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빌리, 로베르토 (1577~1656)
Nobili, Roberto 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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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로베르토 노빌리.
남부 인도의 선교사로서, '적응 방식(accommodatio) 선교' 의 선구자. 1577년 9월 로마에서, 교황청 근위군의 장군인 피에르 프란체스코 데 노빌리(Pier Francesco de Nobili) 백작과 클라리체 치올리(CIarice Cioli) 사이에서 태어나 1656년 1월 16일 인도의 밀라포어(Mylapore)에서 사망하였다. 로마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노빌리는, 그곳에서 예수회의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밝혔지만 1593년 부친이 사망하자, 후견인이며 사촌인 프란체스 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 추기경은 그의 결심을 단념 시키기 위해서 압력을 가하였다. 로마에서 빠져 나와 노체라(Nocera) 공작 부인의 보호를 받은 노빌리는 공작 부인의 집에서 공부를 마친 후, 1596년 가족들의 마지못 한 동의 속에서 나폴리에 있는 예수회 수련원으로 들어 가게 되었다. 1600년에는 신학 공부를 위해 로마로 다시 돌아왔으며 3년 뒤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선교 활동〕 1604년 노빌리는 인도를 향해 떠났다. 리스본으로부터 포르투갈의 큰 범선을 타고 항해한 그는, 다른 비포르투갈인 선교사들처럼 포르투갈 왕의 신하로 간주되었다. 그는 왕의 교회 수호 특권을 빌려 인도 복음화에 대한 책임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모잠비크 근처에 서 배가 난파되는 고난을 겪은 후, 1605년 5월 20일 고아에 도착한 그는, 피셔리 코스트(Fishery Coast)에서 타밀어를 배웠다. 1606년 그의 지구장 알베르토 라에르치오(Alberto Laerzio)는 그를 중요한 내륙 도시의 하나인 마두라(Madura)로 보냈는데, 이것이 새로운 선교의 시작이 었다. 그 이전까지는 포르투갈 해병들이 선교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해안가에 사는 인도인들에게만 복음이 전파되었었다. 노빌리보다 나이가 많았던 마두라 시절의 동료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원 곤살로 페르난데즈(Goncalo Fernandez)였다. 그는 16세기 내내 인도 선교에 적용되었던 방법들을 그대로 따랐다. 개종한 인도인들에게 포르투갈 정복자들과 똑같은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식으로 자신들의 성(姓)을 바꾸어야 했다. 개종은 실제로 문화적 지배와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힌두교인들의 분노를 사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포르투갈인들과 함께 파랑기(Parangis, 천한 외국인)로 여겨졌으며 인도 사회에서 소외되었다. 파랑기들은 쇠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구두를 신었으므로(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는 것은 불경한 것으로 여겨졌다) 더욱 멸시를 받았다. 노빌리는 이러한 방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으며,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서 했듯이, 스스로 인 도의 관습에 맞추기로 결정하였다. 노빌리는 페르난데즈 에게 카스트 제도에 맞서기보다는 그 틀 안에서 활동하자고 설득하였지만 실패한 후, 그와 생활을 따로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사프란 옷을 입고 나무로 된 나막신을 신었으며, 산야시(sanyasi, 힌두교의 성자)처럼 채식을 하였다. 그는 이마에 사각형 모양을 그려서 자신이 선생이라는 것을 표시하였다. 마두라 사람들이 그가 백작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통치자 계급, 혹은 라자(Raja)로 대접하였다. 그래서 노빌리는 라자 산야시 로서 높은 계급의 사람들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고 그 들을 자유롭게 대할 수 있었다. 〔시바다르마의 개종〕 노빌리의 이와 같은 방법은 성공 적이었다. 첫 18개월 동안 그는 마두라 사람 50명을 개종시켰다. 그가 처음 개종시킨 사람은 시바(Siva) 신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이었는데, 노빌리는 그에게 자신의 관구장 이름을 따서 알베르토라는 세례명을 붙여 주었 다. 1608년 노빌리는 브라만 계급의 산스크리트어 학자 인 시바다르마(Sivadarma)와 친해졌다. 그는 마두라에 사는 대부분의 브라만 계급 사람들이 믿고 있던 비이원론적 베단타(nondualistic vedanta) 종파로 노빌리를 개종시키 려고 하였다. 노빌리는 시바다르마를 통해서 산스크리트어, 베다(Veda), 베단타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은 첫 유럽인이 되었다. 반면 노빌리의 성공에 대해 질투를 느낀 다른 브라만 계급 사람들은 파랑기라는 이유로 그를 추방하려고 하였으나, 시바다르마는 800명이 모인 브라만 회의에서 노빌리를 변호하였다. 그는 노빌리가 비록 피부색은 희지만 학식이 높은 산야시이며 다른 파랑기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설명하였다. 그의 변호로 노 빌리는 계속 그곳에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으며, 1609년에는 시바다르마를 개종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세 례는 중대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시바다르마가 브라만을 특징짓는 의상, 즉 왼쪽 어깨에서부터 가슴까지 삼중으로 걸치는 흰 무명 옷과 하나로 땋아 묶은 머리인 구두미(Kudumi)를 버려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브라만들이 사는 해안에서 선교사들은 개종자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였고, 그로 인해 다른 브라만들로부터 추방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노빌리는 마누(Manu) 법전과, 전통 의상과 구두미의 역사를 연구하여 종교적 상징과 문명적 상징을 구별지었다. 의상과 구두미는 후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의 교구장인 크랑가노어(Cranganore)의 로스(Ros) 대주교의 승인으로 그는 전통 의상 과 구두미를 하고 있는 시바다르마에게 1609년 성신 강림 대축일 때 세례를 주었다. 〔적응 방식에 대한 논의〕 페르난데즈는, 이마의 표시나 목욕 의식 같은 인도의 관습을 용인하는 점을 포함해서, 노빌리의 선교 방법에 대해 불평을 하였다. 1610년 고아와 말라바르(Malabar) 관구의 시찰자로 임명된 니콜 라우 피멘타(Nicolau Pimenta)는 노빌리를 견책하였으며, 이를 즉시 로마에 호소하였다. 예수회 총장 클라우디우스 아쿠아비바(Cladius Acquaviva)는 인도로 노빌리의 방법을 수정하도록 제안하는 편지를 썼다. 특히 브라만 개종자들은 전통 의상을 벗어야 하며, "선교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다른 어떠한 변화도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1618년 2월 18일 교황 바오로 5세는 사(Sa) 의 대주교와 고아의 종교 재판관에게 노빌리를 출석시켜 공개 청문회를 열것과, 사건 전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노빌리가 이 재판에 출두 한 후 첫번째 재판관은 그의 방법에 반대표를 던졌으며, 두번째 재판관은 찬성하였다. 나머지 20명의 신학자와 인도인 사제들 중에서 겨우 네 명만이 지지하였다. 그러나 보고서가 유럽으로 보내진 후, 포르투갈의 대재판관과 새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모두 1623년 1월 31일 자 법령으로 노빌리의 방법을 승인했으며, 브라만 개종 자들은 전통 의상과 구두미를 유지해도 좋다고 결정되었다. 노빌리에 대한 반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세례를 주는 일을 금지당하였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저술로 보냈다. 그 대부분은 타밀어로 쓴 것들이었는데,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영적 가르침》(Gnanopadesam)은 실질적으로 신학 대전이었다. 1623년 그는 다시 자유롭게 세례를 줄 수 있게 되었고, 그때부터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남부 인도를 두루 여행하였다. 1640년 포르투갈과 마두라의 나약(Nayak) 사이에 벌어진 전쟁 때문에 노빌리와 동료 선교사들은 체포되어 1년 가까이 감금되었다. 1654년 시력을 잃은 노빌리는 은퇴하여 마두라로 돌아갔다. 노빌리가 처음 남부 인도의 내륙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그리스도교인이 한 사람도 없었으나, 그가 떠날 때에는 4,183명이나 되었다. 노빌리는 밀라포어 외곽에 있는 오두막에서 여전히 사프론 옷을 입고 채식을 하면서 자기 저서의 개정판을 구술하며 만년을 보냈다. ※ 참고문헌 V. Cronin, A Pearl to India : The Life of Roberto de Nobili, New York, 1859/É. Amann, 《DTC》 9, pp. 1704~1745/ P. Dahmen, Robert de Nobili, Münster, 1924/V. Cronin, 《NCE》 10, pp. 477~479. 〔편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