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서울 송파구 송파2동 181 소재. 1983년 8월 28일 잠실 본당으로부터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바오로 정하상(丁夏祥) 관할 구역은 가락 본동 · 1 · 2동, 송파1 · 2동, 문정2동.
〔교 세〕 1983년 1,619명, 1989년 9,263명, 1993년 13,412명. 〔역대 신부〕 초대 배갑진(裵甲鎮) 베드로(1983. 8~1990. 8), 2대 김병도(金秉濤) 프란치스코(1990. 8~현재).
〔공소 시대〕 가락동 일대는 본래 약현 본당(藥峴本堂, 현 중림동 본당) 소속으로 일찍부터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처음에는 박 아가다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에 약현 본당의 초대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는 1903년 이 공동체를 방문하고 정식 공소로 설정해 주었는데, 당시의 명칭은 '가나골 공소' (광주군 중대면 가락리 25번지)였으며, 신자수는 잠실 송파 지역을 합쳐 23명이었다. 이후 신자들은 홍종관(요셉) 회장의 양계장을 개조하여 강당(현 우성 아파트 자리)으로 이용하는 한편 전교 활동에 노력하여 1910년경에는 주변의 어느 공소보다 많은 120여 명의 신자수를 헤아리게 되었다. 가락동 공소에 큰 변화가 있게 된 것은 해방과 6 · 25 사변을 겪은 뒤였다. 지금의 우성 아파트 자리에 평화촌이 건립되면서 신자 세대수가 300세대 정도로 증가하게 된 것이다. 이에 신자들은 1968년 기금 60만원을 마련하여 시유지를 확보하고 14평 공소를 건립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18일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이 강당은
그 후 1981년에 헐리고, 새 강당이 지금의 송파농협 가락 지소 자리에 건립되었다.
〔설립과 정착〕 가락동 공소는 공소 시절이 오랫동안 계속된 탓에 소속 본당이 여러 차례 변모되었다. 1927년 10월 백동 본당(栢洞本堂, 지금의 惠化洞本堂)에 속하였다가 1948년 신당동 본당(新堂洞本堂)에, 1958년 천호동 본당(千戶洞本堂)에 속하였으며, 1971년 '거여동 본당'(巨餘洞本堂, 지금의 마천동 본당)이 설립된 후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7년 12월 잠실 본당(蠶室本堂)이, 1981년 동잠실 본당(현 신천동 본당)이 설립되고, 이에 따라 1982년 6월 20일 관할 구역의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가락동 공소는 잠실 본당 소속이 되었다. 당시 공소의 신자수는 모두 235세대 769명이었다. 이때부터 공소 신자들은 잠실 본당 이병문(李炳文, 베드로) 신부의 도움을 얻어 예비자 교리를 실시했고, 강당을 석촌동 297-17번지 윤성빌딩 3층으로 이전하였으며, 주일학교를 열고 레지오 단체를 가락 아파트 단지별로 구성하는 등 본당 승격을 위한 준비에 노력한 결과 1983년 8월 28일 마침내 본당 승격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다음달 석촌동 277-2번지 엄마손 쇼핑 센터 4층으로 성당을 이전한 뒤 초대 배갑진(베드로) 신부를 맞이하여 우선 사목 협의회를 구성하고 기본 사목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1984년 현 성당 부지를 마련한 다음해 '성전 건립 추진 위원회' 를 구성하고 1986년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3년 뒤인 1989년 12월 8일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그 동안 본당에서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빙하고, 여러 개의 사도직 단체를 발족시켰으며, 아울러 신심과 전교 활동에도 노력하여 교세를 꾸준히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990년 7월, 2대 김병도(프란치스코) 신부를 맞이한 이후에는 새로운 본당사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확대되는 구역의 활성화에 노력하고, 내적인 신심 활동을 바탕으로 미래 지향적인 본당을 설계해 가게 되었다. 한편 본당의 교세는 1988년 9월 석촌동 본당의 신설로석촌동 · 삼전동의 신자 440세대 735명을 이관한 뒤에도 꾸준히 증가하여 1991년에는 1만여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본당에서는 1993년 7월 본당 분할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새 본당 분할을 위해 신설 준비금을 마련하고 있다. 〔車基眞〕
가락동 본당
可樂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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