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산

老萊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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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동 입구에서 바라본 노래산 전경.

노래동 입구에서 바라본 노래산 전경.


박해 시대의 교우촌. 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安德面) 노래2동(老萊二洞). 이 지명을 달레(Ch. Dallet)의 《한국 천주교회사》 기록대로 '모래산' (Moraisan)으로 보고 이 를 청송군 현서면(縣西面) 백자동(栢子洞)의 '모래실' 에 비정하기도 하지만, 그 원본인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비망기>(備忘記)대로 '노래산' (Noraisan)으로 보 는 것이 옳다. 언제부터 노래산(해발 743m) 기슭에 신자 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체 포된 순교자들의 행적에서 미루어 볼 때 1801년의 신유 박해(辛酉迫害)를 전후하여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의 신자들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서로 만나 은둔하기에 적당한 이곳에 새 교우촌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이곳의 지도자격이었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 · 성 운(聖云, 요셉) 형제는 본래 충남 덕산의 별암(현 예산군 고덕면 上長里) 출신으로, 훗날 전라도 고산의 저구리골 (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積梧里)로 이주하여 살던 중 신유박 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노래산으로 이주하였다. 또 교우촌이 이룩된 뒤에는 경상도 출신으로 새로 입교 한 신자들이 상당수 이주해 옴으로써 전형적인 박해 시 대의 교우촌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교우들간의 합심 노력으로 흉년이 들 경우에도 큰 곤란을 겪지 않게 되었다. 이곳 교우촌이 포졸들에게 발각된 것은 전지수라는 배 교자의 밀고 때문이었다. 그는 1814년에 큰 흉년이 들 자 경상도 여러 곳의 교우촌을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던 중 신자들을 밀고하여 더 큰 것을 얻을 작정으로 1815 년 2월 22일 부활 대축일에 포졸들을 이끌고 교우촌의 신자들을 습격하였다. 이때 노래산 교우촌의 신자들이 제일 먼저 체포되었고, 이어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 군 포산면 葡山洞) 교우촌, 영양의 곧은정(현 경북 영양군 일 월면 소재)과 우련밭(雨蓮田, 현 봉화군 재산면 葛山里) 교 우촌의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니, 이것이 곧 을해박해(乙 亥迫害)이다. 노래산 교우촌에서 체포된 신자들은 40명 으로 모두 청송의 상부 관청인 경주 진영으로 압송되었 는데, 이 중 26명이 배교하고 석방되거나 옥사하였으며, 14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들 14명은 고성 대 · 성운 형제를 비롯하여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과 최성열(崔性悅, 바르바라) 부부, 그들의 사위인 최봉한 (崔奉漢, 프란치스코), 안치룡(安致龍), 김화준(金若古 排, 야고보), 이선복(李善福), 김진성(金振聲), 방만동 (方萬東), 김악지(金岳只), 신광채(申光采), 손두동(孫 斗同), 김윤덕(金允德, 아가다 막달레나) 등이었다. 이 중에서 서석봉 · 최봉한 · 안치룡 · 김진성 · 방만동 · 김 악지 · 신광채 · 김윤덕 등 8명은 훗날 옥사하였고, 이선 복 · 손두동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며, 고성대 · 성운 형 제와 최성열 · 김화준 등 4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 진보 · 영양에서 체포되었던 신자들과 함께 1816년 12 월 26일(음 11월 8일) 대구 감영(혹은 觀德堂)에서 참수형 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 이들 시신은 감사의 명령으 로 형장 근처에 매장되었다가 신자들에 의해 이듬해 3월 2일 다른 곳으로 옮겨져 무덤 네 개에 안장되었으나, 현 재 그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 고성대와 고성운 ; 을해박해)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中/ 《日省錄》/ 《純祖實錄》/ 성기숙 편, 《한국의 성지》, 도서출판 크리스찬, 1988/ 마백락, 《경상도 교회의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