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트 칙령 - 勅令
[라]Edictum Namnetense · [영]Edict of Nantees · [프]Edit de Nan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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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트 칙령의 선언.
1598년 4월 13일 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Heneni Ⅳ, 1589~1610)에 의해 선포된 칙령. 시민의 자유와 권리 및 위그노파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으며, 왕에 의해 1598년 4월 3일 비준된 92개의 일반 조항과 5월 3일에 비준된 56개의 특별 조항 및 3개의 칙령을 포함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와 1세(1515~1547)와 앙리 2세 (1547~1559)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형성되었고, 1559년 파리에서 개최된 종교 회의에서 칼 뱅이 기초한 '갈리아 신조' (Confessio Gallicana)가 채택됨 으로써 프랑스 내에 칼뱅파인 위그노파(Hugnenots)가 결 성되었다. 수 명의 귀족들이 개종하여 정치적 경향을 띠 게 됨에 따라 프랑스는 위그노 전쟁(1562~1598)과 내란 에 휩싸이게 되었다. 샤를르 9세(Charles IX, 1560~1574) 때 메디치 가(家) 의 가타리나(Catherine de Medici)가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는데, 그녀는 1562년 1월 17일 처음으로 위 그노파의 존재를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생 제르맹(Saint-Germain)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 칙령은 그 동안 위그노파들이 점령하고 있던 교회들을 다시 반환하 라고 명령하는 한편, 도시 밖에서는 예배볼 수 있도록 허 락하였다. 시내에서는 오직 개인 집에서만 예배 드릴 수 있었다. 사실 이 칙령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보다는, 종교적 분쟁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던 시도였다. 가톨릭 측에서는 칙령의 준수를 거부하였으며, 칙령이 반포된 지 두 달 후에 프랑스는 걷잡을 수 없는 분쟁으로 말려 들어가서 낭트 칙령이 반포될 때까지 36년 동안 종교 전 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바씨(Wasy) 학살 사건은 피비린 내 나는 종교 전쟁의 효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1562년 상파뉴(Champane) 지역 바씨 계곡에서 1,200명의 프로 테스탄트들이 설교를 듣고 있던 중에 기즈(Guise) 공작의 사람들이 난립하여 74명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가 톨릭 측의 우두머리는 기즈의 로트링건 귀족 집안이었 다. 그러자 위그노파 측은 가스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 제독과 콩데(Conde) 공의 지휘 아래 무력 항쟁 에 나서서 정월의 칙령을 준수하도록 요구하였다. 이것 은 1598년까지 7차례나 더 반복되는 종교 전쟁의 시발 이었다. 종교적 동기로 시작된 전쟁에 정치적 동기까지 가미되어 가톨릭은 스페인의 왕가와 교황 및 사보이 (Savoie)의 공작을 그 배경으로 하고, 프로테스탄트는 영 국과 독일을 그 배경으로 한 전쟁으로 변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자인 나바르의 앙리(Henri de Navarre)와 샤를르 9세의 누이와의 결혼식을 통해 화해 의 길이 트이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가타리나와 기즈 가 사람들은 1572년 8월 23~24일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 축일 밤에 회합 중인 위그노파를 대량 학살 하였다. 콜리니 제독도 희생된 이 '파리의 유혈 결혼식' 에 이어, 지방에서도 위그노파의 대량 학살이 있었다. 희 생자의 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단히 많아서 서양 역사 상 잔혹한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학살이 있은 후에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앙리 3세(1574~1589)의 사망 과 더불어 발로아 왕가가 단절되고 부르봉 왕가가 통치 하게 되었다. 이제 위그노파의 지도자인 나바르의 앙리 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나바르의 앙리는 가톨릭 다수 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1594년 초에 샬트르에서 도유되고, 1594년 3월 22일에 파리에 입성하였다(그는 "파리[왕위]는 미사 한 대의 가치가 있지 않 느냐"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나바르의 앙리가 앙리 4세 (Henri Ⅳ, 1589~1610)로 등극함으로써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위그노파에게 한정된 종교적 자유를 주 었고 그들의 안전 보장을 위해 100개의 지방을 양도하 였다. 그렇지만 이 칙령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 의 평등을 말하지는 않았다. 이 칙령은 가톨릭을 절대 다수의 신앙으로 선포하고 가톨릭의 예배는 어디서나 재현되어야 함과 약탈한 교회 재산은 반환되어야 함을 명시하였다. 반면, 위그노파는 왕국 안에서 양심의 자유와 예배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어디서나 자신의 신앙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국가 공무원이 될 수 있고 그들의 교회는 국가로 부터 상당 액의 보조도 받게 되었다. 낭트 칙령은 교황의 재가를 받지 못하였고, 또한 개혁파에게는 그들이 원하 는 대로 정치 조직을 할 수 없기에 부족한 것으로 생각되 었다. 그러나 낭트 칙령으로 말미암아 36년 간 치열하게 계속되었던 프랑스 내의 종교 문제가 해결되었다. 위그 노파는 루이 14세 때의 전제 왕권이 1685년 낭트 칙령 을 폐기할 때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위그노 파 ; 칼뱅) ※ 참고문헌 August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 Herderbiicherei 237, Freiburg, 1965(최석우 역, 《敎會史》, 신학총서 22, 분도 출판사, 1982)/ Lewis W. Spitz, The Refommaiom(서영일 역, 《宗改革 史》, 기독교 문서선교회, 1983)/ F. Zoepfl, 《LThK》 7, p. 787/ D.R. Penn, 《NCE》 10, pp. 206~207. 〔姜永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