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제도

奴隸制度

〔라〕servitus(servitium) · 〔영〕sla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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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를 풀어 주는 로마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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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를 풀어 주는 로마 귀족.


농업 문명의 출현과 함께 발생한 노예 제도는 19세기 에 이르러서도 대부분의 모든 대륙, 모든 국가에서 가정 경제 및 농업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인간 을 상품 시장에 공급하는 것을 기초로 한 노예 제도는 그 원활한 공급을 위해서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의 광 범위한 인구 이동이라는 계획을 수립해야만 하였다. 결 국 고대에는 지중해 연안에서, 그리고 신대륙의 발견과 식민지 농업을 개발한 이후에는 대서양 연안 국가를 중 심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노예 제도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발전되었다. 하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하인의 기능과 대치될 수 있는 가 정 노예였다. 그러나 이에 비해 보다 심각한 형태는 인간 의 상태가 동물의 상태로까지 하락된 노예 제도이다. 이 제도에서 인간은 소나 말처럼 주인에게 예속되었고 노예 의 생산성이 줄어들 경우, 대여 혹은 양도되었다. 고대에 서 한 소유자가 많은 노예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에는 신 생아 노예들은 주인의 경제적 형편에 위협을 주는 존재 로 등장하였으며, 따라서 그 운명도 위태로웠다. 그러나 특히 신대륙에서 집약적 노예 노동을 필요로 하는 상태 에서는 그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주인들은 노예의 재 생산을 장려하였으며 신생아들의 노예화를 위해, 15세 기의 경우 여자 노예는 매년 한 아이를 낳아야만 하였다. 또한 보다 강한 노동력을 가진 노예를 얻기 위해 우생학 적 방법을 통해 종족 개량에 몰두하였다. 결국 노예 제도가 발전된 것은 근본적으로 인력을 필 요로 하는 산업, 예를 들어 광대한 대지주의 토지(latifundium)나 미국의 대규모 농장을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런 산업들이 노예 제도를 기초로 하여 번창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의 경제학자이 며 사회학자였던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는 "우리는 모든 종족이 우리를 위해 죽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해 각 대륙들의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노예 제도가 아무런 저항 없이 실시되지 는 않았다. 각 시대를 통해 많은 종교인들과 도덕가들은 노예 제도의 비인도성과 부도덕성을 지적하였다. 1685 년에 제정된 유명한 법령인 '흑인법' 은 노예에게 최초의 법적 보호 장치를 마련하여 주었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 았을 때 노예 제도의 개선에 전혀 영향을 주었을 것 같지 는 않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 법령의 몇 개 조항은 확실히 가톨릭 성직자들에 의해 고무된 것으 로, 노예 가족이 비록 각각 분리되어 팔릴 수 있다 해도 그 가족에 법적인 존재 가치를 부여하도록 하였다. 18세 기에 들어오면서 노예 제도에 관한 많은 문제들이 제기 되었다. 즉 인간과 동물의 진정한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언어 혹은 피부 색깔인가, 아니면 하느님은 흑인을 새들 이나 파충류와 동시에 창조하였는가, 아니면 다른 인간 과 마찬가지로 6일째에 창조하였는가? 이런 질문들은 노예 제도의 경제적 중요성, 그것이 제기하는 철학적 · 도덕적 문제들의 중요함 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답하 려고 노력했던 질문들이었다. 〔역 사〕 그리스 · 로마 시대 : 고대 두 개의 큰 문명권, 즉 동로마 제국 영역권과 그리스 · 이탈리아 · 로마 도시 영역권 사이에는 명백히 대조되는 노예 제도가 존재하였 다. 전자에서 노예 제도는 중세 또는 근대까지도 지속적 으로 존재하였는데, 동일한 민족 집단 내에서 같은 인종 의 사람들은 자유인도 될 수 있었고 노예도 될 수 있었 다. 하지만 후자에서는 같은 인종, 같은 언어를 가진 노 예는 항상 스캔들로 간주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고대 그 리스 · 로마에서의 노예 제도는 다른 나라와는 아주 다른 형태를 갖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 로마에서는 처음부터 '노예 =물건' 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지는 않았다. 이는 훨 씬 늦게 나타나는 개념이었다. 대신 기원전 3세기경부터 '노예=가축' 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외국인, 포로, 전쟁 죄수를 중심으로 한 노예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솔 로몬 이전의 아테네나 기원전 5~6세기의 로마에서는 부채를 탕감하기 위한 노예라는 형태가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3세기경 도시(polis)와 함께, 시민과 자 유는 불가분의 것이라는 이념 위에 세워진 정부 형태가 발전되었다. 이런 이념 위에서는 빚 때문에 노예로 전락 한 사람들도 법적으로 같은 시민이었으며, 어느 순간 정 치적 자유를 획득하고 정치적 공동체의 필요 불가결한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또한 3세기 말과 4세기 초에 걸쳐 나타나는 반(半)노예 혹은 반(半)자유인의 형태는 독특 한 것이었다. 로마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위해 먼저 그들이 재산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고대 그리스 테쌀리아의 페네스트(Péné-stes)나 스파르타의 노예(農奴, hilotes) 는 그 상황이 자유인과 노예의 중간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력은 임금 제도를 기초로 한 자유인이나 해적질과 전쟁을 통해 획득되는 노예 집단에 의거해야만 했다. 사실상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노예 제도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인과 노예 사이의 임무의 분할이나 노동의 분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주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노예에게는 실행해야 할 일과 의무가 있으며, 자유인은 노예 노동을 근거로 원칙적으로 시민으로서의 삶에 완전히 할애할 수 있는 여가가 생긴다고 지적하였다. 생산 주기의 토대 혹은 하부 구조인 노예 계급이 존재 한다고 하는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정당화하는 이 철학자 들의 이론은 실제로 유토피아적인 것에 불과하다. 즉 이 이론은 노예의 노동의 기초로 여가가 있는 자유인이 도 시 운영에 그 모든 시간을 헌신해야 하는 것이 시민의 의 무라는 관점에 토대를 둔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어느 순 간에도 이러한 관점은 실제와 결부될 수 없었다. 예를 들 어 대다수의 아테네 시민들은 여가를 즐기기보다는 생존 을 위하여 여러 형태의 노동을 해야만 하였다. 이는 모든 시민이 곧 부유한 계층은 아니며, 시민이지만 빈민인 사 람들이 항상 존재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또한 노예들은 주인이 거주하는 지역 바깥에 살면서 주인에게 수입원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몫으로 소규모 생업에 종사하였다. 이처럼 그리스에서는 생존을 위해 자유인과 노예는 나름대로 소규모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근본적 으로 법적 상황이 달랐으며 이에 의해 철저히 분리되었 기 때문에, 자유인과 노예 사이에는 연대성은 물론 경쟁 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각종 전쟁과 소요가 노예들에게 그들의 상태와 단절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 을 때, 그것은 노예들이 추구하는 존재 수단의 개선은 결 코 아니었다. 로마에서의 상황도 거의 동일하였다. 로마에서는 본래 외국인과 노예는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였다. 4세기부터 로마에는 해방 노예 제도가 있었는데 이들은 완전한 권 리를 지닌 시민이었다. 물론 모든 기능이 완전히 개방된 것은 아니었으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었 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예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외국인을 포로로 삼아야만 했다. 로마에서 노예의 숫자 는 기원전 1세기와 서기 1세기 사이에 절정에 달하였는 데, 이는 아프리카, 그리스, 오리엔트, 나아가 골, 게르 만 또는 발칸 지방에서의 정복 전쟁에 기인한 것이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목축이나 투기적인 단작(單作)이 대토 지의 확장과 함께 성행하였기 때문에, 많은 수의 외국인 노예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 외국인 노예들의 비참한 상황은 결국 많은 노예 봉 기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즉 그들은 시칠리 아에서 기원전 136~133년, 106년 또 이탈리아에서는 기원전 194년부터 73년에 이르기까지 끔찍한 스파르타 쿠스 전쟁과 같은 노예 봉기를 야기하였다. 이 봉기는 양 면적 성격을 갖는다. 즉 잔인한 주인에 대한 증오, 집단 적 노동 체제 혹은 치욕적인 검투사 역할에 불만을 품은 봉기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려는 생 각밖에 없는 외국 노예들의 봉기였다. 그러나 이 봉기들 은 항상 실패하였다. 그 원인은 실로 다양하다. 즉 인구 밀도가 조밀하지 않은 농업 구조 속에서의 조직의 어려 움, 명령 체계나 무기의 저급함, 또한 한 지도자나 정치 적 계획을 중심으로 한 결집력의 결여 등이다. 보다 큰 원인은 한 지도자나 선동자의 이념이 다른 노예들에게 침투되어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분노와 좌절에 의해 봉기했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에 대한 진압이 무자비하였음은 말할 필 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 노 예 소유는 국가에 의해 전적으로 보장된 권리처럼 간주 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 : 노예 제도는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도교 국가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에서도 거의 중단됨이 없이 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중세에는 교회와 영주들에 의해 토지를 분배받은 농노(農奴)들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지 주에게 각종 세금과 부역을 바쳐야 할 의무가 있기는 하 였으나,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노예와는 다른 의미 였다. 중세의 노예 제도는 프랑스 역사가들에 의해 아지 엔토(asiento)로 지칭된 노예 무역에 의해 대표된다. 이 말은 원래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 내에서 흑인 노예 교역의 독점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16~18세기의 스페인 공법상 그 의미는 보다 폭 넓은 것이었다. 즉 아 지엔토는 왕권과 한 개인 혹은 한 회사와의 계약이며, 그 것에 의해 국가는 노예 매매업자에게 일정한 특권을 부 여하였다. 국가는 상업적 독점, 각종 세금의 면제와 함께 노예 수입 허가권을 파는 대가로 사전 도급 또는 수익금을 분배받을 수 있었다. 또한 국가에 이익이 되는 혹은 정치적으로 유용한 어떤 회사를 후원하는 방법을 통해 공익을 취하였다. 스페인의 아지엔토들은 아메리카 식민지 내에서 중요한 경제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각종 간접세의 징수, 노예 조약, 각종 광물 및 목재의 수입, 제조업 등에 종사했을 뿐만 아니라 누에, 염색용 식물 또는 향료 나무 등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재배하려고 시도하였다. 16세기 초부터 스페인 국왕은 특정인들에게 노예 수입 허가권을 양도 혹은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세비야(Sevilla)는 허가권 이 거래되는 대규모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주된 노예 공급업자는 아프리카 식민지 대리점을 운영하였던 포르투갈인들이었다. 158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의 담합(談合) 이후 그들은 노예 교역에서 우위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였다. 이후 스페인은 서인도 회사를 설치하여 1년에 4천 내지 5천 명의 노예 를 수입하였다. 밀수입에 의해 들여온 노예의 숫자는 고 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세기 동안 아메리카 대륙으로 부터 적어도 15만 명의 흑인 노예들이 합법적으로 수입 되었다. 그 후 교역의 주권은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을 거 쳐 1713년 영국의 남양회사(South Sea co.)에 위임되었 다. 이 회사는 다양한 특권을 누리면서 30년 간 144,000 명의 흑인 노예를 수입하였다. 그러나 이 노예 교역은 18세기에 들어 스페인 내 토착인과 혼혈 인구의 성장 등 의 이유로 중요성을 많이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예 가격도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결국 1817년 스페인의 동의로 노예 교역을 폐지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되어 3세 기에 걸친 근대 최초의 상업적 자본주의 특권의 상징이 었던 아지엔토의 역사는 끝나게 되었다. 〔폐 지〕 19세기 초부터 흑인 노예 무역에 제재를 가하 려는 노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825년 영국의 월리 엄 피트(William Pitt, 윌버포스(Wilberforce), 카닝(Canning) 등에 의해 "양 세계에서의 시민적, 종교적 자유"가 발표 된 후 영국은 반(反)노예제 운동의 선두에 섰다. 이후 33년 간 영국은 노예 제도의 폐지와 흑인 노예 밀수입에 제재를 가하기 위해 적어도 28개 이상의 조약에 서명을 하였다. 이에 따라 다른 유럽 국가들은 점진적으로 흑인 노예 무역을 포기하였으며, 각 식민지에서 노예 해방을 실시하였다. 포르투갈은 1856년 브라질에서 처음으로 노예를 해방하였고, 네덜란드도 1860년 인도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하였다. 남북전쟁을 통한 미국에서의 노예 제도 폐지는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노예 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니다. 스페인은 최후까지 노예 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공식적 회의는 국제적으로 전개 되어, 1862년의 워싱턴 협약, 1876년의 브뤼셀 회의, 1885년의 베를린 회의 국제 강령, 그리고 1890년 브뤼 셀 회의 등이 개최되었다. 국제 연맹은 규약 22~23항 을 통해 노예 제도를 제재하였으며, 노예제 노동을 폐지 하기를 요구하였다. 또 1924년 노예 제도에 관한 위원 회가 개최되어, 식민지에서의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1926년 노 예 제도에 관련한 협정의 조인을 이끌어 내었다. 마침내 노예 제도 폐지는 1948년 국제 연합(UN)의 '인간 권리 의 보편적 선언' 에 의해 재천명되었다. 〔성서상의 노예 제도〕 구약성서 : 그리스 · 로마 제국 을 비롯한 고대 지중해 지역 국가들에서 노예 제도가 존 재했던 것처럼, 고대 이스라엘 역시 결코 예외는 아니었 다. 그러나 노예 제도가 이스라엘 경제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비록 이스라엘이 농업 국가이기 는 하였지만 광범위한 노예 노동을 이용해야 할 정도로 대규모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고대 이스라엘의 노예 제도는 크 게 두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 다. 그 하나는 노예는 반드시 주변 민족들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즉 주변에 있는 다른 민족, 이스라엘 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자손 및 그들의 친척으로부 터는 노예를 사들일 수 있으나, 동족 중에서 아무리 옹색 하게 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노예처럼 팔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레위 25, 39-47).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 족들 중에서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노예로 전락되는 경 우, 예를 들어 침략에 의한 포로(아모 1, 6. 9),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아모 2, 6 ; 느헤 5, 5. 8), 부모에 의 해 노예로 팔린 여자(출애 21, 7), 훔친 물건의 값을 갚을 수 없는 도둑(출애 22, 2-3), 전쟁에서 획득한 비이스라엘 인 포로들(2역대 28, 8-15)은 비록 노예의 신분이기는 하 였으나 매매될 수 없었다. 이 노예들을 혹사시키는 것은 "야훼께 죄가 되는 일"(2역대 28, 13)로 비록 노예라 하 더라도 정성껏 돌보아 주어야 하였다. 결국 노예를 획득 할 수 있는, 더구나 상속과 매매가 되는 엄격한 의미에서 의 노예 제도를 위해서는 다른 민족과의 전쟁이 불가피 하였다(민수 31, 5-12. 25-47). 두 번째 원칙은 비교적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이집트 땅에서 혹독한 노 예 경험을 한 민족이므로, 설사 노예를 소유했다 하더라 도 혹사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이었다(레위 25, 53 ; 신명 5, 15 ; 15, 15 ; 24, 18). 이에 따라 이스라엘에서는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여러 규정을 두고 있다. 즉 7년 혹은 50년 희년을 기준으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 다는 규정이 그것이다. 히브리인 노예의 경우 7년째가 되면 보상 없이 자유를 주어야만 했으며(출애 21, 2), 여 자 노예는 부인으로 삼든가 아니면 몸값을 치르고 해방 시켜야 했다. 이 경우 절대로 외국인에게 팔 수는 없었 다. 또한 여종을 며느리로 삼을 경우 딸에게 해주는 관습 대로 해야만 했으며, 주인이 본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여종은 몸값을 치르지 않고도 풀려날 수 있었다(출 애 21, 7-11). 동족 중에서 노예로 된 사람은 희년이 되면 원래 자기 가족들에게 되돌려 보내야만 했으며(레위 25, 40-41), 노예 주인이 외국인일 경우 언제나 몸값을 치르 고-직접 혹은 인척들에 의해-풀려 날 수 있었다. 그 럴 능력이 없을 경우 희년이 되면 해방될 수 있었다(레위 25, 47-55). 또한 주인이 노예에게 상해를 입혔을 경우 그 대가로 노예를 풀어 주어야만 하였다(출애 21, 2627). 전쟁에서 포로가 된 여자를 부인으로 삼았을 경우, 그 여자와 이혼을 하려 할 때는 돈을 받고 팔아서는 안되 며 원하는 대로 가게 해야만 한다는 규정도 있었다(신명 21, 10-14). 결국 이러한 규정들은 동족을 보호하려는 것들로 이해 될 수 있으나(신명 24, 7), 보다 안락한 삶을 위해서 필요 한 노예 숫자는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것 역시 기본적 사 고였다. 이렇게 인도주의적으로 보이는 이스라엘의 노예 제도는 사실상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미 언급한 것처럼 노예 숫자를 일정 수준 유지하는 것은 사회 경제적 또 개인적 측면에서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첫째로, 외국인 노예의 경우에서 나타난다. 물 론 외국인 노예 역시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할례 를 받아야 했으며(창세 17, 27), 안식일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출애 20, 10 ; 23, 12 ; 신명 5, 14). 하지만 외국 인 노예는 영구적으로 주인이 소유할 수 있었으며, 자손 들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레위 25, 46). 외국인 노예에게 는 여러 규정을 통해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 능성에서 배제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모순은 희년을 통한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 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대로 히브리 노 예는 7년째 되는 해에 풀려 날 수 있었다. 이때 주의할 점은 그 노예가 처음부터 가족을 데리고 있었을 경우는 그 가족과 함께 해방될 수 있었으나, 노예살이 중 결혼을 했을 때는 예외였다. 즉 노예의 부인과 자식은 주인에게 예속되고 노예와 함께 풀려 날 수는 없었다. 결국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노예의 신분을 유지해야만 하였다(출애 21, 2-6). 세 번 째, 여러 가지 노예 해방 규정이 제대로 이행되었을까 하 는 의구심이다. 또한 노예 주인들이 인도적으로 노예를 대접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쉽게 긍정할 수 없다. 농업 문명의 출현 이래 지속되어 온 노예 제도의 기본은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통해 안락함을 얻는다는 것이며, 최대의 수익성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즉 하위 의 생활 수준을 갖고 노동하는 존재가 있어야만 다른 쪽 에서는 고도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노예를 유지하는 비용조차도 극소화시킬 필요성 이 상존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레미야서 34장에서는 모든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켰다가 며칠 후 다시 잡아들여 노예로 만든 시드 키야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 '같 은 겨레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와서 칠 년이 되거 든 내어 보내라. 육 년 동안 부리고 나서 풀어 주어라' 그랬는데 너희 조상들은 이 말을 귓전으로 흘려 버리고 듣지 않았다"(예레 34, 14)라는 말을 통해 실제로 노예 해방에 관한 규정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구약성서 시대 노예 주인들은 당근과 채찍으로 노 예를 다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빵과 벌과 일을 주면서 노예에게 노동을 시키는 대가로 주인은 편안함을 얻을 수 있었고, 종에게 게으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매질을 필요로 하였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과중한 일을 시키지 않고, 주인 역시 정의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집회 33, 25-33)은 실행하기 어려운 의무였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신약성서 : 구약성서 시대 이래 대부분의 노예들은 가 사(家事)를 전담하였다. 다른 나라들에서 보이는 집약적 노예 노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농업 경제적으 로 그들의 역할은 중요하였다. 이러한 노예 제도는 신약 성서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노예 제도에 대한 언급은 종교적인 측면에서였지 사회적인 것 은 결코 아니었다.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고, 정치적 · 경 제적 · 사회적으로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는 것이 예수의 목적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이 일도록 해주리라. 그들의 몸에 박혔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피가 통하는 마음을 주리라. 그래서 나 의 규정을 따르고 나의 법을 지켜 그대로 실행하도록 만 들겠다. 그제야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 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11, 19-20)는 것이 예수의 육화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기존 의 노예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논 리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 기본적 이념과 원칙을 제시하 였다. 즉 즉각적인 어떤 사회 제도의 폐지가 아닌 그것을 인정하면서 실행하는 방법을 유화시킨 것이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보잘것없는 노예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하는 존재이므로, 그 노예가 주인의 명령대 로 했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워 할 필요는 없었다(루가 17, 7-10). 주인의 명령에 충실하고, 자신의 의무 이행에 확실해야만 하는 것이 노예의 존재였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므로, 그 안에서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그 신분 을 구분한다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1고린 12, 13 ; 갈라 3, 28 ; 골로 3, 11). 이처럼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매 개로 하여 주인과 노예 관계가 설정되어야 한다고 강조 하였다. 노예는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성의를 다하여 주 인에게 복종해야 하며, 주인은 같은 정신으로 노예를 대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에페 6, 5-9 ; 골로 3, 22-4, 1). 더욱 베드로 사도는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뿐 아니라 고약한 주인에게도 복종해야만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1베드 2, 18-20)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도들의 관 점에서는 노예가 주인에게 불복종하는 것은 곧 하느님에 대한 불순함으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노 예는 자유로운 몸이 될 기회가 생기면 그것을 이용하지 만, 일반적으로는 그 신분과 상태를 유지할 것을 권고하 였다(1고린 7, 21-24). 결국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노예 제도에 대한 관점은 기존의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필레몬 에게 말한 것처럼 주인과 노예는 종속적 관계가 아닌 형 제적 사랑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는 자칫하면 많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 한 관점은 노예 제도의 기원에 정식으로 위배되는 것으 로, 노예 제도 자체와 형제적 사랑은 양립할 수 없는 것 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갇혀 있는 사도 바오로 를 시중들 오네시모가 필요하듯 노예 자체를 당시 사회 에서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견지에서,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견지 에서 노예를 형제로 받아들이려는 도덕적 · 종교적 결단 을 요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필레 1, 8-20). 〔가톨릭 교회와 노예 제도〕 교회가 생성되던 시기는 노예 제도가 이미 정치 · 경제 · 사회적 제도로서 존재하 고 있을 때였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초기 교회는 노예 제도의 폐지를 정면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그 시행과 관련한 도덕적 규범만을 제시하였다. 노예 제도 는 다른 사회 구조와 마찬가지로 한 시대나 한 국가의 전 반적 상황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인간 존엄 성이라는 가치에 우위를 두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소 유되고 착취되는 재산으로서의 개체가 되는 것을 반대하 였다. 이러한 점에서 노예 제도는 그 원리상 교회의 가르 침과 상호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노예 제도 자체가 정치 · 경제 · 사회적 산물이라고 말할 때 교회는 그 제도 자체의 폐지 여부보다는 도덕성 문제에 더 큰 관 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 역시 이 제도의 폐지 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교회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한다 면, 노예 제도는 전적으로 인간의 불평등성에 기초하고 있다. 후에 인종 차별주의까지 첨가되는 이 불평등성은 노예의 주인인 기득권 계급의 부(富)를 유지시키기 위해 서는 필수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노예제 사회는 순전 히 이기주의적이며, 노예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부인해야 만 유지될 수 있었다.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초대 교회는, 노예 제도는 필요 하고 유용한 것이라는 교부들의 사고를 바탕으로, 인간 의 존엄성 및 그리스도교적 도덕성을 강조하는 연성적 노예 제도를 주장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경우, 노예 제도는 죄인에게 부과된 일종의 징벌로 이해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모상대로 자유롭게 창조된 합리적 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 런데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속박하고, 자신의 운명 속에 구 속당하는 것은 결국 죄이며, 이는 의롭고 허물의 정도에 따라 징벌을 조절할 줄 아는 하느님의 심판을 초래한다 는 것이다. 더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정의 로운 관계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그 관계에서 "주인이나 아버지로서의 특별한 권리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개인이나 가 족의 사적인 재산이며, 도시와 나라의 공동 재산에 관련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 사이에 엄밀한 의미에서 정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 며, 단지 '경제적' 이라 불리는 정의의 한편만이 있다는 것이다. 즉 양자 사이에는 상호 권리와 의무만이 존재하 는 것이다. 이에 의해 교회는 지속적으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 및 개인 삶을 누리고, 결혼하 고, 종교를 갖고, 성직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였 다. 또한 교회는 노예들도 자유 시간에는 그들 나름대로 의 삶과 가족을 돌볼 수 있기를 주장하였으며, 578년 오 세르 교회 회의에서는 불필요한 주일 노동을 금지하였 다. 또 한편으로, 교회는 노예들로 하여금 그들 주인에게 대항하여 봉기할 것을 선동하는 사람들을 아주 엄격하게 비난하였다. 15~16세기 지리상의 발견 이후 국제적인 노예 무역이 성행하게 되자 교회는 많은 이념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특히 노예 무역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 인 18세기는 도덕적 위기, 즉 다시 말해 식민지에서의 집단 학살의 권리와 복음을 전파할 임무의 상호 공존 또 는 식민지 개척을 통해 부를 축적할 필요성과 하느님 나 라를 준비해야 할 필요성에서 비롯된 위기는 당시 사회 를 동요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노예 무역이나 노예 제도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비록 교회가 노예 무역을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하여 그 금지를 지속적으로 주장하 였다고 하나 그 실효성 여부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노예 무역의 중심 국가는 스페인, 포르투 갈을 비롯한 가톨릭 국가들이었다는 점은 더욱 모순과 혼돈을 심화시킨다. 16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 주교였던 라스 카자스(Bartolomé de Las Casas)는 노예 제 도 및 교역에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였다.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불행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더 이상 노예를 가질 수 없게 될 경우 폭 동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는 식민지 주민들의 공격을 받 고, 오히려 흑인 노예의 사용을 권고하는 경솔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다음 프랑 스의 모(Meaux) 교구 주교였던 보쉬에(Bossuet)와 칼뱅 교 목사였던 쥐리외(Jurieu)의 신학 이론을 중심으로 한 논쟁은 무척 흥미롭다. 이 토론을 통해 쥐리외는 노예는 그와 주인 사이에 동의에 의한 자유로운 계약이 존재하 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보쉬에는 그러한 조약이 노예 상태와는 양립되지 않는 것으로 보 고 이를 거부하였다. 한편 교황 바오로 3세는 1537년 아메리카 인디언을 노예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자들을 파문시켰다. 1838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도 모든 형태의 식민지 노 예 제도와 노예 교역을 비난하였다. 1888년 브라질의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식민지 노예 제도를 없애기 위 한 수세기에 걸친 교회의 노력을 각성시키며, 브라질에 서 노예 제도를 없앤 것에 만족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교 황들의 많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노예 제도를 없 애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볼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노예 제도를 적극 권장하거나 방 관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교회는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노예 제도의 비도덕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윤리에 어긋 난다는 점을 적극 강조하면서 19세기 초부터 전개되는 반노예제 운동에 이론적 · 종교적 후원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노예) ※ 참고문헌  《EU》 8, Paris, 1994/ C. Verlinden 《NCE》 13/ G. Boulvert, Les Esclaves et les affranchis impériauc, Aix, 1964/ A. Ducasse, Les Négriers, ou le trafic des esclaves, Paris, 1948/ M.I. Finley, Le Servitude pour dettes, Rev. Hist. Dr., n° 2, 1965/ M. Lengellé, L'esclavage institution juridique ou système économique, Cahiers économiques, Mars, 1954/ L'esclavage, coll. Que sais-je?, P.U.F., Paris, 1967/ P. Veyne, Vie de Trimalcion, Ammales E.S.C., n2, 1961/P. Vidal-Naaquet, Les esclaves grecs étaient-ils une chasse?, Raison Présente, n° 6, 1967.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