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종삼 (1817~1866)
南鍾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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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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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삼 요한(김태 작).
성인.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은 요한. 본관은 의령 (宜寧). 자는 증오(曾五). 호는 연파(煙波) 또는 중재(重 齋). 조선 후기의 남인계 학자로 1817년(순조 17년) 탄교 (坦敎)의 아들로 태어나, 장성한 뒤 백부인 상교(尚敎, 아우구스티노, 호는 雨村)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조 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이우(履佑)이고, 부친 상교 는 정약용(丁若鏞, 요한)의 학통을 이은 농학자(農學者) 로 충주 목사와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 다. 남종삼의 학문과 사상 형성, 그리고 훗날 천주교에 입교한 데에는 부친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22세 때인 1838년(헌종 4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교리(校 理), 영해 현감 등을 거쳐 철종 때 승지(承旨)에 올랐으 며, 고종 초에는 학덕을 인정받아 왕실에서 교육을 담당 하였다. 〔교회 활동〕 남종삼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고 있지 않지만, 부친이 일찍부터 입교하 여 신앙을 지켜 온 사실에서 볼 때 그의 양자로 들어간 지 얼마 안되어 천주교 교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도 드러나게 교회 활동을 하지는 않 았다. 아마도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관직 때문이었 을 것이다.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교회 활동은 1861 년에 입국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에게 조선 말을 가 르친 것이나, 이전부터 이미 베르뇌(Berneux, 張敬一) ·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 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후 남종삼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되는 시기는 고종 초 러시아인(俄羅斯人)들이 조선 국경 을 넘나든 때부터였다. 당시 러시아는 1860년의 북경 조약(北京條約)으로 연 해주(沿海州)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조선과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게 되었는데, 이를 기회로 러시아인들이 자주 조선에 월경을 하거나 통상을 강요하였다. 특히 조선에 서는 고종 원년(1864)과 다음해에 걸쳐 국경을 침범한 러시아 선박으로부터 통상 강요의 서한을 받게 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시 고종의 부친으로 조선의 실질적인 집권자로 있던 흥선 대원군 (興宣大院君)도 이 문제 해결에 부심하게 되었다. 이러 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일찍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여 선 교사들과 가깝게 지내던 조선 신자들은 이것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호기라고 생각하였다. 즉 조선에 잠 입하여 활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로 하여금 프 랑스의 힘을 끌어들이도록 하면 같은 서구 제국주의 세 력인 러시아를 저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865년 말 에 이르러 그와 같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 俄策)' 을 최초로 대원군에게 건의한 신자들은 홍봉주(洪 鳳周, 토마스) ·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 · 김면호(金 勉浩, 토마스) 등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여러 차례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종삼이 홍봉주 등과 뜻을 같이하고 대원군에게 다시 방아책을 건의하게 된 것은 1865년 11월 말(음)이었다. 당시 그는 프랑스 주교들을 통해 프랑스 ·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조선이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으며,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 들이게 되고, 천주교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 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그는 궁중에 머무르고 있었으므 로 직접 상소문을 작성하여 대원군에게 올리는 한편, 국 내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과의 회동도 건의하였다. 이 번에는 대원군도 그 건의를 받아들여 선교사들을 만나 방아책을 논의해 보겠다는 결심을 표시하였고, 이에 남 종삼은 홍봉주 · 이유일 등과 함께 이 소식을 베르뇌와 다블뤼 주교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주교들과 대 원군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교 들이 비밀리에 지방을 순회하고 있었으므로 거처를 알기 어려웠고, 지방으로 주교들을 만나러 갈 여행 비용을 마 련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남종삼 일행에게 비용을 대 준 사람은 대원군의 사돈(대원군 딸의 시아버지) 조기진(趙 基晋)이었다. 이때 베르뇌 주교에게는 김면호가, 다블뤼 주교에게는 이유일이 소식을 전하였으며, 이에 따라 다 블뤼 주교는 1866년 1월 25일(음 12월 9일)에, 베르뇌 주교는 1월 29일에 상경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대원군의 마음은 이미 바뀌어져 있었다. 남종삼이 주교들의 도착 사실을 알리러 가자 그는 오히려 냉대를 하면서 남종삼에게 낙향을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대원군의 마음이 변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 다. 첫째로 조속한 회동을 기다리던 대원군의 마음에 초 조감이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세력에 대한 의혹 이 일어나게 되었고, 둘째로 러시아의 월경 행위가 잠잠 해져 위협이 사라지고 있었으며, 셋째로 자신의 천주교 접근으로 인해 반대파 대신들인 조두순(趙斗淳) · 정원 용(鄭元容) · 김병학(金炳學) 등으로부터 정치적 공세를 받은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때마침 청나라에서 천주 교 박해가 확산되고 있다는 와전된 소식이 동지사행(冬 至使行)을 통해 조선에 전해지면서 대원군은 자신의 정 치적 입장에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그는 정 치적 문제를 천주교 박해로 풀어 보려는 생각을 하게 되 었고, 마침내는 1866년 정월(음)을 기해 서양 선교사들 에 대한 사형 선고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선 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유명한 병인박해(丙寅迫 害)의 시작이었다. 〔순교와 사상〕 박해가 내려지기 이전에 대원군으로부 터 낙향을 권해 받은 남종삼은 베르뇌 주교를 방문한 다 음, 신앙을 위해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제천(堤川) 땅 묘 재〔山尺〕에 은거해 있는 부친 남상교를 찾아갔다. 여기 에서 부친의 격려를 받은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다시 상 경하기로 작정한 다음 이웃 배론〔舟論〕의 신학당을 찾아 가 고해성사를 받고 서울로 향하였다. 이 무렵에는 이미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고,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져 있 었다. 도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종삼은 형세를 관망하 기 위해 일시 피신하고자 하였으나, 1866년 3월 1일 서 울 근처의 고양(高陽) 땅 잔버들이란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당시 의금부에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 그리고 여러 선교사들이 투옥되어 있었는데, 남 종삼이 체포된 후 함께 국문하라는 지시에 따라 다음날 부터 국청(鞫廳)이 개설되었다. 국청에서 남종삼은 모두 6회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 켜 나갔으며, 오히려 천주교가 정도(正道)라는 호교론 (護敎論)을 펴나갔다. 그에게 있어 천주교 신앙은 '밝히 상제를 섬기는' (昭事上帝) 학문이요, '충과 효를 다하 는 (忠君孝父) 학문이었다. 그러므로 배교란 있을 수 없 는 일이었고, 여러 차례의 신문은 이미 지니고 있던 순교 의지만을 굳어지게 해줄 뿐이었다. 이러한 신심과 함께 그는 자신이 죄를 얻어 죽을지언정 나라의 위급함을 도 외시할 수 없다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사상도 가지고 있었다. 앞서 대원군에게 건의한 적이 있는 방아책이나 서양과의 통교도 바로 그와 같은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 었다. 그에게 내려진 죄목은 사학도(邪學徒)의 우두머리 요, 통외(通外)의 흉악한 계책을 꾸며냈다는 것이었지 만, 그 자신은 이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서양과의 통교를 건의한 것은 매국의 계책이 아니라 '충성하는 마음과 애 국하는 마음' (忠君愛國之心)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오 랑캐로써 오랑캐를 공격하도록 하는 뜻' (以蠻攻蠻之意) 에서 나온 방책이었다. 남종삼이 이와 같은 사상을 지니게 된 데에는 부친의 영향뿐 아니라 서양 선교사들이나 동료 신자들의 영향이 컸다. 이들과 교유하면서 교회 서적을 넓게 접하고 조선 의 상황이나 세계적 추세를 파악함으로써 이를 자신의 신앙과 안목에 접합시킨 것이다. 그는 나라가 어려울 때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지 않고 앞에 나서서 구국의 방 도를 내세운 인물이요 천주교 신앙을 끝까지 지킨 신자 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현실은 그를 올바른 의자(義 者)로 보지 않고, 단지 요언(妖言)을 퍼뜨리며 도적을 불 러들이는 무리의 하나로 파악하였다. 그 결과 그는 모반 부도(謀叛不道)의 죄목으로 참수형의 선고를 받고, 1866년 3월 7일(음 1월 21일) 서소문(西小門) 밖 네거리 에서 동료인 홍봉주와 함께 순교하였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瓦峴〕에 매장 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 었고, 시복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切頭山) 지하 성당으 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한편 그가 순교한 뒤 남은 가족들 도 모두 체포되었는데, 이때 부친 남상교는 공주로 압송 되어 순교하였고, 장자인 남명희(南明熙)는 전주에서 순 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처 이소사(李召史)와 자식들은 각처로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였다. 그중 이소사는 유 배지 창녕현(昌寧縣)에서 훗날 순교하였으니, 그의 가문 은 3대에 걸쳐 4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킨 셈이었다. 남종 삼은 그 후 1885년에 이르러 조정의 조치로 모반부도의 죄를 벗게 되었고,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대성 당에서 복자(福者)품에 올랐으며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베르뇌, 시메온 프랑 수아 ; 병인박해 ; 흥선 대원군)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李元淳, 《한국 성인의 천주 신앙》, 분도출판사, 1984/ 崔奭祐, 《丙寅迫害 資料 研究》, 한국교회사연구 소, 1968/ 《推案及鞫案》, 丙寅 邪學罪人鍾三鳳周等軸案/ 《丙寅迫害 殉教者證言錄》,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치명일기》(日省錄》.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