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의미의 가톨릭 사회 운동은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현세 질서(사회)의 변혁을 위해 벌이는 활동이다. 넓은 의미로는 교회가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해 보이는 관심과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가리킨다. 비슷한 의미로 '가톨릭 사회 사목 활동', '가톨릭 운동' 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처음에 '가톨릭 운동' 은 평신도 중심의 활동을 의미하고, '가톨릭 사회 사목 활동' 은 성직자 중심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교회의 전체 구성원이 참여하는 운동이라는 뜻을 담을 수 없어 잘 쓰지 않는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서는 '가톨릭 사회 운동' 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 말을 공식 용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이 용어는 공식성을 띠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1970년대부터 꾸준히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가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운동이라는 의미를 가장 잘 담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원래 가톨릭 사회 운동이라는 말은 현장성이 강한 활동에 투신하던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활동을 '천주교 사회 운동' 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본래 가톨릭 사회 운동과 천주교 사회 운동은 같은 뜻이다. 다만 한국 교회에는 가톨릭보다는 천주교라는 명칭이 더 일반화되어 있는 까닭에 천주교 사회 운동이라고 부를 따름이다.
〔주 체〕 가톨릭 사회 운동의 주체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이다. 그러나 교회 전체가 항상 운동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운동을 교회 구성원 일부만이 갖는 관심사 정도로 보아야 할 때가 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사회 운동의 주체는 교회 안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소수(小數)의 사제, 수도자와 신도들이었다. 이렇게 주체가 특정한 계층에 한정되는 이유는 교회가 보편적인 관심사에 치중하고, 사회적 약자들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적게 가지며, 심지어는 교회가 이런 활동을 가로 막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런 활동을 감독하는 교회 권위와 운동에 투신하는 신자들 사이에 종종 갈등이 생긴다. 그러나 교회 안에 이런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또한 교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항상 운동의 주체는 가톨릭 교회이다. 가톨릭 노동 운동, 가톨릭 농민 운동, 가톨릭 학생 운동이라고 할 때는 특정한 계층이 주체가 되는 경우이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정의 평화 운동, 환경 운동과 같이-에는 교회의 구성원 곧 주교,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 모두가 주체가 된다.
〔대 상〕 가톨릭 사회 운동은 사회 문제 전반의 개선과 해결을 목적으로 한다. 특정한 계층이 주체가 되는 운동의 경우에는 그 계층의 관심사에 따라 대상이 정해지기도 한다(가톨릭 농민 운동, 가톨릭 노동 운동 등). 그러나 정의 평화 운동과 같이 전쟁, 인권, 가정, 생명, 소수 민족, 인종과 종교 문제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은 경우에는 정확한 대상을 한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리고 지역 교회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 운동, 한국 교회의 통일 운동 같은 경우에는 운동의 대상이 그 지역 교회의 특수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근 거〕 가톨릭 교회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전개할 때 이념적인 기초로 삼는 원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고, 다음이 신앙을 사회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가톨릭 교회의 사회 이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근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명하신 '선교의 사명' 이다. 신앙의 사회적 표현인 이 원리들은 대개 사회의 질서 원리에 속한다. 여기에는 연대성 원리, 공익 원리와 보조성 원리 세 가지가 있다. 이 원리들은 가톨릭 사회론(한국에서는 가톨릭 사회 교리로 쓰이기도 한다)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는 성서와 성전의 기본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 원리들은 모두 인간의 존엄성 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이런 원리를 기준으로 사회 문제를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의 결과를 투신의 근거로 삼는다. 투신의 결과를 다시 이 원리에 입각하여 반성하게 되고, 그 반성의 결과가 다시 실천으로 이어진다.
〔태동 배경〕 가톨릭 교회가 사회 문제에 대해 보인 관심과 실천의 기원을 살피려면 그리스도 교회의 창립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비교적 체계적인 가르침과 노력을 살펴보려면 초대 교회의 교부들에게로 가야 한다. 그러나 교회사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회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실천은 대개 부분적이거나 개인적인 형태였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삼기는 어렵고, 비교적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관심과 활동이 시작된 때를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전세계적인 규모에서 공식성을 가지고 사회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거나, 적어도 사회에서 교회의 이러한 실천에 주목하게 된 시기는 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와서임을 알 수 있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 문제가 커다란 사회 문제로 등장하던 19세기에 들어서인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 사회 운동의 초기 형태는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다. 유럽에서 19세기는 가톨릭 사회 운동의 전성기라 할 만큼 사회 문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활동이 두드러진 때였다. 그 예로 독일과 독일 주변국 가톨릭 신자들의 개인적 그리고 공동체적인 노력을 들 수 있다. 가톨릭 신자들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레오 13세가 1891년 5월 15일 반포한 <노동 헌장>(Rerum Novarum)으로 수렴된다. 이 회칙은 이후로도 가톨릭 사회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노동 운동을 제외한 다른 운동들은 사회 변화의 단계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운동은 20세기 초기에 와서야 비로소 태동되었고, 운동의 범위와 폭이 넓어지게 되는 시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의 등장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이후였다.
한국의 가톨릭 사회 운동 역시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도입과 함께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노동 문제에 개입해 가는 과정에서 가톨릭 사회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1970년대 초에 군사 독재에 저항하고 인권 옹호와 민주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심화되었다. 개발 독재로 규정되는 3공화국과 유신 시기에 군사 정권에 의한 혹독한 인권 탄압은 전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 시기에 한국 교회는 예언직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유 형〕 가톨릭 사회 운동은 운동의 목표와 활동 방식,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 운동 주체가 특정 계층인 경우는 가톨릭 노동 운동, 가톨릭 농민 운동과 가톨릭 학생 운동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가톨릭 학생 운동은 학내 문제나 교육 문제만을 다루지 않고, 한국에서처럼 사회 문제 전반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운동의 주체가 속한 계층의 관심사와 일치하지 않으므로 예외가 된다. 물론 모든 운동이 자신의 영역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가톨릭 노동 운동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신자 노동자만이 참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의 평화 운동처럼 대상과 주체가 서로 중복된다. 현대에 와서는 해방 운동, 환경 운동과 같이 시의성과 지역적인 특수성을 띠는 운동 형태가 등장한다. 해방 운동은 제3세계의 등장과 함께 역사에 대두된 형태이다. 특히 남미 대륙 가톨릭 신자들의 해방 운동은 해방신학이 세계 무대에서 각광을 받으면서 가톨릭 사회 운동의 새로운 영역으로 자리잡아 왔다. 환경 운동은 교회가 비교적 늦게 관심을 가진 분야인데 아직은 선언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고,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은 일부 지역 교회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가톨릭 노동 운동 : 가톨릭 노동 운동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톨릭 노동 운동은 유럽에서 발생했고, 특히 독일과 주변국들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유럽 교회의 노동 운동은 19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중반에 절정을 이줬다. 당시 가톨릭 노동 운동은 심각한 사회 불의와 노동자들의 고통, 유산 계급의 냉혹함과 몰이해를 대상으로 삼았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무엇이고, 노동의 주체가 누구였건 간에 가톨릭 신자들은 노동자의 처지에 서서 이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이러한 문제들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미국이나 다른 대륙 특히 남미의 가톨릭 노동 운동도 활발했지만 그래도 중심은 유럽이었다. 그중에서도 독일 가톨릭 교회의 노동 운동이 가장 활약상이 두드러진다. 독일 교회에서는 케틀러 주교를 비롯하여, 프란츠 요셉 리터 폰 부쓰, 아담 뮬러, 페터 랑헨스 베르거와 아돌프 콜핑 등이 활약하였다. <노동 헌장> 이후로는 교황의 이 회칙을 바탕으로 활동했던 '가톨릭 노동자 연맹' 이 중요하다. 또한 그 후 제국 의회에서 중앙당파의 사회 정책 주창자들이 1893년 프란츠 힛제를 필두로 노동자 사회 보장이나기업 내에서 기업가와 노동자들이 직능별 조직을 위해 사회 정책을 수립하고자 한 노력도 괄목할 만하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제외하고 독일 가톨릭은 더 이상 사회 개혁 운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개된 대표적인 가톨릭 노동 운동은 벨기에에서 시작된 지오세(J.O.C.) 운동이다. 이 운동은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 1981년 현재 125개국 700만 명의 회원을 모았고 창립 정신에 따라 청년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노동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톨릭 농민 운동 : 가톨릭 농민 운동 역시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시기가 훨씬 늦은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 가톨릭 농민 운동의 기원을 중세의 농민 반란까지 보려는 시도가 있으나, 체계적이고 교회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지원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기준으로 볼 때는 193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는 1954년에 마련되었다.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8개국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16개 운동 단체들이 가톨릭 농민회 국제 연맹을 창설하였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농민 스스로의 단결 협력, 농민 권익 보호, 인간적인 발전의 도모와 사회 정의 실현을통해 농촌 사회를 복음화하고 인류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58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인준을 받았다. 가톨릭 농민회는 창립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농촌 청년들 자신의 문제, 환경 개선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 청년을 지도하고, 청년들이 자신의 환경 안에서 복음의 정신대로 생활하도록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정의 평화 운동 : 가톨릭 교회의 사회 운동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여기에는 인권 수호와 신장을 위한 운동이 포함된다. 교회의 대부분의 활동은 넓은 의미에서 이 범주에 모두 포함된다. 이 운동은 오늘날 인권이 각 나라에서 과도하게 무시되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인격적 권리의 신장은 바로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고, 동시에 평화는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기 때문에"(세계 인권 선언 25주년에 즈음하여 유엔에 보낸 교황 바오로 6세의 메시지)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입각하여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체계적인 정의 평화 활동은 1970년대에 주교 대의원 회의 이후에 '교황청 정의 평화위원회' 가 조직됨으로써 전세계화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맞는다. 교황청 정의 평화위원회는 곧바로 각국에 정의 평화위원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5년에 교황청 정의 평화위원회는 각국의 정의 평화위원회와 그밖에 정의 평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엔의 세계 인권 선언 25주년(1948. 12. 10~1973. 12. 10)에 인권을 연구하고 성찰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교회와 인권》이란 책자를 발간하였다. 각국의 정의 평화위원회는 교구나 본당마다 정의 평화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분야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정의 평화 운동은 인권 운동, 민주화 운동, 생명 운동과 같이 지역의 특성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지만 모두 같은 목적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해방 운동 : 가톨릭 교회가 주체가 되는 해방 운동은 남미 교회의 특수한 상황이다. 500여 년에 걸친 백인들의 남미 침략사에서 보듯이 남미의 저항 운동은 뿌리가 깊다. 그러나 가톨릭의 해방 운동이 주목할 만한 규모와 형태로 그리고 교회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것도 제2차 남미 주교 회의(메데인 회의)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지속적인 해방 운동이 전개되어 왔다. 또한 전후 제3세계의 등장과 냉전 시대의 개막은 남미의 해방 운동을 자극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남미 대륙에서 해방 운동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가 모두 가톨릭 신자인 상황에서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질문하는 가운데, 그리고 현실적인 폭력에 대면하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해방 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맑스주의의 사주를 받는 비그리스도교적인 운동으로 치부되기도 하면서 교회 안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남미에서 가톨릭 운동은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일을 구체적으로 진척시키려면 혁명 투쟁만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통념이 생길 정도로 정치성이 강한 편이다. 이런 영향으로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느니보다는 사회 혁명에 투신하는 데로 전환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교회)와 사회 혁명(정치) 간의 경계선이 더욱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다. 1960년대 이후로 기존 운동 단체들간의 유대와 협력이 강화되고, 아울러 새로운 정치 운동을 지향하는 단체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이미 사제들로 구성된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고 이 단체들은 모두가 해방 운동에 개입해 왔으며, 남미 교회의 현존 구조의 개혁은 물론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이 대륙에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투신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 활동에 실제로 참여하는 사제가 있는가 하면 혁명 단체들과 연관을 맺는 사제들도 많다. 이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치 활동에 직접 개입해 왔고 또 개입하고 있다. 가장 가난하고 착취가 심한 지역의 주교들은 스스로 체험한 사회 불의를 매우 강경하게 고발해 왔다. 그들은 그 불의의 원인들을 밝히려다 경제적, 정치적 권력들과 충돌하기도 했다. 때로는 주교단 전체가 정치 영역에 관여하여 자기네 입장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주교단은 선언뿐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직자와 주교들이 노동 파업에 개입하거나 데모에 공공연히 참여하는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
환경 운동 : 일반적으로 환경은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뿐 아니라, 사회적 조건까지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환경 문제라고 하면 자연 환경의 파괴 방지 또는 공해 문제 해결 정도로 보아왔다. 그래서 반공해 운동을 환경 운동으로 보는 경향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환경 문제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관심이 제일 먼저 나타나는 문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이다. <사목 헌장>은 34항에서 "과학적이며 기술적인 발전을 옹호하고" , 35항에서 "인간 활동은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 인류의 진정한 복지에 부합하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전 무결하게 추구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면서 인간 활동이 조절되어야 할 필요를 선언하였다. 바오로 6세는 회칙 <80주년>(1971)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연을 불법 사용함으로써 자연을 파괴할 위험에 직면하고 인간 스스로가 도리어 이런 타락의 희생물이 될 위험도 없지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21항)고 고발하고, "끝없는 이농 현상, 기계 공업의 증대, 대도시의 매력 등이 사람들을 대도시로 집결시키고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대도시는 비대해 가고 있음"(8항)을 주지시켰다. 특히 바오로 6세는 이 도시화 현상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도시화는 분명 인류 사회 발전의 한 과정이며 막을 길 없는 현상이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인구 증가를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그 조직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시민들에게 어떻게 공익 정신을 심어 줄 것인가?"(10항)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구원자>(1979, 16항), <생명을 주시는 주님>(1986) <사회적 관심>(1987, 34항) 그리고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에서 인류와 환경과의 관계 개선을 마음에 새기도록 당부하였다. 이 담화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생태계 위기와 환경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투신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선언하였다. 지역 교회의 노력으로는 필리핀 주교단과 필리핀 신자들의 운동이 대표격이다.
〔한국의 가톨릭 사회 운동〕 한국 교회의 사회 운동은 기층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기층 운동과 사회 일반의 문제 해결을 위해 벌이는 운동으로 구분된다. 기층 운동에는 가톨릭 노동 운동, 가톨릭 농민 운동, 가톨릭 도시 빈민 운동이 있고, 전체 영역을 포괄하는 운동에는 정의 평화 운동이 있다. 이 운동에는 민주화 운동, 인권 운동이 포함되며 그외에 한반도에 특수한 통일 운동과 1980년대 후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환경 운동이 포함된다. 그러나 가톨릭 학생 운동은 학내 민주화와 같이 학생들의 이해 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운동보다는 사회 운동 특히 인권, 민주화, 통일 운동처럼 일반 사회 운동의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교회 안에서도 독자적인 영역이라기보다는 연대의 차원에서 여러 분야의 운동 영역을 관할하고 있으므로 독자적인 영역으로 넣기는 어렵다.
가톨릭 노동 운동 : 한국 가톨릭 교회의 노동 운동은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결성과 활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전에 가톨릭 교회가 노동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보인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노동청년회는 1958년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 수원교구 선면공업주식회사 노조 결성, 서울대교구 드레스 미싱 노조 결성, 전주교구 제지 공업 임금 인상 사건 등에 관여했다. 교회 전체로는 1968년 강화도 삼도직물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이 주도적으로 노조를 결성하여 탄압을 받게 되면서 구체적인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교회뿐 아니라 전사회에 노동 문제가 본격적인 관심사가 된 것은 1970년에 발생한 전태일 분신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12~14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작업 환경에 시달리며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있던 노동자들의 삶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10여 년의 활동 경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직장에 봉사하는 수준이었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문제는 도외시하는 단계였다. 그렇지만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당시의 상황에서 노동의 가치를 올바르게 깨우치고 노동자의 인간 된 보람을 위해 노동 사회의 혁신을 부르짖으면서 단결의 터전을 만들어 나가는 등 그때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활동을 하였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노동자 안에서, 노동자에 의해, 노동자를 위해' 노동자 운동의 계기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 이후 생산직 노동자들이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구성원의 다수를 이루게 되면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활동은 점차 임금, 근로 조건, 인격적인 대우 등의 노동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또한 연대 활동으로 프로테스탄트의 도시 산업 선교회와 함께 활발한 현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성과는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서울통상, YH 등의 노동 현장에서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들이 민주 노조 운동에 촉매 역할을 한 데서 드러난다. 그 결과로 가톨릭 노동 청년회와 도시 산업 선교회는 유신 정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천주교회가 유신 정권에 저항하고 있었기에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은 교회와 큰 마찰없이 노동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과 1970년대 노조 운동은 경제 투쟁(생존권 투쟁) 중심이었고, 인권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정치 변화를 잘 파악하지 못해 12 · 12 군사 쿠데타로 1970년대 민주 노조의 해산과 함께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도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또한 반공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사회 환경에서 노동 문제는 사회주의 운동과 동일시되면서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노조 운동을 위축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980년 5월 광주 항쟁을 계기로 외세-군부-매판 자본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사회 현실을 조명하게 되었고 노동 운동에 있어서도 정치 지향적인 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1970년대의 민주 노조 운동이 갖고 있던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었다. 또한 맑스 · 레닌주의(Marx-Laninism)가 일반 노동 운동의 변혁적, 사상적 이론으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극심한 이론 투쟁이 전개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는 역대 교황들의 사회 회칙과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활동은 침체되었다. 그것은 공안 기관의 탄압과 일반 노동 운동의 성장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가톨릭 노동 청년회 운동에서 한계를 느낀(당시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린즈 회의의 결과를 보고 1세계와 3세계권이 분화되었다) 노조 운동과 가톨락 노동 청년회 운동 출신의 노동자들은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등과 함께 공단 지역으로 이전하여 나름대로 노동자들에게 초보적인 권리 의식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집단 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현실에 대한 자각을 높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천주교 정의 평화위원회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고, 권리 신장을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의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법 개정 서명 운동' 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벌이게 되었다. 또 하나 특기할 사건으로는 부평 · 이리 · 성남 등의 노동 사목이 주축이 되고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서 보다 의식적이고 진취적인 회원 등이 지원하여 '가톨릭 노동 사목 연구소'를 창립한 것이다. 이 연구소에서는 노동 현실에 대한 실태 조사, 노동법 개정 연구, 노동 문제에 대한 초보적인 권리를 자각시키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노동 사목간의 연대의 기틀을 다졌다.
1986년과 1987년에는 지역 노동 사목이 부천 · 주안 · 대구 · 마산 · 부산 · 반월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 '가톨릭 노동 사목 전국협의회' 가 결성되었다(당시 16여 개 지역). 1987년의 노동자 투쟁은 1960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경제 성장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노동 대중들의 불만과 지향이 집약, 집중되어 나타난 노동자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대투쟁이었다.
노동 현장 곳곳에서 터져나온 투쟁의 열기는 "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아보자" 등의 요구로 나타났고 이는 한국 노조 운동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다. 1987년의 6월 항쟁, 7 · 8월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1988년 여소 야대의 정치 지형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소위 공안 정국이 조성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노동 운동과 기층 운동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조직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3년여에 걸쳐 민주 노조 운동이 발전하였고, 전반적인 노동 대중의 의식적 · 조직적인 발전을 가져온 후였기에 그렇게 심한 타격은 받지 않았다. 가톨릭 노동 운동은 전체 민족 민주 운동과 함께 계급과 계층, 지역을 극복하고 연합적인 단결체를 지향하면서 자주 · 민주 · 통일 운동의 발전에까지 나서고 있다.
가톨릭 농민 운동 : 가톨릭 농민회는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농촌 청년부로 시작하여 1966년 10월 17일에 '한국 가톨릭 청년회' 로 창립하였다. 이때에는 가톨릭 농촌 청년이 중심이 되어 착한 사람, 착한 생활, 모범 농사 등을 통한 마을의 환경 변화를 추구했으며 종교 · 기술 · 생활 교육에 의한 계몽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1971년 11월 조직 강화위원회에서 '농민 권익 옹호, 사회 정의 실현' 을 활동 목표로 설정했다. 이것이 가톨릭 농민 운동의 첫걸음이 되었고, 가톨릭 농민 국제 연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가톨릭 농민회로 거듭나면서 1974년 민간 단체로서는 최초로 농지 임차 관계 조사' 를 통해 토지 문제를 제기했고, 1975년부터 '쌀 생산비 조사' 를 통한 가격 보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장 또는 전국 단위로 외국 곡물 수입 반대, 강제 농정 시정, 부당 농지세 시정, 농협 민주화 등의 활동을 끈질기게 추진하였다. 농협이 고구마 계약 수매를 이행하지 않아 발단이 된 '함평 고구마 사건' (1976~1978)에서도 농민은 2년 만에 승리하였고, 이를 계기로 농협의 고구마 수매, 80억원 부정을 폭로하였다. 감자 농사 폐농으로 발단된 '안동 농민회 사건' (일명 오원춘 사건)은 가톨릭 농민 운동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생산, 신용, 구판, 이용 협동, 공동 작업, 생활권 중심의 지역 협의회 결성, 분회 활성화를 위한 마을 공동체 기반 조성, 유기 농업 및 도농 직거래 , 쌀 및 밭작물 생산비 조사, 가격 예시 및 보장 요구, 농축산물 수입 반대, 부당 농지세 시정, 소작제(이른바 농지 임대차) 양성화 입법 추진 저지, 농민 관계 조합 민주화, 전국적인 소몰이, 경운기 시위, 반미 민족 자주 투쟁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현장과 지역, 전국 단위로 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가톨릭 농민 운동뿐 아니라 우리 나라 농민들에게 최대의 현안이 되고 있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과 이것이 농촌 사회에 미칠 치명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대안으로 도시 · 농촌 간의 연대 활동과 생명 공동체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도시 빈민 운동 : 천주교 도시빈민회는 서울시의 목동 재개발을 계기로 1985년에 '도시 빈민 사목협의회' 란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이 회의 탄생은 빈민 지역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인간 개발을 위해 노력하던 활동가들이 서울시의 대대적인 철거 재개발에 맞서 가난한 이들의 삶의 자리를 지키고 그들 안에서 인간 개발을 이루고자 힘을 모은 결과였다.
도시 빈민들에게 교회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8년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 도시 선교위원회의 실무자 교육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당시에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 회원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하였다. 이때 조직가가 주민들과 함께 주민 조직을 만들고 그들이 스스로의 조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알린스키의 지역 사회 조직 방식을 검토하였다. 그 후 인성회는 인간 개발 사무국' 을 중심으로 빈민 지역에서 함께 살고 있는 이들간에 유대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빈민 지역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의 인간 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하였다.
천주교 도시 빈민 사목협의회의 설립 바탕이 된 '복음 자리' 공동체의 형성 과정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77년 170세대가 '복음자리' 로 이주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스스로의 보금자리를 건축하면서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들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980년대 전면적인 철거의 시발점이었던 목동 재개발 과정에서 복음자리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목동 지역민이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운영함으로써 자신들의 경험을 사회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한편 가난한 이들의 인간 개발을 위해 활동하던 이들간에 연대의 필요를 느껴 목동 사건을 계기로 다른 지역민들로부터 도움과 조언의 요청이 쇄도하자 인간 개발 사무국에 관여하던 이들과 복음자리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 1985년 '천주교 도시 빈민 사목협의회' 를 결성하였다. 1986년에는 주민 조직을 결성하고 철거 대상 지역 주민들을 함께 모이게 하는 주민 연대 교육 모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7년에는 '천주교 사회 운동협의회' 에 가입하여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통해 사회 민주화만이 아니라 교회 쇄신에도 기여하고자 하였다. 6월 민주화 투쟁 때에는 상계동 철거민들의 명동 천막 거주로 시민과 교회에 각성을 촉구하였다. 1988년에는 '천주교 도시 빈민위원회' 로 이름을 바꾸고 지역 위원회를 강화하였다. 1989년에는 빈민 지역 주민들의 의례, 교육 문제, 빈곤 여성들의 문제 등을 통해 주민들을 교육하고 조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가톨릭 교구의 공식적인 빈민 운동은 서울대교구 도시 빈민 사목위원회의 설치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빈민 사목이란 가난한 자로 태어나 가난한 자로 살고, 가난하고 작은 이들의 이웃이 되어 주다 죽으신 예수를 따르는 가장 구체적인 일이다. 이러한 신앙에 따라 교회는 빈민 사목을 위한 교회의 공식 기구를 두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도시 빈민 사목위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설립 취지에도 드러나듯이 도시 빈민 사목은 교회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천주교 도시빈민회와 발을 맞추어 도시 빈민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도시빈민사목위원회는 "가난한 이들 속에 투신하는 원칙, 삶과 복음이 하나임을 증거하는 삶과 복음의 일치 원칙, 삶이 일을 창출하는 주민 주체의 원칙, 빈민의 최대 문제인 삶의 자리를 지키려는 삶의 자리 불가침 원칙, 참된 인간 관계에 의해 참된 생명이 발휘되는 공동체 건설을 통한 변혁 원칙" 을 바탕으로 철거 현장을 중심으로 조사 및 지원 활동을 중점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주택 정책에 대해 사회에 여론을 확산시키고 대(對)교회 홍보를 위한 공청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홍보 방법으로는 공청회, 비디오와 자료집, 도시 빈민 사목 주보를 발간하고 있다. 이밖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실천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연수회를 개최하였다. 그 예로 1989년의 아시아 사회 사목연수회와 세계 성체 대회 도시 빈민 현장 체험,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 공동체라는 주제로 열리고 있는 서울대교구 사제 연수회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도시 빈민 사목위원회는 수도자와 평신도들의 현장 체험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교회 안에서 도시 빈민 사목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민주화 운동과 인권 운동 : 민주화 운동은 시기별로 운동 주체에서 차이가 난다. 1970년대에는 비교적 정권에 대해서 자율성을 갖는 프로테스탄트, 가톨릭과 같은 국제적인 기반을 가진 종교들이 저항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자율적인 영역에 속하는 사제 운동이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형태상으로는 예언자적이고, 내용적으로는 고발의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다. 물론 평신도들의 참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생계를 보장받을 수 없는 위험한 정국이었기 때문에 사제 중심의 운동이 주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운동의 대중화와 기층 운동의 성장 결과 평신도 가운데 가톨릭 학생 운동이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평신도 성인들의 참여도 급증하였다.
1970년대에는 유신 체제 철폐 운동, 인권 유린에 대한 항의, 민중의 창의와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 사회 실현을 위한 사제단과 기타 평신도 단체의 활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사례로 유신 헌법과 긴급 조치 반대 운동(1974~1975), 민주 회복 국민회의 결성과 운영(1974. 11. 27~1975. 2. 4), 그리고 각종 민주 연합체의 결성과 참여, 원주 선언과 3 · 1 민주 구국 선언(1975), 자유 언론 실천 운동(1974. 10~1975.3)에 대한 지원, 동아일보 광고 탄압에 대한 대응, 언론 통제의 실상인 보도 지침 공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결성과 개헌 서명 운동 등이 있다. 인권 운동으로는 기도회 개최를 비롯하여, 김지하 구명 운동(1975~1981), 인혁당 사건 진상 조사와 구명 운동,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의 고문 치사 사건 조사(1975), 양심 선언 운동(1974~1975)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청 학련 사건, 남민전 사건, 김재규 사건, 5 · 17 정변 및 광주 항쟁 관련 사건, 전민학련 사건(1981),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1982),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1985) , 5 · 3 사태 관련 사건(1986) 부천서 성고문 폭로와 이와 관련된 사건(1986),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사건(1987)에서처럼 법률 구조 활동, 구명 운동, 서명 운동 등 사제단과 평신도 운동 단체가 중심이 되고 학생 청년이 연대하는 형식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통일 운동 : 한국 교회의 통일 운동은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활발해졌다. 올림픽 개최를 포함하여 1980년대 후반은 남한 전체의 통일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가톨릭 교회의 통일 운동에는 사제단과 가톨릭 대학생과 청년이 주도한 통일 운동, 교회의 공식 기구인 북한 선교위원회가 주도한 통일 운동 노력으로 크게 구분된다.
한국 천주교회는 통일 문제에 관해 공식 입장이나 구체적인 통일 방안을 제안하지 못했지만 정의 구현 사제단, 청년 학생 등을 중심으로 분단의 고통에 동참하려 노력하였다. 천주교 사회 운동협의회, 평신도 단체들과 청년 단체들 또한 통일에 관한 지지 성명, 입장 표명, 통일 문제에 관해 자체 연구를 해왔고 정의 구현 사제단과 북한 선교위원회를 중심으로 통일에 관한 한국 교회의 입장을 정리하는 이론적인 노력들을 수행해 왔다. 한국 가톨릭 농민회는 이 땅의 모든 이가 함께 어우러질 그날을 위해 기층 대중의 하나 됨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1984년과 1986년에 이어 1988년 8월 8일 '북한의 농민 형제' 에게 종자 · 농업 기계 · 영농 시찰단 교류 등의 남북 교류를 제안하였다. 교회에서는 1982년 12월 천주교 2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북한 선교부를 설치했으나 초기에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다. 보다 체계적인 사회 운동의 전망 속에서 통일 운동을 전개하는 과제는 1988년 이후 청년 학생들의 선도적인 통일 운동을 배경으로, 정의 구현 사제단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1988년 이후 보다 구체화된 사제단의 통일 노력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1988년 6월 전대협의 판문점 남북 학생 회담 출정식 및 '평양 축전' 참가 발표, 남북 동포간의 상호 교류의 적극 추진 의사를 밝힌 노태우 대통령의 7 · 7 선언, 야당 정치인들의 김일성 주석 면담용의 표명, 1989년 경제인 정주영의 평양 방문, 문익환 목사의 입북 및 구속, 이영희 <한겨레신문> 논설 고문의 북한 취재 기획에 따른 구속, 소설가 황석영의 평양 입북, 서경원 의원의 평양행 사건 발표와 구속, 이와 관련한 가톨릭 농민회 간부의 구속, 전대협 대표 임수경 양의 평양 축전 참가, 서경원 의원 수사를 위한 정치인 소환과 구인장 발부 사건 등이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던 상황에서였다. 1989년 7월 5일 사제단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기여하고 임수경(수산나) 양의 안전 귀환을 위해"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 임수경과 함께 귀환토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사제단은 1988년 이후 통일 신학의 정립을 위한 연구를 본격화했으며, 통일 문제에 관한 워크숍도 개최하였다. 또한 1989년 6월 6일의 임진각 통일 염원 미사 마련, 1989년 11월 4일 국가 보안법 철폐를 위한 천주교 공동위원회 결성 참여, 1990년 8월 16일 통일 염원 미사 마련 등 통일을 위한 실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통일 문제에 관한 사제단의 기본 입장들을 표명하였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1988년 7월 4일의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하여-우리의 기도와 선언" 1989년 6월 6일 임진각 미사에서 발표된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기 위하여 -민족 통일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선언", 1989년 8월 4일 정부의 7 · 7 선언 이행 문제에 관한 공개 질의로서 제시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 1990년 8월 16일 임진각 미사에서 표명된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우리의 소망" 등이다. 이 선언에서는 7 · 4 남북 공동 성명의 합의 사항인 자주 · 평화 ·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 수용, 통일 문제와 민주화 문제가 동시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 정부의 통일 논의 독점 반대 - 민간 차원의 통일 논의, 민간 교류 지지, 국가 보안법 철폐, 민족 자주화와 외세 불간섭, 미군 철수 · 비핵화 · 군비 축소 · 불가침 선언 표명 · 휴전 협정의 평화 협정으로의 대체라는 평화 군축 운동 등에 관한 사제단의 입장이 천명되었다.
통일을 위한 여러 실천과 각종 선언들(시국 선언 등)과 함께 민족 통일 문제에 관한 사제단의 이러한 입장 표명은 가톨릭 신자들의 통일 문제 인식을 유도하고, 비록 교회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지만 교회 통일 운동의 방향을 이끌어 왔다. 문규현 신부의 방북 이후에는 그로 인해 빚어진 교회 안의 혼란을 극복하고 사제단의 통일 노력을 계속해서 확산시키며, 사제단과 기타 교회 활동 단체들, 일반 신자들의 통일 노력을 결집시키는 조직적인 구심을 확보하고자 1989년 11월 4일 '국가 보안법 철폐를 위한 천주교 공동위원회' 를 발족시켰다. 또한 1989년과 1990년의 임진각 미사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통일을 위한 사제 · 평신도들의 의지를 천명하는 행사로서 통일 운동을 대중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통일과 북한 선교를 위한 최근 교회 내의 활발한 움직임 또한 통일 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다. 북한 선교위원회가 주관하는 통일 사목 연구 세미나 등의 연구 발표 활동, 전국 평신도 사도직협의회의 남북 신자 상호 방문 요청, 납북 사제들에 대한 주교 회의의 행방 확인 요청 등 교회 내 각층의 활동 증가는 통일 운동을 위한 저변 확대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환경 운동 : 환경 운동은 1990년대에 전교회적으로 각광을 받는 새로운 분야이다. 환경 운동은 생태계 보호와 반(反)공해 활동이 중심이다. 그러나 실제는 반공해 운동이라 할 만큼 공해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초기의 활동은 쓰레기 분리 수거, 합성 세제안 쓰기와 적게 쓰기, 자원 재활용, 오염원과 공해원에 대한 감시와 고발 등의 활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러한 초보적인 관심사를 더 발전시키고 생태학과 교회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이론서들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공해 문제에 대한 공학적인 접근과 해결책, 반공해 운동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부족한 상태이다. 문제 해결에 관건인 정치적 실천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 농민회는 1990년 2월 제20차 대의원 대회에서 생명 공동체 운동을 본격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사람과 땅 그리고 자연을 살리는 생명 농업 실천, 함께 사는 생활 공동체 건설,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 생활 건강 활동, 농촌 사회와 겨레의 복음화를 위한 농민 사목, 반생명적인 모든 체계 · 구조 · 문명 · 생활 양식을 극복하고 개선하는 활동을 본당과 긴밀한 관련을 맺으면서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인권 운동에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해 온 주교 회의 산하 기구인 정의 평화위원회는 1989년부터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하는 등 교육 사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여자 수도회 장상연합회, 한마음 한몸 운동 전국 본부 산하 '하늘 땅 물 벗 모임' , 환경 사제 모임, 대구대교구에서 꾸준히 활동을 벌여온 푸른 평화 운동본부 등은 가톨릭 교회 중심으로, 안동교구의 생명 공동체 운동은 비신자를 포함한 넓은 범위의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영향과 의의〕 가톨릭 사회 운동은 현세 질서의 변혁과 교회 쇄신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현세 질서 안에서는 교회가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사적 표지로서 인식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교회 내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 사회에서도 가톨릭 사회 운동은 한국 사회의 민주적인 발전과 교회의 쇄신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특히 한국 사회의 인권 향상과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는 교회 안팎이 인정하는 정도이다. 교회 내적으로도 가톨릭 사회 운동은 교회가 한국 사회에서 담당해야 할 임무를 깨닫게 해주어 교회 쇄신의 원동력과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가톨릭 사회 운동의 주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의심받을 정도로 교회 생활에 무관하거나 소홀히 하는 경향을 보여 일반 사회인들과 구별되지 않는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때로는 정치 제도에서 담당해야 할 임무를 교회가 요구하는 경향을 보여 불필요한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가톨릭 사회 운동에 대한 낮은 인식으로 운동의 주체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한편 교회는 가톨릭 사회 운동에서 보이는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해결 노력을 교회의 부차적인 임무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가톨릭 사회 운동을 저지하거나 적극적으로 활동을 막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가톨릭 사회 운동은 한국 사회와 교회의 발전과 성숙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고, 앞으로도 수행해 나갈 것이다. (→ 가톨릭 노동 운동 ; 정의평화위원회 ; → 한국 가톨릭 사회 운동)
※ 참고문헌 가톨릭 정의평화연구소, 《한국 가톨릭 교회와 소외층 그리고 사회 운동》, 빛고을출판사, 1990/ 一, 《알기 쉬운 공해 추방 상식》, 성바오로출판사, 1991/ 교황청 정의 평화위원회, 김윤주 역, 《교회와 인권》, 분도출판사, 19771 명동 천주교회,《한국 가톨릭 인권 운동사》, 분도출판사, 1984/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제2차 총회, 김남수 역, 《세계 정의에 관하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7/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 분도출판사, 1985/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위원회, 《사회》, 사목회의 의안 12권, 1984/ 한용희, <교회도 정치도 혁신되어야 한다》, 경세원, 1992. 〔朴文洙〕
가톨릭 사회 운동 -
社會運動
〔라〕motus socialis Catholicus · 〔영〕Catholic social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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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화 운동에 앞장섰던 헬더 카마라 대주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