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결핵 요양원

大邱結核療養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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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결핵 요양원(위)과 '밀알의 집'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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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결핵 요양원(위)과 '밀알의 집' 전경.


1968년에 개원하고, 1992년 6월 19일에 사회 복지 법인 "대구 가톨릭 사회 복지회"로 편입된 폐결핵 환자 요양 기관. 한국 가톨릭 결핵 사업 연합회의 모체. 대구 시 달서구 송현동 982번지 소재. 그리스도의 사랑 · 나 눔 정신에 따라 빈곤한 결핵 환자의 완치와 자활을 추구 하며, 가톨릭의 결핵 사업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결핵을 퇴치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역대 원장〕 초대 김동한 (金東漢, 가롤로) 신부(1976. 3~1983. 9), 2대 박병기(朴 炳璂, 베네딕도) 신부(1983. 10~1990. 2), 3대 김철재(金 鐵在, 바오로) 신부(1990. 3~1993. 5), 4대 박병기(베네딕 도) 신부(1993. 5~10), 5대 이대길(李大吉, 시메온) 신부 (1993. 10~1994. 3), 6대 김은화(미리암) 수녀(1994. 4~현 재). 〔설립과 변모] 1966년 5월 4일에 발족한 재단 법인 '태린회' (대표 이사 : 김태환)에서는 1968년 10월 22일 폐결핵 환자 수용 시설을 인가받고, 동시에 대구시립 희 망원으로부터 결핵 환자 54명을 인수하여 요양원을 개 원하였다. 개원 당시에는 사회적 · 경제적 여건으로 수용 소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따라서 환자에게 필요한 투약 은 말할 것도 없고 생활 방편도 시청의 구호에 의존해야 만 하였다. 1972년 7월 16일 법인 명칭이 사회 복지 법 인 춘광원(春光園, 대표 이사 : 서석환)으로 변경되었으며, 1976년 3월 20일부터 김동한 신부가 이를 인수, 운영하 게 되었다. 김 신부가 이 요양원를 운영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마산 국립 결핵 병원에 서 요양 생활을 한 것과 관계가 깊다. 인수 당시 요양원 에는 70여 명의 난치성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요양원을 인수한 김동한 신부는 대표 이사 겸 초대 원 장으로 취임하였고, 1977년 5월 5일에는 독일 밋시오 (Missio)와 정부 보조 등으로 여자 병동 및 취사장을 신 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15일 대구 결핵 요양원 후원회인 '밀알회' 를 조직하였는데, 그 회원으로는 가톨 릭 신자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불교 신자, 비신자, 심지어는 해외 동포들도 참여하였다. 이후 밀알회에서는 1979년 6월 10일 관리실을 신축하고 남자 병동을 개축 준공하였으며, 1980년 4월 30일 일본 동경대교구의 시 라야나기(白柳) 대주교로부터 X-선 촬영기(500mm)를 기증받아 설치하였다. 밀알회가 발전하면서 김 신부는 1978년부터 결핵균 음성 노약자를 위한 보호 시설 밀 알의 집' 설립을 추진하여 1984년에는 고령군 개진면 개포동 696번지에 이를 건립하게 되었다. 동시에 대구 결핵 요양원의 현대화 작업도 추진하여 1985년에는 현 대식 3층 건물을 완공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83년 9월 28일 김동한 신부는 폐수 종의 재발로 선종하였고, 후임으로 박병기 신부가 2대 원장에 취임하여 1984년에는 김 신부 생전의 염원이던 '가톨릭 결핵 사업 연합회' 를 결성하였다. 그 후 3대 원 장인 김철재 신부 재임시인 1992년 6월 19일에는 본 요 양원의 법인이 춘광원에서 사회 복지 법인 '대구 가톨릭 사회 복지회' 로 변경되었으며, 1994년 4월 10일 여자 병동 건물을 개축하고 직원 기숙사를 이전하였다. 그 동 안 밀알회는 계속 성장하여 1995년 4월 현재 4만 5천여 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다. (→ 대구 광역시립 희망원 ; 대구대교구 ; 김동한) ※ 참고문헌  朴泰鳳 〈韓國天主教會와 醫療事業의 展開過程〉, 《韓國教會史論文集》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대구대교구 편, 《교구 총람》, 1986/ 《교회와 역사》 212호(1993. 1),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 천주교회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