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오 1세 I(?~867)

Nicol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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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1세 교황.

니콜라오 1세 교황.


성인. 제105대 교황(858~867). 축일은 11월 13일. 로 마 귀족 출신으로 출생 연월일은 미상. 수준 높은 지성인 이며 지배자적 성격의 인물이었다. 일찍부터 선임 교황 들의 신임을 얻어 세르지오 2세 교황 때 차부제, 레오 4 세 교황 때 부제가 되었으며, 베네딕도 3세 교황 때는 교 황청에서 주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또한 루드비히 2세 황제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으므로, 베네딕도 3세가 사망하자 황제의 영향으로 858년 교황에 선출되 었다. 교황이 되자 우선 제왕들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고, 서방뿐만 아니라 동방까 지 포함한 전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을 확립하는 일 에 최대의 관심을 보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방의 수도 대주교들과 동방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위시해서 국왕들과도 충돌하게 되었다. 니콜라오 교황은 첫 번째로 861년 라벤나(Ravenna)의 수도 대주교 요한과 충돌하였다. 요한 대주교는 가능한 한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꾀하고 수도 대주교로서의 영향 력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그의 관구 주교들과 성직자들 을 억압하고 교황령까지 침해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 한 니콜라오 교황은 그를 로마로 소환하였는데, 응하지 않자 그를 파문으로 굴복시켰다. 이어서 니콜라오 교황 은 랭스(Reims)의 수도 대주교 힌크마르(Hincmar의 '로 타드 사건' 과 '뷜파드 사건' 에 개입하게 되었다. 힌크마르 대주교가, 관구 소속인 스외송(Soissons)의 로타드(Rothade) 주교가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862년에 그를 파문 · 해임시키고 이어 관구 회의에서 그의 결정을 승인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로타드 주교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교황에게 호소하였다. 이에 교황은 힌크 마르에게 로타드를 석방하고 복직시킬 것을 요구하였고, 865년의 로마 교회 회의는 로타드의 복직을 결의하였 다. 그러는 동안 로타드 때문에 '뷜파드 사건' 이 일어났 다. 이 사건은 애당초 힌크마르의 선임인 에보(Ebbo) 대 주교가 면직 당시 뷜파드(Vulfade)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사제로 서품시킨 데서 비롯되었다. 힌크마르는 랭스 대 주교가 되자 이 성직자들에게 성무 집행을 금지한 데 이 어 853년에는 그들을 모두 해임시켰다. 이 조처는 그 후 교황들로부터도 승인을 얻었지만, 면직된 성직자 중 빌 파드가 부르즈 대주교로 추천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그 의 복직과 함께 나머지 성직자의 복직이 다시 거론되기 에 이르렀다. 이에 교황은 힌크마르에게 면직된 모든 성 직자들을 즉시 복직시킬 것을 명하는 한편, 직접 그들을 복직시켰다. 니콜라오 교황은 국왕의 일에도 개입하게 되었는데, 로렌 왕 로타르(Lothar) 2세의 이혼 사건이 중요한 계기 가 되었다. 로타르는 발드라다(Waldrada)라는 여인을 알 게 되자 합법적인 아내 토이트베르가(Theutberga)와 이혼 할 수 있는 구실을 찾았고, 이 문제를 교회 회의에 일임 하였다. 861년 아헨의 교회 회의에서 토이트베르가와의 결혼이 무효임이 선언되자 로타르는 즉시 발드라다와 결 혼하였다. 이 소식에 격분한 교황은 그 교회 회의에 참석 한 주교 중 왕에게 아첨한 쾰른의 군타르(Gunthar) 대주 교와 트리어의 토이트가우트(Theutgaud) 대주교를 파문 과 함께 해임시켰다. 그러자 황제 루드비히 2세는 아우 로타르를 위해 로마를 포위하고(864) 교황을 위협하였으 나 교황을 굴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니콜라오 교 황이 비록 제왕일지라도 윤리 면에서 문제가 있을 때 교 황이 개입할 권리가 있음을 실제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니콜라오 교황은 동방 교회에 대해서도 교황의 수위권 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이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 주교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이냐시오가 해임되고 유배되 자(858) 황실의 영향으로 일약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자리에 오른 포시우스(Photius)는 관례대로 교황의 승인 을 요청하였다. 교황은 사절들을 파견하여 우선 상황을 파악하게 하였다. 그러나 교황 사절들은 포시우스의 술 책에 넘어가 교회 회의에서 이냐시오의 해임에 동의하고 말았다(861). 이에 교황은 863년 로마 회의에서 포시우 스를 파문하고 이냐시오의 복직을 선언하게 하였다. 이 에 포시우스는 항의를 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불가리아 사건이 일어났다. 영세한 지 얼마 안된 불가리아 왕 보고 리스(Bogoris)는 라틴 교회에 접근하려는 의도에서 866 년 일련의 질문들과 함께 신앙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하 였다. 교황은 이를 친동방적인 불가리아인들을 라틴 교 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즉시 답 서 〈Responsa ad consulta Bulgarorum〉을 불가리아인들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동서방의 관계를 격화시키고 말았다. 실제로 동방의 반동은 대단히 컸다. 포시우스는 분개한 나머지 867년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여기서 '필리오궤'(Filioque)를 위시해서 라틴 교회의 전례와 관습들을 맹렬 히 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교황의 폐위를 선 언하고 교황을 따르는 자들은 파문당할 것이라고 위협하 였다(포시우스 이교).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교황이 사망하 고 곧 이어 포시우스도 황제의 암살로 인해 면직되자 사 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규는 동서 방 교회의 관계를 악화시켜 결국 1054년 결정적인 교회 분열에 이르게 하였다(동방 대이교). 니콜라오 교황의 교회 통치 이념은 첫째 속권에 대한 교권의 우위이다. 이는 제왕일지라도 교황이 그들의 윤 리 생활을 감시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둘째는 교황이 모 든 주교들의 일에 관여할 수 있다는 교황권의 절대적 우 위성이다. 이러한 이념은 물론 레오나 그레고리오 같은 대교황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만, 그것보다 는 니콜라오는 당시에 유포된 '가법령집' 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가(假)이시도로 법령집' (Pseudo Isidoriana) 으로 불리는 교황의 서한과 교령들을 모은 이 법령집은 이 무렵, 즉 850년경 랭스 관구에서 탄생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부분 위조되거나 변조 된 것이었다. 니콜라오 교황은 이 책을 로타드 주교로부 터 넘겨받은 후 즐겨 인용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오 교황 이 그의 통치 이념을 옹호하기 위해 그 법령집이 위조인 줄 알면서도 이용하였다는 일부 역사가들의 비난은 부당 하다. 왜냐하면 15세기까지는 아직 사람들이 그 진실성 을 의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오 1세는 위대한 교황이었다. 그는 황제권의 침 체로 시작된 '암흑의 세기' 의 문턱에서 교회의 권리를 대담하게 옹호하는 최고의 권위자로 나타났는데,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빛나게 하였 다. 그러나 이러한 잠시의 진보는 그의 사망 후 다시 무 서운 침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 교회 통치 이념은 멀리 그레고리오 개혁기의 위대한 교황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마침내 교황권의 최고 시 대를 열게 하였다. (→ 수위권 ; 포시우스 ; 동방 교회) ※ 참고문헌  Migne PL 119, pp. 769~1212/ G.H. Pertz,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epistolae VI/ Ph. Jaffé, Regesta pontificum Romcmorum I, Leipzig, 1881/ L. Dushesne, Les premiers temps de l'état pontifical, Paris, 1911/ F.A. Norwood, The Political Pretensions of Pope Nicholas I, Ch Hist 15, 1946, pp. 271~285/ F. Dvornik, The Photian Schism, Cambridge, 1948/ 一, The Patriarch Photius and the Roman Primacy, Chicago Studies2, 1963, pp. 94~ 107/ 아우구스트 프란츤 저, 최 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pp. 190~192.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