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 신앙

來世信仰

〔라〕 fides vitae futurae · 〔영〕 faith of world to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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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 의해서 결박되는 악귀들과 저주받은 영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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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에 의해서 결박되는 악귀들과 저주받은 영혼들

I . 교의 신학에서의 내세 신앙 인간의 삶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으로 끝나 지 않고 사후에도 영원히 지속하리라는 믿음. 그리스도 교의 내세 신앙은 인간의 보편적인 희망인 사후 세계에 서의 영적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구체 인물인 예수의 부활 신앙에 입각하여 형성되었다. 이러한 그리 스도교적 내세 신앙의 표상 양식(表象樣式)은 시대와 장 소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의미 또한 상위성을 드러내고 있다. 〔성서적 표상〕 구약의 유대인들은 본 시 그리스인들처럼 영혼과 육신을 엄격 하게 분리시켜 파악하지 않았으며, 육 신을 떠난 영혼만의 생명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인간 생명 자체가 하나의 피조물이고 본래의 인간적 삶이 란 육신과 현세가 상관하는 실재였다. 그들에게서 인간 영혼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 불멸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영혼의 선재(先在)를 표상 하고 있지 않다. 인간은 창조된 조물이 기 때문에, 불멸성은 영혼에 내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정초한 희망일 뿐이었다.유대인들의 삶은 죽음으로 일단 끝나 고 사후에는 생명의 주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예속되어 (창세 35, 18 : 전도 3, 19-21 : 12, 1-8) 그의 신의(神意) 에 의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희망은 약속된 땅, 메시아의 시대, 또는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어 표현되었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는 사자(死者)들의 부활에 대한 희 망이 생겨났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내세 신앙은 육신과 분리된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사자들이 부활하여 야훼 왕국에 참여하는 삶에 대한 희망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부활 표상은 죽기 전에 있던 육신이 영혼과 결합 하여 생명을 새롭게 회복하리라는 소박한 신앙이었다(이 사 26, 19 : 다니 12, 1-3). 이는 기원전 2~3세기경부터 성조들과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의 구원에 관한 물음과 사자들의 운명에 대한 일반적 관심을 통해서 묵시 문학 계통에서 내세 표상이 계발되기에 이르면서 강화되었다. 신약은 구약성서의 후기 유대-묵시 문학적인 보편적 부활 신앙의 표상을 수용하였다. 예수의 부활 역시 이러 한 후기 유대-묵시 문학적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었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리가 없다." (1고린 15, 13). 하지만 신 약에서 영원한 생명을 지상에서 영위되는 삶의 단순한 연장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재생(再生)을 통하 여 영생에 이르게 된다고 믿었다.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 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은 새로운 조물이 되어야 한다. 그 러나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는 재생을 실현할 수 없다. 인 간을 새로운 조물로 만드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로서의 은총이다. 인간은 자기 영혼의 본성적 능력으로 불멸하 지 않고 하느님의 초본성적 은총의 덕으로 영원한 생명 에 참여하도록 불렸다(필립 1, 21-26 ; 1데살 4, 16 ; 로마 8, 36 : 14, 7-9 2디모 4, 18 : 히브 12, 22-24). 그리스도 인들은 초기 교회에서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만이 아니 라 전인적(全人的) 존재가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고 확신하였다. 초기 에 신자들은 감동적이면서 충격적이었던 예수 부활의 신 앙과 재림(再臨, parusia) 임박의 기대 속에서 생활하였다 (1데살 1, 10 ; 2, 19 : 3, 13 : 4, 15 : 1고린 15, 23 : 필립 3, 20 이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던 신자들은 부활 하고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그들이 살아 있는 동 안에 재림하여서 자신들은 죽음에 처해지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되리라고 기대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세상 종말이 닥치면서 이미 죽은 사람들 역시 부활 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주여 어서 오소서!' (마라나 타, Mapowo 0a)의 외침은 이러한 내세 신앙에 대한 당시 교 회와 신자들의 기대를 표출하고 있다(1고린 16, 22). 하지만 초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마지막 날의 도래가 지연됨을 체험하게 되면서 그들의 단순 소 박한 내세 신앙이 현실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현실적으로 사람들에게 닥치는 죽음과 이들 의 부활 사이에 어떠한 일이 발생하는가 하는 물음이 제 기된 것이다. 죽음이 닥치면서 인간의 육신이 부패하고 파멸되는 양상과 사자들이 처하게 되는 고립 현상에 직 면하여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의 현실성(現 實性)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사자 부활이 세상 마지막 날,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발생 하고 그때까지는 사자들이 지하 세계로서의 '쉐올' (scheol)에서 일종의 수면 상태 속에서, 즉 거의 무(無)에 가 까운 상태에 머물게 된다고 간주되었다(시편 88, 7 ; 116, 3 ; 욥기 18, 18).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자들 이 죽고 나서 즉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하느님의 생 명에 참여하는 지복(至福)을 누릴 것으로 확신하였다(필 립 1, 21 이하 : 2고린 5, 1 이하). 〔교부 시대〕 사람이 죽고 나서 세상 마지막 날까지 기 다리지 않고 즉시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복을 누리게 된 다는 신앙의 타당성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한 문제 제기에 직면하여 교회는, 영혼 불멸(靈魂不滅)을 주장하 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그리스적 입장, 특히 당시에 널 리 유포되었던 플라톤주의(Patonismus)의 입장을 원용하 기에 이른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7)은 그리스 세계 안 에서 그 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던 영혼 불멸 표상을 수용 하여 새로운 논증으로 영혼과 육신의 본질적 이질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육신을 영혼의 감옥이나 무덤으로 규 정하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Phaidon 62b : 65e : Kratylos 400c). 그에게서 육신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사멸적(死 滅的) 실재임에 반하여, 영혼은 단순하고 정신적이고 신 적(神的)이어서 자신을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불멸적 실재로 파악되고 있다(Menon 81ab ; Timaios 27d~28c). 플 라톤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취지에서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하고자 시도하였다. 그에게서 인간 생명의 원리로서 의 영혼은 피상적이고 변화 무쌍한 물질계로부터는 취득 할 수 없는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 같은 영원히 지속 되는 정신적 관념(觀念, 18eox)들을 인식하고 있다(Phaidon 65c; 100d). 그에 따르면 하나의 영적 실재는 불멸적 실재 이고, 영혼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관념들의 인식은 영혼 이 물질계에 유폐되기 이전에 관념 세계에서의 삶에 대 한 '기억' (記憶, cavaumono)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이 다. 이처럼 영혼은 지상의 현실 세계보다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지상 실재의 몰락 과정에 편입되지 않고 영원한 관념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므로 영혼과 육신의 결합은 비본래적인 것이고 종래에 가서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 다. 그리고 죽음은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는 것으 로 파악되면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현존 방식으로부터의 해방으로 간주되는 것이다(Phaidon 66e ; 67a). 이는 영혼 이 죽음에 의하여 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신적 세계로 귀환한다고 파 악되기 때문이다. 영혼을 불멸하는 실재로 파악하는 플라톤적 견해가 주 로 동방 교회의 오리제네스(0rigenes, 185~254)와 서방 교 회의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와 같은 교부들에 의해서 그리스도 교회에 수용되기에 이르렀다. 오리제네 스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피력하면서 영혼만을 인간의 본 질로 파악하였다(mepl opxov 1 4, 1 : Ⅱ 2, 2). 그에게서도 영혼은 본시 상부(上部) 광명(光明)의 세계에 속하였으 나 자유 의지를 통한 범죄 행위로 말미암아 추락하여 하 부(下部)의 육신 세계에 유폐되기에 이른 것으로 파악된 다. 오리제네스는 본시 현세의 삶보다 선재(先在)한 영 혼이 죽음 속에서 육신으로부터 해방될 때에 인간의 구 원이 실현된다고 하는 플라톤과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 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영혼만을 인간의 본질적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영혼이 하느님에 의하여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보고 있다(De Trinitate Ⅹ 5, 7 ; XIV 4, 6 : 12, 15). 그는 이론상으로는 육신도 하느님에 의하 여 창조되었으므로 자체로는 선하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한다. 육신은 원죄(原罪) 이후에 사욕 편정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저항하고 악으로 빠지도 록 유혹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지상적(地上的) 이 아닌 지성적(知性的)인 세계를 진정한 실재로 파악하 면서 피안 세계에서의 영원한 진리를 지복직관하는 열망 을 강조하였다. 그에게서 인간적 갈망은 천상 세계의 광 명 안에서 존재하는 영혼의 고향을 향하는 것이다. 이처 럼 아우구스티노도 인간의 육신성을 경시하는 플라톤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동방 교회나 서방 교회를 막론하고 교부 시대에 육신 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원론적 인간관이 지배하게 되 면서 초대 교회의 하느님 나라 기대 사상이 후퇴하고 영 혼 구원 사상이 그리스도교계의 전면에 부상하기에 이르 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육신 부활을 통한 전인(全 人)의 구원보다는 육신과 구별되는 영혼만이 구원되어서 영생을 누린다는 개인주의적 내세 신앙이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점차 팽배하게 되었다. 〔중세 이후〕 플라톤-그리스도교적 입장은 13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극복된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 하여 대표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 간관을 비판적으로 원용하면서 '영혼이 육신의 유일한 형상' (anima unica forma corporis)이라고 규정하며 인간 존 재의 단일성을 강조하였다(STh I , q. 76 a. 1-3). 그에 따 르면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었다기보다는, 영혼 과 '제1 질료' (materia prima)로 구성된 존재이다. 다시 말 하면, 영혼은 '형상' (形相, forma)으로서 '제1 질료' 안 에서 자신을 실제적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자기 본연 의 구체적 실재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형상으로서의 영 혼을 통해 자신을 구현하게 되는 '제1 질료' 또한 비형 상적 사물적 실재가 아니라 영혼처럼 내적 존재 원리로 규정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을 이질적인 두 개의 실재로 구성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요 전체적인 존 재로서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는 육신 안 에서의 인간의 세계적 현전성(現前性)이 영혼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로 상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 의 실재성 안에서 현전하는 것이다. 현실적 인간은 '영 혼적' 이고 동시에 '육신적' 이다. 그는 인간의 육신과 영 혼을 두 개의 실체(實體, substantia)로 파악하지 않고 인 간 존재의 원천적 단일성 안에서의 두 개의 형이상학적 원리들로 파악한 것이다. 그에게서 육신은 영혼과 대조 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되지 않고, 육신과 긴밀 하게 연관되어 있다. 육신이 영혼의 현존(現存) 조건이 기 때문에 육신 없이 영혼은 존재에 이를 수 없다. 여기 서 육신은 플라톤주의에서처럼 더 이상 영혼의 감옥이 아니요, 영혼의 방해물이나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인간 정신은 육신을 통하는 도정을 거쳐서 진리를 인식하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정신은 정신 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육신성을 필요로 한다. 영혼이 소여(所與)된 시공간성(時空間性) 속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드러냄으로써만 실재하는 한에서 인간의 영혼 과 육신은 하나인 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하나 요 전적인 인간 실재 안에서 육신은 다른 것이 아니라, 현세의 시공간 안에서의 영혼 자신인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단일적이고 전체적인 인간관이 교 회의 교리 안으로 공식적으로 수용되기에 이른다. 교회 는 인간을 두 개의 존속 본질 부분으로서, 즉 하나의 물 질적 육신과 정신적 영혼으로 구성된 합일체(合一體)라 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존속 부분들이 란 구별되고 분리되는 두 개의 존재자들이 다른 제3자적 존재자에 의해 합성되는 것들이 아니라,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존재자에게 있는 두 형이상학적 국면들의 실현이 다. 하나의 인간 존재가 이 두 개의 존재 원리들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엔느 공의회(1311~1312)는 인간 존재를 이원론적으로 규정하려는 영신주의(靈神主 義, spiritualismus)를 거슬러 인간의 단일성을 옹호하였다. 이 공의회는 정신적 영혼이 자신과 분리된 하나의 다른 원리를 중재로 해서 육신과 결합되는 것이 아닌, 자기 자 신을 통해서 직접 육신과 결합되는 육신의 형상임을 강 조한 것이다. 여기서 '영혼이 육신의 형상' 이라는 정식 이 결정적으로 진술되고 있다(DS 902). 이 관점에서 영 혼은 육신에 형체를 부여하는 '형상' (形相)이며, 육신은 정신적 영혼의 '표현' (表現)으로서 영혼으로 하여금 비 로소 자신의 구체적 실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본 입장이 부활 신앙을 통하여 영혼 - 육신적 인간의 완성을 가르치고 있으나 수 세기 동안 교회의 일 상적 복음 선포와 교리 교육, 그리고 장례 예절에서 거의 이원론적 양식으로만 영혼 - 육신 관계가 해설되어 온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교회가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512~1517)에서 각 인간이 불사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다고 가르친 바 있다. 당시 인본주의적 신(新)아리스토 텔레스주의자들은, 인간 영혼은 보편 타당한 것을 파악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기에 영혼은 개별적 존재일 수 없 으며, 개별 인간 속에서 영혼과 함께 활동하는 감각적 진 리가 본질적으로 물질에 매어 있고 그 현존이 개인적이 기 때문에 영혼은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공의회는 인간의 영혼이 사멸적이 고 모든 인간들 안에서 오직 유일한 하나의 영혼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을 배격하면서 영혼은 불사 불멸적이고, 육신의 다수성에 상응하여서 다수라고 가르쳤다(DS 1440 이하). 교회는 영혼의 불사 불멸성을 강조하고 죽음 뒤에 영 혼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지복을 누린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도 세상 '마지막 날' 에는 부활한 육신과 재결 합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왔다. 그런데 육신 부활을 통한 영혼의 육신과의 재결합 표상은 이미 하느님과 일 치하여 지복을 누린다는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별다른 상관없는 우유적(偶有的) 부가물의 성격만을 지닐 뿐이 다. 〔신학적 표상〕 교황 베네딕도 12세의 헌장 <복되신 하 느님>(Benedictus Deus, 1336)에 따르면 죽음으로써 육신으 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즉시 하느님께로 나아가 사심판 (私審判)을 거쳐 지복(至福)을 누리거나, 영벌(永罰)이 나 정화(淨化)의 단련을 받다가 세상 종말에 부활한 육 신과 결합한 상태에서 공심판(公審判)을 받게 된다(DS 1000~1002). 이에 따르면 개인의 죽음 속에서 영혼이 처하게 되는 상태와 역사 종말 때 육신 부활을 통한 인간 의 상태는 차이가 있다. 소위 사심판과 공심판 사이에 존 재하는 인간들의 처지는 전통적으로 '중간 상태' (中間狀 態)로 지칭되고 있다. 이 '중간 상태' 를 말하는 교회나 신학자들은 현세나 죽음 뒤에 따르는 내세에서의 인간의 단일성 내지 지속성을 나름대로 인정하고자 노력한다. 이 '중간 상태' 에 대한 재래 표상이 불완전하다는 것 을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본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육신과 영혼은 분리된 두 개의 존재자가 아니고 하나의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두 개의 구별되는 존재 원리이기 때문에 죽음은 육신만이 아니라 영혼에도 해당된다. 즉 영혼은 이 죽음을 겪게 된다.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한 모 든 것을 아무것도 파멸시키지 않는다는 신앙의 진술을 고수할 때, 죽음 속에서 육신이 파멸된다는 생각은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다. 육신의 소멸이란 말은 그의 존속하 는 질료적인 부분이 완전히 파멸됨을 뜻하는 것이 아니 다. 그리고 영혼이 죽음을 함께 겪는다는 말은 영혼이 무 (無)로 침잠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육신과 영혼이라는 두 개의 '부분적 실체' 가 본 질적으로 일치한다는 상념에 입각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죽음 속에서 인간의 육신과 영혼이 함께 죽 는다. 육신 부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중간 상태는 누 구에게나 무엇인가가 결핍되어 있는 상태이다.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어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에서- '본성을 거스르는 상태' 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전인간' 으로서 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의 무엇인가 (Pars naturae)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중간 상태 속에서 성인들 과 정화된 사람들의 영혼이 지복직관의 영복을 누린다고 일컬어지고 있으므로, 육신의 부활은 영혼에게 지복성에 있어서는 단지 비본질적 증가만을 가져다 주는 셈이다. 교회는 영혼 구원의 중요성을 지극히 강조하면서도 육 신의 부활 신앙을 결코 저버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교회 는 현세적 인간과 부활한 인간의 동일성(同一性) 내지 지속성을 보존하려는 취지에서 인간들이 현세적 육신으 로 부활하리라고까지 가르쳤다. 이를테면, 톨레도 교회 회의(675)는 모든 사자들이 그들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부활할 것이나, 공기 형태이거나 다른 육신 으로서가 아니고 인간이 현재 살고 존속하며 움직이고 있는 현세적 육신을 입고 부활하리라고 말하고 있다(DS 540 : 325). 그리고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 역시 모 든 인간들이 현세에서 담지하는 자신들의 육신을 지니고 부활하며 자신이 행한 선행이나 악행에 따라서 영벌이나 영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DS 801). 교회의 이러한 교리에 입각하여 육신 부활을 인간의 잔해인 뼈 와 근육 등이 세상 '마지막 날' 에 하느님으로부터 새로 이 활력을 받아 다시 소생하여 천국 또는 지옥에서 존재 하고 있는 영혼과 재결합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된 다. 오히려 현재 자신이 지닌 육신의 단 하나의 원자도 그대로 남지 않고 다른 원자로 대치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부활 신앙을 통해서 육신과 영혼을 서로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의 생명 원리로 규정하고 영혼과 함께 육신 역시 구원되고 완성된다는 내세 신앙을 고수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육체와 영혼으로 단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간은 그 육체적 성격으로도 이미 물질 세계의 요소들을 한 몸에 집약하고 있으므로 물질 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그 정점에 도달하며 인간을 통해 서 그 자유로운 찬미를 창조주께 읊어 드리고 있다. 따라 서 인간은 그 육체적 생명을 천시(賤視)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된 그 육체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므로 좋고 영예로운 것으로 알아야 하 겠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물질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 하는 동시에···· 자신 앞에서 영적 불멸의 혼(魂)을 긍정 하게 될 때··· 단지 물리적 내지 사회적 조건의 소산인 덧 없는 환각에 속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깊은 진리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사목 14항). 〔의 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교리에 상 응해서 죽음 속에서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느 님께로 나아가고 세상 마지막 날에 육신이 영혼을 뒤따 라 영생에 참여한다는 표상 대신에 죽음 속에서 이미 육 신의 부활, 전체 인간의 부활이 발생한다는 견해가 오늘 날 많은 신학자들과 공식적이라 할 만한 교회 문헌에서 피력되고 있다(《화란 교리서》, 《새로운 공동 신앙 고백서-하 나인 믿음》). 여기서 부활은 신체나 시체(屍體)의 재생을 뜻하지 않고 육신-영혼적 단일 존재인 인간이 죽음 속에 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어 전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으 로 이끌리게 됨을 뜻하고 있다. 구원의 은총이 부활로 인 한 죽음의 극복을 이미 씨앗과 같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 에 은총 속에서 사망하는 의인에게는 죽음 속에서 이미 육신의 부활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 속 에서 인간이 은총의 힘으로 지복적 처지로 현양되면, 인 간의 육신도 현양되어 육신 부활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죽음 속에서의 육신 부활이 이루어졌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도 같은 운명의 가 능성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필립 1, 23 : 2고린 5, 1-5). '새로운 창조' , '새로운 세계' 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생활하고 사망한 하느님의 조물들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물론 죽음 속에서 부활한 육신은 현 세적 육신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전혀 새로운 실재이다 (1고린 15장). 이 육신은 하느님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을 선사받은 육신적 인격체로서 현세 인간의 사고와 표상 능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새 창조의 결실인 것이다. 교회의 내세 신앙은 개인주의적 구원 희망에 사로잡히 지 않고 만인의 구원을 희망하는 연대적 신앙의 성격을 지닌다. 한 인간이 세계 안에서 생활하다가 죽고 난 후,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여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전 인이 현세에서 맺은 모든 관계와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된 다. 육신 부활 안에서 그가 살아 세계 안에서 맺었던 관 계가 소멸되지 않고 궁극적이 된다. 그러므로 사자들은 다른 인간들과 세계 전체와 여전히 유대되어 머무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 자체가 바로 세계 자 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부활을 통해서 죽음 속에서의 인 격체와 더불어 세계가 부분적으로나마 완성의 상태에 도 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육신 부활 내지 사자 부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내세적 삶은 순전히 개인적 사 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 고 세계가 유대를 맺는 가운데 충만에 이르는 보편적 과 정의 단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종말론) ※ 참고문헌  J. Auer, Auferstehung des Fleisches. Was kann mit dieser Aussage heute gemeint sein? Ein Versuch, 《MthZ》 26, 1975, pp.17~31/ H.U. v. Balthasar, Eschatologie im Umriβ, Pneuma und Institution. Skizzen zur Theologie, vol. 4, Einsiedeln, Johannes, 1974, pp. 410~455/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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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이 빠졌다 라든가, '넋이 나갔다' , '넋두리를 한다' 라는 표현들이 넋의 이러한 속성을 드러내 보여 준 다. 임종자의 숨이 넘어가면, 망인의 의복을 들고 나가 북쪽을 향하여 "복, 복, 복!" 하고 외치는 고복(皇復)은 바로 넓이 되돌아오라(返魂)고 부르는 초혼(招魂) 의례 이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위하여 벌이는 수망굿에서 는, 먼저 익사 장소에 가서 '넋(혼) 건지기굿' 을 한다. 넋은 '산 (사람의) 넋 〔生靈〕과 '죽은 (사람의) 넋' 〔死靈〕으로 나뉜다. 상례나 제례에 관련되는 넋은 죽은 사람의 넋인 사령(死靈)이다. 사령은 죽은 사람에게도 계속하여 넋이 살아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 사용되는 개 념이다. 사령은 다시 선령(善靈)인 조상(祖上)과 악령 (惡靈)인 원귀(寃鬼)로 나뉘어진다. 선령인 조상이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자기가 살 던 집안에서 자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여한 없이 죽은 이상사(理想死)의 경우에는 사후 3년(만 2년) 만에 대상 이 지나 탈상을 하고 나면 죽음의 부정을 씻고, 재수와 부귀를 가져다 주면서 후손을 보호하는 조상의 반열에 오른다. 그렇게 죽지 못한 이상사(異常死)의 경우에는 진오귀굿 등의 신격화(神格化)의 과정을 거쳐서 조상이 된다. 그도 저도 되지 못한 사령은 살아 있는 인간을 괴 롭히는 원귀가 된다. 악령인 원귀는 생전의 원한이 남아 저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질병이나 재앙 등으로 살아 있는 이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공포의 대상이다. 결혼 (식)을 하지 못하고 죽은 처녀 귀신인 '왕신' 혹은 '손각 시' 라든가, 총각 귀신인 '몽달 귀신' 혹은 '삼태 귀신' 이 대표적인 원귀이다. 이들을 달래고 저승으로 천도하기 위해서, 죽은 후에라도 결혼을 시키는 '저승 혼사굿 또 는 '허재비굿 을 하는 것이다. 사자와 산 자의 관계는 이 승과 저승 양쪽의 중개자인 무당을 통한 의사 소통으로 계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렇게 보면, 넋은 살아 있는 인간의 원동력이었다가 사 람이 죽고 나면 육체를 떠나 독립적으로 그들만의 세계 인 저승에 머물면서 이승의 인간 세계와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불멸의 존재이다. 〔저승관〕 한국 민간의 인생관은 한마디로 삼생관(三生 觀)이라 할 수 있다. 전생(前生), 이승 그리고 저승에서 의 삶이다. 전생에서의 삶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이승에 서 인간으로서 사는 삶의 질이 결정된다. 내세인 저승은 바로 이승의 투사물이다. 저승에서의 삶도 이승에서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죽은 사람을 데리러 온 저승 사자 에게 천천히 데려가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저승 사자가 저승길을 서두르지 않고 중간중간에 물을 마시며 자주 쉬도록 하게 하기 위해 사자상(使者床)에 간장 종지를 올려 놓는 꾀를 부리기까지 한다. 저승 열두 대문을 통과 할 때는 저승 문지기에게 뇌물을 줘야(인정을 써야) 무사 히 지나갈 수 있다고 저승 노자(路資)를 마련한다. 이승 과 저승은 엄격히 분리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 이 어져 있다. 왕생(往生)을 바라는 염원이 표출된 좋은 예 가 바로 이중장(二重葬)이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바로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가묘에다가 이엉을 덮어 두 거나(草墳), 지표면에 드러나게 두어서〔風葬〕, 살이 썩 은 다음〔肉脫〕, 그 뼈를 추스려 닦는 세골(洗骨)을 한 후 에 비로소 완전히 매장하는 장례법이다. 전라남도 진도 를 비롯한 서해 도서 지방에서 지금까지도 시행되고 있 는 장례 방식이다. 죽은 후에도 비교적 오래 남는 뼈가 바로 넋이 머무르는 거처라고 여기는 까닭에, 뼈를 소중 히 다루는 것이다. 저승의 또 다른 명칭들은 구천(九泉), 황천(黃泉), 음 부(陰府), 유도(幽都), 염라국(閻羅國), 명부(冥府) 등이 다. 이렇게 다양한 명칭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죽음 이후 의 세계에 대한 민간의 관심이 그만큼 지대함을 보여 주 는 것이다.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죽음은 어느 누구도 거 역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무속 의례에서도 죽음과 관 련되는 내용들이 다양하게 발전되어 왔다. 무속에서 저 승이라는 공간은 자연 순환의 근원지요, 이상향이다. 사 람이 죽으면 본래 비롯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저 승의 위치는 막연하여, 그냥 다리를 건너서 가는 저편이 다. 사령제(死靈祭)인 다리굿에서 저승 다리의 상징인 시왕포를 가르거나 베를 째는 동작은, 죽은 이가 이승에 서 분리되어 죽음 저편의 세계로 잘 가도록 돕는 의미를 내포한다. 죽은 인간은 저승에 가서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이렇다. 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저승 사자가 저승길을 안내하러 온다. 저승 사자를 따라 저승길을 가다 보면 여러 차례 대문을 통과해야 되 는데, 이때 저승문을 지키는 차사에게도 인정을 써야 무 사히 통과된다. 드디어 저승에 다다른 죽은 이는 저승 문 서를 관장하는 최판관(崔判官, 재판관) 앞에서 서류 심사 를 거쳐, 십대왕(十大王)의 심판을 받는다. 저승의 시왕 (十王)은 열 가지 저마다 다른 양상의 지옥을 다스리는 존재이다. 한국의 민간 신앙에서 말하는 지옥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지옥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리스도교의 지옥이 영벌의 장소라면, 민간 신앙에서의 지옥은 그리스도교의 연옥 개념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지옥에서의 형벌을 거쳐야만 저승에 안착할 수 있다든가, 지옥의 형벌로도 다스릴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은 소, 말, 구렁이 혹은 지네로 이 세상에 다시 환생한다는 설명을 보면 민간에 서 이야기하는 지옥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흔히 말하는 염라 대왕은 저승의 시왕 중에서 다섯번째의 왕이다. 어 른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거나 거짓말을 한 죄인을 다스 려서, 혀를 잡아 빼는 발설 지옥을 맡고 있다. 심판의 기 준은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부모 효도와 집안 화목이 주안점이 된다. 그래서 이기심 을 단죄하며 공동선을 강조한다. 개인, 가족, 지역 사회 및 국가 그리고 인류 보편의 문제들을 혈연 관계를 기본 규범으로 하여 심판한다. 심판의 결과는, 죄가 없고 이승 에서 많은 공덕을 쌓은 사람은 저승에서 다시 태어나〔再 生〕 그곳에서 영생하거나, 새나 나비가 되어 이승으로 환생한다. 죄가 있는 사람은 지옥의 정화 과정을 거친 후 에 저승에 안주하거나, 죄가 너무 많아 지옥의 형벌로도 다스려지지 않을 때는 소나 말, 구렁이나 지네 등으로 이 승에 환생한다. 불교의 윤회와는 달리 이승으로의 환생 은 단지 동식물로만 가능하며, 인간으로 이승에 사는 기 회는 단 한 번뿐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적극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이끄 는 정신적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제 명대로 다 사는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남의 명' 에 죽은 사람 즉 비명(非命)에 간 사람이나, 돌 보아 줄 후손이 없어 신격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혼령 〔無主孤魂〕은 이승에도 속하지 못하고, 저승에도 들어가 지 못하여 구천에 떠도는 뜨내기 귀신, 즉 뜬신〔雜鬼雜 神〕이 되고 만다. 그래서 '무자 귀신(無子鬼神)이 서럽 다' 라는 속담이 나온 것이다. 이들 원귀는 뒤늦게라도 진혼(鎭魂) 의례인 '진오귀굿' 등을 베풀어 신격화시켜 서 저승에 들여보내거나, 굿의 마지막 절차인 뒷전에서 풀어먹임으로써 임시 방편으로 달래거나 누르는 대상이 된다. 〔상례(喪禮)〕 인간의 죽음은 단순히 물리적인 생체 기 능의 중단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종교적인 의미가 부여 된다. 한국 민간의 내세 신앙을 가장 잘 반영하는 사령제 는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어 저승으로 천도하고, 살아 남 은 이들의 안녕과 질서를 꾀하는 목적에서 거행된다. 한 국 민간 신앙에 따르면 죽음은 '부정' (不淨)과 연관된 다. '부정' 은 일상의 조화와 질서가 파괴되는 혼돈을 표 현하는 민간 신앙의 용어이다. 이러한 부정을 '입고 벗 는 과정이 사령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살아 남은 사 람은 차차 상(喪)을 벗고 일상의 질서로 복귀하며, 사령 은 부정한 기간을 지나서 귀신, 조상, 신령이 되어 집을 떠나 멀리 저승으로 간다. 이제 사령은 후손을 돌보는 수 호신으로 격상한다. 살아 남은 사람들에 의하여 숭배되 는 존재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한 사령은 조상신이 되지 못하고 잡귀가 된다. 사령에 대한 제의, 사령제가 거행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임종 의례에서부터 시신 처리 과정인 장례까지를 포함 하는 상례 그리고 제사와 차례를 합한 제례에 이르기까 지, 사령제는 지역과 종교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지닌다. 한국 민간 신앙의 한 부류인 무속의 사령제에 국한시키 더라도 종류와 지역에 따른 편차가 패나 복잡하다. 역사 적으로 보아 고려 시대 말까지는, 임종 의례에서부터 장 례까지의 절차에 해당하는 고유한 무속 의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분의 발굴 결과라든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신라 본 기> 등에 의하면, 부여 · 고구려 · 신라 등지에서는 순장 과 세골장의 풍속이 있었다. 순장과 세골장은 한국 민간 의 내세관과 맥을 같이한다. 즉 이러한 장례 풍속은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왕생 관념을 바탕으로 이루 어진 습속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조선조 이후에는 주 희의 《주자가례》에 근거한 유교식 의례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현대에 와서는 장의사에 일임하여 공동 묘지에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사령과 산 이 들이 정상적인 관계를 맺은 이후의 사령제라 할 수 있는 조상 숭배 제례 역시 유교 의례와 구분하기에 곤란할 정 도로 습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한국 민간 고 유의 사령제를 살피기 위하여 장례를 제외한 현행 무속 의 상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종 류 : 무속의 상례는 시기상으로 나누어서 세 가지 종류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살아 있을 때 본인이 자신의 사령제를 미리 거행하는 '산오구굿' 이 있다. 불교의 예 수제(豫修薺)에 비견되는 의례로, 죽은 뒤에 돌보아 줄 후손이 없거나 후손이 있더라도 자신의 의사대로 무속에 따른 상례로 치러지지 않으리라고 판단될 때 미리미리 손수 해두는 예외적인 사령제인 셈이다. 최근에는 부산 이나 경남 지역 그리고 제주도에서 그러한 사례가 관찰, 보고되었다. 개인이 혼자 의뢰하는 경우도 있으나, 경비 조달의 문제로 여러 사람이 공동 추렴을 하여 의뢰하는 예가 대부분이다. 두번째는 장례 당일에 하는 상례이다. 서울이나 경기 지역에서는 '자리걷이' 혹은 '집가심' , '방가심' 이라고 하고 제주도에서는 '귀양풀이' 라고 한 다. 본격적인 굿의 형태로 행하는 전라도의 '곽머리 씻 김' 또는 '진씻김' 도 이 범주에 드는 의례이다. 장례를 지낸 그날에 사람이 죽은 자리인 방이나 집을 정화하는 의례이다. 사람이 죽은 장소는 부정을 타서 망자의 가족 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죽음의 자리를 가시는(씻는, 정화하는) 것이다. 단순히 위 생적인 소독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죽음의 자 리에 따라든 '부정' 을 심리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걷 는다. 심리적으로는, 살아 남은 사람들이 죽은 자에 대한 회한, 미련, 마음의 상처를 씻어 버리고, 미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차 근차근 받아들이도록 한다. 종교적으로는, 산 사람의 마 음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마음도 달래서 살아 있는 사 람에게 초인간적인 원인에 의해 탈이 나거나 살(煞)이 끼는 것을 방지하는 예방 의례의 목적도 있다고 할 수 있 다. 그래서 자리걷이에서는 죽은 사람의 여한을 달래고, 살아 생전에 미처 못다 한 그의 말을 무당의 입을 통해 더 들어 보며, 묘지가 마음에 드는지, 남아 있는 이들에 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를 듣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자리걷이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장례일이 되면 상가 의 남자들은 장지에 가서 산역(山役)에 참가하고 여자들 은 집안에서 자리걷이를 준비한다. 일종의 역할 분담인 셈이다. 죽은 사람이 누워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그릇에 쌀이나 밀가루를 담아 널반지로 덮고, 그 위에 망자가 평소에 입던 옷을 놓아 둔다. 이것을 '넋반' 이라고 하는데, 굿 이 끝난 다음에 죽은 사람이 무엇으로 환생하는가를 쌀이나 밀가루 위에 난 자국을 보아 확인한다. 새 발자국이나 나비 모양은 자유로운 넋으로 환생했다 는 의미의 길조이며, 지네나 뱀이 지나 간 자국 같은 구불구불한 모양은 흉조 로 본다. 이 세상에 여한이 많거나 갚아 야 할 죄의 값이 남은 의미라고 보기 때 문이다. 무당은 상(제단)을 차리고, 죽 은 이의 혼을 뜻하는 '넋전' 을 창호지 로 오려서 머리에 매단다. 그 다음에 무 당이 고리짝을 긁거나 장구를 치면서 무가를 부르고, 망자의 혼을 자기 몸에 실어서(넋들임) 죽은 사람의 말을 대신하는데,이것을 '넋두리' 라고 한다. 대체적으로 죽음을 서러워하는 말이 고 살아 남은 이들에게 당부하는 말과 묘지의 좋고 나쁨 에 대한 의사 표시를 한다. 자리걷이는 모든 신들을 청해 들이는 본격적인 규모의 굿이 아니고, 죽음에 관계되는 신들만을 불러 죽음의 부정을 가시는 소규모의 의례이 다. 제주도의 귀양풀이나 전라도의 곽머리씻김은 형식은 조금씩 달라도, 죽음에 따라든 부정을 정화한다는 데 있 어서는 기본적인 의미가 같다. 무속의 세번째 상례는 죽은 지 1년 이상 지나서 시행 하는 의례로서, 서울 경기 지역의 진오귀굿, 평안도의 다리굿, 함경도의 망무기굿, 경상도의 오구굿, 제주도의 무혼굿, 동해안의 수망굿 그리고 전라도의 씻김굿이 있 다. 진오귀굿은 다시 매장 직후부터 한 달 이내에 하는 진진오귀와, 대상 무렵 혹은 그 후에 날을 받아서 하는 마른 진오귀 또는 평진오귀로 나뉜다. 씻김굿도 진씻김 과 마른 씻김이 있다. 씻김굿을 다시 내용상으로 구분하 면 혼맞이굿, 혼(넋) 건지기굿, 저승 혼사굿이 있고, 시 기상으로 구분하면 곽머리 씻김굿(진씻김), 소상 씻김굿, 대상 씻김굿, 날받이 씻김굿, 초분본장 씻김굿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명칭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무속의 상례야 말로 한국 민간 신앙에서 죽음과 죽음 이후 내세의 문제 를 얼마만큼의 비중으로 다루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 여 주는 분야이기도 하다. 의 미 : 한국 민간 신앙에서 상례는 두 가지 의미를 지 닌다. 첫째로, 사령이 원령 내지는 악령으로서 떠돌이 넘 이 되기 이전에 미리 저승으로 천도하는 예방 의례로서 의 성격을 갖는다. 이승에 미련이 남은 사자는 이승과 저 승의 중간 어디인가에서 배회하며 살아 있는 이들을 괴 롭히는 원귀, 원령이 될 수도 있다. 사령제를 통하여 산 이들은 그러한 불행을 예방하고, 망자는 이승에의 미련 을 떨쳐 버리고 저승으로 갈 수 있다. 둘째로는 화(禍)의 넘을 복(福)의 넋으로 바꾸는 전환 의례의 성격을 지닌 다. 이러한 전환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의 차별도 없고, 이승에서 좋은 일을 한 사람이나 나쁜 일을 한 사람의 차 별도 없다. 부와 빈, 선행과 악행이 저승 천도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사령제를 베풀어서 부정을 제거하고, 저승 사자들을 기쁘게 해주면 누구나 저승으로 갈 수 있다. 무 속의 사령제는 어떠한 사람의 죽음이라도 예외 없이 상 례를 통하여 구제할 수 있다는 의례 지상주의의 보편적 구원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의례 지상주의는 저승 혼 사굿에서도 드러난다. 생전에 동거를 하여 사실혼 관계 에 있었더라도 혼인 '식' 을 거행하지 않았더라면 저승 혼사굿을 하여야 한다. 한편, 상례에 나타나는 저승의 위 치는 이승의 저너머에 있는 수평적인 위치이다. 이승과 저승은 서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 뒷마당의 장독대는 바로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공간적 표상이 된다. 그래서 집안의 주부가 저승과 의사 소통을 시도하는 소규모 의례로서 조상신들에게 '비손' 을 하거 나 '치성' 을 드릴 때의 장소가 바로 장독대인 것이다. 사 령제에서 무당이 빵빵이를 돌고 나면 조상신과 접신된 다. 그러한 모습은 바로 조상이 지금 저승의 모퉁이를 '돌아서' 또는 다리를 '건너서' 이곳으로 온다는 의미가 된다. 천신(天神) 계열의 신령들이 무당의 도무(蹈舞) 뒤에 하강, 접신하는 현상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상례 에서 '다리' 는 특별한 상징성을 갖는다. 다리는 이승과 저승의 양 세계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표상이 다. 이 다리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매개가 되어, 무 당이나 조상이 이쪽 저쪽을 건너가고 건너오며, 돌아가 고 돌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과 저승은 엄연히 다른 세계이다. 그래서 바로 또 이 다리를 '갈라서' 이승 과 저승을 상징적으로 분리시킨다. 진오귀굿이나 다리굿 에서 기다란 무명이나 베로 상정한 다리인 '시왕포' 를 찢는(째는) 소리는 영이별의 아픔을 '다리' 라는 모양뿐 아니라, 그 날카로운 소리로도 심금을 울리며 형상화한다. 목 적 :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민간 신앙의 상례 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목적이 있다. 무엇보다 앞서서 살 아 남은 이들의 행복 추구이다. 강한 부정의 발생이라고 표현되는, 비일상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인 죽음을 종교 의례를 통하여 단계적으로 수습하려는 시도이다. 차근차 근 죽음을 재체험함으로써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우선 감정적으로는 별리의 슬픔을 달랜다. 심 리적으로는 심하게 받은 내면의 충격을 흡수, 완충하고 엄청난 일을 당한 같은 공동체의 유대감을 확인한다. 사 회적으로는 한 구성원의 결원으로 생기게 된 사회적인 질서를 재구성하는 기능을 한다. 종교적으로는 불가항력 의 사건인 죽음을 초인간적인 힘(신령)을 동원하여 최종 적으로 극복하고 해결하려는 일이다. 두번째의 목적은 죽은 사람에 대한 위로이다. 무당의 입을 빌려(넋내림, 넋 들임), 살아 생전에 못다 한 망자의 말을 함으로써(넋두 리, 기밀 드림), 망자의 한을 풀고 편안히 저승으로 가도록 한다. 마지막으로는 산 사람과 죽는 사람의 연대감을 확 인한다. 조상 숭배라는 모습으로 산 자와 죽은 자가 의사 소통의 통로를 열고 새로운 관계를 지향함으로써,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 온 누 리의 안녕과 질서를 도모한다. 〔결 론〕 이제까지 한국의 민간 신앙에 나타나는 내세 신앙을 알아보기 위하여 민간에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 며, 종교 의례를 통하여 그 죽음을 어떻게 극복하고 죽음 이후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지 보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이 죽고 나서도 간직하고 있는 이승에서의 한을 풀 어 주고 저승으로 천도한다는 관심사로 집중되었다. 그 리하여 산 자와 죽은 자가 행복을 공유함으로써 이승과 저승이 연결된 공동체의 유대를 재확인하고, 하늘과 땅 이 맞닿은 우주의 조화를 꾀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 참고문헌  《三國誌》/ 《三國史記》/ 文化財管理局, <巫儀式 篇>, 《韓國民俗綜合調查報告書》 14, 文化公報部, 1987/ 김승혜 외, 《죽음 이란 무엇인가? - 여러 종교에서 본 죽음의 문제》, 도서 출판 창, 1990/ 최길성, 《한국 민간 신앙의 연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1989/ 조 흥윤, 《한국의 무》, 정음사, 1983/ 이두현, <장제(葬祭)와 관련된 무속 연구>, 《문화 인류학》 6(1973), pp, 7~38/ 金泰坤, 《韓國巫俗研究》, 집 문당, 1981/ 이광규, <한국의 조령 개념과 조상 숭배>, 《한국 종교의 이해》, 집문당, 1985, pp. 143~168/ 황루시, <절제된 한풀이의 미학, 상 징적 의례로서의 씻김굿>, 《전라도 씻김굿》 6, 열화당, 1985, pp. 76~91/ 김성례, Lamentations of the Dead ; the Historical Imagery of Violence on Cheju Island, South Korea, Journal of Ritual Studies 3/2(1989), pp. 251~285/ 박일영, <무속의 사후 세계와 사령제>, 《사목》 164호 (1992. 9). 〔朴日 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