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동 본당
沓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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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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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4월 17일에 거행된 종 축성식.
인천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주교좌 본당. 인천시 중구 답동 3 소재. 설립 당시의 이름은 '제물포(濟物捕) 본 당' 이었는데, 그 후 '인천 본당' 으로 불리다가 1958년 경부터 '답동 본당' 으로 불리게 되었다. 1889년 7월 1 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바오로. 관할 구역은 중구 답동 · 율목동 · 유동 · 신생동 · 경동 · 내동 · 용동 · 인현 동 · 사동 · 신포동과 관동 · 송학동 · 중앙동 · 신흥동 1 가 일부 지역, 신흥동 2가의 삼익 아파트 단지. 〔교 세〕 1890년 112명, 1894년 752명, 1899년 845명, 1910 년 1,289명, 1924년 1,565명, 1952년 5,188명, 1956 년 4,073명, 1971년 3,963명, 1981년 4,509명, 1988 년 4,099명, 1993년 4,003명 〔역대 신부〕 초대 빌렘(J.Wilhelm, 洪錫九) 요셉(1888. 7~1890. 10), 2대 르비엘(E.Le Viel, 申三德) 에밀(1890. 11~1893.4), 3대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요셉(1893. 4~1904. 3), 4대 드뇌(E. Deneux, 全學俊) 에우제니오(1904. 4~1937. 6), 5대 임종국(林鍾 國) 바오로(1937. 6~1959. 11), 6대 버크(J. Burke, 장) 요한 (1959. 11~1963. 8), 7대 설리반(H. Sullivan, 薛立安) 헨리 코(1963. 8~1968. 4), 8대 강의선(美義善) 힐라리오(1968.4~1970. 1), 9대 박성규(朴成圭) 베네딕도(1970. 1~1975. 11), 10대 김병상(金秉相) 필립보(1975. 11~1980. 2), 11 대 김상용(金相勇) 힐라리오(1980. 2~1984. 3), 12대 송주 석(宋周錫) 안셀모(1984. 3~1986. 2) 13대 강용운(康龍 雲) 시몬(1986. 2~1994. 2), 14대 정윤화(鄭允和) 베드로 (1994. 2~현재) 〔설립과 정착]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 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이전이었다. 그 후 이 지역에 서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인천 · 부평 ·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 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소공동체를 이루어 신앙 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다. 답동 본당의 설립은 조 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이 장차 발전할 것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성당 대지를 물색하게 된 데서 비 롯되었다. 이에 앞서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일찍부터 이 지역에 진출하여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있었고, 훗날 천주교회 측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자 이를 훼방 하기도 하였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조선교구에서는 당 시 말레이 반도 페낭(Penang) 신학교에 있던 파리 외방전 교회 선교사 빌렘 신부에게 새 본당 지역을 맡아 주도록 요청하였고, 빌렘 신부는 이를 받아들여 조선에 입국하 자마자 제물포에 진출하여 본당을 설립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889년 7월 1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제물포 본당의 초대 주임이 된 빌렘 신부 는 우선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1889년 7월 8일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당시 미사에 모인 신자수는 85명이 었는데, 새 신자들로 인해 신자수는 곧 112명으로 증가 하게 되었다. 다음해 어렵게 대지 3,212평을 매입한 빌 렘 신부는 여기에 성당과 교리실을 건축하려고 계획하다 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었다. 그 뒤를 이어 부 임한 르비엘 신부는 이웃의 야산을 추가로 매입하고, 임 시 성당 겸 경리부(經理部) 건축을 시작하여 1891년 7 월에 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유럽으로부터 성당 건립 기금을 모금하는 한편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고 교세 확대에 노력하였으나, 병으로 인 해 홍콩 요양소로 휴양을 가면서 1893년에는 임시로 비 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제물포 본당이 완전히 정착하게 된 것은 3대 주임 마 라발 신부 때였다. 1893년 4월, 본당에 부임하자마자 그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Coste, 高宜 善) 신부에게 성당 설계도를 받아 기초 공사를 시작하였 다. 이듬해 8월 수녀원이 완공되자 살트르 성 바오로 수 녀회에서는 수녀 2명을 파견하여 제물포 분원을 창설하 고 보육 사업과 무료 진료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해성보육원' (海星保育院)과 '해성병원' (海星病 院)의 전신이었다. 한편 성당 건립 공사는 1894년의 청 일전쟁(淸日戰爭)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1895년 8월 11일에는 정초식이 거행되었고, 1897년 7월 4일 마침내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 성당의 건평은 396 평이었고, 형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춘 형태였는데, 1937년 확장 개축을 거쳐 1981년에는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마라발 신부 는 성당 건립 외에도 1900년 9월 1일 '박문소학교' (博 文小學校, 현 박문국민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또 1901년 영종(永宗) 공소(현 옹진군 영종도의 돌팍재)와 대 골 공소(현 시흥군 소래읍 富谷里)의 신설 등으로 본당의 교세가 크게 확대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나, 1895 년 1월에 일어난 신부 구타 사건, 같은 해 7월의 콜레라 발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수녀원의 불화에 연루되어 1904년에 성직 정지 처분을 받고 영종도로 들어가게 되 었다. 〔성장과 분할〕 4대 드뇌 신부는 답동 본당의 역대 신 부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하면서 일제 치하의 어려 움 속에서도 본당의 성장에 노력하였다. 우선 그는 부임 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 부지(현 신흥동) 침입으로 야 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전교에 노력하여 1910년까지 새 말(현 시흥군 소래읍 大也里) · 고잔(현 김포군 검단면 梧柳里 高盞) · 구월리(九月里) · 부평(富平)에 공소를 신설하였 으며, 같은 해에 영종도 공소 강당을 축성하였다. 아울러 1915년 2월 1일 드뇌 신부는 '바오로 성인' 을 본당의 주보 성인으로 결정하였다. 1909년부터는 박문학교 교 장을 겸임하여 직접 학교를 운영해 나갔고 이듬해에는 여자부를 신설하였으며, 1914년에는 교사를 신축 확대 하였다. 1917년 4월 2일에는 남 · 여부를 통합하여 '인 천박문학교 로 개칭함과 동시에 설립자 겸 교장이 되었 다. 이 밖에도 그는 1925년에 박문학교 남학교 교사를 2층으로 신축하였으며, 1937년 3월 1일에는 성당 구내 에 '박문유치원' 을 설립 개원하였고, 1935년에 성당의 외벽을 새로 쌓는 개축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6월 30 일 제7대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1935년 드뇌 신부는 연로하여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임종국(바오로) 신부를 보좌 신부로 맞이하였다. 그러다 가 1937년 드뇌 신부가 서울 주교관으로 휴양을 감에 따라 임 신부가 최초의 한국인 주임 신부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1959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본 당에 재임하면서 해방과 6 25 동란 등을 겪으면서 여 러 가지로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우선 평신도들 의 단체 설립에 노력하여 1938년에 부녀 회원으로 구성 된 '소화 데레사회' 를 조직하였고, 회장단과 복사단을 정식으로 구성하였으며, 1937년에 발족된 성모회의 활 동을 활성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시외 각처의 신자 공 동체를 위해 1938년에 소사(素沙) 공소를, 1941년에 부평 공소를 신설하였고, 1942년 노기남(盧基南, 바오 로) 주교가 제8대 서울교구장에 오름으로써 방인 교구로 설정되자, 교구 안에서는 가장 먼저 재정적 자립을 선언 하고 모든 신자들이 이를 위해 협력하였다. 이 무렵 본당 의 신자수는 약 3천 명 정도에 달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 기에 이르러 탄압이 심해지면서 성당 종을 탈취당해야 했고, 1945년 4월 1일에는 일제의 소개령(疏開令)에 의 해 박문학교 남학교 교사가 헐리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본당 신자들은 가장 먼저 탈취된 종을 찾 아왔고, 새로 복사단과 사목회를 구성하였으며, 가톨릭 청년회와 성모회, 학생회인 용심회(勇心會) 등을 중심으 로 갖가지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동시에 임 신부는 1945년 '소화(昭和)고등여학교'를 인수하여 박문여자 중학교' 로 개편하였는데, 이 학교는 전쟁 후인 1951년 에 '박문여자고등학교' 를 병설하여 중학교 6학급, 고등 학교 6학급으로 운영하다가 1954년 12월에 송림동에 새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한편 소사 공소의 신자 들은 해방 직후부터 본당 승격 운동을 전개하여 1946년 4월 5일에는 마침내 '소사 본당' 으로 분리 독립하게 되 었고, 1946년 11월에는 행주(幸州) 본당 관하에 있던 걸포리(傑浦里) 공소가 '김포(金浦) 본당' 으로 승격되면 서 인천의 북쪽 지역이 새 본당 관할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 1952년 3월에는 부평 공소가 '부평(현 부평2동) 본 당' 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9월에는 송림동에 건립한 새 성당이 축성됨과 동시에 '송림동(松林洞) 본당' 이 설 립되었으며, 1959년 5월 9일에는 '백령도(白翎島) 본 당' 이 분리되었다. 〔인천교구의 설정과 본당의 변모〕 답동 본당에 큰 변 화가 있게 된 것은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인천 감목 대 리구' 로 설정되고, 그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 되면서였다. 이에 따라 1959년 11월 16일자로 버크 신 부가 6대 본당 주임 겸 박문유치원 원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임종국 신부는 서울교구로 이임하였다. 버크 신 부는 본당 부임 후 우선 도서 지역의 전교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1959년에 영흥(靈興) 공소(옹진군 영흥 면), 선재(仙才) 공소(옹진군 영흥면), 운서리(雲西里) 공 소(옹진군 영종면)를 설립하고, 이웃의 송림동 본당과 협 의하여 1960년 7월 17일에 '도화동(道禾洞) 본당' 을, 1962년 9월 18일에 '화수동(花水洞) 본당' 을 분리 신 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낡은 성당을 수리하였고, 1961 년 3월에는 박문국민학교의 운영권을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부터 인계받아 제6대 교장을 겸직하였으며 1962년 3월 25일에는 신용 협동 조합을 창설하였다. 그 러는 동안 1961년 6월 6일, 인천 감목 대리구가 '인천 대목구 로 승격되고 맥노튼(W.J. McNaughton, 羅吉模) 주 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이 주교좌 본당으 로 설정되었다. 이후 답동 본당은 각 본당의 분리 설립으로 인해 관할 구역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지만, 전교 활동의 결과 총 신 자수는 언제나 5천 명 이상을 유지하였다. 즉 7대 본당 주임 설리반 신부 재임기에만 해도 1964년에 5,374명 을 기록하였고, 1965년에는 5,689명을, 1966년에는 5,413명을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 3,900여 명의 신자수를 기록한 이래 다시 신자가 증가하여 현재는 4천 여 명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또 1968년 4월 8대 주임으 로 강의선 신부가 부임한 뒤부터는 한국인 신부가 지금 까지 주임을 맡아 왔는데, 강 신부는 본당 부임 후 구 역 · 반을 재편성하고 단체 활동을 활성화시켜 나갔으며, 한편으로는 본당 주보의 창간 및 박문학교 교사 증축 등 에 노력하였다. 이 중에서 교사 증축 작업은 9대 주임 박 성규 신부 부임 후인 1970년 4월에 완료되었다. 박성규 신부는 이와 함께 성당 내부 수리 공사와 성당 앞 층계 공사를 하였고, 1974년에는 《답동 본당 85년사》를 간행 하였다. 이어 10대 주임 김병상 신부 때부터는 평신도 활동의 확대, 시국 기도회와 민주화 운동, 이웃 돕기 활 동 등을 통하여 본당의 활성화와 사회와의 일체감 마련 에 노력해 오고 있다. 아울러 11대 주임 김상용 신부는 1982년에 교육관을 완공하였고, 13대 주임 강용운 신부 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답동 대성당 100년 사》를 간행하였으며,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그 리고 1992년 10월 '대부도(大阜島) 본당' 을 분리 신설 함과 동시에 영흥 공소와 선재 공소를 새 본당으로 이관 하였다. (⇦ 인천 본당 ; 제물포 본당 ; → 인천교구) ※ 참고문헌 천주교 답동 교회, 《답동 대성당 100년사》, 1989/ 인 천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사》 천주 교 인천교구, 1991.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