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오, 쿠사의 (1401~1464)
Nicolaus Cusa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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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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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의 니콜라오 추기경.
교회 정치가. 교회법학자. 수학자. 철학자. 신학자. 브 릭센(Brixen)의 주교이자 추기경. 1401년 독일 트리어 (Trier)의 쿠에스(Kues)에서 뱃사람인 크렙스(Henne Krebs)의 아들로 태어나, 1464년 8월 11일 이탈리아 움 브리아(Umbia)의 토디(Todi)에서 사망하였다. 본명은 독일어로 니콜라오 크렙스(Nikolaus Krebs)인데, 라틴어 로는 출생지에서 따온 별명이 붙어서, 처음에는 니콜라 오 트레베렌시스(Nicolaus Treverensis)라고도 하였으나, 보통으로는 니콜라오 쿠사누스 또는 쿠사의 니콜라오라 고 한다. 교육은 데벤터(Debventer)에 있는 '공주 생활(共住生 活) 형제회' 에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416~ 1417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1417년 10월부터 1423 년 가을까지 파도바 대학에서 교회법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아울러 자연 과학, 수학, 철학 등에도 심취했 으며 1425년 괄른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 해 1 월 31일에는 알트리히 본당을 첫 교회록(Beneficium)으로 받았지만, 이미 1416년부터 '트리어의 성직자' (clericus Treverensis)로 불리었다. 1425년 이후로 괄른 대학에서 몇 해 가르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갓 생긴 루뱅 대학 의 강좌 초청을 두 차례나(1428, 1435) 거절하기도 했다. 니콜라오의 맹활약은 1432년에 비롯한다. 이해 2월에 만더샤이트(Manderscheid)의 울리히(UIrich) 백작을 대리 해서 바젤(Basel) 공의회에 참석한 니콜라오는 곧장 신앙 논쟁에 가담하여, 특히 평신도의 성혈 배령(聖血拜領)을 주장하는 후스파와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공의회가 개 혁을 추진하기를 바라면서 우선 콘스탄츠 교령을 내세워 온건하게 그 신법적 권위를 옹호했다. 콘스탄츠 공의회 의장단의 한 사람인 체사리니(Giordano Cesarini) 추기경 이 주도하는 소수파의 일원으로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 하였지만, 이때 교황에 대한 일반 공의회의 우위성을 주 장한 그의 교회법 저작 《가톨릭 조화론》(De concordantia catholica)의 출간으로 일약 공의회의 저명 인사가 되었 다. 그러나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그리스인들을 설득하 여 이탈리아에서 재일치 공의회를 추진하고 바젤 공의회 의 다수파를 거부하게 되자, 니콜라오는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전력을 바쳤다. 그는 황제와 동방 교회 고위 성직 자들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탈리아로 안내한 교황 사절 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페라라에서 일치 협상이 시작 되자, 니콜라오는 교황의 특명을 받아 독일로 가서 공의 회주의자들과 '중립' 야욕가들인 군주들을 상대로 10년 에 걸친 교회 정치적 씨름을 벌이며 '에우제니오파의 헤 라클레스 로서 교황과 동로마 제국의 화해를 위하여 남 다른 활약을 수행하였다. 1448년 12월 20일 추기경으 로 지명되었다. 1450년 4월 26일 교황 니콜라오 5세에 의하여 브릭 센의 주교로 서품된 후로, 니콜라오는 빈에서 하렘까지 두루 바쁜 역정을 펼쳤다. 잘츠부르크(Salzburg) · 마그데 부르크(Magdeburg) · 마인츠(Mainz) · 쾰른(Köln) 등지의 관구 공의회에 참석하고, 수많은 개혁 교령을 발표하고, 성직자들과 백성들 앞에 순방 설교를 행함으로써, 성년 대사(聖年大赦)를 알리고 평화의 전달자가 되어 미신과 형식적인 신앙 생활로서의 외면화에 대항하면서 교회의 종교적 쇄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브릭센 교구의 사목에도 마찬가지로 신명을 바쳤 다. 5년 후에는 거기서의 그의 개혁 노력들이 좌초하게 되었는데, 영토 지배권을 복고하려는 시도가 티롤의 백 작인 지그문트(Sigmund) 공의 저항에 마주친 것이다. 1458년 9월 14일에 그는 자기 교구를 떠났다. 이번에는 교황 비오 2세가 그에게 교황청과 이탈리아에서 수행할 큰 소임을 맡겼는데, 1459년에 그는 로마와 알프스 이 남 지역 교황령의 교황 대사로 임명되어 교황이 만투아 에서 군주 회의에 참석하여 부재중인 동안 최고권을 행 사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니콜라오는 정력적으로 평화 를 확보하였다. 교회 일반의 개혁을 선도할 로마 성직자 의 개혁도 개시하였다. 그때 작성한 개혁안(Reformatio generalis)에서 그는 교황에게 신학적으로 꿰뚫어 궁리한 시안을 제출했다. 그의 묘비는 빈콜리의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있으며, 성 니콜라오 병원 설립에 유산을 기증하는 그의 유언장이 오늘날까지도 그곳에 소장되어 있다. 〔저 술〕 치열한 외부 활동에서도 놀라울 만큼 니콜라 오는 사색에 몰두하고 풍부한 글들을 남겼다. ① 그의 저 작 가운데 일부는 당시 교회와 국가 생활의 상황과 쇄신 을, 또 큰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다룬다. 세 권으로 된 《가톨릭 조화론》(De concordantioa catholica, 1432~1433)은 바젤 공의회 때 나온 것으로, 플라톤 철학의 인간론의 체 계(영혼-정신-몸)에 따라 보편 그리스도교 질서의 모형을 설계하여,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하나인 교회가 하느 님의 영과 사제들의 정신과 신도들의 몸으로 조화된 공 명" (Ⅲ, 41)을 이루는 유기적인 조직으로서 신성 제국 (Sacrum Imperium)을 제시한다. 콘스탄티노플 사건 후에 나온 대화집 《신앙 평화론》(De pace fidei, 1453)에서는 갖 가지 민족과 종교들의 대표자 열일곱 명을 하느님의 말 씀에 비추어 소개하면서 베드로가 대표하는 교회 안에 그 모두의 종교적 관심사가 어떻게 충족되어 있는지를 알린다. 그의 《코란 정선》(Cribratio Alkoran, 1461)은 코란 의 알맹이를 가려 이슬람교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신비들 을 이해시키려고 한 것이다. ② 열한 권의 수학 저술(1445~1459)에서 니콜라오는 원의 넓이 같은 문제에 칼질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숫자 와 기호들을 철학 · 신학의 상징으로 삼았는데, 특히 《신 학적 보완》(Complementum theologicum, 1453)이 그 좋은 예 이다. 이미 바젤에서 그는 천문학 지식을 평가하여 《달 력의 개작》(Reparatio Kanendarii, 1436)을 꾀한 바도 있다. ③ 대표 저서인 삼부작 《무지의 지(知)》(De docta ignorantia, 1440)에서 '원리 박사' (decretorum doctor) 니콜라오 가 전개한 철학적 신학적 깊이와 독창성은 오늘날 새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느님과 우주와 인간과 더욱이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서 불가분의 관계로 맺 어져 기본 주제를 이루고 있다. 1442/1443년에 그는 《추정론》(De coniecturis)을 탈고하였는데, 실재에 대한 모 든 인간 인식의 유비적 성격이 강조되어 있다. 이어서 3 부작 《De Deo abscondito》와 《De quaerendo Deum》과 《De filiatione Dei》(1444. 12. 25~1445. 7. 27), 《De dato Patris luminum》 (1445/ 1446), 《Coniectura de ultimis diebus》(1446), 《De Genesi》 (1447), 《Apologia doctae ignorantia》(1449), 《Idiota de sapientia, de mente, de staticis experimentis)(1450), 《De visione Dei》 (1453), 《De aequalitate》(1459), 《De principio》(1459), 《De Possest》(1460), 《De non aliud》(1461~1462), 《De venatione sapientiaey》1462~1463), 《De ludo globi》(1462~1463), 《Compendium》(1463), 《De aspice theoriae》(1464) 등이 나왔다. ④ 그 밖 에도 성서신학과 교의신학 소품들이 있으며, 특히 약 300편의 강론들에서는 그의 종교 사상적 창의성이 돋보 인다. 〔사 상〕 니콜라오의 저술들의 접근 방식은 전반적으로 스콜라식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를 당시의 어느 한 신학파에 자리매김할 수는 없다. 그는 신플라톤 사상 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의존하는데, 이 전통은 프로클루 스(Proclus)와 가(假)디오니시오(Pseudi-Dionysius)에게에서 비 롯하여 스코투스(Duns Scotus)를 거쳐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에 이르고 있을 뿐, 무슨 학파와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니콜라오는 스콜라식 문제 제기와 찬반 논증 방 법을 거부하고 새로운 철학적 논술 방식을 전개한다. 이 자체가 모든 인간 지식은 부정확하며 진리는 '무한히 많 은 단계' 를 거쳐서라야 얻을 수 있다는 니콜라오의 굳은 확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문제와 대답마다 그 결정된 자 리가 있는 '신학 대전' 식 중세 이상이 그에게는 이미 존 재하지 않는다. 니콜라오의 수학적이며 철학적인 논술에 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 요인인즉 모순들이 무한 속에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당의 합일' (coincidentia oppositorum)이다. 이것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니스까지의 여 행 중에 그에게 발생하여(1437~1438) 그에게 "위로부터 내려온 선물"처럼 여겨졌던 원리이다. 이 원리에 힘입어 그는, 비록 어설픈 수학자이긴 하지만, 원의 구상(矩象) 과 원의 변형 문제를 그것의 길이로 단순화하여 풀 수 있 다고 믿었다. 신 론 : 이 원리의 발견으로 그는 무엇보다 '무지의 지 (知)' (docta ignorantia)라는 새 방법에 이르렀다. 그는 이 것을 먼저 인간의 하느님 인식에 비추어 전개하였다. 절 대 일치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신플라톤 철학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그는 삼위 일체가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본 개 념이므로 그 개념이 다른 개념에 우선한다고 하였다. 절 대 일치는 무한하다. 무한과 유한 사이에 비교 관계란 허 용되지 않는데 인간의 사고는 비교에 의존하므로 하느님 은 그런 인간 사고에 수용될 수 없다. 하느님은 인간의 인식에서 그처럼 멀리 있고 보면 그리스도교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하느님에 관하여 진술한 모든 것이 결국은 알맹이 없는 빈말인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따 르면 존재의 유비로 이 무한한 괴리를 극복하는 데에 도 움이 되는 개념들이 마련된다. 이 방법을 니콜라오는 채 택하지 않았는데, 존재의 철학이라는 그 가정을 그는 수 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전개한 방법은 상징을 통 하여 탐색하는(symbolice investigare) 방법이다. 한 상징은 그 본성상 그것이 상징하는 어떤 것과 관련된다. 한 상징 이 나타내는 것은 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한 모상이다. 어디서 상징을 얻는가? 니콜라오는 대답한다. 인간 지성 은 상징을 스스로 생각해 내거나 만들어 낸다. 한 대상이 있는 그대로 알려지는 것은 오직 그것이 인간 지성 덕택 에 존재할 때뿐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니콜라오는 그 의 첫 상징들을 기하학에서 고른다. 한 주어진 직선에서 부터 한 삼각형, 한 원(圓), 한 구(球)들이 '전개' 된다. 이들은 이미 직선 자체 안에 잠재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니콜라오는 이중의 초월을, 곧 무한으로 넘어가 는 두 모험을 요청한다. 첫 단계로 그는 무한한 직선에 이른다. 단 하나가 있을 뿐인 이 무한 직선은 그 자체 안 에 삼각형과 원과 구의 잠재성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에 무한한 삼각형이요 무한한 원이며 무한한 구이다. 이 무한한 기하 공식은 상상할 수 없을 뿐더러 합리성도 초월하는데, 직선과 곡선의 대당들이 그 안에 용해되어 있는 까닭이다(대당의 합일). 둘째, 초월에서는 모든 양(量)에서부터 추상하여 나와 서 하느님의 절대 단순한 무한으로 솟아올라야 한다. 이 로써 '무지' 에 머물지만 그것은 '무지의 지(知)' 이니, 상징들에서 하느님의 무한성을 어느 모로 접하기 때문이 다. 마치 거울을 통해 어슴푸레 보는 것과 비슷하다(1고 린 13, 12). 이렇게 해서 상징은 하느님의 무한성이 일치 성임을, 동시에 절대적인 충만이자 그 자체 안에서 내포 적으로(complicite) 모든 대당들을 절대적 단순성 속에 안 고 있는 그런 일치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추정론》에서 는 이 교설도 바꾸어, 하느님은 대당의 합일보다도 무한 히 높이 계시다고 주장한다. 우주론 : 니콜라오의 기하학적 상징들은 비판의 여지 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골몰하여 마지않은 상징 신학은 그 자체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특히 심오한 형안은 《천 구 운행론》(De ludo globi)에 담겨 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전개' 하시되, 다른 모습으로 하셨다. 비록 모든 피조물들이 대당되는 존재를 갖는다 해도 어딘가 하느님의 모상들이 되도록 하셨다. 우주는 공간과 시간에 주어진 한계가 없는 그만큼 하느님의 무 한성에 참여한다. 우주는 또한 하나의 단일체이다. 하느 님처럼 절대 일치는 아니지만, 잠재적으로 무한한 다양 성과 세분화를 내포하고 있는 대당되는 단일체이다. 우 주의 '자기 전개' 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우주는 단계적으로 발전한다. 니콜라오의 이 단계적 · 위계적 우 주 사상은 전통 사상으로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은 - 뒷날 라이프니츠(G.W. Leibniz)가 체계화 하였거니와 - 모든 단계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세계 가 극미한 요소에서부터 지고한 영들에 이르기까지 끊이 지 않는 연속성을 띠고 있다는 사상이다. 둘째 생각은 실 존하는 것마다 낱낱이 결정되어 있다는 착상으로 출발한 다. 우주는 개체 안에서 입증된다면 개체는 우주를 대표 한다. 니콜라오는 기본적으로 고대와 중세의 세계 개념과 절연한다. 우주가 공간이 무한하다면 움직일 수 없는 중심은 없다. 우주의 혹성들 가운데 하나인 지구는 보이는 세계의 다른 존재들보다 완전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거처라는 점에서 우주 안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론 : 인간은 소우주(microcos-mos)이다. 이것은 그리스 자연 철학에서 처음 표현된 사상인데, 니콜라오는 더 나아가 '인간적인 신' 과 '제2의 신'으로서 인간을 말한다. 그의 경우 이말은 르네상스식 인간 자존의 표현이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였다는(창세 1, 27) 하느님 말 씀의 해석이다. 니콜라오는 이 닮음을 무엇보다도 인간 지성의 창조력에서 본다. 하느님이 실재 세계를 창조하 였듯이, 인간은 비단 개념들의 세계를 (수학적 개념들도 포함하여) 창조할 뿐 아니라 또한 자연 안에서가 아니고 자기 자신의 지성 안에서만 모형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많은 것을 창안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도 인간은 만물 을 당신 자신 안에 품고 계신 창조주와 닮았다. 인간은 또 필경 의지의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닮았다. 다만 이 자유는 악을 선택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는 점에서 하느님과 닮지 않았다. 인간은 스스로 천사가 될 수도 있고 금수가 될 수도 있다. 둘 다 인간 본성에 잠재적으로 담겨 있다. 인간의 윤리적 책임은 자신 안에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과의 닮음을 개발하는 데 있다. 그 밖의 공헌 : 니콜라오는 과학적 노력의 여러 분야 에서 전문가가 되지 않고도 새로운 빛을 던져 기여한 보 편적 사상가이다. 천문학과 수학에 대한 그의 공헌은 중 요하다. 천평칭으로 '사고 실험' 을 하여 과학적 방법론 의 역사에서 한자리를 얻었다. 중유럽의 최초의 지도가 그의 영감으로 생겨났다. 독일어로 된 첫 교리 교육 괘도 도 그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법학자요 사학자로 서 콘스탄틴 증여 문서(Donatio Constantinii)가 불법 위조 문서임을 알아낸 사람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게르만법 의 고대 원전들을 통일 게르만 법전으로 편찬하고자 했고, 브릭센 교구 교회 영토의 발전에 관한 주교관 기록 문서를 정확히 알고서 영주로서의 자기 권리를 근거 있게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포용 정신은 매사에서 완전한 조 화를 재건하는 일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으나, 이 거대한 설계는 성취되지 않은 채 이상으로만 남았다. ※ 참고문헌 J. Koch, 《NCE》 10, pp. 449~451/ R. Haubst, 《LThK》 7, pp. 988~991/ Maurice de Gandillac, Dictiomaire des Philosophes,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3, pp. 2105~2112. 〔鄭漢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