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느웨
〔라〕Nineve · 〔히〕נינוה · 〔히〕Νινευή · 〔영〕Ninev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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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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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람신이 부조된 돌기둥(루브르 박물관 소장).
아시리아 제국 말기의 수도(首都). 성서의 이 도시에 대한 언급은 제국 패망 전 몇 십 년 동안에 해당된다. 니 느웨의 폐허는 현재 이라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모 술(Mosul)에 속해 있다. 이 유적은 티그리스 강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고, 신도시 모술은 티그리스 강 건너편, 즉 서쪽에 있다. 이 지역은 분명히 중요한 거주지였고, 그 주위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비옥한 농경지이다. 교역 면에서 볼 때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을 오르내리는 남북 교역로와 쿠르드(Kurd) 산맥의 남쪽 산기슭을 따라가는 중요한 동서 교역로가 교차되는 곳이다. 이 도시의 전성기 때에는 둘레가 대략 13km 되는 지 역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반경 안에는 코쇼르 (Khoshor) 강을 사이에 두고 텔(tell) 쿠윤직(Kuyunjik)과 텔 네비 유누스(Nebi Yunus)가 있는데, 쿠윤직이 네비 유 누스보다 두 배 정도 크다. 니느웨의 유적에는 옛 전승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네비 유누스에는 예언자 요나 의 무덤과 그를 모시는 사당이 회교 사원에 있고, 또한 이 사원에는 요나의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고래의 뼈가 걸려 있다. 네비 유누스는 새 마을과 공동 묘지뿐만 아니 라, 이러한 종교적 성격으로 인해 현대 고고학자의 손이 전혀 미치지 않았고, 쿠윤직만이 광범위하게 발굴되었 다. 1842년 프랑스 학자 보타(P.E. Botta)가 텔 쿠윤직을 발굴하기 시작하였고, 1850년 봄에 영국인 레이야드 경 (Sir A.H. Layard)과 갈대아 출신인 라쌈(H. Rassam)이 아 슈르바니팔 궁전과 토판(土版, clay tablet)이 가득한 도서 관을 찾아냈다. 아슈르바니팔의 도서관이야말로 바빌로 니아와 아시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 주는 가장 중요 한 출처이다. 찾아낸 토판은 25,000개 이상이나 된다. 또 전쟁이나 사냥 장면을 묘사한 장려한 부조(浮彫)들이 궁전에서 발견되었고, 이 중 상당수의 유물들이 대영 박 물관에 소장되었다. 영국 탐사단의 니느웨 발굴 이래 대 영 박물관으로 옮긴 부조들을 주제별로 분류해도 50점 이 넘는다. 〔역 사〕 아시리아에는 네 개의 큰 도시로 아슈르, 갈 라, 아르벨라, 그리고 니느웨가 있었다. 니느웨의 수호신 은 사랑과 전쟁의 여신 이쉬타르(Ishtar)였는데, 이 여신 은 또한 아르벨라의 수호신이었다. 니느웨에는 선사 시 대(기원전 5000경)에 거주한 흔적이 있고, 기원전 2500 년경에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이 당시에 니느웨는 남쪽 의 아카드(Akkad) 왕국의 정치적 지배 아래 있었는데 이 때의 왕 만이쉬투슈(Manishtushu, 기원전 2269~2255)가 이 쉬타르 성전을 재건했고, 나람신(Naramsin, 기원전 2254 ~2218)은 이 도시에 기념비를 남겼다. 만이쉬투슈의 업 적을 언급한 옛 아시리아의 샴쉬아다드 1세(Shamshiadad 1, 기원전 1813~1781)도 이쉬타르 성전을 복구하였다. 옛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Hammurabi, 기원전 1792~ 1750) 법전의 서문(iv60)도 유명한 이쉬타르 성전이 니느 웨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기원전 15세기에서 14세기 중반까지 니느웨가 미타 니(Mitanni) 왕국 치하에 있었을 때, 미타니 왕 투쉬라타 (Tushratta)는 이집트 파라오 아멘오피스 3세(Amenophis Ⅲ, 기원전 1402~1363)의 치통(齒痛)을 낫게 하려고 이 쉬타르 신상을 특별한 선물로 보냈었다. 그러나 니느웨 는 아슈르의 도시 국가 통치자들 덕분에 미타니의 지배 로부터 벗어났다. 이것이 아시리아 국가 성립의 시작이 었고 아슈르우발리트 1세(Ashuruballint I , 기원전 1362~ 1327)가 최초의 '아시리아 땅의 왕' 으로 등장하였다. 이 때부터 니느웨는 아시리아의 다른 핵심 도시들과 함께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중기 아시리아 제국 시대 즉 살마네셀 1세(Shalmaneser I , 기원전 1273~1244)로부터 아슈르바니팔(Ashutbanipal, 기원전 668~627) 때까지 최소 한 13명의 왕들이 니느웨에 궁전을 지었고, 또 이쉬타르 성전을 개축하였다. 산헤립(Sennacherib, 기원전 704~681)은 점점 커가는 아 시리아 제국의 수도로 니느웨를 선택한 다음 그곳에 대 규모의 건축 사업을 벌였다. 도시의 남서쪽에 기반을 12~15m 정도 높인 다음, 집회실만 해도 70개가 넘는 웅장한 궁전을 지었다. 왕궁의 성문에는 인간 모습을 한 날개 달린 황소상을 세웠고, 여러 가지 아름다운 돌과 하 얀 석고로 줄무늬를 쳐서 성벽을 꾸몄다. 왕궁의 벽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장면이나 사냥하는 장면, 또는 수 호신들을 부조로 묘사하였다. 기원전 700년 이집트, 에 티오피아와 합세하여 아시리아 제국의 통치에 반란을 일 으킨 유대 왕 히즈키야(기원전 727~698)를 진압하기 위 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기에 앞서 팔레스티나 남부에 위 치한 이집트 변경의 주요 요새인 라키쉬를 포위하고 점 령하는 장면과, 높은 왕좌에 앉은 산헤립에게 항복하며 전리품을 바치는 장면도 바로 이곳에 있다(2역대 32장 ; 이사 36장). 산헤립은 또한 도시를 확장하고 두께 12~ 15m, 높이 30m 되는 "산처럼 높은" 성벽을 흙 벽돌로 쌓았다. 15개의 성문을 만들고, 왕궁으로부터 도시 중심 가를 통해 티그리스 강을 건너는 다리까지 행렬로(行列 路)를 만들었다. 산헤립의 기술자들은 그가 만든 큰 정 원에 물을 대기 위해 도시로 물을 끌어올리는 복잡한 구 조의 운하와 수로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도시 전체가 온 갖 식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산헤립의 아들 에살하돈(Esarhadon, 기원전 680~669)은 님로드(Nimrod)에 궁전을 짓기 시작했으나 끝마치지 못 했다. 그의 건축 사업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슈르바니팔 때 에는 아시리아 제국의 건축과 부조 예술이 극치에 이르 렀다. 그의 북쪽 궁전에는 전쟁과 사자 사냥 장면으로 가 득했고, 이 중에는 도망치는 엘람 왕과 그의 아들을 묘사 한 것도 있다. 에살하돈과 아슈르바니팔 치하에서 아시 리아 제국이 이집트까지 침공하였을 때, 니느웨는 세상 에서 그 어떤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아슈르바니팔은 니느웨의 북쪽에 궁전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옛 서적들을 수집했는데, 그는 전례 없는 책 애호 가로서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바빌로니아의 도서관과 개인 소장을 살살이 뒤져 토판을 찾아냈고, 복사판을 만 들었다. 다행히도 이 방대한 도서관의 모든 책들은 점토 (粘土, clay)로 만든 토판이어서 이집트의 파피루스와 달 리 화재에도 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바 빌로니아에서는 축축한 토판에 글을 쓴 다음 이것을 햇 볕에 말려서 보관하였고, 습기가 많은 아시리아에서는 종종 가마에 구워 보관하였다. 이 도서관의 장서는 수메르 시대부터 당시까지 축적된 지식의 총체를 망라한 것이다. 최초의 문법 책들, 수메 르-아카드어 사전, 문학 · 종교 문서에 대한 주석 책, 판 례법, 법률 용어 사전, 천문학과 점성술에 관한 자세한 기록-예를 들면, 월식(月蝕)과 일식(日蝕) 계산, 천문 의 12궁(宮)의 움직임에 관한 왕립 관상대의 보고서이 있다. 천문학에 대한 지식은 달력을 정하는 데 필요했 고, 이 달력은 신들의 축제일과 그에 따른 종교적 십일조 를 거두어들이는 사제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대 부분의 종교 문서들은 수메르 시대에 쓰여졌으며, 신들 에게 바치는 찬양시와 여러 성전에서 사용한 제의 문서 들도 이 도서관에 수집되었다. 아시리아 전통을 반영한 문학 작품들도 있다. 바빌로니아나 이집트에서는 성전에 서 종교 제의 문서를 수집 보관하였으나, 새 아시리아에 서는 왕궁에서 이 일을 하였다. 이 도서관에는 지명 · 동 물 · 조류 · 어류 · 식물 · 광물 등에 관한 백과 사전이 있 으며, 특히 꿈에 대한 해석이나 동물(주로 양)의 간을 관 찰하여 점치는 일을 기록한 토판도 많이 있다. 또한 의술 과 수학에 관한 참고 서적도 상당하다. 왕조의 연대기 (年代記), 무역과 교역 문서, 동산과 부동산의 매매 계약 서, 지방 도시에서 왕궁에 내는 세금에 관한 경제 문서 등이 있다. 한 부서는 편지로만 채워져 있는데, 약간은 사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고급 관리들과 제국의 공무원 들이 왕에게 보내는 서한이다. 대부분의 토판들은 분류 별로 목록을 정해서 배열하였으며, 색인을 만들어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새 아시리아 제국 시대의 수도는 니느웨에서 남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아슈르' 였고, 이곳은 제국의 종교적· 대외적 수도 역할을 계속하였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 (Ashurnasirpal II , 기원전 883~859)는 갈라(님로드)를 선호 (選好)했고, 사르곤 2세는 두르-샤르킨(Dur-Sharrukin, 지 금의 코르사바드[Khorsabad])에 훌륭한 궁전을 지었다. 산헤 립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니느웨는 새 아시리아 제국의 유일한 수도가 되었으며, 마지막 왕인 아슈르우 발리트 2세(Ashurubalit Ⅱ, 기원전 611~609)가 즉위하기 바로 전해까지 93년 동안 제국의 수도로 이름을 날렸다. 니느웨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에 대하여 당시 아시리아의 자료에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갈대아 왕조를 세운 새 바빌로니아 왕 네보폴라사르(Nebopolassar, 기원 전 625~605)의 연대기에 의하면, 기원전 612년 바빌로니 아와 메대(Medes)의 연합군이 니느웨를 3개월 동안 공 격한 끝에 파괴하였고, 당시 니느웨에 있었던 왕 신샤르 이쉬쿤(Sinsharishkun, 기원전 623~612)은 불에 타 죽었다 고 한다. 이 사건을 이야기로 전한 저자가 옛 그리스에도 여러 명 있지만,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디오도루스 (Diodorus Siculus, 기원전 1세기)의 설명이다. 스키티아인 아라바세스(Arabaces)가 니느웨를 2년 동안이나 포위했 으나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가, 3년째 갑자기 강이 넘쳐 서 성벽의 일부를 씻어 가는 바람에 포위군이 쉽사리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왕과 그의 수행원들은 화장(火 葬)용 장작더미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도시는 스키티아 인들에게 함락당하였다. 지휘관 요네스에 의하면 넘친 강은 티그리스가 아니라 성안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코쇼 르 강이었다고 한다. 예언자 나훔의 말대로 니느웨는 넘 치는 물(나훔 1, 8 ; 2, 6)과 타오르는 불(3, 13 ; 3, 15)로 종말을 맞이했다. 크세노폰(Xenophon, 기원전 5세기 초) 에 의하면 니느웨는 그 당시 이미 폐허로 남아 있었다. 〔니느웨와 성서〕 니느웨에 대한 성서 기록 가운데 가 장 오래된 이야기(창세 10, 11-12)에 의하면, 니므롯이 시 날 지방의 바벨에 왕국을 처음 세운 후, 그곳을 떠나 "아 시리아로 나와서 니느웨와 르호봇 성과 갈라를 세우고,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레센을 세웠다. 이는 큰 도시였다" 고 한다. 니느웨가 큰 도시라는 언급이 예언서 요나, 나 훔, 그리고 스바니야에도 있다. 역사적 기록으로는 산헤 립의 아들들이 산헤립을 암살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 로 니느웨라고 한다(2열왕 19, 36-37 ; 이사 37, 37-38). 또 많은 이스라엘과 유대 사람들이 아시리아로 귀양가 니느 웨에서 살았다고 한다(토비 1, 10. 17 ; 11, 17 ; 유딧 1, 1). 예언자들은 아시리아와 니느웨를 이스라엘과 유대 왕국의 가장 큰 적이 있는 곳으로 간주하였고, 대부분의 언 급이 니느웨의 멸망에 관한 것이다. 동시대의 두 예언자 스바니야와 나훔은 니느웨의 몰락을 예언하였다. 스바니 야는 니느웨에 대한 예언을 부수적으로 말했지만(스바 2, 13), 나훔의 예언서는 직접적으로 "니느웨에 대한 신탁 (神託)”(나훔 1, 1)이라 표현하였다. 나훔은 야훼께서 온 세상 일에 엄하고 올바른 심판자라는 찬양시로 시작하여 (1, 2-8), "거짓과 전리품으로 가득 찬 도시" (3, 1)인 니 느웨가 파괴될 것을 선포하고(1, 9-14), 도시의 마지막 날을 묘사했다(2, 1-14). 제국을 지배하던 그 당당한 도 시와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께 거스르는 갖은 죄악으로 인하여 벌받는 모습(3, 2-19)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토비 14, 4). 요나서에는 "니느웨는 굉장히 큰 도시로, 돌아다 니는 데 사흘 걸리는 곳" (요나 3, 3)이었으며, "오른쪽과 왼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 이상이나 사는 큰 도시였다" (4, 11). "40일 만에 니느웨는 망한다" (3, 4)는 요나의 외침에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하였다 (3, 5). 이러한 일을 계기로 예언자 요나는 많은 사람들 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라는 교훈을 남겼다. 마태오 복음 12장 39-41절과 루가 복음 11장 30-32절 에서는,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최 후 심판 때 예수의 시대 사람들을 단죄하기 위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 참고문헌 R.D. Barnett, Assyrian Palace Relifs, The British Museum, 1976/ The Cambridge Ancient History, vols. 1~3, Cambridge, 3rd ed., 1970~1973/ A.K. Grayson, The Royal Inscriptions of Mesopotamia : The Assyrian Periods, vols. 1~2, Toronto, 1987~1990/ W.F. Saggs, The Might that was Assyria, London, 1984. 〔安星林 . 曹哲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