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시아누스 (200?~?)

Nowati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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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중기 이후 서방 교회에서 일어난 노바시아누스 이교의 원인이 된 인물로, 그의 반대자들의 기록을 통해 서 적게나마 그의 생애에 대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 스인들은 그의 이름을 노바투스(Novatus)라고 하지만 분 명 노바시아누스일 것이며, 약 200년경에 태어났고 그 가 사용한 말로 볼 때 라틴어로 교육받았을 것으로 추정 된다. 역사가인 필로스토르지우스(Philostorgius)의 증언 (《교회사》 8, 15)에 따르면, 프리지아(Phrygia) 출신이지만 확실하지 않다. 고르넬리오(Cornelius) 교황이 안티오키 아의 주교인 파비오(Fabius)에게 보낸 서한에 의하면 노 바시아누스는 중병에 걸렸을 때 세례를 받았을 뿐 결코 견진성사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따라서 견진성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주교의 인호를 받을 수 있느냐 는 이의를 제기하였다(에우세비오 6, 43, 14-15). 에우세비오는 계속해서 성직자와 평신도 등 많은 사람 들이 반대했지만 그의 주교가 노바시아누스에게 서품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동 6, 43, 17). 비록 고르넬리오 교황이 "그의 교활함과 이중성, 위증과 허위, 그의 비사 교성과 늑대 같은 교우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고, 더 나 아가서는 "믿을 수 없고 악의에 찬 야생 동물"(동 6, 43, 6)이라고 악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바시아누스가 파비아노(Fabianus) 교황의 순교 이후로 로마의 성직자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에는 분명 나름대로 존경을 받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고르넬리오 교황이 파비오에게 보낸 서한의 진위성이 문 제가 된다. 고르넬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로마의 주교좌가 공석이었을 때 배교자들(lapsi)에 대한 문제로 카르타고의 주교인 치프리아노(Cyprianus)와 로마 교회 가 주고받은 서한 중 두 편은 발신인이 "로마에 있는 사 제들과 부제들"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서한은 노바시 아누스가 집필한 것이며, 이는 치프리아노의 증언을 통 하여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노바시아누스가 당대 에 갖고 있었던 권위를 알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는 데치우스(Decius)였다. 그는 제국의 종교적 기반이 국가 예식을 거부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를 근절하고 모든 제국 국민을 당시의 국가 종교로 복귀시키고자 하는 법을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249년 12월부터 체포 선풍이 불기 시작하여 250년 1월 20일에는 파비아노 교황이 로마에서 순교하기에 이른 다. 250년 중엽의 한 포고는 제국의 전 주민들이 전염병 을 막기 위하여 제신(諸神)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제헌 집행을 감시하고 제헌 의무를 다한 자 에게 제헌 증명서를 발부할 특별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 배교하는 이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실제로 제물을 바친 사람도 있었고, 제신과 황제의 화상 앞에 분향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실제로 제물을 바치지 않고 제헌위원회에 뇌물을 주고 증명서를 얻어낸 사람들과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이름을 제헌자 명부에 오르게 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 모두는 진실한 신자 들에게는 배교자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배교자들을 교회 에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가 교회 내에서 논쟁 거리가 되었다. 치프리아노의 <서한> 30은 박해 당시에 배교한 이 들에 대해 교회의 규율이 준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카 르타고의 주교인 치프리아노와 로마 교회가 일치하고 있 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이 서한은 죽을 위험에 처한 배 교자를 제외하고는 새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배교자들 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유보하자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251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된 고르넬리오가 배교자들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 노바시아누스는 지금까지의 입장 을 바꾸어 배교자들은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는 배타적인 엄격주의자로 돌변하 였다. 노바시아누스는 자신이 로마의 주교로 선출될 것 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바시아누스는 이탈리아 작은 지역의 3 명의 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아 대립 교황으로 자리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에우세비오는 자신의 《교회사》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사악한 자의 파렴치한 행위에 너무나도 단순한 그들이(3 명의 주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와 같은 무질서한 사람 에 의해 감금되어 10시경 그들이 술에 취하고 그 후유증 으로 몸이 좋지 않을 때, 그는 그들에게 형식적이고 가시 적인 안수를 통하여 강제적으로 자신을 주교로 축성하게 끔 하였다. 하지만 이 직무는 교활한 배신 행위에 의해 그에게 취해진 것이지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돌아올 것은 아니었다" (6, 43, 9). 노바시아누스는 주교가 된 후 다른 주교에게 자신이 주교 서품을 받았다는 서한을 보냈으며, 이로써 고르넬 리오 교황을 반대하는 이교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 다. 하지만 노바시아누스가 이교적 그룹을 형성한 것은 교의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에서 연유한 것이 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디오니시오(Dionysius)가 노바시아누스에게 교회로 다시 되돌아올 것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지만 허사였다. 노바시아누스는 모든 속죄 규정에 있어 엄격한 의견을 내세웠고, 고르넬리 오 교황의 가톨릭 교회를 신앙적으로 이완되고 배신한 교회라고 비난하였다. 에우세비오의 증언에 의하면 노바시아누스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깨끗한 사람'(καθαροι, puri)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가톨릭 교회의 세례를 부정하면서 자신들 안에서 재세례를 베풀었다. 결국 노바시아누스파는 251년 60명의 주교들 이 참석한 로마 교회 회의에서 단죄되었지만, 서방 교회에서는 스페인까지 그리고 동방 교회에서는 시리아까지 그 세력을 떨쳤으며 수 세기 동안 이어졌다. 스페인, 로마 그리고 아프리카 등지에는 노바시아누스파 공동체가 자신들의 주교와 함께 존재하였다. 동방 교회에서는 무엇보다도 몬타누스파(Montanists)가 존재했던 프리지아에 서 가장 세력이 강했는데, 큰 도시에는 거의 노바시아누 스파 주교들이 있을 정도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노바시아누스파가 점차적으로 교회에 복종하였고 노바시아누스파 주교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와 함께 교회로 돌아왔 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에울로지오(Eulogius)가 노바시아누스파를 회두시키기 위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교회와 제국 사이의 공동 협력이 그들을 사라지 게 하였는데, 7세기 말엽에는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되었 다.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도 다시 가톨릭 교회 로 돌아온 노바시아누스파에 대해 가톨릭 교회의 교의를 준수할 것을 서면으로 고백하도록 하고 있다. 노바시아누스의 후기 생애에 관해서는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내용을 종합해 보면, 발 레리아누스(Valerianus, 253~260) 황제 또는 갈루스(Gallus, 260~268) 황제 재위시의 박해 때 생존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교회사가인 소크라테스(Socrates) 자신의 저서인 《교회사》 4장 28절에서 노바시아누스가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에울로지오는 6세기 말에 노바시아누스의 순교 행적을 읽었 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이것은 모두 역사적 근거가 희박 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이다. 하지만 예로니 모의 순교록에 의하면, 노바시아누스란 인물이 6월 29 일의 로마 순교자 명단에 들어가 있다. 더구나 1932년 여름 로마의 성 라우렌시오 성당 근처에서 발견된 화려 하게 장식된 한 묘지에서 "지극히 복되신 순교자 노바시 아누스를 (기념하여) 부제 가우덴시오" (Novatiano Beatissimo Martyri Gaudentius Diac.)라는 붉은 색으로 쓰여진 비 문이 발견되었다. 이는 분명 노바시아누스란 순교자를 기념하여 가우덴시오 부제가 마련한 무덤일 것이다. 여 기서 노바시아누스란 인물이 대립 교황이었던 노바시아 누스일 수도 있지만 주교란 칭호가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다른 노바시아누스일 경우도 가능하다. 개인적인 감정에서 이교자가 된 노바시아누스는 분명 열정적인 인물이었으며 뛰어난 재능과 학식을 지닌 인물 이었다. 스토아 철학에 정통했으며 수사학을 가르치기도 하였고, 문장 구사력은 베르질리우스(Vergilius)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반대자들의 의견이 다 올바른 것이 라면 왜 파비아노 교황은 노바시아누스의 서품을 묵인하 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울러 <노바시아누스에게> (Ad Novatianum)란 논문의 저자는 노바시아누스를 일컬 어 만약 그가 교회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귀중한 그릇' 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심지어 그의 반대자인 고르 넬리오 교황 역시 안티오키아의 주교인 파비오에게 보낸 서한에서 노바시아누스를 가리켜 '뛰어난 인물' , '매우 출중한 사람' , '교의의 대가요 교회 규율의 보호자' , '복음의 수호자' 등으로 부르고 있다. 또한 그는 노바시아 누스가 '이교 철학에 매료된 사람' 이라고 표현하고 있 다. 이는 노바시아누스가 스토아 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 았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노바시아누스는 로마에서 라틴어로 자신의 저서를 낸 첫 인물이며, 로마 신학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신중하면서도 세련된 라틴어와 고급 문체의 문장과 동시에 간결하고도 명쾌한 문장을 구사하였다. 〔저 서〕 노바시아누스의 저서는 단지 그의 유창한 문장 구사만이 아니라, 그의 훌륭한 신학과 철학의 교육적 바탕을 보여준다. 예로니모의 《명인록》 70에는 노바시아누스가 다음의 작품들을 저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 다. 즉 《파스카론》, 《안식일론》, 《할례에 대하여》, 《사제 직에 대하여》, 《기도론》, 《유대인의 음식에 관하여》(De cibis Iudaicis), 《성삼론》(De Trinitate) 등이다. 이 중 《성삼론》이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성삼론》 : 250년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로마에서 라틴어로 쓰여진 첫번째 작품으로 로마 학파가 남긴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예로니모는 이 작품 을 가리켜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의 모방이라고 하였 다. 테르툴리아노의 《반프락세아론》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산문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 및 이레네오, 히폴리토, 테르툴리아노 등에 의 해 전개된 성삼론의 고전적 가르침을 집대성하고 있다. 아울러 이 작품에서 사용되고 있는 그리스도론에 관한 용어는 후대에도 거의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작품 속에 성삼(Trinitas)이라는 표현은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로마의 옛 신경에 기초를 두고 사도 신경의 세 큰 줄거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성삼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드러난다. 31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네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이 작품은 그노시스주의에 반대하여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전능하신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과 그것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가현설(docetism), 에비오니즘(ebionitism), 양자설(adoptianism), 양상설(modalism) 성부 수난설(patripassianism) 등을 배격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과 그리스도의 정배인 교회에 베푼 은혜와 작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신적 일치성과 특별히 성자의 신성이 하느님의 본체적 신성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다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의 영원한 관계를 밝히고 있다. 《유대인의 음식에 관하여》 : 이 작품에서 노바시아누스는 로마서 7장 14절을 기초로 하여 성서가 지닌 영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유대인들의 음 식 규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목 교서의 형태로 쓰여진 이 작품은 로마에 있는 노바시아누스파 공동체에 보낸 것으로 우상에 바친 제물을 먹지말 것과, 세네카(Seneca)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아침에 술을 마시는 것을 금하고 있다. 《경기 관람》(De spectaculis) : 이 작품에서 노바시아누스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쓴 테르툴리아노와 마찬가지로 당시 잔인한 풍습의 하나인 경기 관람을 금하고 있다. 이러한 유의 경기 관람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우주 만물의 조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즐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결에 관하여》(De Bono Pudicitiae) : 이 작품에서 노바시아누스는 신자들 모두가 복음의 가르침에 항구히 머물러 있기를 권고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정결을 강조하면서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성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임을 상기시키면서 무례와 방종, 무절제 등을 피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정결이 세 단계로서 동정과 절제 그리고 결혼 약속에 대한 신의라고 하였다. 〔신학 사상〕 노바시아누스는 유스티노(Justinus)를 비롯한 선임 교부들의 로고스(logos) 사상에서 시작하여 로고스가 언제나 성부와 함께하시며 창조의 과정을 통해 외적으로 나타난다는 단계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노바시아누스는 모나르카아니즙(monarchianism)이 지닌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인 견해, 즉 양자설적 견해와 양상설 또는 성부 수난설을 일치 조화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신적 일치성을 강조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 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히폴리토와 테르툴리아노가 사 용한 성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또한 종속설에 해당되는 이원설을 강력히 거부하면서 이론을 전개 하여 로고스의 특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즉 로고스 는 성부의 위격적 현현(顯現)이며 잠정적 특성이고, 바다와 파도의 관계처럼 이 둘은 언제나 일치하기 마련이 라는 것이다. 노바시아누스는 그리스도론과 삼위 일체론 교의 사이에 용어적 연결을 강화했고, 그리스도의 위 격' 에 대해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삼위 일체론적 관점에서 행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노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렇게 하는 데 있어 여전히 성부와 성자 사이에 구별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테르툴리아노와 마찬가지로 심지 어는 이레네오와 히폴리토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을 구별하여 '사람의 아들' 과 '하느님의 아들'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본성의 이원 성과 주체의 일치 모두를 표현하기 위해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 (Verbum Dei incarnatum)라는 정식을 사용하거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신 사람’ (qua homo ex Abraham)이요, '그 아브라함 이전에 계신 하느님' (qua Deus ante ipsum Abraham)이라는 정식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한 분이요 동일하신 분' 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영혼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바시아누스의 그리스도론은 주목할 만한 혼합을 드러내지만, 이 속에서 히폴리토에 의해 제시된 옛 로마의 로고스-육 그리스 도론(logos-sarx christology)이 여전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도 후대의 라틴 신학에서 특징 적인 말씀-인간 그리스도론(verbum-homo christology)의 자취가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에 관한 노바시아누스의 설명은 짧고 부족하다. 단지 성령과 교회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성령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 참고문헌  August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90)/ Aloys Grillmeier, Christ in Christian Tradition 1, London & Oxford, A.R. Mowbrays & Co. Ltd., 2nd, revised ed., 1975/ Berthold Altaner, Patrology, New York, 2nd ed., 1960/ Johannes Quasten, Patrology, vol. 2, Westminster, The Newman Press, 1953/ H.R. Percival, The Seven Ecumenical Councils, 《NPNF》 2, 1977/ P.H. Weyer, Novatian and Novatianism, 《NCE》 10.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