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히〕דָּוִד · 〔라 · 영〕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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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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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금으로 사울의 조울증을 치료해 주는 다윗(라이덴 작) .
이새의 아들로서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다윗 왕조의 태조로서 예루살렘에서 기원전 1010~970년 사 이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 다윗은 유대의 베들레헴 출 신이고, 룻기 4장 18-22절에 의하면 보아스와 모압 여 인 룻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의 손자이다. 〔이름과 자료〕 다윗이란 이름은 시.편의 제목을 제외하 고 구약성서에만 180여 회 나온다. 다윗이라는 말의 의 미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자 (beloved on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마리(Mari) 문서에 나오는 다뷔둠(dawidum, 추장, 지도자)과 관련하여 해석 해 보려는 시도들도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 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주요 자료는 크게 나누어서 ① 신명기 사가의 자료(1 사무 16장 - 1열왕 2장), ② 역대기 사가의 자료(1역대 1129장), ③ 시편 89편과 132편, ④ 예언서(이사 9, 6-7 : 11, 1-9 : 예레 23, 5-6 : 에제 34, 23-24 : 호세 3, 5 : 아모 9, 11 ; 미가 5, 2)로 나눌 수 있다. 〔신명기 사가의 자료에 나타난 다윗〕 다윗에 관한 설 화는 권력 상승 설화(1사무 16장 -2사무 5장, 8장), 계약 의 궤 운반 설화(1사무 4-6장 ; 2사무 6장), 다윗 궁중 설 화 즉 다윗 후계자 경쟁 설화(2사무 7장, 9-20장 : 1열왕 1-2장 : 2사무 21-24장)로 나눌 수 있다. 권력 상승 설화 : 신명기 사가의 다윗의 권력 상승 설 화는 서로 중복되거나 상충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이는 신명기 사가가 여러 자료들을 사용하여 다윗의 역사를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두 번에 걸쳐 사울에게 소 개된다(1사무 16, 14-23 ; 17장). 첫 번째 이야기에서 다 윗은 수금을 가지고 사울의 조울증(manic-depressive)을 치료해 주는 음악가로 사울 왕궁에 나타난다. 두 번째 이 야기에서 다윗은 불레셋 용사 골리앗을 물리치는 사람으 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무엘 상 17장 55-58절에 의하면 사울은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칠 십인역 성서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다. 사무엘 하 21장 19절에서는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한다. 허니맨 (A.M. Honeyman) 같은 학자는 "엘하난은 다윗의 본명이 고, 다윗은 통치자로서의 이름"이라고 말하나 설득력이 약하다. 사울과 다윗의 역량을 비교하는 노래가 사무엘 상에 세 번이나 나오고(18, 7 ; 21, 12 ; 29, 5), 사무엘의 죽음은 두 번이나 언급된다(25, 1 ; 28, 3). 이와 같이 자료들이 다양하고 서로 상충되기도 하지 만, 이러한 자료들은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의 왕이 될 사람임을 합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신명 기 사가는 다윗이 사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 를 입증하기 위하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런 방향에서 자료들을 해석하였다. ① 하느님이 다윗을 왕으로 선택함, ② 왕위의 계승권 을 가짐(다윗이 사울의 딸과 결혼함), ③ 용감한 군인으로서 의 모습, ④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옹립함에 대한 기사들 이 모두 다윗의 왕위 계승권을 합법화시켜 주는 자료들 이다. 이 가운데서 첫 번째 이유가 특히 중요한데, 다윗 이 왕이 된 것은 그에게 어떤 미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 느님이 그를 선택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신명기 사가 의 관점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계약의 궤 운반 설화 : 계약의 궤 운반 설화는 사무엘 하 7장의 성전 건축에 대한 관심과 함께 다윗이 하느님 의 경외와 제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계약의 궤는 다윗과 그 이전의 역사 · 종교 사이 를 연결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다윗 궁중 설화 : 다윗 궁중 설화 즉 다윗 후계자 경쟁 설화는 로스트(L. Rost)가 처음으로 다른 이야기들에서 분리하였고 '후계자 설화' (Thronfolgeerzählung)라는 이름 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이설화가 솔로몬이 후 계자로서 적법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 주는 역할을 한 다고 보았다. 이 이야기는 문학적인 면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가치성도 높이 평가되고 있 다. 화이브레이(R.N. Whybray)와 헤르미시온(H. Hermission)은 이 이야기에서 지혜 문학의 문체와 교훈을 발견 하기도 한다. 다윗과 사울의 관계 : 다윗이 사울에게 소개되고 군인 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자마자 다윗은 가장 유능한 군인으 로 평가받기 시작하였고(1사무 16-17장), 그 결과 사울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몇 번이 나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사울의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게 되 었다. 사울은 불레셋 사람의 포경 100개를 가져오면 미 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다윗은 그 조건을 만족시켜 미갈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사울 궁중에서 확고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1사무 22, 14). 사울과 다윗 의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되었으나 다윗의 절친한 친 구인 요나단에 의해서 겨우 현상 유지를 하게 되었다. 그 러나 사울의 시기가 점점 더 심해지자 다윗은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다윗은 먼저 라마로 갔다가(1사무 19, 1824) 그 다음에는 놉(1사무 21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불레셋의 갓 나라 왕 아기스에게 잠깐 머물다가(1사무 21, 10-15) 아둘람으로 가서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같이 지냈다(1사무 22장). 그 이후로도 그는 사울의 추적 을 피해 미스바, 크일라, 지브, 마온, 엔게디 등을 전전 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따라다니며 죽이려고 하였으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경우에도 사울을 죽이지 않 고 살려 주었다. 다윗은 결국 유다를 떠나 다시 불레셋으로 가서 갓 나 라의 아기스 왕에게 피난처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다윗 은 그의 사병들과 함께 시글락에 정착하게 되었다. 여기 서 그는 아말렉 사람들과 그 외의 종족들을 치고 빼앗은 노획물로 그의 가족과 사병들을 먹여 살렸다. 그 노획물 의 일부를 유대의 장로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1사무 30, 26-31). 다윗이 시글락에 머무른 지 2년 뒤 불레셋은 사 울을 공격하였다. 다윗은 이 전투에 참여할 허락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글락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되돌아와 보니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침략하여 파괴 한 후였다. 다윗은 아말렉을 뒤쫓아가서 보복하고 빼앗 긴 사람과 물품들을 모두 되찾아 왔다. 그 후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전사하였다. 한 아말렉 사람 이 자기가 사울을 죽이고 그 왕관과 팔찌를 가져다 바치 자 다윗은 그를 죽이도록 명령하고 사울과 요나단을 위 한 조가(弔歌)를 지어 바쳤다. 이때 불레셋은 최소한 이즈르엘 평지에서부터 남쪽 네 겝까지의 팔레스티나 땅을 차지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참패한 이스라엘은 길르앗 땅의 마하나임으로 밀려가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아브넬은 이스라엘의 군사령관으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다. 다윗은 헤브론으로 가서 왕이 되었고 7년 반 동안 불레셋의 봉 신(封臣)으로서 헤브론을 다스렸다(2사무 2, 11). 이스보 셋은 2년 동안 왕위에 있다가 암살당하였다. 이와 같이 이스보셋이 빨리 망하게 된 것은 군대 장관 아브넬이 이 스보셋에 대한 후원을 중단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아브 넬은 다윗에게 가서 그를 왕으로 모시기로 약속하였다. 아브넬은 요압에게 암살을 당하였다. 이렇게 하여 다윗 이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 다(2사무 5, 1-5).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 다윗 :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통 치하던 33년 동안에 있었던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정 확히 서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의 치적을 요약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전과(戰果) : 다윗이 왕이 된 후 첫 번째 한 일은 불레셋을 공격하여 물리치는 일이었다(2사무 5, 17). 그 는 예루살렘도 점령하였다(2사무 5, 6). 다윗은 주변 나라 들을 침략하여 모압, 암몬, 에돔, 아람-소바, 아람-다마 스커스 등을 점령하였다(2사무 8장, 10장). 다윗은 이 지 역들을 식민지로 다스리고 그들에게서 조공을 받았다.그 외에도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을 점령하여 다스렸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말라마트(A. Malamat)는 다윗이 소바 왕 하다데젤을 정 복한 사건이나, 다윗 시대의 영토에 대한 기록을 모두 역 사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다윗은 그술 왕 탈매의 딸과 결혼하고(2사무 3, 3), 그의 아들 솔 로몬을 암몬 왕의 공주 나아마와 결혼시키는(1열왕 14, 21) 등 주변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강화하였다. ② 통치 : 다윗의 관리들 명단이 두 곳에 나와 있다. 사무엘 하 8장 15-18절(1역대 18, 14-17)의 명단은 다윗 통치 초기의 것이고, 사무엘 하 20장 23-26절은 후기의 것이다. 다윗의 관리 조직은 이집트의 것을 모델로 하였 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요압은 군 총사령관이고, 여호사밧은 왕실 공보관, 사독과 에비아달은 사제, 스라 야는 비서 혹은 모든 외교 문서들을 관장하는 서기관이 었다. 브나야는 외인 부대 지휘관이었다. "다윗의 아들 들은 사제 일을 보았다" (2사무 8, 18)는 표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생소한 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의문을 제 기하는 학자들이 많다(1역대 18, 17에서는 '왕의 수석 보좌 관' 으로 수정한다). 아도람은 강제 노동 대신이고 이라는 사제였다(2사무 20, 26). 다윗은 야훼 종교 전승을 다시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 를 취하였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계약의 궤를 안치할 장 막을 치고 계약의 궤를 모셔 왔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아서 짓지 못하고 그 일을 아들 솔로몬에게 위탁하였다. 다윗은 인 구 조사를 지시하였는데(2사무 24장) 이 조사는 백성들에 게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인구 조사는 지파 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기 위한 첫걸음이었을 뿐만 아니 라, 세금을 징수하고 강제 징병을 실시하기 위한 조치였 기 때문이다. 인구 조사 때문에 하느님의 형벌로서 전염 병이 만연하였다고 성서 저자들은 전하고 있는데 이는 그 당시의 민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가족 : 다윗에게는 이름이 알려진 부인만도 8명이나 있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아들 여섯(2사무 3, 2-5 ; 1역 대 3, 1-4), 예루살렘에서 아들 열셋(2사무 5, 14 ; 1역대 3, 5-9)과 다말이라는 딸 하나가 있었다(2사무 13, 1). 다 윗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다윗 궁 중 설화에서 발견된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사 랑하였다. 암논은 다말과 단 둘이 있게 되었을 때 그에게 성폭행을 가하였다(2사무 13, 1-22). 압살롬은 암논을 미 워한 나머지 암살한 다음 아버지 다윗을 두려워하여 도 망갔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다음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반 란은 북이스라엘 지파들의 후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오래가지 않아 평정되었고 압살 롬도 살해되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왕 위에 올랐다. 다윗에 대한 반역은 또 하나 있었다. 베냐 민 지파의 세바는 "다윗에게 붙어 봐야 돌아올 몫은 없 다" (2사무 20, 1)고 하면서 북쪽 지파들이 다윗 왕조로부 터 독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세바의 반역은 실패로 끝나 고 말았으나 이는 르호보암 때에 나타난 왕국 분단의 전 주곡이었다. 이러한 가정 분란과 반란의 원인을 신명기 사가는 바세바 사건에서 찾는다(2사무 12, 10-12). 이상적인 왕 다윗 : 신명기 사가의 다윗 이야기에서 다윗의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긍정적으 로 묘사된 다윗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으로 묘사된 다 윗이다. 긍정적인 평가는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건, 사울의 궁중 악사가 되고 골리앗을 죽인 사건, 피난 시절 의 미담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고 유 다의 왕이 되기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사무엘 상 16장에 서부터 사무엘 하 10장에 나타나 있다. 부정적인 평가는 바세바 사건이 시작되는 사무엘 하 11장에서부터 가정 분란, 그리고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이 기록된 사무엘 하 20장에 이르기까지 나타나 있다. 사무엘 하 24장의 인 구 조사 사건도 다윗의 부정적인 측면에 속한다. 이와 같 이 신명기 사가가 다윗을 통하여 보여 주려한 것은 무엇 인가? 그것은 그와 그의 시대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의 모습이다(G. von Rad). 신명기 사가는 이스라엘이 이미 망하고 유다가 멸망 직전에 처해 있을 때부터 포로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쓰면서 이스라엘을 바르게 통 치할 이상적인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명기 사가는 이 이상형을 다윗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메시아 대망의 모 티브는 사무엘 하 7장의 다윗 계약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러나 신명기 사가가 발견한 역사적인 다윗은 결코 이상 적인 완전한 왕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명기 사가는 다윗 의 긍정적인 측면은 메시아 상의 긍정적인 측면 그대로 묘사하고, 부정적인 측면은 장차 올 메시아에게 있어서 는 안될 측면으로 경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왕으 로서의 다윗의 모습은 역대기 사가의 역사서에 더욱 분 명히 나타난다. 〔역대기 사가의 자료에 나타난 다윗〕 역대기 사가는 포로 후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쓰면서 다윗을 그의 이상 적인 왕으로 내세운다. 다윗을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하 기 위하여 역대기 사가는 그가 다윗 역사의 대본(臺本) 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무엘서 가운데에서 다윗의 목동 시절, 사울로부터의 피난 생활, 유대의 왕국 분열, 바쎄 바 사건, 솔로몬의 탄생 기사, 가정 분란, 압살롬과 세바 의 반란 등의 기사를 제거한다. 그 이유는 이 기사들이 대부분 다윗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 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채택하고 있는 기사일지라도 다 윗을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하는 데 맞지 않을 경우 그 부 분들을 제거하거나 정정하고, 또 본문의 위치를 변경하 거나 편집구 등을 삽입함으로써 그가 그리고자 하는 다 윗의 모습을 창출해 낸다. 이렇게 해서 묘사된 다윗의 모 습은 이미 신명기 사가에게서 시작된 이상적인 미래의 왕으로서의 모습으로 더욱 철저화된 것이다. 역대기에 나타난 이상화된 다윗의 모습은 대략 다음과 같다. 다윗의 족보 :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을 열거하면 서 역대기 사가는 다윗의 조상인 유다를 맨 앞에 내세운 다(1역대 2. 3). 그리고 솔로몬 시대의 4대 현자인 에단, 헤만, 갈골, 다라를 다윗의 조상으로 내세우고(1역대 2, 6), 본래 다윗과 직접 관련이 없는 스루야와 아비가일(2사무 17, 25)을 다윗의 자매들로 족보에 기입함으로써 이들의 아들인 요압, 아사헬, 아비새, 아마사 등이 다윗의 생질들로 위치가 바뀌게 된다(1역대 2, 15-16). 이와 같이 새로 꾸며진 족보를 통해서 다윗은 신명기 사가의 역사서에 나오는 초라한 목동이 아니라 훌륭한 가문의 출신으로 변모되어 나타난다. 이상적 통치자 : 역대기에서 다윗은 처음부터 온 이스라엘' 을 다스리는 왕으로 등장한다(1역대 11, 1-3). 헤브론에서 왕이 되어 유대를 다스린 기록은 일부러 삭제되고 있다. 그리고 다윗이 통치한 이스라엘의 경계선도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가장 넓은 지역인 "이집트 시홀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로 되어 있다(1역대 13, 5). 야펫(S. Japhet)이 말했 듯이 이 경계선은 역사적 사실이라 기보다는 역대기 사가의 희망의 표현인 동시에 포로 후 공동체가 기다리던 이상적 이스라엘과 통치자에 대한 투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대기의 다윗은 신명 기 사가의 역사서에 나타난 다윗에 비해 자기 개인의 영 광을 내세우지 않고 공로를 신하들이나 백성들과 함께 나누는 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 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군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모압, 암몬, 아람, 에돔 등 동서남북의 적들을 물리치되 사무엘서에 나타난 전공보다도 훨씬 더 큰 전공을 거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1역대 18, 4 ; 2사무 8, 4 비교). 그 리고 이들 민족들을 모두 정복함으로써 이스라엘에 평화 를 가져다 준 왕으로 나타나 있다(1역대 17, 1). 야훼 경외의 모범 다윗 : 역대기의 다윗은 모범적인 야 훼 경외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이후 다른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율법의 규정에 따 라 계약의 궤를 운반해 오고(1역대 13장), 모범적으로 율 법을 준수하며(1역대 14, 12 ; 16, 39 : 21, 23), 왕조와 사 제직을 엄격히 분리함으로써(1역대 15, 26 ; 16, 1 ; 18, 17) 다윗은 야훼를 경외하는 일에 있어서 후대 왕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2역대 7, 17 : 29, 2 ; 34, 2) 성전 건축 준비자 : 신명기 사가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전적으로 솔로몬의 업적이다. 이에 비하여 역대기 사가는 성전 건축을 솔로몬이 하였다는 것을 부 인하지 않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준비해 준 공로를 온전히 다윗에게 돌린다. 다윗은 성전터를 마 련하였고(1역대 21장), 건축 인부(1역대 22, 2. 15 ; 28, 21), 자재(1역대 22, 3. 16 ; 29, 2), 설계도(1역대 28, 1113)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준비해서 솔로몬에게 넘겨준 다. 그리고 다윗은 성전 제의(祭儀)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제의 제도를 확립한다(1역대 28, 13 ; 2역대 8, 14). 이상과 같이 역대기 사가가 그린 다윗 상은 역대기 사 가와 포로 후 공동체가 바라고 기다리던 이상적인 메시 아 상이다. 이 역대기 사가가 기다린 메시아를 '신정적 메시아' (theocratic messiah)라고 부른다. 이 메시아 사상은 이미 신명기 사가의 역사서에 나타나 있는 것을 역대기 사가가 더욱 철저하게 완성한 것이다. 〔시편과 예언서에 나타난 다윗〕 다윗에게서 메시아의 뿌리를 찾고 그의 후손에게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전승은 예언자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졌고 이러한 전승은 시편에 도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메시아 전승은 유대교를 거쳐 신약 시대로 이어진다. 시편 89편 3-4절에서는 "나는 내가 뽑은 자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다. '내가 너를 왕위에 앉히고 네 후손 대대로 왕 노릇하게 하리라' "고 말한다. 또 132편 11-12절에서는, "야훼께서 다윗에게 하신 맹 세, 어길 수 없는 진실된 맹세, '네 몸에서 난 후손을 너 에게 준 왕좌에 앉히리라' " 고 말한다. 위에 말한 시편들 은 모두 다 사무엘 하 7장의 다윗 계약에 근거하여 앞으 로 올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에 대한 언급이다. 기원전 8세기의 농민 예언자 아모스는 하느님이 다윗 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켜 줄 것을 말한다(9, 11). 이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한 왕을 세워 이스라엘을 회복시 켜 줄 것을 의미한다.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의 예언자 호 세아는 먼 훗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찾게 될 것 이라고 말하는데(호세 3, 5) 이는 다윗 후손 가운데서 나 타날 메시아를 의미한다. 이사야는 9장 6-7절과 11장 1-5절에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한 왕이 나타나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을 말한다. 예언자 미가는 다윗 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할 왕이 나올 것을 예언한다(미가 5,2). 예레미야는 유다 역사의 말기에 다윗에게서 의로운 한 사람이 일어나서 공평과 정의로 유대와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을 말한다(예레 23, 5-6). 포로기의 예언자 에제키엘은 야훼가 장차 목자를 세울 것인데 그 목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야훼의 종 다윗이라고 말한다(에제 34, 23-24 ; 37, 24) 〔신약에서의 다윗〕 신약성서에서 다윗은 59번 언급되는데 주로 공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온다. 마태오 복음2장 1-12절에서는 미가 5장 2절을 메시아 전통으로 인용하고 해석한다. 루가 복음 2장 4절과 11절에서도 예수의 탄생지를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이라고 밝힘으로써 예수가 다윗의 전통을 이어받은 메시아임을 입증하고 있다. 예수의 족보(마태 1, 1-16 ; 루가 3, 23. 38)에서도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밝힌다. 요한 복음의 초기 전승도 이러한 전승을 알고 있었다(요한 7, 40-42).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나타내는 칭호가 여러 가지 있는 데 '다윗의 자손' 이라는 칭호도 그런 칭호들 가운데 하 나이다(마태 9, 27 : 12, 23 ; 마르 10, 47 등). 이 칭호는 '메시아' 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다윗의 자 손' 이란 칭호는 구약성서(2사무 7, 12 ; 예레 23, 5)나 외 경(솔로몬의 시편 17, 21-25)에서는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제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복음서는 이 칭호와 연관시켜 예수를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제왕으로 이해하 려는 시도들에 대하여 비판하고, 예수는 그런 왕이 아니 라 종말론적인 메시아요 세상 통치자들과 다른 평화의 왕임을 강조한다(마르 12, 35 이하 ; 마태 22, 41 이하 ; 루 가 20, 41 이하). 그렇지만 신약성서에서도 다윗은 본받아 야 할 믿음의 모범으로 나온다(사도 7, 45 이하 ; 13, 22 ; 히브 11, 32) . 〔역사적 다윗과 케리그마적 다윗〕 위에서 살펴본 다윗 의 모습은 신명기 사가의 역사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 부분 긍정적이고 다분히 이상화된 것이며 케리그마화된 모습이다. 물론 현재 성서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은 역사 적 다윗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상적인 왕의 모습으로 각 색한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다윗의 본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성서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에서 역사적 다 윗과 이상화된 케리그마적 다윗을 엄격하게 구별해 낸다 는 것은,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를 구별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상화된 다윗의 그늘 에 가려져서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다윗의 면면들을 알아보기로 하자. 군인 다윗 : 우선 다윗은 목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 나 대중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다윗의 모습에 대한 상반된 기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궁중 악사로서의 모 습이고(1사무 16, 14-23), 다른 하나는 군인으로서의 모 습(1사무 17-18장)이다. 학자들은 다윗이 궁중 악사였다 는 기록에 대해서 회의를 표명한다. 그 이유의 하나는 이 이야기가 다윗을 사울의 치료사로 등장시킴으로써 다윗 이 사울보다 더 나은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려는 후대 역사가의 서술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보다 강력한 다른 이유는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 앞에 나 타난 다윗을 사울이 몰라보았다는 사실이다(1사무 17, 55). 그래서 다윗은 궁중 악사이기보다는 싸움을 잘하는 군인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는 사울의 무기 당번이 었고 불레셋과의 싸움에서 늘 승리하여 백성들로부터 칭 송을 받는 군인이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물리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도 두 가지 상반된 기록이 있다. 사무엘 상 21장 9절에서는 다윗이 아닌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 였다" 고 말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역대기 상 20장 5절에서는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 흐미를 죽였다"고 수정함으로써 이 모순을 해결하고 있 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었을까? 일부 학자들은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골리앗을 죽인 것은 무명 용사 엘하난이었는데 역사가들이 그 명예를 다윗에게 돌렸을 것이라는 주장이다(군네백). 정략가 다윗 : 다윗은 뛰어난 정략가로 알려져 있다. ① 정략 결혼 : 다윗은 여러 번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다. 다윗은 마온 지역의 유지였던 나발의 미망인인 아비가일 을 아내로 맞아들였다(1사무 25, 39). 그 가문은 그 지역 에서 세력이 있는 가문이었으므로 아비가일과의 결혼은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으려는 정략적 결혼의 성격이 짙 었다. 또 이즈르엘 여인 아히노암과의 결혼(1사무 25, 48)이나 그술 왕 탈매의 딸 마아가와의 결혼(2사무 3, 3) 도 정략적인 차원의 결혼이었다. ② 불레셋의 봉건 영주 : 다윗은 사울을 피해 불레셋의 왕인 아기스의 봉신이 되었다(1사무 27장).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아말렉을 점령 하고 많은 노획물을 가지고 와서 유대 장로들에게 보냄 으로써 장차 유대의 왕이 되는 길을 닦았다. ③ 사울 가 문에 대한 태도 : 다윗은 사울의 자결을 도왔다는 아말 렉 사람(2사무 1, 1. 15)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암살 한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2사무 4, 12) 그들에게 상급을 내리는 대신 사형에 처하였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하여 조가(弔歌)를 지어 불렀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 에서 인심을 얻기 위한 고도의 정략가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다윗의 조치들이 얼 마나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며, 혹시 역사적 사실일 경우 라도 얼마나 진심에서 우러나온 조치들이었는지 의문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사울의 친척인 시므이에 의하면 다 윗은 사울 가문의 피를 흘리고 왕권을 찬탈하였다고 비 난하기 때문이다(2사무 16, 8). 패권주의자 다윗 : 성서의 기록에서 다윗의 부정적인 측면도 보게 된다. ① 그 대표적인 예가 바세바 사건이 다. 남편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빼앗 는 모습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다윗의 적나라한 모 습을 보게 된다. ② 다윗은 중앙 집권적 왕권을 확립함으 로써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파 자치권을 말살해 버렸 고, 백성들을 전쟁과 강제 노동(2사무 20, 24)에 동원함 으로써 반민중적인 통치를 하였다. 압살롬과 세바의 반 란은 이러한 전제 정치의 결과였다. ③ 다윗은 내치에서 뿐만 아니라 외치에서도 패권주의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그는 주변 나라들과 평화 우호 관계를 추구한 것이 아니 라 일방적으로 침략하여 점령하고 식민지화하는 정책을 썼다(2사무 8장) ※ 참고문헌 임태수, <역대기의 다윗상>, <신학사상> 49호, 1985, pp. 239~279/ 一, <민중 편에 선 신명기 사가의 통치 이데올로기>, 《신학사상》, 65~66호, 1989/ 一, <다윗의 두 얼굴 1~3>, 《살림》 24~26호, 1990~1991, 한국신학연구소/ 一,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 : 메시아>, <살림> 31호, 1991/ 장일선, 《역대기 사가의 신학》, 한 국신 학연구소, 1981/ 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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