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골
樓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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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소재지요 최양업(崔良業, 토마) 신부의 탄생지. 현재의 행정 지역명은 충남 청양군 화성 면 농암리(農岩里) 월내동(月內洞)으로, 인근에서는 가 장 높은 오서산(鳥棲山, 790m) 기슭에 위치해 있다. 본 래 '다락골' 은 마을의 형태가 다락〔樓〕 모양과 같다는 데서 유래되고 있는데, 이것이 훗날 '달안골' 〔月內洞〕로 바뀌어진 것 같다. 혹은 다래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다래골' 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직후라고 추정되고 있다. 즉,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인 최한일(崔漢駝)이 내포의 사도라 일컬어지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사망하고,곧 이어 박해가 일어나자 증조모인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외아들 최인주(崔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를 데리고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였다. 그러나 청양 지역에는 이미 그 이전에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고, 신해박해 때에는 홍주(洪州)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과 홍주 응정리 태생의 원시장(元, 베드로), 청양 제운의 태생 의 황 바오로 등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다락골에 정착하였던 최인주는 장성한 뒤 이곳에서 오 른쪽으로 약 700m 되는 골짜기로 이거하였는데, 그 후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하나의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 〔新垈〕로 명명되었 다. 최양업 신부와 부친인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 코)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 1830년대 초에 경기도 수 리산(修理山, 안양시 안양4동의 담배골)으로 이주하였다. 이후에도 다락골의 신자들은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해 오 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와 1868년의 무진 박해(戊辰迫害) 때 체포되거나 피신하였는데, 현재 다락 골 뒷산에 있는 30여 기의 줄무덤은 이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라 추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홍주나 공주에서 순교한 신자 들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고, 해미나 보령(保寧) 갈매못 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당시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이 줄무덤을 만들었는데, 박해 가 두려워 천주교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던 중 관아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마을을 불살라 신자 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 후 대전교구 와 청양 본당에서는 이곳에 있는 줄무덤을 조사하여 그 중 14기가 순교자의 무덤인 것으로 밝혀냈고, 1982년 무명 순교자비를 건립한 이래 두 차례에 걸친 작업 끝에 이곳을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 최경환 ; 최양업) ※ 참고문헌 崔相鍾, <최 바시리오 이력서>, 《순교자와 증거자 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方潤錫, <다락골과 새터>, 《교회와 역 사》 91호(1983. 1)/ 차기진, <청양 일대의 사적지와 鳴谷里 교우촌 (1)>, 《교회와 역사》 209호(1992. 10).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