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서

一書

〔라〕liber Nehemiae · 〔영〕Book of Nehem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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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초의 느헤미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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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초의 느헤미야서.


바빌로니아 탈무드(Baba Bathra 15a)와 사르디스의 주교 멜리토(에우세비오, 《교회사》 4, 26, 14)가 보여 주듯이, 에 즈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본래 '에즈라' 라는 책명을 가진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이 현 재와 같이 두 권으로 나뉘어진 최초의 증거는 오리제네 스(에우세비오, 《교회사》 6, 25, 2)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로 니모(342~420)의 불가타(라틴어 성서)에서는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가 분리되어 나온다. 히브리어 사본은 1448년에서야 불가타 구분의 영향 을 받아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둘로 나누었다. 이러 한 사실과 함께, 이 두 권의 내용 및 신학의 동질성 때문 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본래 동일 편집자에 의해서 편집된 책으로 보며, 그 편집 시기 를 대개 기원전 4~3세기경으로 추정한다. 이 편집자는 새로운 유대인들의 이상적 사회가 모세 율법의 구체적 실천에 있다고 보며, 이 실천의 구심점이 예루살렘 성전 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고, 모세 율법의 철저한 실천을 위해서 이방인들과의 잡혼도 금지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한 경건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이러한 신학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 아래 이 책을 편집하였다. 〔사용 자료〕 편집자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사용하였 을 것으로 추정된다. ① 느헤미야 비망록(느헤 1, 1 - 7, 73a ; 11, 1-2 ; 12, 31-43 ; 13, 4-31). ② 에즈라 비망록 (에즈 7. 10 ; 느헤 8, 9). ③ 아람어로 된 자료(에즈 4, 7 6, 18). ④ 여러 가지 형태의 목록들 :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집안 가장들의 목록(느헤 11, 3-19), 유대인들이 살 고 있던 지방 성읍들의 목록(느헤 11, 25-36), 즈루빠벨 시대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목록(느헤 12, 1-9), 예수아 에서 야뚜아에 이르는 대제사장 목록(느헤 12, 10-11), 요아킴 시대의 사제들과 레위인들의 목록(느헤 12, 1221. 24-26). ⑤ 느헤미야의 맹약(느헤 10장). 〔내 용〕 (1) 느헤미야의 사명(1, 1-7, 73a) 1, 1-4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관한 소식 들음. 1, 5-11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으 로 인하여 단식하며 기도함. 2, 1-8 : 느헤미야가 아르닥사싸 황제로부터 예루 살렘으로 귀환할 것을 허락받음. 2, 9-20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2, 910), 예루살렘 성곽의 참상을 조사하고 (2, 11-16), 성곽 재건을 결심하나(2, 17-18), 산발랏과 토비야와 게셈의 조 롱을 받음(2, 19-20). 3, 1-32 : 성곽 건축. 3, 33 -4, 17 : 사마리아인들(산발랏과 그의 친구 들)의 방해를 받음. 5, 1-13 : 경제적 곤경과 이에 대한 느헤미야의 해결. 5, 14-19 : 느헤미야가 희생적 헌신의 모범을 보임. 6, 1-19 : 산발랏, 토비야, 게셈 일당의 음모와 방 해에도 불구하고 성곽 수축 완료. 7, 1-73a : 예루살렘에 주민들을 많이 거주하게 하기 위한 준비를 함. (2) 에즈라의 활동(7, 73b -9, 37) 7, 73b -8, 12 : 에즈라가 대회에서 모세의 법전 을 읽음. 8, 13-18 : 다음날 초막절을 지킴. 9, 1-37 : 티슈리 제24일을 회개의 날로 정하고, 엎드려 죄를 고백하고 기도를 드림(참회 의 시 : 9, 5b-37). (3) 느헤미야의 공동체(9, 38-13, 31) 9, 38 - 10, 39 : 느헤미야와 지도자들이 율법대 로 살 것을 맹약함. 11, 1-36 : 예루살렘 주민의 증가 현황과 예루살 렘에 거주하는 가장들의 목록 및 유대 인들이 사는 지방 성읍들의 목록. 12, 1-26 : 포로 후기 공동체의 사제들과 레위인 들의 목록. 12, 27-43 : 성곽 봉헌. 12, 44 - 13, 3 : 이상적 공동체 서 술. 13, 4-31 : 느헤미야의 제2 총독 시기 의 개혁들. 〔느헤미야〕 느헤미야의 이름(נהמיה, Νεεμιας)은 '야훼께서 위로하시다' 라 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하갈랴의 아들이며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느헤미 야 수기의 저자이다(1, 1). 느헤미야는 상당히 경건한 집안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야훼를 의미하는 야 (yah)가 들어가는 부친의 이름(하갈랴 : הֲכַלְיָה, 야훼를 기다려라)과 느헤미야 자 신의 이름에서 엿볼 수 있는 면모이다. 그리고 그 선조들의 뼈가 묻힌 도성 예 루살렘의 피폐를 매우 슬퍼하였으며 (2, 3), 하느님의 율법에 열심이었다(1, 4-11).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아르닥사싸 1세 시대에 '왕에 게 잔을 따라 올리는 사람' 이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 면, 이 직위는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내시였었고, 느헤미 야 자신도 왕과 왕비가 함께 있는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로 미루어 볼 때 그도 내시였을 가능성이 높다. 느헤미야 는 왕과 이처럼 가까이 지낼 수 있었고, 이것이 그로 하 여금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될 수 있었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위한 칙서와 칙령을 받을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배경과 활동〕 메대와 리디아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 여 대(大)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고레스(기원전 559~ 530)는 피정복민들에게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폈다. 역대 기 하권 36장 22-23절과 에즈라서 1장 1-4절과 6장 25절에 의하면, 고레스는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유대 포 로민들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허락하고, 느 부갓네살이 빼앗아 온 성전 기물들을 돌려 주라는 칙령 을 선포하였다(기원전 538). 그리고 이 재건 사업은 여호 야긴의 아들로 추정되는 세스바쌀에게 맡겨졌다. 그가 언제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였는지는 불투명하나, 아마 칙 령이 선포된 후 얼마 되지 않아 곧 예루살렘으로 떠난 것 같다. 이때 이후로 다리우스 1세가 즉위하던 기원전 522년 사이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귀환하였으나, 또 다른 많 은 사람들이 여전히 바빌론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스 바쌀의 지휘 아래 첫 번째 귀환이 있은 지 얼마 후에 그 의 조카인 즈루빠벨이 세스바쌀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고, 그는 대사제 예수아와 함께 귀환자들을 이끌어 갔다. 귀환자들은 대단한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 나 궁핍하였고 잘 조직되어 있지 못했다. 그들은 예루살 렘에 돌아온 다음해에 성전의 기초를 놓는 작업을 시작 했다(에즈 3, 8).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마찰과 그 들 각자의 집을 지을 필요와 곡식의 흉작과 이 작업에 대 한 무관심 등의 이유로 인하여, 이 성전 재건 작업은 지 연되었다(에즈 3, 3 ; 4, 4-5 ; 하깨 1, 10-11 ; 2, 4 ; 즈가 8, 10). 이 성전 재건 사업은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 486)의 재위 2년(기원전 520)까지 보류되다가, 기원전 520년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의 예언과 즈루빠벨과 예 수아의 활동으로 재개되었다. 이 건축 활동의 재개는 페 르시아 관헌들의 의혹을 사게 되었지만 조사 결과 이 건 축은 위법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그리하여 다리우스 왕은 다시 칙령을 내려 이 건축 활동의 허락과 함께 이 사업을 국고에서 지원하도록 하였다. 결국 이 성전 건축 은 기원전 515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이 평안한 것은 아니었다. 귀환한 유대인들은 아주 작은 영 토만을 차지하였다. 예루살렘 일대와 북쪽으로 미스바, 동쪽으로는 예리고까지에 이르는 주변 지역, 남쪽으로는 크일라, 벳술과 드고아, 그리고 서쪽으로는 타민족의 지 배하에 있던 계곡들이 그들의 거주지였다. 대부분의 귀 환자들은 토지에 대한 명백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못 했고, 따라서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귀환자들이 유대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과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리우스 1세의 말년부터 서방에 대한 페르시아의 지배력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 고, 그의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기원전 485~465) 왕의 강압 정책은 이집트 사람들을 분기시켜 팔레스티나는 안 정되지 않았다. 이 불안정한 상태는 아르닥사싸 1세 시 대(기원전 465~424)에도 호전되지 않았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구책을 강 구해야 했다. 그들은 외적에 대항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을 요새화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터를 다지고 성 벽을 쌓기 시작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러한 활동 을 적대적인 움직임으로 보고 페르시아 정부에 고발하였 다. 페르시아 정부는 이 일을 중지시키라는 명령을 사마 리아에 하달하였다. 이에 사마리아 당국은 지체 없이 그 명령을 집행하여 치안 부대를 파견해서 그 공사를 중단 시켰다(에즈 4, 23). 아르닥사싸 재위 20년(기원전 445) 11~12월경에 느헤미야는 수사궁(페르시아의 겨울 궁)에 있을 때, 그를 방문한 그의 동생 하나니와 그와 함께 온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이처럼 공사가 중단된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태에 관한 보고를 듣게 되었다. 이 소식에 느헤미야는 슬퍼하며, 왕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금 식하며 기도하였다(1, 1-11). 기원전 444년 3~4월경, 그가 어전에서 술을 따르게 될 때, 왕은 느헤미야가 수심 에 가득 차 있음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다. 이때 느헤미 야는 왕에게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과 복구 계획을 이 야기하였으며, 그를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줄 것을 요청 하였다. 왕은 이 청을 허락하고,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 총독들에게 보내는 친서를 내려 그로 하여금 무사히 예 루살렘까지 도착하게 할 뿐만 아니라, 황실 살림을 맡은 아삽에게 가는 친서도 내려 성문과 성과 자신이 살 집을 지을 재목까지 제공하게 하였다(2, 1-8). 그는 왕이 딸려 보낸 장교들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2, 9-10). 그는 이와 같은 권력과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예루살 렘에 도착한 후 곧 성벽 재건에 착수했다. 비록 유대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는 세 지역의 총독과 추장, 즉 사마 리아 지방의 총독 산발랏, 요르단 강 건너 동부 지역의 암몬 지방 총독 토비야, 서북 아라비아에 있는 케다르의 강력한 추장 게셈의 방해를 받았으나,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서 52일 걸려 완성하였다(6, 15 ; 요세푸스는 2년 4개 월 걸려 완성되었다고 함, Antiquities XI, V, 8 이 연대 기록이 맞 는다면 성벽은 기원전 437년에 완성된다). 그는 명실공히 유대의 총독으로서(8, 9 ; 10, 2 ; 5, 14 : 12, 26),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 러 가지 사회 개혁을 단행하였다. 성벽 재건을 완수한 후 에, 그는 성안에서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 규칙을 제정하 였고(7, 1-3), 성안의 빈자리에 백성이 살 주택을 마련하 기 위한 준비로서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7, 5 ; 11, 1). 그와 동시대의 지도자인 에즈라가 종교적 개혁에 공헌한 사람이라면, 그는 사회적 개혁에 공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433년, 그는 그의 첫 번째 총독 임기를 마치고 페르시아 궁정으로 돌아갔다(13, 6).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의 부재중, 이 교 묵인파가 일을 그릇되게 처리하였다. 특히 엘랴십은 대사제임에도 불구하고(3, 1 ; 13, 28), 느헤미야의 적대 자인 토비야에게, 본래 제의를 위해서만 사용하게 되어 있는 성전의 방 하나를 내주기까지 하였다. 느헤미야는 이에 분노하여 토비야의 물건들을 밖에 내던지게 하고 그 방을 본래의 목적에 맞게 사용하도록 하였다(13, 49). 그리고 그는 레위인들이 받을 몫을 받지 못하고 있음 을 알자 10분의 1세(십일조)를 거두게 하여 그들의 생계 를 보장하게 하였고(13, 10-14),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도 록 하였다(13, 15-22). 그는 이방인들과의 잡혼을 금지시 켰으며(13, 13-17), 대사제 엘랴십의 한 손자가 산발랏의 딸과 결혼한 것을 알고는 그를 추방시키기도 하였다(13, 28-29). .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하여 느헤미야는 예루 살렘의 안녕을 도모하고, 민족을 정화하여 시나이 산 계 약의 윤리에 바탕을 둔 신정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는 사제와 레위인들을 율법의 순수한 수호자요, 모범적 준수자가 되도록 하여 민족의 대표적 위치에 올 려 놓았다. 그가 첫 번째 임기를 마치고 얼마 동안 예루 살렘을 비웠는지, 두 번째 임기가 언제까지였는지 정확 히 알 수는 없다. 엘레판틴 문서에 의해서 기원전 411년 의 유대 총독은 바고아스(Bagoas)였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며 적어도 이때 이전에는 총독직에서 물러나 있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 에즈라서 ; 예언서) ※ 참고문헌  R.J. Coggins, The Book of Ezra and Nehemiah, 《CBC》/ J.M. Myers, Ezra . Nehemiah, New York, 1981(에즈라 · 느헤미야, 《국 제 성서 주석》, 한국신학연구소/ D.J. Clines, Ezra · Nehemiah · Esther, 《NCBC》I H.G.M. Williamson, 《WBC》/ R.W. Klein, 《ABD》 2, pp. 731~742. 〔朴喆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