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앙

檀君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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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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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영정.

I . 종교학에서의 단군 신앙 단군을 국조(國祖)나 초월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신앙 형태. 단군이 고조선의 건설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단군 신앙의 역사는 고조선 시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 숭배의 흐름〕 고조선 시대의 단군 신앙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에 보이는 단군에 대한 전승을 토대로 추측해 볼 수 있 다. 고조선에서 단군은 생명의 근원이며 존재의 근거인 시조신(始祖神)으로 숭배되었다. 그리고, 단군이 인간의 수명과 질병, 농경의 문제 등을 주관했던 환웅(桓雄)의 혈통을 계승하였고, 나중에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가 자연신으로도 숭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고조선 사회에서 단군 신앙은 정치 질서를 정당화하 고 내부의 결속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 조선이 해체되고 새로이 등장한 정치 세력들이 나름대로 의 시조신을 내세우자 단군 신앙 의 내용에 변화가 생겨 났다. 곧 단군은 고조선의 전통을 간직한 특정의 집단이 나 지역에서 수호신 또는 산신으로 숭배되었다. 삼국 가 운데 단군에 대한 신앙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던 곳은 평 양과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지역이었다. 단군 신앙의 이러한 양상은 커다란 변화 없이 고려 시 대로 이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평양과 구월산 두 지역을 중심으로 단군에 대한 신앙이 존속되었다. 이들 두 지역 의 단군 신앙은 상당한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 양에서의 단군 신앙은 단군의 역사성이 강조되었고 구월 산 지역에서는 단군의 초월성이 강조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전기에는 단군이 삼국 시대 이전에 실재했던 역사 적 의미를 지닌 존재인 동시에 특정 지역의 수호신 내지 조상신으로 숭배되었다. 그러다가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민족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자 민족 내부의 결속을 위한 상징의 필요성에 의해 한민족 전체의 시조(始祖)로 숭배 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에서는 단군을 '조선 시조' (朝鮮始祖)나 '동 방 시조' (東方始祖)로 표기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 을 국조로 숭배하는 인식이 보다 확고하고 보편화되었 다. 따라서 조선 시대의 단군 신앙은 개인적 내지 지방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행해졌다. 이 때의 단군 신앙은 평양의 단군사(檀君祠)와 구월산의 삼 성사(三聖祠)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평양의 단군사는 국 가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의 제사는 국가가 치르 는 중심적 제사로 정해졌다. 그리고, 구월산 지역은 고려 시대부터 이미 민간 신앙적 차원에서 단군 신앙이 행해 졌던 곳이다. 삼성사도 1472년(성종 3)에 공식 사당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뒤 국가의 관리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이와 같이 조선 시대의 단군 신앙은 국가 적 차원에서 행해졌다는 특징을 지적할 수 있다. 〔단군 숭배 종단〕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국가적 차 원에서의 단군 신앙은 쇠퇴한 반면, 단군을 숭배하는 종 교 단체들이 생겨났다. 단군을 숭배하는 대표적인 종단 으로는 대종교(大倧敎) 단군 마니 승조회(檀君摩尼崇祖 會), 단군교 본부, 단군교 종무청(檀君教宗務廳), 개천교 (開天敎) 그리고 한얼교 등이 있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羅喆)이 창립하였다. 본래는 단군교라는 교명으로 시작하였으나, 1910년 8월 대종교 로 교명을 바꾸었다. 그러자 정훈모(鄭薰模)가 본래의 단군교라는 교명으로 분립하기도 하였다. 일제하에서 대 종교는 주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일제는 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을 일으켰는데, 대종교가 조선 민중 에게 조선 정신을 배양하는 교화 단체로서 조선 독립을 최후의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해방 후 만 주로부터 돌아온 대종교는 국내 활동 기반이 빈약한 상 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적산(敵産)을 불하받아 어렵게 활동을 재개하였다. 대종교의 경전으로는 《삼일신고》(三 一信誥), 《천부경》(天符經), 《팔리훈》(八理訓), 《신사 기》(神事記), 《신리대전》(信理大全), 《회삼경》(會三經) , 그리고 《삼법회통》(三法會通)이 있다. 단군 마니 승조회 는 1984년 박종간(朴鐘干)과 황우연(黃祐淵)이 창립하 였다. '단군 마니' 는 단군의 부인을 의미한다. 이들이 봉 안하고 있는 천진(天眞)에는 단군 내외, 삼선(三仙), 사 령(四靈) 그리고 이황(李滉)의 영정이 있다. 이 종단은 매월 음력 7일 · 17일 · 27일에 참배하고 있는데 단군보 다 단군의 부인인 비서갑신모(非西岬神母)를 오히려 더 숭배하고 있다. 단군교 본부는 1975년 김해경(金海京)이 서울에서 창 립하였다. 이 교에서는 단군을 최초의 무당으로 간주하 고 있으며 현재 무당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포교하고 있 다. 단군이 세상에 강림한 지 216년(기원전 2118) 만에 다시 하늘에 오른 날인 어천절과 개천절에 매년 행사를 거행하며 여름에는 '만남의 날' 행사를 한다. 경기도 가 평에 수도원이 있으며 《단군정서》라는 경전이 있다. 단군교 종무청은 1981년 정봉화(鄭鳳和)와 송원홍 (宋元弘)이 창립하였다. 대종교에서 분립한 정훈모의 단 군교는 일제 때 소멸하고 말았는데, 단군교 종무청은 정 훈모의 단군교를 계승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교에서는 《단군부흥경략》(檀君復興經略), 《신교총화》(信敎總話) , 《천을선학경》(天乙仙學經), 《단군교 성경팔리》(檀君敎 聖經八理), 《단군 한배검님 말씀》, 그리고 《배달 전서》 등을 간행하였다. 천단(天壇)에 단군의 아버지인 환 천왕(桓雄天王)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개천교는 1969년 박계림(朴桂林)이 창립하였다. 처음 에는 서울시 종로구에 단군 성전을 세우고 칠성암(七星 庵)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으나 1985년에 개천교로 개명하였다. 환응 천왕과 단군 왕검을 동시에 모시고 있 으며, 경전으로는 《천부경》 이외에 《지부경》(地經)이 있다. 연등 행사와 지부경 강설을 개천교의 특징으로 지 적할 수 있다. 한얼교는 1966년 신정일(申正一)이 창립 하였다. 처음에는 정일회(正一會)라는 교명으로 활동하 다가 1978년 한얼교로 바꾸었다. 1980년에는 한사상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포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 다. 음력 1월 1일에는 신년법제(新年法祭), 음력 2월 1 일에는 만성절(萬聖節) 음력 4월 4일에는 정연절(正延 節) 등의 행사를 한다. 강화도 마니산 성지 순례, 민족 정신 선양 운동 등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밖에 단군을 받드는 단체들이 더러 있고, 개인이나 사회 단체에서 세운 각 지방의 단군 사묘(檀君祠廟)에서도 단 군을 시조나 국조로 모신다. 또한 최근에는 단군 성전 (聖殿) 건립 문제를 둘러싸고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강력 한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평 가〕 대체로 현재 단군에 대한 신앙은 체계적이지 못하고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는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 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단군이 단순히 개국 시조(開國始祖)에 불과한 것 인지, 아니면 민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군 신화는 통치권의 합법성 또는 신성 성을 부여해 주는 신화이다. 따라서 단군 신화의 내용만 을 눈여겨본다면, 단군은 어디까지나 개국 시조에 불과 하다. 그러나 그 뒤의 신앙 형태를 보면, 단군을 단지 개 국 시조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민족의 시조로 보는 경향 이 있어 왔다. 이와 같이 단군에 대한 이미지에 괴리 현 상이 있기 때문에 단군 신앙이 체계적으로 전개될 수 없 었다. 둘째, 단군이 단지 평양과 구월산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신인지, 또는 민족 전체를 수호하는 수호신인지 명 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단군은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 특히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산신의 성격 을 더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단군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신종교들과 무속 신앙의 요즈음의 단군에 대한 통 념은 그를 민족 전체와 연관시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단군 신앙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 하고 현재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단군 신앙이 한민 족 전체를 결속시켜 줄 수 있는 중요한 상징들 중의 하나 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의 각 종교들이 단군 신앙을 계속해서 재해석해 나가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고 하 겠다. 그래야만 종교간의 공존이 가능하고 종교로 인한 민족의 분열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 대종교 ; 신 종교) ※ 참고문헌  李康五, <檀君信仰 總論>, 《전북대학교 논문집》 10 집, 1968, pp. 9~54/ 姜萬吉, 〈李朝時代의 檀君崇拜〉, 《한국사 논총》, 신구문화사, 1969, pp. 249~2741 徐永大, <檀君崇拜의 歷史〉, 《정신 문 화 연구》 32집, 1987, pp. 19~31/ 姜敦求, 〈韓國民族主義에 대한 宗敎 學的 理解〉, 《韓國哲學宗教思想史》, 圓光大學校 宗教問題研究所, 1990, pp. 917~934. 〔姜敦求〕 II . 한국 신화로서의 단군 신앙 고조선(古朝鮮)의 시조인 단군(檀君)에 관한 신화로 고조선의 건국 신화이며, 오늘날까지 민족 전체의 대표 적인 신화로 간주되고 있다. 우리 나라 고문헌에 나타나 는 신화로는 단군 개국 신화나 동명왕(東明王) 개국 신 화를 비롯하여 북부여의 해모수(解募漱), 동부여의 금와 (金蛙), 백제의 온조(溫祖), 신라의 혁거세(赫居世) 등 에 관한 일련의 왕조 신화가 있다. 이 가운데 단군 신화 는 당시 가장 선진 지역이었던 요동 반도의 요하 유역에 등장한 고조선의 건국 신화로, 오랜 역사를 두고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 왔다. 〔내용과 해석〕 단군 신화의 내용 : 현재까지 전하는 단 군 신화는 13세기 후반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가 가장 원형에 가까운데, 《삼국유 사》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하늘 나라의 임금인 환인(桓因, 天帝)에게 여 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환웅(桓雄)은 천하를 다 스리고 인간 세상을 구원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환 인이 그 뜻을 알고 천하를 두루 살펴보니 태백산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에 알맞은 곳이라 여기고, 천부인(天 符印) 3개를 주면서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 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밑 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일컫고 천왕이 되었 다. 환웅 천왕은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 생 명 · 질병 · 형벌 · 선과 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그때에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기를 '원컨대 사람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였다. 한 번은 환웅이 신령한 쑥 1자루와 마늘 20톨을 주면서 말 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 고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 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기 삼칠일(三七日) 만에 곰은 여 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삼가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 하였다. 웅녀(熊女)는 자신과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 로 또 신단수 아래에서 축원하기를 '아이를 배어지이다' 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깐 변하여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 니 이가 단군 왕검이다. 왕검은 요(堯)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 은 경인년이 아닌 정사년이다. 아마 틀린 듯하다)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컫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 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이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 고도 하였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 달로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 이때 나이 1,908세 였다고 한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단군 신화는 상징적인 요소들 을 많이 지니고 있다. 본래 이것은 민족 서사시로서 신관 (神官)에 의하여 구송(口誦)되다가 어느 시기부터 글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신화는 민족의 원시 생활, 사상 등 에 대하여 귀중한 자료라고 믿어지고 있지만, 시기가 상 당히 늦은 기록만이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읽 어 낼 수가 없다. 역사적 사실이 해결되지 않은 점, 신화 학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점, 그리고 연구 초기의 한 · 일 간의 역사 상황 등이 이 문제를 복잡하게 하였고 왜곡하였다. 상징과 내용 해석 : 단군 신화는 오랜 구전 기간을 거 쳐 뒤늦게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 천을 거듭하는 신화 자체의 속성 때문에, 현존하는 단군 신화 내용 가운데에는 후대에 새로 첨가 · 수식된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소멸되어 전해지지 않기도 하였 다. 단군 신화에서 후대적 사고의 영향으로 생각되는 요 소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환인' 이라는 표현이다. 환 인이란 원래 동방호법신을 나타내는 범어 '석제환인' 에 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는 불교가 들어온 뒤 표현상의 윤식이 가해진 부분이다. 둘째는 단군의 즉위년을 중국 전설 시대의 요와 같은 때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단군 또는 민족사의 시원을 끌어올리려는 수식이었다. 이러한 후대적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화의 전체 줄거 리는 인간계와 비인간계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던 고대 사회 초기의 사유 단계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환웅이 곡 식 · 목숨 · 질병 · 형벌 · 선악의 다섯 가지를 비롯하여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고 있는 것을 통하여 고대인 의 인생관 ·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인간 생활의 복잡한 사항을 1년 동안의 날짜 수에 맞춘 점도 주목할 만하며, 곰 ·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 역시 원시 공동체 사회의 동 물 숭배 흔적이다. 단군 신화에서 윤색되기는 하였으나, 환인이란 표현이 갖는 본래의 내용은 오늘날 흔히 쓰이는 하느님이다. 이 것은 자연신이나 다신(多神)을 섬기던 사회가 천신 신앙 을 중심으로 일대 통합 정리되는 현상을 보여 준 것으로, 이는 한때 밝 사상이나 태양 숭배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또 환웅이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고 하는 것은 수목 신앙 과 연결된다. 이 천신 신앙과 수목 신앙은 북방 아시아계 종족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요소이다. 그리고 환웅이 풍백 · 우사 · 운사 등과 함께 곡식 · 형벌을 비롯한 360 여 가지 일을 관장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사회가 기본적 으로 농경 사회이며 상당한 정치 권력 체계가 갖추어진 사회였음을 나타낸다. 이미 계급이 분화하여 지배 계급 은 경제 생활과 사회 생활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지상에 내려와 웅녀와 결합한다는 내용은, 당시 환웅으로 대표되는 종족 집단이 이동하여 웅녀족을 정복 · 연합한 사실로 상정할 수 있다. 당시의 사회상은 '단군 왕검' 이라는 명칭에도 잘 나타 난다. '단군' 은 특정 인물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아니 라 '당굴' 또는 몽고어의 '탱그리' 라는 뜻으로 제사장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이다. '왕검' 은 현실의 지배자로서 정치적 군장을 의미한다. 이러한 칭호를 가진 지배자는 하늘로부터 받았다고 믿는 천부인 3개를 권위의 상징으 로 삼고 종교 행사를 주관하면서 현실의 지배자 구실도 함께하였다. 이것은 고조선 사회 초기의 제정 일치 사회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때는 이미 계급 분화가 이루 어지고 지배자가 등장한 청동기 시대 초기로서, 지배 계 급은 천손족임을 자처하거나 하늘이 보호하는 자임을 내 세워 자신들의 지배를 신성화 · 정당화하였다. 또한 시베 리아의 여러 종족들 사이에서 곰 숭배가 널리 행해졌다 는 점 등을 생각하면, 비슷한 유형의 신화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곰보 다는 호랑이를 더 중시하는 것은 고려하여야 할 역사적 변화라 하겠다. 한편 북한에서는 이 신화가 청동기 시대라기보다는 고 조선의 원시 사회 말기 생활상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 그 러면서도 사회 · 경제적 관점에 치중하여 당시의 현실을 아래와 같이 추정하고 있다. 첫째, 고조선의 중심 세력은 오랜 옛날에 '아사달' 이라는 지방에 거주하였다. 둘째, 이 사회는 이미 농경 생산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일정 한 정도의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셋째, 풍백 · 우 사 · 운사 등의 관직과 세분된 국가 기구가 있었다는 것 은 후세의 덧붙임일 것이나, 이는 국가적 권력의 싹이 발 생하고 있던 사실을 반영한다. 그 밖에 이 신화는 당시 곰이나 범을 토템으로 하던 씨족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토템 신화는 천손족 신화보다 오래된 것이다. 단군 신화 는 시기를 달리하는 두 신화가 합쳐진 것이라고 본다. 그 러므로 곰 씨족에 속한 여자가 '단군' 을 낳았다는 점에 서, 천손이 내려오는 청동기보다 그 기원이 오래된 것으 로 이해된다. 〔연구 과제와 경향〕 기록과 위치의 문제 : 현존 최고 (最古)의 기록인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 신화를 전하고 《세종 실록 지리지》의 <평양조>에도 《단 군고기》라는 책 제목이 나온다. 이 책들은 오늘날 전해 지지 않으므로 어떤 책인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단군 신화의 최고 기록을 고려 시대로 잡는다. 그 외에 이승휴 (李承休)의 《제왕운기》, 권람(權攣)의 《응제시주》 등에 도 단군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전하는 유형은 기 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편 인용된 고기록들이 전해지 지 않기 때문에, 일제 시대 식민 사가들은 이 신화가 후 대에 조작된 것이라고 왜곡하였다. 몽고 침입이라는 국 가 위기 상황에서 일연이 묘향산 산신의 신화를 적어 넣 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군 신화가 당시의 사실을 일정 하게 반영하고 있음이 해방 후 사학자들에 의해서 증명 되었다. 예컨대, 김재원은 《단군 신화 연구》에서 고고학 적 고찰을 통하여 문헌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점 들을 해결하고자 시도하였다. 특히 오늘날에는 고조선의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그 사실들이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 다. 기록 문제와 아울러 생각할 것은 태백산의 위치이다. 기록 당시 일연이 태백산은 묘향산이라고 주를 달아 놓 았기 때문에, 고려와 조선 시대 내내 그것이 사실로 인정 되어 왔다. 그러나 최남선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언어학 적 고찰을 통해 태백산은 백두산임을 증명하였다. 일연 이 단군 신화를 기록할 때는 영토가 축소되어 백두산이 이미 고려의 땅이 아니었으므로, 기록자가 의도적으로 묘향산으로 비정하였으리라 본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고조선의 영토가 요하 유역이었다는 증명이 나오고 있어 그 가능성을 굳히게 한다. 역사성의 문제 : 민족 신화인 단군 신화를 중요시하는 정도가 시대에 따라 한결같았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이 것은 민족이 분열되었거나 어려움을 당할 때 상징처럼 강조되곤 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뒤삼국의 시조 신화 에서 단군 신화를 계승한 흔적은 약하다. 다시 말하면, 단군도 하늘의 아들이고 삼국의 각 시조도 하늘의 아들 이었으나, 이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관이 없다. 고조선의 시조 신화인 단군 신화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민족의 구심점으로 강조되었으 나 그 뿌리는 깊지 못하였다. 결국 통 일 신라는 오래지 않아 후삼국으로 나누어졌다. 고려가 민족적인 통일을 추진함에 따라, 단군은 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등장하였다. 몽고와의 싸움 과, 그 뒤의 가혹한 지배 속에서 저절 로 우러난 적개심은 우리 민족이 몽 고족보다 우수한 천손족이며 따라서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요구하였던 것 이다. 그리하여 고려 말기에 이르러 서는 단군이 도읍하였다는 평양을 신 성한 고장으로 보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기자를 숭배하라는 명의 요구에 반발하여, 세종 때에는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함께 모셨다. 이때부 터 단군은 명실 상부한 국조(國祖)가 되었다. 구월산 삼성사(환인 · 환응 · 단군을 모심)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단 군을 민간 신앙의 차원으로 모셨으 며, 강동에는 단군의 무덤이 있다는 주장까지 등장하였다. 17세기 이후 실학자들은 단군에 대한 연구를 활발 히 하여 민족 의식을 높이려 하였다. 더구나 일제 시대에는 민족 의식이 더욱 고조되면서 단군을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받드는 대종교(大倧敎)가 생기고 《단경》(壇經), 《단전》(壇典) 같은 경전이 나왔다. 현재도 단군을 모시는 민간 종교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또한 개천절을 설정하여 단군 개국을 기념하였는데, 대종교에서 시작한 개천절은 해방 후 정식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개화기 이후에는 단군 왕 검의 즉위년을 기원으로 단군 연호를 쓰기도 하였다. 단 군 기원은 고려 말 백문보(白文寶)가 처음으로 사용하였 는데, 이를 대종교에서 계승하였고, 1948년 정부 수립 과 동시에 정부에서는 모든 공문서에 단기를 사용하도록 법령으로 공포하였다. 이것은 군사 정부가 1962년 1월 1일을 기하여 이를 폐기하고, 서력 기원을 사용할 때까 지 계속되었다. 요컨대, 단군 신앙은 민족 의식이 강조될 필요성이 있을 때마다 강화되었으며, 현재에는 남북한 모두가 단군 신화를 고조선의 건국 신화이자 민족 신화 로 강조하고 있다. 의례의 문제 : 신화에는 의례성 · 상징성 · 종교성이 중 요하다. 단군 신화도 구송되면서 행해지는 어떤 일정한 형식의 의례가 있었을 것이다. 고대 한국의 경우에도 왕 족들의 시조(始祖)와 그 계보에 얽힌 전승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던 특수한 개인이나 집단이 존재하였다. 건국 신 화도 이들에 의해서 구전되어 오다가 한자의 수입과 함 께 문자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이때 일정한 의례 형태가 고정되었는데, 우리의 경우 부족을 통합하여 국가 사회 로 발전하면서 시조 제의(始祖祭儀)로 만들어졌을 것이 다. 이는 한국 전통 사회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조상 숭 배 문제와 더불어 삼국이 모두 시조 묘를 세우고 제사지 내던 것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개국 시조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오늘날 의례는 더 욱 간단해져 개천절 기념 행사와 같은 기념식의 형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연구 경향 : 단군 신화에 관한 연구는 1985년 현재 논 문수만도 180편 이상이 될 정도로 우리 나라 신화 연구 가운데 가장 활발하다. 연구 역사도 김교헌의 <단군·실 기》(1914)를 시점으로 반세기 이상이 지났다. 연구 경향 도 초기에는 역사 인물들의 실존이나 역사 상황, 문화 기 원이나 이동 관계를 해결하려고 하던 데에서, 최근에는 상징을 통한 종교 연구, 현존 민속과의 관련 연구 등으로 다양화하고 있다. 최남선이 본격적으로 서구 신화학을 도입하기 시작한 1920년대 이전에는 단군 신화의 유구 성을 부인하는 것이 연구의 주된 경향이었다. 최남선은 불함 문화권(不咸文化圈) 등을 설정하여 상고 문화를 해 결하려 하였다. 단군 신화 연구는 1930년대에는 주로 유물사관적 입장에서 세계사적 발전 단계와 연관지어, 농업 공산 사회의 붕괴 과정으로 설명되었고, 1940년대 에는 무씨사당화상석을 단군 신화로 해석하는 등 자료 보완 작업이 진행되었다. 1950년대에는 태양 신화와 토 템 신화로 해석되었으며, 이어 1960년대부터는 민속학 이나 국학 분야에서 생활사와 연결하여 곡물 재배 제의 나 성년 입사식 등의 해석을 끌어냈다. 아울러 정신 분석 학적 접근 방법도 시도되었고, 감리교 신학자 윤성범은 단군 신화를 삼위 일체 교회와 연결하기도 하였다. 단군 신화가 신석기 때의 아시아족의 신화라는 설이 나오면 서, 1970년대에 와서는 그 연구 방법이 더욱 넓어져 현 재는 구조주의적 분석까지 시도되고 있다. 〔고조선과 단군 신화〕 한국 민족 전체의 국조이자 초 월적 존재 내지는 신으로서 간주되는 단군의 신화는 고 조선 역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그 실재성이 증명 되고 있다. 우선 고조선을 단군 조선과 위만 조선으로 나 누는데, 이들에 관한 기원전 4세기부터의 상황은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주(周)가 쇠퇴하여 연(燕)의 제 후가 왕을 칭할 무렵 고조선의 군장은 자신을 왕이라 자 칭하고 연과는 요하를 경계로 하여 대립하였다. 기원전 312~279년에 연의 장수 진개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으 나, 기원전 2세기 초 연으로부터 망명하여 온 위만이 준 왕을 축출할 때까지 연맹 왕국으로 존재하였다. 고조선 의 유적과 유물에서는 전 시대에 비하여 훨씬 구체적으 로 그들의 문화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나오고 있 다. 당시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요동 반도 남쪽 끝에 있는 강상 묘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청동 제련, 가공 기술 의 발전에 의하여 많은 생활 용품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4세기 이후에는 기술 수준이 더욱 높아져 세형 동검과 잔줄 무늬 거울, 수레 부속품과 마구류 등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3~2세기에는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하여 도구와 무기를 만들었고 장신구 · 생활 용품 등도 철로 만들어 썼다고 여겨진다. <한서> 지리지에 전하는 고조선 법금 8조' 에 의하면 일정한 법률 체계에 기초하여 공권력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요소를 고려하 면, 단군 신화에 대한 해석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며, 아 울러 단군 신화는 이러한 고조선 사회 연구에 열쇠를 제 공하여 민족의 뿌리에 대한 이해를 도와 줄 것이다. ※ 참고문헌  《三國遺事》 《世宗實錄地理志》 《帝王韻紀》/ 《응제 시주》 강만길, <이조 시대의 단군 숭배>, 《이홍직 박사 회갑 기념 한 국사 논총》, 1969, pp. 249~2741 강인숙, <단군 신화와 역사 1~3>, 《역 사 과학》, 127 · 128 · 133호, 1988~ 1989/ 김재원, 《단군 신화의 연구》, 탐구당, 1976/ 김정숙, <건국 신화 연구와 외국 이론의 도입>, 《신라 문화 학술 발표회 논문집》 11, 1990, pp. 317~414/ 一, <민족 신화의 특성과 그 극복 문제>, <사목> 147호(1991. 4), pp. 16~39/ 一, <탄생 모습으로 본 한국 문헌 신화의 원형 분류>, 《교남사학》 3, 1987, pp. 3~35/ 서영대, <단군 신화 이해의 기본 문제>, 《한국 종교의 이해》, 집 문당, 1985, pp. 101~127/ 서영대, <한국 원시 종교 연구사 소고>, 《한 국 학보》 30, 1983, pp. 155~192/ 이기백 편, 《단군 신화 논집》, 새문사, 1990/ 이은봉 외, <단군 신앙의 연구>, 《정신 문화 연구》 32, 1987, pp. 3~94/ 이은봉 편, 《단군 신화 연구》, 온누리, 1986/ 전형택, <조선 후기 사서의 단군 조선 서술>, 《한국 학보》 21, 1980, pp. 120~141/최남선, <단군고기전석>, 《사상계》, 1954. 2, pp. 53~76/ 홍기문, 《조선 신화의 연구》, 지양사, 1989. 〔金貞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