가운데서도 훗날 천주교와 깊은 관련을 맺게 된 경우는 주로 기호 남인이었고, 그중에서도 이익의 학통 을 이은 성호학파(星湖學派)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 난다. 그러나 이들의 서학(西學)에 대한 관심은 먼저 천 주교 신앙보다는 서양의 지리나 과학 기술에 있었으며, 이를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성호학파가 지니 고 있던 학문적 특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 성호 이익 은 탈주자학적(脫朱子學的) 학문 성격이 강한 허목의 학 통을 잇고 있었고, 비록 남인은 아니지만 예송(禮訟)에 서 남인 윤선도(尹善道)나 허목과 뜻을 같이한 윤휴(尹 躪)의 학문을 존중해 오고 있었다. 윤휴의 학문 또한 보 수 지향성이라기보다는 노론의 송시열로부터 사문난적 (斯文亂賊)으로 지목될 정도로 탈주자학적 측면이 강하 였다. 그러므로 이익은 유형원(柳馨遠)에게서 영향을 받 은 현실 개혁의 경세학적 측면과 허목 · 윤휴의 탈주자학 적 측면을 동시에 지니게 되었고, 따라서 전통 주자학을 고수하기보다는 자주적인 학문 해석〔自得之學〕을 중시 하였다. 이익의 사후 그 문도들의 학문 성향은 크게 둘로 나뉘 어지게 되었다. 그 하나는 이익의 학문을 따르면서도 전 통 주자학의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안정복(安鼎福) 의 순암계(順菴系)였고, 다른 하나는 윤휴 · 이익으로 이 어지는 탈주자학적 성격을 지닌 권철신(權哲身)의 녹암 계(鹿菴系)였다. 그중 안정복은 이익의 제자 중에서 윤 동규(尹東奎)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권철신은 이병휴 (李秉休)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의 학문 성격은 훗 날 서학(西學)을 접하게 되면서 더욱 뚜렷해지게 되는 데, 전자의 문도들이 하나같이 천주교를 배척한 반면 후 자에서는 대부분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갖거나 서학의 한 쪽인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수용한 경우가 많았다. 또 이에 앞서 양명서(陽明書)를 접하게 되었을 때도 스 승 이익이 그 내용을 객관적 입장에서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순암계에서는 이를 비판하였으며, 녹암계에서 는 그 내용을 수용하려는 성향이 강하였다. 〔남인과 천주교 수용〕 서양 지리 · 과학에 대한 이해 : 이익은 일찍이 한역 서학서들을 읽은 뒤 서학의 기적(器 的) 측면 즉 세계 지리와 서양의 자연 과학 이론을 이해 하였고, 천문 · 역법 등에 관심을 보이면서 종래의 천원 지방(天圓地方)이라는 인식, 지리적 화이관(華夷觀) , 중 화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지원설(地圓說)이나 지심 론(地心論), 지동설(地動說)을 내세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익의 서학 이해는 그의 학문 성향과 함께 제자들 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선 윤동규는 1749년(영조 25) 안정복과의 서신 왕래를 통해 서학에 대해 알고 난 뒤에는 죽는 날까지 서양의 과학 · 기술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고, 훗날 척사론을 주동하는 안정복 또한 초 기에는 <시헌력>(時憲曆)과 같은 서양의 천문 · 역법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이익이나 윤동규에게 그 내용을 질문 하기도 하였다. 훗날 최한기(崔漢綺)가 그의 저술 <운화 측험>(運化測驗)에서 자주 인용한 바뇨니 (A. Vagnoni, 高 一志)의 《공제격치》(空際格致) 또한 이 시기에 이미 읽 혀지고 있었다. 이러한 성향은 이병휴나 홍유한(洪儒漢) 등에게서도 일관되게 엿보인다. 특히 이가환은 1778년 이전에 이미 서양의 천문 · 지리론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그는 지구 경위도(經緯度)와 지 구설, 천문력 등을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양의 분도 구차법(分度求差法), 항성론(恒星論), 천문의기(天文儀 器)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당시로서는 매우 탁월한 것으로 서, 서양 천문의기에 대해서는 그 정밀함을 인정하여 정 조에게 제작을 건의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시 헌력의 정확함을 강조하였으며, 조선의 천문학 진흥을 위해 정역상론(正曆象論), 수의기론(修儀器論), 양인재 론(良人材論)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익이나 이가환의 서학에 대한 이해는 종래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 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성호학파의 제3 세대인 이승 훈이나 정약전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전통적인 학문 분위기 안에서 성장해 온 그들에게 한역 서학서에 대한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하였다. 실제로 이승훈, 이벽(李 檗), 정약전(丁若銓) 정약용 등은 서양의 《기하원본》 (幾何原本)과 같은 한역 서학서들을 읽고 서양 기하학 · 수학 · 천문 · 역학 · 지리 등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 사 실은 훗날 정약용이 자명소(自明疏)를 통해 일찍부터 한 역 서학서들을 접해 왔고, 당시에는 "천문 역상(天文曆 象)의 학문, 농정 수리(農政水利)의 기계, 측량 추험(測 量推驗)의 방법을 잘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해박하다 고 평가하는 것이 일종의 풍조였다"(《여유당 전서》 I-9)고 한 점이나 이승훈이 북경에 가기 전에 서양의 수학에 많 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정약 전 · 약용 형제는 훗날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된 뒤에도 서한을 통해 서양의 지구의(地球儀)나 지구도(地 球圖) 작성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었다. 또 정약전은 지 구의 운행 즉 지운설(地運說)을 펴기도 하였고, 정약용 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가 제시한 플라톤의 4원설을 받아들여 역상(易象)의 기틀을 4정패론(四正卦 論)으로 설명하였다. 천주교 수용과 교회 창설 : 이와 같이 조선 후기 남인 의 일각인 성호학파에서는 한역 서학서들을 통해 서양 과학을 폭 넓게 접하였으며, 그러는 동안 그 안에 함께 담겨져 있는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실제로 이익은 그의 고제인 신후담(愼後聃)과 1724년(경종 4)에 천주교 교리에 대해 토론하였고, 1746년(영조 22)에는 안정복에게 천주교의 폐단을 설명 하였으며, 1754년에는 정항령(鄭恒齡)에게 서한을 보내 리치의 《교우론》(敎友論)을 극찬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 익은 한편으로 천주교 교리를 비판하였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유가의 이론과 천주교 교리 사이의 상이점을 파 악하고자 노력하면서 때때로 그 교리를 지지하였다. 반 면에 신후담이나 안정복은 전통 주자학의 입장에서 처음 부터 그 교리를 비판하였고, 안정복은 1757년에 이르러 스승 이익으로부터 천주교 비판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 다. 한편 권철신의 경우는 양명학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것처럼 천주교 수용에 있어서도 안정복과는 달랐다. 그 는 양명학을 통해 심학(心學)의 이론과 그 실천적인 측 면을 받아들이고자 하였고, 서학 특히 천주교를 통해서 는 수양(修養)을 바탕으로 정신 세계와 신앙 세계를 추 구하였으며, 마침내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 교 신자가 되었다. 이때 안정복이 그를 비판하였음은 물 론이다. 녹암계 즉 권철신과 그의 문도들이 서학 특히 천주교 서적을 접하는 시기는 양명학에 대한 논의가 끝나는 1780년을 전후해서였다. 권철신은 그에 앞서 1774년부 터 1776년까지 제자들을 받아들여 학문을 전수하기 시 작하였는데, 이때 그 문하에 들어간 인물들은 김원성(金 源星), 이총억(李寵億) , 이존창(李存昌), 홍낙민(洪樂 敏), 이승훈, 정약전, 이윤하(李潤夏), 윤유일(尹有一) 권상학(權尙學) 등 성호학파의 제3 세대들이었다. 또 이 벽, 정약용도 다른 시기에 권철신으로부터 학문을 배웠 다. 당시 권철신은 이기양(李基讓)과 친밀한 관계를 맺 고 있었는데, 이병휴는 이들이 성호학파의 학문을 발전 시켜 갈 것으로 생각하였다. 훗날 이들 모두가 천주교와 관련되거나 대부분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을 보면, 녹암계 에서는 이 무렵부터 천주교 교리가 연구되기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천주교 교리 연구를 위한 강학(講學)으로 대표되는 것 은 1779년(정조 3)에 있은 주어사(走魚寺, 경기도 여주군 金沙面 下品里) 강학이다. 물론 주어사 강학은 녹암계 고 유의 학문을 토론하는 자리로 시작되었지만, 이벽이 이 자리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천주교 교리에 대해 논의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기호 남인 일각에서 천주교 교리가 연구되면서 여기에 가장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 바로 이 벽이었다. 그는 1783년 말 이승훈에게 부탁하여 북경에 가 서양 선교사를 만나 보도록 하였고, 이승훈은 북경에 서 그랑몽(Grammont, 梁東材)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세 례명으로 영세하고 이듬해 봄에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서적들은 이벽의 교리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이승훈의 견문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 이벽과 이승훈은 1784년 9월(음) 수표교(水標橋) 인근 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최초로 영세식을 가짐으로써 한 국 천주교회를 탄생시켰다. 이때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벽, 권일신(權日身), 정약용이었다. 이후 이벽은 교회 서적들을 가지고 양근의 감호(鑒湖, 현 경기 도 양평군 江上面 大石里)로 권철신을 방문하였는데, 권철 신이 세례를 받은 것은 이를 전후해서였다. 〔신서 · 공서의 대립〕 교회 창설 후 첫 신자들은 천주 교를 전파해 나가는 한편 1784년 겨울부터는 명례방(明 禮坊, 현 명동 성당 인근)에 있던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으로 집회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일어난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기 호 남인의 젊은 학자들이 천주교 신앙을 추종하고 교리 를 탐구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천주교 배 척 즉 척사(斥邪)의 움직임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 다. 사실 척사의 이론적 근거는 1724년에 저술된 신후 담의 《서학변》(西學辨)이나 이익과 윤동규, 안정복의 이 론적 비판 등을 통해 이미 마련된 셈이었다. 또 북학파 (北學派)에서도 천주교 교리를 비판하였는데, 이들의 논 리는 천주교 교리에 관한 한 반서학(反西學)의 입장에 서 있다는 점에서 그 선구자인 홍대용(洪大容)을 비롯하 여 황윤석(黃胤錫) · 박지원(朴趾源) · 박제가(朴齊家) 등이 한결같았다. 이후 척사의 움직임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첫번째 단계는 1784년에서부터 1787년의 반회 사건(泮會事件)까지로 기호 남인 안에서 척사의 공론(公論)이 폭 넓게 조성되어 간 특징을 가지 며, 두번째 단계는 1787년부터 1791년 신해년의 진산 사건(珍山事件)까지로 여전히 재야 사림의 공론이 조성 되어 가면서 그 한편에서는 공서 · 신서의 대립이 이루어 지는 중간 단계였다. 그리고 세번째 단계는 1791년부터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는 1801년까지로, 공서파 (攻西派)와 신서파(信西派)의 대립이 노골화되어 가면 서 내적으로는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채당(蔡黨)과 홍수 보(洪秀輔) 부자를 중심으로 한 홍당(洪黨)의 분열과 관 련되고, 외적으로는 노론의 시 · 벽(時僻) 분쟁에 휘말림 으로써 공서파가 노론 벽파에 이용되는 시기였다. 첫번째 단계의 척사 운동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이벽이 녹암계의 인물들과 폭 넓게 접촉하면서 이에 반비례하여 눈앞에 나타난 천주교 신봉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 공론 조성에 앞장 선 인물은 바로 안정복이었다. 이때 그는 먼저 이익의 증 손인 이재남(李載南) · 재적(載積) 형제에게 서한을 보 내고, 유옥경(柳玉卿)에게는 《기인십편》과 《영언여작》을 함께 부쳐 주면서 이단의 학문이므로 경계하도록 하였으 며, 정원심(鄭元心)에게 준 글에서는 젊은이들이 천주설 에 빠져 이야기하고 있음을 탄식하거나 비꼬았다. 아울 러 제자인 심유(沈泄)가 천주설에 대해 물어 오자 <천학 설문>(天學設問)을 지어 이에 답하면서 천주교의 교리를 조목 조목 비판하였는데, 이 글이 바로 다음해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짓는 기본 틀이 되 었다. 이에 대해 이만채(李晩采)는 훗날 "당시 안정복은 신서파의 무리를 염려하고 천주교 신봉을 견제하려는 의 도에서 척사론을 편 것” (《闢衛編》 권2, 安順菴乙巳日記)이 라고 타당성을 부여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염려는 오래 지 않아 현실로 드러나게 되었다. 1785년 봄 추조 적발 사건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이 발각되었고, 3월에 진 사 이용서(李龍舒) 등이 통문을 돌려 남인 천주교 신자 들을 배척하였으며, 이해 4월에는 노론계의 유하원(柳河 源)이 상소를 올려 서학서가 유행하고 있음을 논하고 그 유입을 근절시켜 주도록 요청하였다. 한편 채제공은 1786년에 <불쇠헌기>(不衰軒記)를 지어 서학을 배척하 면서 안정복의 척사 노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일찍이 서 학의 전파를 경계하였던 이헌경(李獻慶)도 이 무렵에 안 정복으로부터 종용을 받고 <천학문답>을 저술하여 천주 교 교리는 물론 서양의 천문 · 역학까지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전개되어 오던 척사의 공론은 1787년 겨 울, 성균관 마을 김석태(金石太)의 집에서 있었던 반회 사건이 이듬해 봄 홍낙안(洪樂安)의 책문과 이경명(李景 溟)의 척사소를 계기로 조정에서 문제가 되면서 두번째 단계로 변모하게 되었다. 즉 반회에 참석하였던 이승 훈 정약용 등이 공박을 받게 됨에 따라 신서파 · 공서파 가 뚜렷이 대립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여기에 노론계의 척사적 당론이 작용하면서 남인계, 즉 우의정 채제공과 측근들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는 척사 운동으로 변모하 게 되었다. 이에 앞서 1782년 남인의 영수로 지목되던 채제공이 일시 정계에서 물러난 이후, 그와 대립의 위치 에 있던 남인들은 소채(小蔡)인 채홍리(蔡弘履)를 따랐 고, 그 결과 채제공과의 의리를 지키던 대채(大蔡)와 구 별되고 있었다. 그 결과 기호 남인 안에서 있어 온 반서 학의 움직임도 단지 척사의 공론 조성에 그치거나 천주 교 신봉을 경계하는 이론적인 것에 한정될 수만은 없었 다. 사실 이후에 나타난 채제공과 일부 남인들의 척사 운 동은 바로 노론계의 당론화(黨論化)를 막기 위한 데도 목적이 있었다. 안정복이 1786년 채제공에게, 1787년 이헌경에게 서 한을 보내 척사의 입장을 견지하고 젊은이들을 타이르는 데 앞장서도록 한 이유도 바로 노론계의 공격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그는 또 제자인 황덕일(黃德壹) · 덕길(德 吉) 형제에게 척사의 태도를 유지해 나가도록 당부하였 고, 이와 동시에 자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정통 유 학을 견지해 나가도록 당부하였다. 이로써 안정복의 기 존 문도 가운데 1776년을 전후하여 권철신의 학문을 추 종하였음이 분명한 녹암계의 인물들은 모두 안정복의 학 통에서 제외되기에 이르렀으며, 순암계와 녹암계의 구분 이 비로소 분명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은 점차 지방으로 확산 되어 가고 있었으며, 이제 그것은 새로운 문화 수용 운동 을 넘어 순전히 민중 종교 운동의 차원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아울러 기호 남인 안에서 이루어져 오던 갈등은 1791년 윤지충(尹持忠) · 권상연(權尙然)의 제사 폐지 가 문제된 진산 사건으로 다시 한번 양상을 달리하게 되 었다. 그리고 이 해에 취해진 신해 통공(辛亥通共) 정책 과 신해박해(辛亥迫害) , 이승훈이 관련된 다음해 초의 평택 향전(平澤鄕戰) 사건 등으로 점차 남인의 입지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에 정조는 1792년 10월 문체 반 정 운동(文體反正運動)을 펴 노론이 주장하는 척사의 당 론을 막아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1792년의 영남만인소 에 이어 다음해 영의정 채제공이 임오의리를 주장하고 나서자, 소채 계열의 홍수보와 아들 홍인호(洪仁浩) 형 제가 노론의 편에서 채제공을 공격함으로써 기호 남인들 은 다시 채당과 홍당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채 계열의 목만중(睦萬中)과 홍수보는 완전히 채제공 과 의리를 달리하게 되었으며, 양자는 각각 '자기 보위 의 논리' 를 전개해 나갔다. 정조의 문체 반정 운동이 있은 후 일시적으로 남인의 득세는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게 되었다. 반면에 노론계 의 움직임은 본격적인 척사 운동으로 변모하였으며, 신 서파에 대한 공서파와 노론의 공격은 날로 거세어졌다. 또 이러한 와중에서 공서파는 순암계에서 제기해 온 척 사론을 따르고, 정치적으로는 홍당과 진퇴를 함께하면서 그들과 같이 노론 벽파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들의 선 봉에 선 인물들은 이기경(李基慶) · 홍낙안 · 목만중 등 이었다. 반면에 이른바 '사학(邪學)의 3흉' 으로 지적되 고 있던 신서파의 이가환 · 이승훈 · 정약용 등은 녹암계 인물들로서 채당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 결과 채제공 과 정조의 교화(敎化) 원칙, 그리고 채당의 비호에도 불 구하고 이른바 3흉으로 지목되고 있던 인물들이 유배되 거나 좌천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1795년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의 서울 잠입으로 일어난 북산 사건(北山 事件)과 을묘박해(乙卯迫害) 등은 그 변모 과정에서 발 생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전의 채 서(採西) 노력이 쇠퇴하고, 척사의 당론을 불식하려는 정책이 무너지면서 마침내 외규장각(外奎章閣)에 있는 서학서 소각을 결정하기에 이르렀고, 북학론자들의 서학 수용론 또한 1786년 박제가의 <병오소회>를 끝으로 퇴 색하게 되었다. 이후 척사 운동은 남인의 정치적 입지를 어렵게 하면 서 채제공과 정조의 사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과 정에서 노론 벽파가 척사 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반서학의 논리보다는 남인 배척의 움직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는 탕평론의 기조를 약화시 키게 되었으며, 학문 · 사상적으로는 척사론의 본래 의미 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1801년(순조 1)의 신유박해는 바로 18세기 내내 이루어져 온 서학 수용 운동과 그 반 작용으로 제기되어 온 척사의 움직임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었으며, 이로써 기호 남인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천주교 신앙은 일반 민중 속으로 전파 되어 나가게 되었다. (→ 권철신 ; 신해박해 ; 이익 ; 채 제공 ; 한국 천주교회)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上/ 李元淳, 《朝鮮西學史研究》, 一志 社, 1986/ 趙珖, 《朝鮮後期 天主教史研究》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1988/ 崔奭祐, 《韓國 敎會史의 探究》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유 봉학, <18세기 南人 분열과 畿湖南人 學統의 성립>, 《논문집》 제1집, 한신대학교, 1983/ 朴光用, 〈蕩平論과 政局의 變化〉, 《韓國史論》 10, 1984/ 朴光用, <英 · 正祖代 南人 勢力의 정치적 위치와 西學 政策>, 《韓國敎會史論文集》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車基眞, <蔓川 李 承薰의 교회 활동과 정치적 입지>, 《敎會史研究》 8, 1992/ 車基真, <鹿菴 權哲身의 학문과 西學>, 《清溪史學》 10, 1993/ 車基眞, <18세기 畿湖南 人의 斥邪論과 그 성격>, 《滄海朴秉國教授停年紀念 史學論 叢》, 동 간행위원회, 1994.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