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야마 우곤 (1552~1614)

高山右近

글자 크기
3
다카야마 우곤(舟越保武 작).

다카야마 우곤(舟越保武 작).


일본 기리시탄 다이묘(大名 즉 영주)의 한 사람. 세례 명은 유스토(Justo) 일명 유스토 나가후사(長房) 또는 다이후 나가후사(大夫長房)라 불림. 지금의 오사카 부근 셋슈(攝州)에서 다카야마 히다노카미(飛驒守 다리오)와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세 때 다쿠죠(澤城)의 성 주이던 부친은 비엘라(G. Vilela) 신부 아래 있던 일본인 수사 라우렌시오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감복하여 비 엘라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성내로 초빙하였는데, 이때 우곤도 모친과 함께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들 부자는 친척이나 친구는 물론 부하 장졸들에게까지 교리를 전하는 데 앞장서서 긴키(近畿) 지방 개종자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오사카 · 다카쓰키(高槻) 등지에 성 당을 건립하였다. 16세 되던 1568년 오다 노부나가(織 田信長)가 교토(京都)로 진격할 때 우곤은 부친과 함께 숙부 와다(和田維政)를 따라 종군하였는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와다가 셋쓰(攝津)의 다카쓰키 성주가 되면서 그의 집안도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후 우곤은 와 다가 사망한 지 2년 뒤인 1573년에 21세의 나이로 다카 쓰키의 성주가 되었고, 동시에 그의 이름 겐고로(彥五 郎)를 유쇼(友祥)로 개명하였다. 5년 뒤 아라키 무라죠 (荒木村重)가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자 우곤은 선교사 오르간티노(Organtino) 등의 권유에 따라 오다 노부나가 를 도움으로써 큰 세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부모는 이 무렵부터 오로지 교리 실천과 전교에 힘써 많은 이들 에게 신앙을 전하였다. 한편 우곤은 1581년 예수회 동 양 순찰사 발리냐노(A. Valignano)가 교토 지방으로 오자 그를 맞이하여 다카쓰키에서 부활제를 거행하였다. 1582년 우곤은 오다 노부나가가 이끄는 중국 정벌대 에 참여하였다가 그가 변을 당해 자살하자 다카쓰키로 돌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군에 합류하였으며, 이듬해 오사카에 성당을 건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후의 공을 인정받아 1585년에 고베(神戶) 서쪽의 아카 시(明石) 성주가 되었다. 그러나 1587년 규슈(九州) 정 벌에 나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확장되어 가는 천주교 세력에 놀라 금교령을 공포하고 선교사를 추방하기 시작 하면서 열심한 신자였던 그는 영주의 직위를 버린 채 부 모 · 처자와 함께 유랑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고 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영지인 쇼토섬(小豆島)으로 숨었다가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의 영지인 가나자 와(金澤)로 이주하였고, 그의 후원을 받아 여러 곳을 정 벌하였다. 그러는 동안 천주교 탄압이 일시 중지되고 발 리냐노가 재입국하자 전교 활동을 재개하였고, 1605년 에는 가나자와에 성당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 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14년 금교령을 내리면서 우곤에게도 추방령이 내려졌고, 그 결과 그의 집안은 모든 영지를 잃고 오사카, 나가사키 (長崎)를 거쳐 필리핀의 마닐라로 추방되었다. 마닐라에 도착한 그는 40일 만에 열병을 얻어 사망하였는데, 이때 마닐라 사람들은 그의 덕행을 기려 성대하게 장례를 치 르고 예수회의 '성녀 안나' 성당(지금의 미군 병영 내)에 안장하였다. 당시 함께 마닐라로 추방된 그의 부인 유스 타와 자식들 가운데의 일부는 훗날 비밀리에 귀국하였으 며, 우곤은 사후에 생전의 열성과 덕행으로 인해 '찬란 한 덕행의 빛' 또는 '교회의 반석' 으로 불렸다. (→ 일본 교회사) ※ 참고문헌  片岡彌吉, 《高山右近大夫長房傳), 東京 : 力 卜 リ シ 7 中央書院, 1936/ Léon Pagés 저, 吉田小五郎 역, 《日本切支丹宗門 史》, 東京 : 岩波書店, 1939/ ヨハネス・ラウレス, 《高山右近の生 涯》, 東京 : 中央出版社, 1953/《カトリック 大辭典》 4, 東京, 1954.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