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교회가 수행하는 사회 복지 사업. 한국 가톨릭 교회는 초창기부터 신자들과 이웃 주민들의 복지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첫째로 사회 복지 사업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었고 둘째로 고아와 노인들의 영혼을 구하는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랑 실천과 인간 구원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으로 한국 교회가 초창기부터 모진 박해를 당하면서도 개인적으로 때로는 조직적으로 사회 복지 사업을 펼쳐 온 것은 이러한 신앙적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국가나 사회에 앞서서 그 시대의 사회 문제에 적합한 사회 복지 사업을 도입, 실천해 왔다. 또한 국가나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계층에 대해 먼저 관심을 보이면서 모든 사람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고 우리 나라 사회 복지 사업을 선도해 왔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사회 복지 분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선 · 구빈 사업〕 그리스도교 사상은 이승훈에 의한 천주교의 수용 이전에 이미 실학 또는 서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또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져 당시 양반 계급의 학자들 사이에 연구되고 전파되었다. 그리스도교 사상이 전파되자 개인적으로 그 사상에 감화되어 신앙으로 실천에 옮긴 사람도 있었으니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의 예와 같이 천주교가 이땅에서 시작된 이승훈의 세례 이전부터 그리스도교적 이웃 사랑의 사상은 실행되었다. 이와 같이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되기 전부터 그리스도교 사상에 입각한 자선 행위는 실행되었고 이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전파되기 시작한 한국 천주교는 모진 박해 속에서도 줄기차게 번져 나갔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이웃 사랑을 모범적으로 실천하였으니 그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한국 교회 초창기였던 19세기의 우리 나라 민중 생활은 대단히 비참하였다. 홍수와 기근, 해일, 우박과 같은 자연 재해는 주기적으로 발생하여 민중의 생활고를 심화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민중 생활의 도탄 속에서도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적 박해까지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고초는 더욱 심각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신자들의 상부 상조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뿐 만 아니라, 당시 신자들은 모금 활동을 통해 감옥에 갇힌 신자들을 돕기도 하고 구빈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개인적인 자선 행위의 예는 교회사를 통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조직적인 구빈 사업은 주로 명도회(明道會)를 통해 전개되었다.
초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신심은 얼마나 두터웠던지 무서운 박해를 피해 다니면서도 신앙을 지켰고 선행을 많이 했다. 이와 같이 초창기에 모범적인 신자들에 의해 행해졌던 박애 · 자선 사상에서 우러난 수많은 구빈 사업은 신교 자유(信敎自由)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선행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비조직적이고 개인적 · 일시적 자선 행위로 끝난 경우가 많아 그 기록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형편이다.
빈민 구제 사업으로는 20세기 초 3 · 1 운동 당시 안성 천주교회에서 사목하던 공베르 신부(Gombert, 孔安國)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공베르 신부는 자신의 본국인 프랑스에 호소해서 모은 돈으로 춘추 판공을 위해 공소를 방문할 때 곡식과 광목을 사다가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또한 고아들을 모아 친히 기르기도 하고 신자 집에 위탁하여 기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미약한 자료이지만, 빈민 구제 사업이 끊이지 않고 어느 시기에나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해방과 6 · 25를 겪는 동안 미국 가톨릭 구제위원회가 한국에 진출하면서 대대적이고도 조직적인 구빈 사업과 사회 개발 사업이 펼쳐졌다.
가톨릭 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 C.R.S.)는 미국 천주교회의 주교 회의 산하로 공식적인 해외 원조 기관인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각지에 산재한 난민을 구호하고 전쟁 희생자와 빈민을 돕기 위하여 조직된 각국의 사회 사업 단체들을 금품으로 지원해 주기 위해 1943년에 조직되었다.
한국의 가톨릭 구제위원회는 1946년 처음으로 구호 사업을 시작했으며 1952년 외원법에 의하여 외원 단체로 보건 사회부에 등록하였다. C.R.S.는 자체 사업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미국 정부, 한국 정부, 한국 천주교회 각 교구와 협력하여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C.R.S.의 사업은 양곡 사업, 의료 사업, 사회 경제 개발 사업, 지역 사회 개발 사업 등에 대한 후원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양곡 사업은 모자 보건, 아동 급식, 학교 급식, 근로지원 사업, 극빈자 구호 사업 등이며 지역 사회 개발 사업은 농로 개설, 축산, 저수지 축조, 관개, 주택, 간척, 신용 조합 육성 등을 위한 직접 또는 간접 원조이고 의료 사업은 비타민제, 기타 의약품 등의 공급과 병원의 설립 운영을 위한 원조 및 의료 기구의 지원 등이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고 1960년대 후반기부터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이 점차 성과를 거두고 국민 생활이 안정되어 갔다. 이에 교회는 구빈 사업에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 사회 개발 사업과 인간 개발 사업으로 점차 관심을 돌렸다.
〔지역 사회 개발 사업〕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 개발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C.R.S.가 중심이 되어 들여온 수많은 물자와 자금을 해방 직후부터 6·25를 통해 피난민 구호 사업의 일환으로 투입했고 미공법 제480호로 들여온 잉여 양곡과 의류 등은 피난민과 빈민들에게 광범위하게 분배되어 당시 우리 국민들 중 그 혜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종교를 초월하여 배부되었다. 그러나 1963년부터는 이 잉여 농산물과 자금이 비로소 사회 개발 사업에 지원되기 시작했다. 한국 천주교회가 196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사회 개발 사업을 시작한 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 컸다. 그것은 공의회가 인간의 현세적 생활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평가한 데서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한국 정부가 공업화 우선 정책을 펴게 되어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이 생기게 되고 농촌이 침체되는 등 새로운 양상의 사회 문제가 유발되었다. 그 중에서도 소득의 격차와 노동자 권익 옹호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사회 현상에 교회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농촌 개발 사업에 가장 큰 비중을 두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에 큰 업적을 남긴 미국 가톨릭 구제회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개인별 국민 소득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1974년에 한국에서 철수하고 미국 가톨릭 여성연합회가 주관하던 양친 사업(Help a Child Program)이 구제회의 명의로 계속 활동하다가 이것마저 중단되고 C.R.S.의 재산 일체를 한국 인성회에 양도했다.
〔아동 복지 사업〕 개인적이고 비조직적인 자선은 모범적인 초기 신자들 사이에 열심히 행해졌으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회 사업으로는 1854년 매스트르(Maiste) 신부에 의해 설립된 영해회(嬰孩會) 사업이 효시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는 1857년 8월 2일자로 반포한 <장주교운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에 <영해회 규칙>을 실어 각처 공소의 회장집에 비치하여 누구든지 볼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르면 영해회의 목적은 죽을 위험이 있는 외교인 아이들을 대세(代洗)받게 하는 것과 의탁할 곳 없는 외교인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신자 가정에 분산 양육하는 위탁 보호였다. 이것은 당시 종교 박해 때문에 아이들을 함께 모아 보호하는 수용 보호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보호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고아들을 거두어 기르는 것이었으나 때로는 고아가 아니라도 부양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서 위탁받은 아이들도 보호하였다.
영해회 사업은 비록 박해로 인해 신자들 가정에 위탁 양육을 했다고 하나 결과적으로 사회 복지 내지는 아동 복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선구적인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해회는 아이들에게 소위 시설병(Hospitalism)에 대한 나쁜 결과를 예방할 수 있었고 철들 때까지 양육하고 그 후부터 생업을 위한 기술 교육을 실시했고 마침내 나이가 차면 적당한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으니, 이는 훌륭한 현대적 사회복지 사업이었다.
피비린내 나던 박해가 어느 정도 가시고 우리 정부가 서방 여러 나라와 수교 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 천주교에 대한 부분적인 허용이 있게 되었고 1886년 한불조약의 체결로 종교 자유가 명문화되었다. 이때 조선교구장 블랑(J. Blanc) 주교는 정부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노인과 병자, 고아들을 구제하고자 양로원과 고아원을 시작했다.
1880년부터 이미 버림받은 어린이들을 구제하여 여교우나 자식이 없는 교우를 물색하여 기르게 하고 보육료를 지급하였다. 이것은 이미 20여 년 전 영해회가 하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고아들을 돌본 것이었다. 그러다가 서울 곤당골(미동, 현 을지로 1가 미대사관 서측)에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영해원을 설립하여 무의 무탁한 아이들을 받아들여 열심한 교우 몇 명에게 이들을 보육하게 하였다. 1885년 3월 15일에는 곤당골에 '천주교 고아원' 을 설립, 제1대 원장에 블랑 주교가 취임하였다. 블랑 주교는 1888년 9월 8일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천주교 고아원' 의 운영을 맡겼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 복지 시설이었다.
당시 한국의 사회 실정은 가난과 흉년, 전염병 등으로 기아 · 고아가 많이 발생했고, 정부나 사회에서 이들을 위한 시설 보호를 행하지 못한 처지였으므로 자연히 '천주교 고아원' 에 몰리는 숫자가 많았다. 수녀들은 일정한 수입원이 없이 이런 사업을 계속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천주교 고아원 제3대 원장 가밀 수녀는 1915년 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바자(bazzar)를 열었다. 이것이 또한 한국 최초의 바자를 기록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5년 간, 그리고 전쟁 후에도 수녀원과 고아원의 궁핍은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성영회 본부에서 고아들을 위해 보내주던 돈이 줄어들거나 때로는 정기적으로 송금이 되지 않아 큰 수입원이 없는 수녀원에서는 150명이 넘는 고아들을 먹여 살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국내에서도 뜻있는 사람들의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천주교 고아원은 계속 경영난을 겪어 오다 1943년 1월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더욱 운영난이 심해져 만 13세 이하의 아동에 대해 정부 구호령에 의한 구호비를 지급받기 시작했다.
수녀들이 한국에 진출한 후 수녀회가 뻗어 나가는 데는 고아원도 언제나 함께 생겼으니 1894년 8월 18일에는 인천에 수녀회 분원을 설립하면서 고아원과 시약소(施藥所)를 함께 시작했다. 마침 초대 분원장 클레망(Clémence) 수녀는 통킹의 서양 군대 병원에서 여러 해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 병자 간호를 잘해 환자들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인천에 시약소가 설치되었고 동년 가을부터는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하여 고아원도 시작되었다.
1915년 10월 15일에는 대구 바오로 수녀원에 고아원을 부설하였는데 지금의 백백합보육원(白白合保育院)이 그것이다. 1932년 10월 5일에는 전주 수녀원에 부설 영해원을 설립했고 1946년 2월에는 부산 범일동 성당에서 본당 주임 정재석(鄭在石, 요셉) 신부가 해방과 함께 귀환한 동포들로 주거와 양식의 극심한 곤란 속에서 고아들이 거리에 범람함을 보고 이를 구제코자 20여 명의 고아들로 소화보육원을 발족했다.
이와 같이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온 즉시 처음 착수한 사회 사업이 고아원과 양로원 사업이었고 이 또한 한국 최초의 현대적 사회 사업으로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다만, 초기의 신자 가정에 맡겨 기르던 결연 사업이 1880년대에도 있었으나 고아원 시설이 생기고부터 더 발전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통해 걸식아와 전쟁 고아가 양산되던 시기에 교회는 시설 수용 아동 복지 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그러나 이 시기의 아동들이 성년이 되어 사회로 진출한 후 아동 복지 대상 아동의 양상은 전쟁 고아에서 미혼모와 결손 가정으로부터 버려진 고아로 바뀌었다. 이러한 아동 복지 대상자의 변화에 대처하는 국가 정책은 인구 억제 정책과 맞물려 피임과 인공 유산을 장려하는 가족 계획 사업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태어났으나 버려진 아동들에 대해서는 해외 입양을 장려했다. 여기서 '고아 수출 국가' 라는 악명과 함께 온 세계로부터 비난을 듣게 되었다.
아동 복지에 있어서 시설 수용 보호는 최종적인 방법이라야 하며 입양이나 위탁 보호가 더욱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이 학문적으로는 이때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내 입양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는 해외 입양을 무조건 금한다는 것도 적절한 대응책은 아니었다. 이에 한국 가톨릭 교회는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한마음 한몸 운동' (The one heart-one body movement)을 통해 국내 입양 및 결연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주요 사업 내용은 입양, 사랑의 부모(일시 위탁), 결연 사업, 생명 수호 운동 등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의 변화와 교회의 분위기에 따라 1980년대에 와서 종전의 아동 복지 시설들은 상당수 아동 및 가정 문제 상담소, 미혼모 시설, 모자 보호 시설 등으로 사업 내용을 바꾸는 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 교회는 낙태를 예방하고 생명을 수호하였다. 미혼모와 결손 가정의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국내 입양 또는 위탁 보호를 알선하였다. 저소득 주민 밀집 지역에서는 공부방, 유아원, 탁아소 등의 시설 사업을 통해 가정을 돕는 방향으로 아동 복지 사업의 방향을 바꾸어 가고 있다.
〔노인 복지 사업〕 천주교 고아원을 개설하면서 동시에, 교회는 종로 똥골(東谷, 현재의 관철동)에도 큰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의지할 곳 없는 남녀 노인들 40명을 모아 수용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고아원과 양로원이었고 고아원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으나 양로원은 그 후 종현(鐘峴)으로 옮겼다가 1894년 이후 한때 폐지되기도 했다. 그 후 1924년 종현의 몇몇 유지 신자들이 '애긍회' (哀矜會)를 창립, 무의 무탁한 노인들을 수용 · 보호함으로써 양로원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구교구에서 1917년 2월 1일 설립된 인애회(仁愛會)는 노인 복지 시설 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재가노인 복지 사업을 실시하였다. 인애회는 매년 회원을 모집, 회비 형식으로 모금을 하여 무의탁 노약자들에게 주택을 마련해 주고 사망시 장례를 치러 주었다. 회비를 내는 회원을 위해서는 매년 생미사를 한 대씩 드리고 사망하면 연미사를 드려 주었다.
초창기 한국 가톨릭 교회의 노인 복지 사업은 "영혼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신자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이루어져 일시적인 긴급 구호의 수준에 머물렀고 시설 노인 복지 사업은 재정적인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워 지속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 1900년 부천의 성가양로원, 1936년 포항 요셉의 집, 1943년 청주 성심원 등이 있었을 뿐이었다.
해방과 한국 전쟁을 통해 한국 사회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교회는 긴급 구호 사업과 나환우 복지 사업에 주력해 왔다. 그 후 우리 나라 사회가 산업화 · 고령화됨에 따라 교회가 노인 문제에 관심을 집중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와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에 와서 각 교구는 노인 복지 시설을 많이 설치하였다. 현재의 교회 관련 노인 복지 시설의 반 이상이 이 시기에 설립된 것이다. 이 시기의 교회 노인 복지 사업의 특징은 노인에 대한 사회 교육 사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노인 대학을 다투어 개설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대도시에서의 노인 문제는 빈곤 노인 문제보다 노인들의 소외 문제와 세대간의 갈등 문제가 더욱 심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교회는 노인 대학을 통해 노인들로 하여금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 적응하고 가정에서의 세대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교육과 상담을 실시하고 아울러 레크리에이션을 제공함으로써 노인 복지에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나환우 복지 사업〕 한국 천주교회가 나환우 복지 사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 부랑 나환우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 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한 캐롤(G. Carrol, 安) 주교가 1948년 현재의 라자로원 자리에 있던 당시 세브란스병원 부속 결핵 요양소를 사들여 성 나자로 요양원을 설립하고 부랑 나환우를 치료한 데서부터 비롯된다.
8 · 15 광복을 맞은 우리 나라는 혼란에 빠졌고, 이를 틈타 나환우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심각한 상황이 되어 갔다. 일제 하에서는 붙들리게 되면 소록도로 보내어졌고, 그곳에 일단 들어가면 죽어서도 나올 수 없다는 공포심 때문에 은둔 생활하던 환자들, 그리고 각 수용 기관에서 탈출한 환자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구걸 부랑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치료약이란 대풍자유(大風子油)가 고작이었는데 환자들로서는 그마저 구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으며 붕대도 없어 헝겊 조각으로 굶아터진 피부를 감고 다녔다. 이와 같이 기아와 병고 속을 헤매는 환자들의 수는 1946~1947년에 절정에 달해 매일같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국가와 사회에 커다란 부담을 안겨 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의 나관리 추세는 이제까지의 격리 수용에서 재가 치료로 전환되었고 이와 함께 이동 진료 기법이 등장하였다. 1950년대 필리핀의 이동 진료는 세계의 이목을 끌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이 같은 세계적 동향에 따라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동 진료 기법이 도입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 가톨릭 교회도 본격적인 나환우 복지 사업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1955년 스위니(Joseph A. Sweeny, 徐) 신부가 한국에 오면서부터였다. 스위니 신부는 미국 메리놀회 소속으로 중국 광동성에서 26년 동안 구라 사업을 하다가 그곳이 공산화되자 본국인 미국으로 귀국, 카빌요양소에서 근무했으며 한국에는 1954년에 입국하였다. 스위니 신부는 오랫동안 중국 본토에서 나환우 진료 및 구호 사업을 해온 경험을 살려 나환우들을 찾아다니며 치료하는 이동 진료를 시작하였다. 1955년 9월 천주교 구라회를 창립한 스위니 신부는 이듬해 말부터 매월 1회씩 강원(원주), 경기(화성), 충남(예산, 공주, 논산), 전북(전주, 남원), 충북(옥천, 영동) , 경북(김천, 상주, 예천, 봉화, 영일, 대구), 경남(밀양, 창녕, 진주, 사천, 충무, 거제, 김해, 마산, 부산) 등 전국을 두루 돌면서 재가 환자들에 대한 진료를 실시하였다.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이동 진료 사업인데 그 활동 근거는 성 라자로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재가 환자들을 찾아다니는 이동 진료의 어려움을 느껴 이들이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살도록 정착촌을 만들게 되었는데 1961년부터는 정부도 음성 나환우(치료된 나환우)들을 위한 정착촌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1950년대 말 대구교구에서도 오스트리아인인 루디 신부를 구라 사업 전담 신부로 임명하고 구라 사업부를 창설했다. 루디 신부는 자기 모국인 오스트리아의 가톨릭 부인회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경북 의성군 다인면의 신락 농장과 고령군 우곡면의 은양원을 세우고 그 생계 지원 및 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1961년 4월 24일에 내한한 오스트리아 간호사 엠마 프라이징거(Emma Freisinger)는 이 사업을 승계하여 그의 모국 가톨릭 부인회 지원으로 대구시 봉덕동 1275번지의 임야 15,000평을 매입, 숙사를 건립하고 전염의 우려가 있는 양성 환자의 자녀들을 그 부모로부터 분리시켜 돌보게 된 것이 가톨릭 피부과의원의 시발이었다.
이렇게 교구마다 독자적으로 나환우 복지 사업을 하고 있던 성직자, 수도자, 평신자들이 서로 협력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들은 상호 유기적인 협조 아래 나환우 복지 사업을 함으로써 함께 연구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중복된 구호를 없애고 애로 사항을 공동으로 해결해 나가며 정부나 나협회 등 유관 기관과의 협조 등을 목적으로 1967년 가톨릭 나사업가연합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가톨릭 나사업가연합회는 기본 사업으로 나병 계몽 사업, 의료 사업, 교육 사업, 자립 사업, 불구 환자 수용 보호 사업, 후원회 육성 사업 등을 벌였다. 연합회는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녀회와 서독 구라협회와 관련을 맺고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부인회는 사회 복지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 기관, 나환우 복지 사업 단체 및 양로원 고아원 등 사회 복지 시설에 재정 원조를 함으로써 이들 기관이 목적한 바를 조기에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부인회는 교육 사업(사회 농업 · 가내 수공업 등), 개발 사업, 의료 사업, 나환우 복지 사업, 난민 구제 사업, 양로원 고아원 등의 운영비 및 시설비 지원 사업 등을 기본 사업으로 삼았다. 서독 구라협회는 나환우 복지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의료 기관, 계몽 기관 및 음성 나환우 정착촌등 복지 시설에 재정 지원을 하여 각 기관이 목적한 바를 조기에 달성하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 단체는 원칙적으로 직접 사업을 하지 않고 현금 등 재정 지원을 주로 하나 세계 각국의 나사업에 관한 자료 교환 및 계몽을 위한 출판 사업, 나병 연구 사업 등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이 단체는 주된 사업으로 정착촌 자립 사업, 의료 사업, 나이동 진료반 사업, 교육, 연구, 시설 설치 및 유지, 계몽, (환자 자녀) 복지, 불구 환자 수용 보호 등의 사업에 재정적 지원 사업을 벌여 왔다.
1968년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는 '세계 나병의 날' 인 1월 마지막 주일을 '구라 주일' 로 선포하고 매년 이날에는 전국 각 본당 및 가톨릭 기관을 대상으로 나병에 대한 계몽과 나환우 복지 사업에 협조를 호소하고 주일 미사 때 헌금을 받아 가톨릭 나사업가연합회의 각종 사업에 사용케 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나환우 복지 사업은 나환우 의료 사업과 음성 환우의 재활 및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정착 마을 사업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업은 1960년대까지 매우 활발하였으나 나병에 대한 의료기술의 발전과 재가 환우 발굴 사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1970년대에 와서는 신규 사업이 점차 줄어 들었고 1980년대에 와서는 신규 사업이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나환우 진료 사업이 성공을 거두어 현재의 고령 나환우 외에 더 이상 발병하지 않고 있어 가톨릭 교회의 나환우 복지 사업도 점차 매듭되어 질 것으로 전망된다.
〔무의탁자 복지 사업〕 교회의 무의탁자 복지 사업은 1980년대에 와서 부랑인 수용 보호 사업과 재가 무의탁노인 및 도시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식사 제공 사업으로 이루어진다. 부랑인 수용 보호 시설은 초기 한국 교회의 자선 구빈 사업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는 것을 예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루가 10, 25-37)로 가르쳐 주신 교회의 기본적인 의무로 생각해 왔다. 교회는 이러한 정신으로 가난하고 의지할 데가 없는 이들을 돌보는 부랑인 복지 사업을 펼쳐 왔다. 그러나 교회의 재정 능력의 한계로 그 규모와 보호의 내용상 많은 제약을 받아 왔다. 1981년 정부는 전국적으로 부랑인 실태 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국가적 차원에서 부랑인 대책을 수립, 1982년부터 중앙 정부의 지원 아래 부랑인 보호 사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지방 자치 단체 또는 민간에 의해 행해져 오던 부랑인 수용 보호 시설이 피보호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와 온갖 비리 · 부정 등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정부는 부랑인 수용 시설의 정비 및 지원을 강화하고 그 운영을 종교 재단에 위탁하기로 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각 교구 또는 수도회에서 부랑인 수용 시설을 위탁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부랑인 시설의 입소 대상은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가 있어도 보호할 능력이 없는 65세 이상의 노인, 18세 미만의 아동, 고질적인 정신 질환 또는 심신 장애 등 생활 능력이 없는 부랑인, 일정한 주거가 없이 구걸하는 부랑인으로서 본인이 시설 수용 보호를 원하는 자를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입소시켜 보호한다.
부랑인 문제를 보는 시각에는 개인적 · 가정적 문제로 보고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부랑인 복지를 위해서는 전문 지식과 전문 기술은 2차적인 것이며 인간 존엄성과 사랑의 정신이 가장 중요시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부랑인 복지 사업을 맡게 된 당위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부랑인의 발생 요인은 개인적 · 가정적 · 사회적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개인적 요인으로는 개인의 능력 부족, 나태성, 질병 및 장애 등을 들 수 있다. 가정적 요인으로는 가정의 보호 능력 상실, 결손 가정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적 요인으로는 사회 변화에 따른 적응 능력의 결여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와 대상자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대규모 수용 시설에 혼합 수용 보호하는 방식은 오늘날 사회 복지의 개별화 · 전문화 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교회가 부랑인 보호 시설을 위탁 운영하고부터는 보호의 수준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이러한 보호의 개별화 · 전문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 부랑인 복지 사업의 향후 과제는 보호 대상자의 문제성에 따른 분류화와 자립 · 자활을 위한 교육과 직업 훈련을 통한 사회 복귀를 도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재가 무의탁 노인을 위한 가정 봉사 사업은 자원 봉사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1980년대에 와서 각 교구 사회 복지회는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자원 봉사자 교육을 실시, 재가 무의탁 노인들의 가사 돌보기 사업에 파견해 왔다. 교회가 벌이는 가정 봉사 사업의 내용으로는 식사 준비, 빨래, 목욕, 심부름, 말 벗, 기타 집안일 돌보기 등이다. 가정 봉사 사업은 무의탁 노인뿐만 아니라 장애인 가정, 소년 · 소녀 가장 세대 등에도 필요한 사업으로 오늘날 지역 복지 이념과 정상화 이념(normalization)에 따라 가톨릭 교회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확산시켜 나가야 할 분야라 하겠다.
부랑인 및 저소득 주민들을 위한 교회의 무료 식사 제공 사업은 1980년대 후반에 와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운영은 전적으로 신자들의 자발적인 헌금과 자원 봉사로 이루어지고 있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사업이라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중진국이라 자처하는 우리 나라에서 아직도 절대 빈곤 수준에서 생활하는 주민이 많다는 사실은 정부와 교회가 부의 재분배에 더욱 관심을 보여야 할 것임을 알게 해준다.
〔장애인 복지 사업〕 한국 가톨릭 교회가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보인 것은 1955년 충주 성심학교를 통해 특수 교육을 실시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 후 1970년대까지 10여 개의 재활 사업과 특수 학교가 설립되었다. 교회가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 에 그 사상적 바탕을 두고 있다. 교회가 장애인 복지 사업을 실시함에 있어, 특수 교육을 통한 자립 재활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에 남보다 먼저 투신한 것도 결국은 장애인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모상을 영광스럽게 드러내고자 하는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1980년대에 와서 교회의 장애인 복지 사업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1981년을 유엔(UN)이 '세계 장애인의 해' 로 정했고 이 해를 기해 정부가 장애인 복지법을 제정 공포한 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교회도 장애인 복지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여 장애인 복지 시설과 기관 · 단체들을 설립하였다. 1990년에 발간된 《가톨릭 사회 복지 편람》에 수록된 장애인복지 시설 · 단체 67개소 중 53개소가 1980년대에 설립된 것만 보아도 이때에 와서 교회가 비로소 장애인 복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국 장애인 복지 시설 199개소(1992년말 현재) 중 3분의 1을 가톨릭 교회가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가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의 사회 문제에 가장 먼저 관심을 보였고 사회 복지 사업의 개척자적인 자세로 한국 사회 복지 사업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장애인 복지의 이념은 장애인도 개인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고 이에 상응하는 처우를 받으며, 장애를 이유로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인 복지의 목표는 장애인으로 하여금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복귀시켜 자신의 복지를 스스로 구현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따라서 교회의 장애인 복지 사업도 일반인들의 장애인관을 바꾸는 교육을 펼쳐야 할 것이고 그 능력을 개발하여 자기의 능력에 맞는 직업을 갖도록 하여 정상인과 더불어 사회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재활(reha-bilitation) 사업에 그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앞으로 장애인을 위한 시설 개조와 장애인을 위한 전례상의 배려에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야 할 것이다.
〔전문 사회 사업〕 한국 가톨릭 교회는 1980년대에 와서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상담소, 단주 단도박 모임, 출소자 모임 등을 통해 전문 사회 사업을 시작하였다. 1982년 5월 1일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에 내담 상담실을 개설하였고 같은 해 9월 5일에는 '나눔의 전화' 를 개설, 전화 상담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1983년에는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단주 모임을, 1984년에는 도박 상습자들을 위한 단도박 모임을 통해 개별 및 집단 사회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또 1988년에는 출소자 공동체를 설립하여 교정 사회 사업을 시작하였고 1989년에는 장애인 결혼 상담 사업을 시작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전문 사회 사업은 아직 별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또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도 않고 있다. 그것은 교회가 사회 사업의 전문성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사회 사업 전 문가의 양성에 관심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 사업은 고도의 개인적 책임을 수반하는 지적 활동인 것이다. 사회 사업은 인접 학문의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개인, 집단, 지역 사회를 실제로 다룰 수 있는 고유한 이론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사회 복지 사업의 대상이 되는 불우 계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 심리적 여러 가지 문제는 단순한 선의나 동정심만으로 접근해서 진단하게 대응책을 모색할 수 없는 영역이 너무나 많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사회 복지 사업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사회 복지 사업을 수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사회 복지 사업에 대한 낮은 인식도는 교회 사회 복지 사업 종사자들의 자격증 소지율이 낮은 데서도 나타난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사회 복지 사업을 수행함에 있어 지금까지 요보호 대상자들에 대한 금품 지원이나 생활상의 단순 봉사 사업에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회 복지 사업에 투자되는 교회 재정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위해서도 사회 복지 사업의 전문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조 직〕 가톨릭 사회 복지 사업을 전국적으로 협의 · 조정하는 기구로 주교 회의 사회 복지위원회가 있다. 1975년 6월 26일자로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는 산하 전국 기구로 '주교 회의 인성회(仁成會)' 라는 전국협의회를 설치하였다. 주교 회의는 그 당시까지 교구마다 다양하게 벌여 오던 구호, 자선, 복지 및 개발 사업에 대해 조정 · 협의하는 기능을 인성회에 맡겼다. 1991년 인성회는 한국 천주교회의 사회 복지 시설협의회를 흡수 통합하여 '주교 회의 사회 복지위원회' 로 명칭을 바꾸고, 주교단으로부터 국내의 사회 복지 활동뿐 아니라 해외의 가난한 나라를 원조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받음으로써 국내외의 사회 복지 활동을 지원하는 체계를 마련하였다.
위원회는 협의 기구로, 주교 회의가 선임한 위원장 주교를 정점으로 하여 총무 신부 1명과 전국 위원 신부 21명(교구 대표 위원 신부 15명과 사회 복지 분야별 전국 단체 지도 신부 6명)으로 구성되며, 조직은 상임위원회와 감사 및 사무국을 두고 있다. 분야별 전국협의회는 결핵 사업연합회, 나사업연합회, 아동 복지협의회, 빈민 의료협의회, 맹인선교회, 농아선교회 등 6개가 있다.
사회 복지위원회는 로마에 본부를 둔 국제 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의 정회원이며 아시아 주교 회의 연합회 인간 발전위원회(OHD-FABC) 및 아시아 인간 발전 협의체(APHD)의 정회원이다. 또 제네바에 본부를 둔 가톨릭 국제 난민위원회(ICMC)와 기타 외국 교회 원조 기구들과도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국 단위의 사회 복지위원회는 지금까지 개별적이고 산발적인 교회 사회 복지 사업을 협의 · 조정함으로써 남구(濫救) 또는 누구(漏救)의 폐단을 막을 수 있게 되었고 사회 복지의 홍보 및 연구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교회 사회 복지 사업의 진로 및 사회 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각 교구 사회 복지협의회는 교구 및 교구 관할 구역 내의 다양한 사회 복지 사업을 협의 · 조정하고 자원을 개발하고 배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각 본당은 본당 사목회(또는 사목협의회) 산하에 사회 복지분과를 설치하여 본당 내의 다양한 사회 복지 사업을 협의 · 조정하기도 하고 불우 이웃 돕기, 자원 봉사 활동, 저소득 주민 자녀에 대한 장학금 지급, 긴급 구호, 시설 방문 및 지원 등의 활동을 직접 행하기도 한다.
〔재 정〕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 복지 사업에 쓰여지는 재원의 중심은 공식 예산상의 자선비(또는 사회 복지비), 특별 주일 헌금, 사순절 모금, 기타 개별 후원 회비 등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베풀어 온 수많은 자선 또는 사회 복지 사업의 재원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성금, 개인 독지가들의 희사금 또는 외국의 원조 등이었다. 사실, 최근까지만 해도 교회의 유지 및 운영을 위한 신자들의 책임 의식이 부족해 기본 예산으로 복음 선포 및 전례를 위한 비용 충당에 급급해 봉사를 위한 예산에까지 힘이 미치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1962년 한국 교회가 교회법상 자치 지구로 설정됨에 따라 신자들의 책임은 무거워졌고, 한국의 여러 차례에 걸친 경제 개발 계획이 성공을 거두고 국민들의 경제 생활이 향상됨에 따라 교회에 대한 외원도 점차 줄어들거나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까지 수행해 오던 교회의 사회 복지 사업은 한국 교회가 전적으로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봉사의 직분을 다해야 하고 사랑의 교회임을 재인식하여 구빈 또는 사회 복지 사업의 재정을 신자들의 자선심에만 호소할 게 아니라 공식 예산에도 상당한 수준으로 반영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이때에 와서 높아졌다. 이에 1980년대에 와서 전국적으로 본당 예산에 자선비 항목이 새로 생기거나 예산 금액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복지 기금 모금을 위한 특별 주일은 사회 복지 주일(1월 마지막 주일)과 자선 주일(대림 제3주일)이 있다. 사회 복지 주일은 종전의 구라 주일을 1991년부터 명칭을 바꾸고 구라 사업을 위한 모금에 한정되어 있던 것을 사회 복지 사업 전반에 걸친 기금 조성을 목적으로 모금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가 복지 기금 모금 주일을 정한 것은 1968년 '세계 나병의 날' (1월 마지막 주일)을 '구라 주일' 로 선포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날 전국 각 본당에서 거두어 지는 헌금을 가톨릭 나사업가연합회로 보내어 각종 구라 사업에 사용하였다. 이로부터 23년 간 존속해 오던 '구라 주일' 은 1991년부터 '사회 복지 주일' 로 명칭을 바꾸고 1992년 가을 주교 회의는 이날을 해외 원조 헌금 주일로 정했다. 주교 회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지역 공동체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돕도록 촉구하기 위해 1985년에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제정하였다. 자선 주일 헌금은 각 본당의 예산 중 자선비(사회 복지비)와 함께 본당 차원의 사회 복지 사업에 쓰이고 그중 일부는 교구에 보내어져 각종 사회 복지 사업과 시설 및 기관에 배분된다.
사순절 모금은 교회의 가장 오래 된 관행이며 전세계교회가 시행하는 가톨릭 교회 전체의 운동이다. 한국 교회는 옛부터 성당 안에 애긍함(哀矜)을 비치하고 신자들이 사순절 동안 단식과 금육재를 지키고 극기하여 절약한 돈을 모아 1년에 한 번씩 개봉하여 가난한 이웃에게 식량 등을 사서 나누어 주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1977년부터 각 교구 차원에서 사순절 기간 동안 신자 의식 교육, 사랑의 단식재, 공동 헌금 등의 행사를 실시하도록 지원함으로써 사회 복지 활동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이 운동의 초점은 모든 신자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참다운 인간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 교육에 두고 있다. 이 의식의 구체적 표징으로 드러나는 신자들의 헌금은 교구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을 향한 다양한 복지 및 개발 사업에 쓰여진다.
이와 같은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 복지 사업은 본당과 교구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전국적인 차원에서의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본당과 교구의 높은 벽을 어떻게 허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한국 교회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은 교회의 공식적인 모금 이외에도 개별적인 시설 기관의 후원 회비와 자선 바자 등을 통한 모금 활동이 있다. 자선 바자는 단발성이지만 후원 회비는 시설의 운영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결 론〕 교회의 사회 복지 사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구체적인 실행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본질적인 사명에 따라 초세기부터 교회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 왔고 한국 교회도 처음부터 신자들이 사랑으로 자선을 베풀었고 1백여 년의 박해 끝에 신교 자유를 얻게 되자 곧바로 조직적인 근대적 시설 사회 복지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사회 복지 사업은 한국 사회 복지사(社會福祉史)에서 언제나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 한국의 종교가 재산을 모으기만 할 뿐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다는 국민적 비난에 대해 한국 가톨릭 교회는 떳떳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교회는 언제나 적절한 사회 복지 시책을 전개하여 그 시대의 사회 문제 해결에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교회 창립 초창기부터 신자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자선을 베풀었고 교회 차원에서는 서구의 선진적 방식과 자금을 지원받아 빈민 구제 사업, 아동 복지 사업, 노인 복지 사업 등을 수행함으로써 이땅에 근대적 사회 복지 사업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1854년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도입된 영해회 사업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아동 복지 사업이자 우리 나라에서 수행된 근대적 사회 복지 사업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1885년 블랑 (백) 주교에 의해 설립된 '천주교 고아원'은 한국 최초의 아동 복지 시설로 기록되고 있다. 고아원과 함께 설립된 양로원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노인 복지 시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명칭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오랜 박해가 끝나고 신교의 자유를 얻은 가톨릭 교회는 활발한 사회 복지 사업을 시작하다가 곧바로 한일합방과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을 당하면서 서양 교회의 지원을 받기가 어려워졌고 국내에서도 총독부와 가톨릭 교회 간의 어려운 여건으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은 한국 교회는 사회 복지 사업에 있어서 이후 매 10년 단위로 괄목할 만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1950년대에는 해방과 한국 전쟁으로 인한 수많은 전쟁 이재민을 구하기 위해 미국 가톨릭 구제회의 원조로 긴급 구호 사업을 벌였다. 동시에 이 시기에 사회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나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 나환우 의료 사업과 나환우 복지 사업에 치중하였다. 1960년대에는 국민 생활의 급박한 상황이 진정되어 긴급 구호 사업에서 국민 생활의 근본적인 안정을 위해 사회 개발 및 인간 개발 사업에 눈을 돌렸다. 농촌 개발 사업을 위해서 농로 개설, 관개 시설 확충 및 보수 사업, 간척 사업, 축산업 장려 등의 사업을 교회가 선도하였다.
1970년대에 와서는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이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도시 빈민 문제와 산업체 근로자들의 생활의 질 향상을 위해 사회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반독재 투쟁과 맞물려 교회의 사회 참여에 있어서 강 · 온 양면으로 갈려 방법론상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는 장애인 복지와 노인 복지에 관심을 보였고 아동 복지 사업도 아동 복지 시설 사업에서 아동 복지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미혼모 복지, 모자 복지에 관심을 돌려 더욱 발전된 사회 복지관을 나타내 보였다.
1990년대에 와서는 전문 사회 복지 사업에로 관심을 돌려 지금까지 물질적 원조의 차원에서 더욱 전문적인 사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요보호 대상자들의 자립 재활에 더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순한 물질적 원조보다 생활상의 어려움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자원 봉사자 교육을 통한 가정 봉사 사업을 시작하여 교회의 사회 복지 서비스를 다양화하고 그 질을 높였다.
1993년은 한국 교회의 해외 원조 원년으로 기록될 획기적인 해가 되었다. 이국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기만 하던 교회에서 1962년 자치 교구로 되면서 자구(自救)에 온갖 노력을 다해 왔는데 1993년을 기해 드디어 도움을 베푸는 교회로 발전한 것이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불우한 형제가 많이 있다. 가까운 이웃을 버려둔 채, 멀리 있는 형제를 돕는다는 것은 모순된 행위라는 비판도 있음을 한국 교회는 알아야 한다. 국가의 벽을 뛰어넘듯이 가까운 본당이나 교구의 높은 벽을 허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교회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 참고문헌 朴錫敦, <韓國의 天主教社會福祉事業에 관한 研究>, 大邱大學校 大學院 碩士學位 論文, 1981/ 유홍렬, 《한국 천주교회사》, 가톨릭출판사, 1962/ 任珍昌, 《韓國의 社會發展과 가톨릭敎會의 役割》, 西江大學校 社會問題研究所, 1976/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회, 《바오로 뜰안의 哀歡 85年》, 가톨릭출판사, 1973/ 《달레 교회사》. 〔朴錫敦〕
가톨릭 복지 사업 -
福祉事業
[영]Catholic welfare work(Catholic welfare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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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구제위원회의 구호 활동은 이땅의 전재 복구에 큰 기여를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