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남 (1902~1984)

盧基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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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국인 주교. 대주교. 제10대 천주교 서울대교 구장. 세례명 바오로. 본관은 장연(長淵). 8 · 15 광복과 6 · 25 동란을 전후한 격동기에 한국 천주교회를 슬기롭 게 이끌어나가 오늘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공로자. 평안 남도 중화군 율리면 무진리(栗里面 戊辰里)의 쪽못〔藍 塘〕에서 천주교 신자인 노성구(盧成九, 요한)와 제안(齊 安) 황(黃, 비비안나)씨의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심이 깊은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일찍이 평양 본당의 르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에게서 유아 세례를 받고, 1911년에는 답현(沓峴) 공소에서 첫영성체를 하였다. 그가 사제가 되고자 결심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 해 가을 부친을 따라 신계군 고면 화개리 내동(古面 華 蓋里 內洞)으로 이주한 그는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계속 하는 한편 포내 본당(浦內本堂)의 부이수(Bouyssou, 孫以 燮) 신부에게서 열심히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1913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로부터 견진성사와 함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입학 허락을 받은 뒤, 1917년 9월 15일 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와 신학과를 차례로 졸업하고, 1930년 10월 26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일제 치하에서의 활동〕 서품 즉시 그는 종현(鐘峴, 현 명동) 본당의 보좌 신부로 임명됨과 동시에 계성보통학 교(啓星普通學校)의 운영을 맡아 보게 되었다. 또 1939 년 5월 14일, 일제의 강압으로 결성된 '국민 정신 총동 맹 경성교구 연맹' 의 부이사로, 같은 해 9월 24일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회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는 한 편 이해 '경성교구 가톨릭 합창단' 을 창설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말기에 이르자 조선 총독부는 종교 탄 압을 더욱 노골화하면서 광주교구장에 와끼다(脇田) 신 부를, 대구교구장에 일본인 하야사까(早坂久兵衛) 신부 를 임명하는 등 한국에 있는 외국인 교구장을 모두 일본 인으로 바꾸려는 획책을 하게 되었다. 이에 제9대 서울 교구장으로 재임하던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는 사임을 결심한 뒤 노기남 신부를 자신의 후임자로 임명 해 주도록 비밀리에 로마 교황청에 청원하였고, 이 청원 이 받아들여져 그는 1942년 1월 3일, 교황 비오 12세로 부터 서울교구장 및 평양 · 춘천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 다. 교구장으로 착좌한 지 한 달도 안된 1942년 2월, 노 교구장은 조선 총독부로부터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를 폐쇄하라는 통고를 받고, 서울에 있는 대신학생들을 덕 원(德源) 신학교로 옮겨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였 다. 이어 다음달에는 신사 참배(神社參拜) 문제로 인해 일본으로 가서 동경 주재 교황 사절 마렐라(Marella) 대 주교와 동경 대교구장 도이(土井) 대주교와 대책을 협의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해 일제에 의해 감금된 35명의 프랑스인 성직자와 아일랜드인 성직자들을 보호하는 데 도 전력을 다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인해 1959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문화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egion d' Honneur)를 수여받았다. 교구장으로 임명된 지 10개월 만인 1942년 11월 10 일, 골바사(Colbasa)의 명의(名義) 주교로 12월 20일 명 동 대성당에서 주교 성성식을 가졌다. 이 무렵 그는 평양 교구장을 새로 임명해 주도록 교황청에 요청하여 다음해 3월에는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신부가 제5대 평 양교구장에 착좌하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해방 이후의 활동〕 광복이 되자 노 주교는 1945년 8 월 17일자로 모든 성직자와 교우들에게 축복을 내림과 동시에 고유(告諭)를 발표하여 성신의 도움으로 하루빨 리 한국이 조속한 자주 독립을 이룩할 수 있도록 기원하 고, 춘천교구장직을 다시 한국에 입국한 퀸란(T. Quinlan, 具仁蘭) 주교에게 인계하였다. 또 한국에 진주한 미군과 함께 찾아온 스펠만(Spellman) 대주교(후에 추기경으로 승 품)를 맞이하여 9월 28일 명동 성당에서 한 미 친선 특 별 미사와 미군 환영 미사를 봉헌하였고, 12월 8일에는 김구(金九) 등 상해 임시 정부 요인 귀국 환영식을 개최 하였다. 아울러 그는 교회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여 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우선 충청남도 지역을 독립된 포 교지로 설정해 주도록 교황청에 요청하여 1948년 5월에 는 파리 외방전교회(책임자 : 라리보 주교)가 이 지역을 맡 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1946년에는 일제 때 폐간당했 던 교회 기관지 《경향잡지》(京鄕雜誌)와 《가톨릭 청년》 을 복간하고, 일간지 <경향신문>(신문사 사장 : 양기섭 신 부)을 창간하여 반공 사상을 고취하는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의 만연을 경고하였다. 다음으로 1946년 9월에 전 국 교구장 회의를 열고 일제 말기에 유명 무실해졌던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위원장 : 윤형중 신부)를 재 창립하는 동시에 순교 성지인 한강 새남터〔沙南基〕에 순 교 기념탑을 건립하는 등 순교자 현양 사업을 강력히 추 진하였다. 또 남 · 여 청년 연합회의 활동을 강화하였으 며, 이듬해 4월에는 1945년 4월 개교한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京城天主公教神學校)를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승격 인가받았다. 이 무렵부터 그는 신학교 때 은사였던 장면(張勉, 요한) 박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 회 안팎의 일을 자주 협의하였고, 1948년 1월에는 그를 국민 총선거의 가톨릭 대표로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1949년 8월 26일 '대한 천주교 연맹' 을 결성, 그 총재 에 추대되었다. 6 · 25 동란 발발 후 노 주교는 자유 진영의 적극적인 원조를 호소하고, 즉시 유럽 여행에서 돌아와 부산의 피 난 교회를 돌보는 데 노력하였다. 그리고 1950년 11월 북진하는 유엔군을 따라 평양을 방문,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이듬해 초부터 '군종 제도 설립에 동참 하여 '가톨릭 군종 신부단' 을 창설하였고, 1951년 1월 장면 박사의 국무총리 임명에 일조를 하였다. 뿐만 아니 라 휴전 이후에는 폐허가 된 각처의 성당 복구와 신학교 교육 재건에 힘쓰면서 구호 물자 분배와 사회 사업 등 전 후의 사회 봉사 활동에 교회가 앞장서도록 인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노 주교는 1955년에 미국과 유럽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쟁 피해 복구, 교회와 사회의 재건을 위한 적극적인 원조를 호소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자유 당 정권 말기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독재와 사회의 부 정 · 부패가 날로 심해지게 되자 <경향신문>을 통해 민중 의 편에 서서 이를 비판하고 민주 정치의 정상화를 촉구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그는 교황청으로부터 '정치 주교' 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견지하고, 교회의 정치 참여에 비판을 가하였다. 한편 노 주교는 1953년 전국 교구장으로 구성된 '천 주교 중앙위원회' 를 발족시켜 총재로 선출되었고,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30여 명의 신 부 · 신학생 · 평신도를 유럽 · 캐나다 등지로 유학시켰 다. 또한 신학교와 성모병원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는 한편, 전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여 교세를 크게 신장시켰 다. 또 1958년 6월 청주교구를 분리했고, 1961년 6월 에는 인천교구를 분리했다. 이처럼 광복 후의 혼란과 전 쟁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한국 천주교회가 발전하게 되자 로마 교황청에서는 한국 교회의 자립 능력과 성숙을 인 정하여 1962년 3월 한국 교회에 교계 제도(敎階制度)를 설정하도록 하고, 서울 · 대구 · 광주교구를 관구 대교구 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3개 관구(管區)를 설정하였다. 이 에 따라 노 주교는 서울대교구장을 맡게 되었으며, 6월 29일자로 대주교로 승품(昇品)되었다. 〔교구장직 사임과 봉사 활동〕 1962년 10월과 1963년 9월, 1965년 9월에 노 대주교는 로마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1 회기와 제3~4 회기에 참석하고, 제 1 회기와 제4 회기가 끝난 뒤에는 한국 주교단과 함께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 바오로 6세를 알현하였다. 아울 러 1963년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받았으며, 10월에는 수원교구를 분리하였고, 1966년 2월 이탈리 아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Commendatore)을 수여받았다. 또 이해 12월에는 '한국 종교인 협회' 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67년 3월 27일, 그는 한국 교회의 장래를 젊은 후진에게 맡긴다는 생각에서 서울대교구장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 났다. 이로써 그는 서울대교구의 대주교에서 프로 콘술 라리(Pro consulari)의 명의 대주교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경기도 안양의 성 라자로 마을 요양원으로 거주지를 옮 겨, 소외된 나환자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곳에서의 봉사 활동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되었으 며, 그 동안 자서전 《나의 회상록》이 1969년 6월에, 《당 신의 뜻대로》가 1978년 6월에 출간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미 사와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시성식을 집전하기 위해 한 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명동 대성당에서 알현하는 영광을 갖고, 이들 103인의 시성을 확인한 뒤 6월 25일 선종하였다. (→ 서울대교구 ; 한국 천주교) ※ 참고문헌  盧基南, 《나의 회상록》, 가톨릭출판사, 1969/ 《가톨릭 사전》/ 朴濤遠, 《盧基南 大主敎》,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