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大邱大敎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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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 기구표>
대구광역시와 경상도 중서부 지역을 관할하는 대교구(大敎區) .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1911년 4월 8일 조선 교구에서 분리되어 대구 대목구(大邱代牧區)區)로 설정되 었으며, 1962년 5월 9일 한국 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립 되면서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부산교구 · 청주교구 와 함께 대구 관구(大邱管區)를 형성하였다. 현재 대구 관구에는 대교구 승격 이후에 설정된 마산교구와 안동교 구가 포함되어 있다. 대구대교구의 관할 구역을 보면, 우 선 대목구 설정 당시에는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제 주도 전역이 여기에 속하였으나, 1931년 5월 9일 전라 남북도와 제주도를 전라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였다가 1937년 4월 13일 전라북도를 전주 지목구(全州知牧區) 로,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광주 지목구(光州知牧區)로 분 리하였다. 또 1954년 6월 18일에 경상남도 지역을 경남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였다가 1957년 1월 21일 부산 대 목구(釜山代牧區)로 분리하였으며, 1958년 6월 2일에 는 경상도 북동부 일원을 안동 감목 대리구로 설정하였 다가 1969년 5월 29일 안동교구(安東敎區)를 분리함으 로써 현재와 같은 관할 구역을 갖게 되었다. 〔관할 구역〕 대구시, 포항시, 경주시, 김천시, 영천시, 구미시, 경산 시, 경상북도의 월성군, 군위군, 영천군, 경산군, 달성 군, 청도군, 고령군, 울릉군, 칠곡군, 선산군, 성주군, 금 릉군, 영일군. 〔역대 교구장〕 초대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주교(1911. 4. 8~1938. 2.9), 2대 무세(G. Mousset, 文濟萬) 주교(1938.12.13~1942. 7. 7), 3대 하야사카 구베 에(早坂久兵衛) 주교(1942. 8. 30~1946. 1. 7), 4대 주재용 (朱在用, 바오로) 신부(1946. 1. 16~1948. 5.21), 5대 노기 남(盧基南, 바오로) 주교 겸임(1948. 5.27~12. 8), 6대 최 덕흥(崔德弘, 요한) 주교(1948. 12. 9~1954. 12. 14), 7대 서 정길(徐正吉, 요한) 대주교(1955. 7. 13~1986. 7.5), 8대 이 문희(李文熙, 바오로) 대주교(1986. 7. 5~현재). I . 복음의 전파와 순교자의 탄생
〔복음 전파와 초기 박해〕 경상도 지역에 복음이 전파 되기 시작한 것은 1790년대였다. 1791년의 신해박해로 인해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 북부에 퍼져 있던 신자들이 좀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 기 시작했고, 그중 일부가 경상도 북부와 남부의 산간 지 대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예로는 충청도 출신의 황일 광(黃日光, 알렉시오)이 1798년경에 입교한 뒤 아우와 함께 경상도로 이주한 사실을 들 수 있다. 한편 이와 관 련하여 1775년에 경상도 영주로 이주한 홍유한(洪儒 漢), 1785년의 을사 추조 적발 사건으로 유배된 김범우 (金範禹, 토마), 이 무렵에 경상도로 이주한 서광수(徐光 修) 등이 논의되기도 하지만, 그들이 천주교 신자였다거 나 경상도 지역에 복음을 전파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경상도로 이주하는 신자들 은 점차 증가하게 되었고, 이들이 새로운 신앙의 안식처 를 찾아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경상도 땅에 형성된 최초의 교우촌들이다. 이로써 경상도 지역 에서도 미약하나마 전교 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복음의 전파는 곧 박해를 예고하는 것이었고, 얼 마 되지 않아 이것이 현실로 닥쳐오게 되었다. 경상도 최 초의 박해는 1815년에 일어난 을해박해였다. 전지수라 는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청송 지방의 노래산(老萊山, 현 경북 청송군 安德面 老萊2동) 교우촌, 진보의 머루산(현 경 북 영양군 포산면 葡山洞) 교우촌, 영양의 곧은정과 우련밭 (雨蓮田, 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葛山里) 교우촌 등이 포졸 들의 습격을 받아 모두 71명이 체포되었고, 이 중 고성 대(高聖大, 베드로) 성운(聖云, 요셉) 형제와 최성열(崔 性悅, 바르바라),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 등 7명은 이 듬해 대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어 1827년 에는 전라도에서 일어난 박해의 여파가 경상도 지역에까 지 미쳐 다시 여러 신자들이 체포 투옥되었다. 당시 전라 도의 박해가 경상도 지역에까지 미친 이유는 전주 출신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상주의 잣골(현 경북 상주군 이 안면 新興里) 교우촌으로 이주해 와 살고 있었기 때문이 다. 이때 잣골뿐만 아니라 상주의 멍에목(駕項里, 현 경북 문경군 동로면 鳴田里)과 앵무당(현 경북 상주군 화북면 坪溫 里), 순흥의 곰직이(현 경북 봉화군 물야면 梧田里) 등에서 여러 신자들이 체포되어 옥사하거나 오랫동안 투옥되었 다. 그중 신태보는 1839년에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박 사의(朴士儀, 안드레아) 등 3명은 대구에서 참수되었다. 〔복음의 확대와 병인대박해〕 두 차례의 박해로 경상도 북부에 형성되었던 교우촌들은 대부분 신자 공동체인 것 이 노출되었으므로 더 이상 신앙의 안식처가 될 수 없었 다. 그러므로 살아 남은 신자들은 다시 남쪽으로 이주하 게 되었고, 그 결과 1830년대에는 경상도 남부 지역에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무렵에는 경상 도 남부 지역으로 유배된 신자가 해배(解配)된 후 복음 을 전파함으로써 언양(彥陽)에 새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 었으며, 대구 인근의 신나무골이나 칠곡(漆谷)의 한티 (현 경북 칠곡군 동명면 得明洞)에도 새 교우촌이 형성되었 다. 이와 같이 교우촌들을 중심으로 복음이 더욱 널리 전 파되는 상황이 185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는 사이 에 1831년 조선교구가 탄생하였고, 1836년부터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그중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는 1837~1838년 무렵에 처음으로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였다. 그러다가 1850년대에 이르러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 다블 뤼(Daveluy, 安敦伊) 주교의 사목 순방으로 공소가 설립 되었는데, , 이 공소들을 중심으로 1861년 이후에는 다블 뤼 주교가 경상도 남부 지역을, 페롱(Féron, 權) 신부가 경상도 서북부 지역을, 칼래(Calais, 姜) 신부가 경상도 서부 지역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경상도가 커다란 3개의 '지역 본당 으로 나누어졌음을 의미한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대박해(丙寅大迫害)는 경상 도 지역에서도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이에 앞서 1859년의 경신박해(庚申迫害) 때는 경상도의 신자들 중 17명이 체포되어 그중 이선이(엘리사벳)가 대구에서 옥 사하였고, 1862년경에는 경상도 남부에서 국지적인 박 해가 일어나 여러 교우촌이 폐허가 되기도 했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1865년까지 계속 예비자가 증가하고 있 었으며, 1864년 이후에는 칼래 신부가 경상도 북부 지 역을, 리텔(Ridel, 李福明) 신부가 남부 지역을 순회하였 다. 병인대박해의 서막은 이미 1865년 말에 시작되고 있었다. 경상도 문경의 건아기(乾鶴, 현 경북 문경군 동로 면 鳴田里) 회장인 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여우목(狐 項里, 현 경북 문경군 문경읍 中坪里) 회장의 아들인 이 시 몬(혹은 요한)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상주 평지리(현 경북 문경군 산양면 평지리)에 살고 있던 서유형(바오로)도 상주 진영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1866년 초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는 밀양에서 몇몇 신자가 체포되었을 뿐 경상도 북부 지역 으로는 직접적인 여파가 미치지 않다가 그 해 가을 박해 가 두 번째 단계로 이어지면서 이 지역에서도 순교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1866년 9월의 병인양요(丙寅洋擾)에 자극을 받은 조 정에서 다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전국에 내 리자 우선 문경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上乃里) 교우촌 에 거주하던 서태순(베드로)과 김 아우구스티노 일가, 장 서방 부부 등이 체포되어 상주에서 순교하였고, 여우 목의 김 수산나도 이때 상주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다. 이 어 여우목의 회장이던 이윤일(요한)이 10월에 체포되어 상주 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1월 21일 대구 관덕당(觀 德堂) 앞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윤일의 시신 은 그 후 아들에 의해 대구 날뫼〔飛山〕에 안장되었다가 1904년경 경기도 용인의 심방골(현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墨里의 먹뱅이)로 이장되었으며, 1984년 시성된 지 3년 만인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장 이문희(바오로) 대주교에 의해 대구대교구청으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이 무렵 진주에서도 정찬문(안토니오)과 구 타데오가 체포 되어 순교하였다. 경상도 지역에 다시 박해가 일어나게 된 것은 1868년 의 무진박해(戊辰迫害) 때였다.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 는 흥선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독일 상 인 오페르트(Oppert)가 도굴한 데서 재연된 전국적인 박 해로 인해 우선 칠곡의 한티 교우촌 출신인 서익순(요 한)과 이 알로이시오가 서울로 압송되어 순교하였고, 조 가롤로는 한티에서 체포되어 참수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 남부의 김해, 동래, 언양 지역에서도 여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후에도 1870년 무렵까지 전국 에서 크고 작은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경상도 지역에서 새로 순교자가 탄생한 기록은 없다. 그리고 점차 박해가 그치면서 새로 선교사들이 입국하게 되었고, 이제 신자 들은 비밀히 유지해 오던 신앙 생활을 드러내 복음을 전 할 수 있게 되었다.
II . 공소의 부활과 대구 본당의 설립
〔본당 설정과 공소의 부활〕 오랜 박해가 끝나면서 경 상도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교우촌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박해의 여파가 남아 있었으므로 활 발하게 전교 할동을 전개할 수는 없었다. 특히 경상도 지 역은 전통 유림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고, 이들은 1881 년에 외국과의 통상 조약과 천주교의 전파를 반대하는 이른바 '영남만인소' (嶺南萬人疏)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 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선교사들은 1876년부 터 다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경상도 지역을 처 음으로 방문한 선교사는 1877년에 입국한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였다. 그는 1879년 무렵에 대구, 언양, 선 필(善弼) 등을 방문하였으며, 도중에 전염병에 걸려 고 생한 적이 있었다. 그 뒤를 이어 1878년에 입국한 로베 르(Robert, 金保祿) 신부가 강원도와 황해도, 함경도 등 지에서 활동하던 중 1882년에 경상도 지역의 전담 신부 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경상도 지역은 박해로 인해 지역 본당의 성격이 소멸되었다가 10여 년 만에 다시 '경상도 지역 본당' 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경상도 지역 본당을 맡게 된 로베르 신부는 즉시 사목 순방에 나서 1882~1883년 사이에 경상도 · 충청도 · 강원도 등지의 공소들을 방문하였는데, 그중 경상도 지 역의 공소는 모두 26개로 경주 · 칠곡 · 함안 · 밀양 · 성 주에 2~4개 공소들이 있었고, 대구 · 선산 · 군위 · 경 산 · 청도 · 언양 · 진주 등지에도 공소가 있었다. 또 신자 수는 경상도 전체가 1,518명으로 대구읍이 197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주 선필 82명, 군위 78명, 진주 78명, 성주 77명, 선산 65명 등이었다. 그러므로 이 무렵에는 이미 경상도 전역에 신자들이 분포되어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경상도 지역 본당은 다른 지역보다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었고, 1884년에는 공소 가 34개로 확대되었으며 대인 영세자만도 216명에 이르 렀다. 이에 로베르 신부는 대구 지역에 따로 한 명의 선 교사가 상주할 필요가 있다고 교구장 블랑(Blanc, 白圭 三) 주교에게 건의하였다. 이때까지 로베르 신부는 지평 (현 경기도 양평군 砥平里)과 예수성심신학교가 있던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釜坪里) 등에 거처하면서 경상도 신자들을 방문하였는데, 자신의 거처를 경상도로 옮기는 것이 시급함을 깨닫고 1885년에는 마침내 부엉 골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대구에 정착하지 못하고 우선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경상도의 신나무골(경북 칠곡군 枝川面 蓮花洞) 교우촌에 거처를 마 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아직 신앙의 자유를 얻지 못한 상황이었고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과 신자들에 대한 위협 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해에 그는 성영회(聖嬰會) 사업을 통해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연령회와 유사한 단 체를 조직하여 가난한 이웃들의 장례를 돌보아 주기 시 작하였다. 〔대구 본당의 설립과 정착〕 신나무골에 정착한 로베르 신부는 다음해 5월경 보좌로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신부를 맞이한 뒤, 일단 그를 신나무골에서 80리 가량 떨어진 여진(余津, 경북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으로 보내 교우들을 돌보게 하였다. 그러다가 1887년 3월경에는 신나무골을 그에게 맡기고 대구 인근의 새방골(新坊谷, 현 대구시 서구 上里洞과 竹田洞 부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 으니, 이것이 바로 "대구 본당"의 설립이다. 당시 대구의 공소로는 가장 큰 남산(南山)을 비롯하여 모두 6개였고, 신자수는 273명이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2월, 대구의 아전 2명이 포졸들을 앞세워 몇몇 신자들을 체포 투옥하 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허 골롬바라는 여성 신자가 함께 체포되어 약 1년 6개월 간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녀는 감사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로베르 신부의 중재로 석방될 수 있었 다. 이어 1891년에 와서는 로베르 신부 자신이 지방민 과 아전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대구 감사에 의해 축출되 는 이른바 '대구교안' (大邱敎案)을 겪게 되었다. 이 교 안은 뮈텔(Mutel, 閔德孝) 주교, 프랑스 공사 플랑시 (Plancy, 葛林德)의 중재로 해결되었으며, 협상이 타결되 자 로베르 신부는 1891년 4월 20일에 군인들의 호송을 받으며 서울을 떠나 4월 30일에 대구에 도착하였다. 그 동안 신나무골에 있던 보두네 신부는 1888년 봄 전라도로 가서 전주 본당을 설립하였고, 1889년 초에 입국한 죠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한때 신나무골에 거 처하다가 이듬해 초 절영도(絶影島, 현재의 影島)로 내려 가 부산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 뒤를 이어 1894년에 입 국한 파이야스(Pailhasse, 河敬朝) 신부는 그 해 6월 신나 무골에 와서 머물며 경상도 북부 지방을 맡아 전교하다 가 9월경 가실(佳室, 왜관읍 낙산동 蘆湖)로 이주하여 낙 산 본당을 설립하였다. 한편 로베르 신부는 1891년 음 력 12월에 새방골에서 대어벌(현 대구시 중구 仁橋洞)의 정규옥(鄭圭鈺) 승지 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893년 초 다시 계산동(桂山洞, 당시의 남산동)으로 이전하였으 니, 이것이 계산동 본당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었다. 처음 로베르 신부는 그곳에 있던 초가를 임시 성당으로 삼아 전교 활동을 하다가 1897년 현재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 였으며, 2년 만인 1899년에 그리스식 십자형 목조 성당 을 완공하고 축성식을 가졌다. 이 해에 본당에서는 해성 재(海星齋)라는 한문 서당을 설립하였는데, 이 서당은 그 후 1908년에 해체되고 초등 교육 기관인 성립학교 (聖立學校)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새 성당은 1년도 채 못 되어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에 로베르 신부는 즉시 새 성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공사에 착수하여 1902년 5월 에는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성당을 완공할 수 있었다. 이 무렵에는 이미 경상도와 전라도 여러 곳에 본당이 설립되어 있었고, 제주도에도 선교사가 진출하여 활동하는 등 신자수가 계속 증가하는 상태에 있었다.
Ⅲ. 대구 대목구 설정과 변모
〔대목구 설정과 초기 현황〕 대구 본당에서 부산 본당 과 낙산 본당을 분리한 이래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는 1901년에 김천(현 황금동) 본당이, 1907년에는 용평 본 당이 다시 분리 신설되었다. 그리고 남부 지역에서는 1899년 진주에 본당이 설립되었다가 1900년에 마산포 로 이전되었으며, 1906년에 진주의 소촌(召村, 현 문산면 蘇文里)에 본당이 신설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안대동 (安大洞) 본당, 전주 본당에 이어 1893년에 고산의 되재 [升峙] 본당(현 고산 본당의 전신), 1896년에 금구의 수류 (水流) 본당, 1897년에 여산의 나바위〔羅岩〕 본당과 목 포 본당, 1900년에 진안의 어은동(漁隱洞) 본당, 1901 년에 정읍의 신성리(新城里) 본당, 1904년에는 나주의 양천(良川, 현 노안)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제주도에는 1899년에 북제주의 제주 본당이, 1900년에 남제주의 서홍리〔西烘里〕에 한논〔大踏〕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 결 과 1910년까지 경상도 · 전라도 · 제주도에 모두 18개 본당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 으로 재임하던 뮈텔 주교는 교구 분할의 필요성을 느껴 이를 교황청에 건의하였다. 당시의 교황 비오 10세는 이 를 받아들여 1911년 4월 8일자 친서를 통해 마침내 "대 구 대목구를 설정함과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 하였고, 드망즈 신부를 주교로 승품시켜 초대 교구장으 로 임명하였다. 드망즈 신부의 주교 성성식은 6월 11일 서울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새 대목구에 포함된 지역이 바로 경상도 · 전라 도 · 제주도였으며, 그 중심지는 대구였고, 이전의 대구 본당이 계산동 본당으로 개칭되면서 주교좌 본당으로 설 정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조선 대목구는 서울 대목구 로 개칭되면서 그 밖의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드망 즈 주교는 사목상의 이유로 충청도 논산 지역을 대구 대 목구에 편입시켜 줄 것을 뮈텔 주교에게 요청하였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 지역은 1922년 서울교구로 반환되었다.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성성식 직후 경상도, 전라 도의 모든 본당을 순방한 뒤 7월 2일에는 '루르드의 성 모 를 교구 주보로 정하고 주교관, 신학교 건립, 주교좌 성당의 증축 계획을 수립하여 하나씩 완성해 나갔다. 그 리고 1912년 6월 1일 성신 강림 대축일에 <대구교구 지 도서>(Directorium Missionis Taikou)를 반포하여 교구 사목 방침을 정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913년 9월 10일에는 <회장의 본분>을 반포하였다. 건물 건립 계획 중에서는 가장 먼저 1913년 12월에 주교관이 완공되었고, 이어 신학교 건립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1914년 10월 1일에 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완공되어 10월 4일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교구에서는 이에 따라 서울의 용산 예수성 심신학교에서 공부하던 58명의 신학생들을 새 신학교로 전입시켰으며, 초대 교장으로 샤르즈뵈프(Chargeboef, 宋 德望) 신부를 임명하였다. 당시의 교육 과정은 중등과 · 신학과 · 철학과 등 18년이었다. 한편 계산동 본당에서 는 신자들의 활동 단체인 명도회를 위해 1912년에 명도 회관을 건립하였으며, 1915년에는 수녀원을 건립함과 동시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였 다. 그리고 1915년에 일제의 포교 규칙(布敎規則) 선포 로 교회 학교 운영이 어렵게 되면서 기존의 성립학교를 김찬수에게 인계하였는데, 그는 학교 인수 후 교명을 해 성학교(海星學校)로 개칭하는 동시에 교사를 신축 이전 (현재의 효성국민학교 위치)하고 드망즈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그중 해성학교 여자부는 1924년에 교 명을 효성여학교(曉星女學校)로 개칭하고 독립하였다가 1925년 5월 15일, 효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한편 1911년부터 시작된 성당과 종탑 증축 공사는 1919년에 완공되어 5월 11일에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드망즈 주교는 처음 계획 때 자신의 계획을 다 이룰 수 있게 된다면,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 워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이렇게 성당 증축 공사 가 마무리될 수 있게 되자 약속대로 1918년 8월 15일 성모 동굴을 완성하고 10월 13일 성모당을 건립하여 축 성식을 가졌다. 이 무렵 평신도들의 활동 중에서 가장 활 발하였던 것은 청년들의 활동이었다. 이들은 1909년에 성립 학우회(聖立學友會)를 발족시켰는데, 그중 연장자 들은 1912년에 이전의 명도회(明道會)를 개편하여 남방 천주 공교 명도회를 창립하였다. 성립 학우회에서는 1915년에 해성 체육단을 발족시켰고, 이어 해성여자학 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1920년에는 그 명칭을 해 성 청년회(海星靑年會)로 변경하였다. 이후 1921년 4월 10일, 명도회와 해성 청년회는 상호 협의를 거쳐 통합하 였으나, 1924년 7월 20일에 이전의 청년회 회원들을 주 축으로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南方天主公教青年會)가 결성됨으로써 비로소 조직적인 가톨릭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청년회에서는 1927년 4월 1일 기관지로 서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를 창간하였다. 〔교구 분할과 시련〕 대구 대목구는 설립 이후 계속 교 세가 확대되어 나갔다. 1911년에 18개 본당 24,694명 이던 것이 1920년에는 30,002명이 되었고, 1930년에 는 다시 34개 본당 37,455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 에 따라 드망즈 주교는 1922년에 문경(현 점촌) 본당, 퇴 강(退江) 본당을 신설하였고, 1924년에는 안동 본당을 설립하였다. 또 1926년에는 대구의 남산 본당, 경주 본 당, 거제의 옥포(玉浦) 본당, 언양 본당, 전라도의 장수 본당, 부안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1927년에는 대구의 비산 본당이, 1928년에는 하양 본당, 거창 본당, 왜관 본당이, 1929년에는 통영 본당, 금산 본당, 삼랑진 본당 등이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교세와 본당이 증가하면서 드망즈 주교는 장차 전라도 지역을 분할한다는 계획 아 래 1931년 5월 9일, 제주도와 전라남북도를 합쳐 '전라 감목 대리구' (全羅監牧代理區)로 설정하고 초대 감목 대 리에 전주 본당의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를 임 명했다. 당시 대구 대목구의 총 신자수 37,450명 중에 서 전라도의 신자수는 17,529명이었고, 본당은 14개(전 북 10, 전남 2, 제주 2), 공소는 199개, 성당은 36개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전라도 지역을 하나의 대 목구로 설정한다는 것이 무리였다. 무엇보다도 사제수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드망즈 주교는 교황청에 새 선교회의 진출을 요청하였고, 교황청에서도 이를 받 아들여 1933년 10월 아일랜드에 본부를 두고 있던 골롬 반회에서 전라남도 지역의 사목을 맡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0월 29일 맥폴린(Owen McPolin, 林) 신부 를 비롯하여 10명의 골롬반회 신부들이 입국하게 되었 으며, 다음해 5월 10일에는 '전라남도 감목 대리구' (감 목 대리 : 맥폴린 신부)가 설정됨으로써 전라북도 지역과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두 지역에서는 대목구의 승 격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37년 4월 13일에는 마침내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전라남도가 '광주 지목 구' 로, 전라북도가 '전주 지목구 로 설정됨과 동시에 맥 폴린 신부와 김양홍 신부가 각각 초대 지목(知牧)에 임 명됨으로써 대구 대목구로부터 분리되었다. 전라도 지역의 분할은 곧 대구 대목구의 성장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대목구의 관할 구역과 교세는 축소되었고, 따라서 새로운 성장을 위해 노력하 여야만 하였다. 이 무렵인 1931년 7월, 청년회 회지였 던 <천주교회보>는 교구 기관지로 변경되었다가 1934년 1월 주교 회의의 결정에 따라 《가톨릭 청년》이 창간됨과 동시에 자진 휴간하였다. 또 드망즈 주교는 1933년 8월 21일 지구 사제 대의원을 선출하였는데, 이때 경상남북 도가 모두 4개 지역으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계산동 본 당, 김천 본당, 마산 본당, 문산 본당의 주임 신부가 지 구 사제 대의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34년에는 성 요셉 무료 진료소가 개원하였으며, 각 본당에 평신도 사 도직 단체인 평의회(評議會)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1935년 5월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가장 많은 숫자인 12명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교구 분할 뒤 각 본당에서는 교세 확대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으 나, 일제 치하의 생활 환경과 압제 정치로 인해 전교에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 결과 대목구 분할 이후인 1938년에 27,003명을 기록하였던 교세가 큰 변동이 없 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반면에 본당 설립은 1932년에 합천 본당, 1933년에 함안 본당과 삼덕 본당 이 설립된 이래 꾸준히 지속되었다. 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대구 대목구도 안팎으로 갖가 지 변모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우선 1938년 2월 9일 에는 초대 감목으로 27년 간 활동해 오던 드망즈 주교가 선종하였다. 이에 따라 1928년부터 제2대 부감목으로 활동해 오던 무세 신부가 같은 해 12월 13일 제2대 감 목으로 임명되어, 1939년 5월 7일 주교 성성식과 착좌 식을 갖게 되었다. 이 무렵 일제는 교회에도 신사 참배를 강요하였고, 1938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이래 국민 정 신 총동맹 결성, 황국 신민화 정책 등을 통해 기회가 있 을 때마다 교회를 억압하였다. 또 강연회나 성탄 축하식 을 갖지 못하도록 하였고, 마침내는 무세 주교의 교구장 사퇴까지 강요하게 되었다. 이때 평양교구의 메리놀회 선교사들과 광주 · 춘천의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국외로 추방되거나 연금되었다. 그러자 서울 대목구의 라리보 (Larribeau, 元亨根) 주교는 비밀리에 노기남(盧基南, 바 오로) 주교에게 교구장직을 승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에 무세 주교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42년 7월 7 일 교구장직을 사임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결과 같은 해 8월 30일, 일본인 하야사카 주교가 대구 대목구의 제 3대 감목으로 임명되어 10월 25일에 착좌식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일부 한국인 성직자들은 신사 참배를 거부 하거나 첩자 역할을 하였다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구속되 었고, 1943년에는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일본군 병영으 로 사용되면서 신학생들은 서울의 학생들과 함께 함경남 도의 덕원 신학교에서 위탁 교육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러다가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5년 3월 31일에는 대구 대목구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체포되어 모두 남산 성당에 연금되었다.
Ⅳ. 대교구 승격과 성장
〔해방 이후의 변모〕 해방이 되면서 남산 성당에 연금 되었던 선교사들이 석방되고, 각 본당들이 안정을 찾아 갈 즈음인 1946년 1월 7일 하야사카 주교가 선종하였 다. 이때 그의 후임으로 주재용(바오로) 신부가 1월 16 일 교구의 임시 관리자로 임명되었다가 2월 27일 제4대 감목으로 착좌하였다. 그러나 1948년 5월 21일에 주 신 부가 갑자기 관리자직을 사임함으로써 서울 대목구의 노 기남 주교가 제5대 감목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5월 27일에 착좌식을 갖고 대구 대목구의 제5대 감목을 겸 하게 되었다. 이어 1948년 8월 29일에는 그 동안 서울 과 대구 대목구의 사목을 맡아 오던 파리 외방전교회 회 원들이 새로 독립 포교지가 된 대전 지역을 맡아 전출하 였고, 같은 해 12월 9일 최덕홍(요한) 신부가 대구 대목 구의 제6대 감목으로 임명되어 1949년 1월 30일에 주 교 성성식 및 착좌식을 가졌다. 그러는 동안 부산공과학 원(현 대양중학교와 대양공업고등학교의 전신) · 왜관 순심여 자초급중학교(순심여자중 · 고등학교의 전신) · 대구 대건중 학교 등이 설립되었으며, 최덕홍 주교 성성 이후인 1949년에는 경주의 근화여자중학교 · 마산 성지여자중 학교 · 대구 효성여자중학교(효성여자고등학교의 전신) 등 이 새로 문을 열게 되었고, 1950년 1월 31일에는 1949 년에 인가된 김천의 성의여자중학교가 성의중학교로 개 칭 인가되었다. 또 1945년에는 <천주교회보>가 복간되 었고, 1948년에는 대구 대목구 가톨릭 청년 연합회가 발족되었으며, 1946년에 시작한 대건 인쇄소가 1949년 9월 1일 대건 출판사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 중 <천주교 회보>는 1953년에 <가톨릭 신보>로, 이듬해 <가톨릭 시 보>로, 1980년에는 <가톨릭 신문>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50년의 6 · 25 동란은 새롭게 발돋움하려는 교구 활동을 일시 멈추게 하였다. 이때 최덕홍 주교는 대 건중학교 건물을 육군 병원으로, 효성중학교 건물을 공 군 본부로, 대건 출판사를 군용 인쇄소로 사용토록 하였 으며, 평화를 위한 기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대구의 청년 신자들은 피난민 구호 활동과 의용대를 중심으로 한 치안 유지 활동, 가톨릭 합창단을 중심으로 한 위문 공연 등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구호 활동에는 각 본당 신 자들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평신도 단체 등이 참여 하였으며, 교구청 구내에는 급식소가 설치되기도 하였 다. 이와 함께 대구 대목구에서는 1951년 8월 30일, 효 성여자고등학교를 효성여자중학교에서, 대건고등학교를 대건중학교에서 분리 개교하였고, 10월 1일에는 남선경 제신문사로부터 <대구매일신문>을 인수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 신문사는 그 후 1959년 개인에게 인계 되었다가 1960년 12월 6일에 다시 대목구에서 인수하 였다. 또 1952년 3월 30일에는 왜관에 순심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9월 8일에는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가 정식 수도회로 승격되었다. 물론 전쟁 기간 동안 부산 지역의 각 본당들은 피난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크게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우선 신자수가 크게 증가하였고, 이와 함께 본당의 분할과 신설이 이루 어지게 되었으며, 각종 사회 사업 활동과 평신도 활동도 활발해져 갔다. 그 결과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부 산과 경상남도 지역이 대구 대목구로부터 독립될 가능성 이 엿보이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대구 교회는 크게 변모되기 시작하였 다. 우선 최덕홍 주교는 1951년 10월 22일, 원산에서 월남하여 부산 중앙 본당에서 활동하던 성 베네딕도 수 녀회를 초청하여 남산 본당에 자리잡도록 하였다. 이 수 녀회는 이듬해 10월 12일에 남산동을 떠나 삼덕동으로, 1955년 1월에는 신암동으로 이전하여 이듬해 7월 2일 파티마 병원을 설립 개원하였다. 이어 전쟁 이전에 공산 당에 의해 해체되었다가 1952년 초에 다시 입국한 덕원 (德源)의 성 베네딕도 수도회 회원들이 대구 지역에서 활동을 하게 되자 최 주교는 그들의 정착을 위해 1952 년 7월 6일 '왜관 감목 대리구' 를 설정하고, 그 초대 감 목에 덕원과 함흥교구장 서리인 비테를리(T. Bitterli, 李) 신부를 임명하는 한편 왜관과 낙산 본당의 사목을 위임 하였다. 그 후 왜관 감목 대리구에서는 사목 지역을 확장 하여 김천 · 상주 · 문경 지역에까지 진출하였다. 또 대목 구에서는 1952년 4월 10일 문교부로부터 효성여자초급 대학의 인가를 받아 5월 15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처 음 이 학교의 학과는 국문 · 음악 · 가사 등 세 개 학과에 지나지 않았지만, 개교한 지 1년 뒤인 1953년 5월에는 4년제 효성여자대학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계산동 본당 에서는 1952년에 대성당 낙성 50주년을 기념하여 《대 구 천주교회사》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1953년 8월 15일, 최덕홍 주교는 교구와 모든 본당을 성모 성심께 봉헌하는 봉헌식을 거행하고, 교황 비오 12 세의 교서대로 이해 12월부터 성모 성년 행사를 시작하 였는데, 이 행사는 1954년 10월의 전국 성모 성년 대회 와 한미 합동 성체 대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성모 성년 행사가 계속되는 동안 최 주교는 1954년 6월 18일자로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을 '경남 감목 대리구' 로 설정하고 초대 감목 대리로 서정길(요한) 신부를 임명하였다. 그 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1943년부터 사용해 오던 《가톨 릭 성가집》을 개편하여 각 본당에 보급시키는 등 전례 개혁에 힘쓰다가 1954년 12월 14일 사목 방문 도중 지 병이 악화되어 선종하였다. 최 주교에 이어 제7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사람은 경 남 감목 대리로 있던 서정길 주교였다. 그는 1955년 7 월 3일 교구장으로 임명을 받고, 9월 15일 주교 성성식 및 착좌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전날 자유당 정부의 탄압 에 항의하던 대구매일신문사에 대한 테러 사건이 발생하 자 착좌식에서 언론의 자유를 수호할 것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이에 앞서 1955년 5월에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 의 우애회가 대구에 진출하였다. 당시 대구 대목구의 교 세 현황은 경상남북도를 합하여 주교 1명, 한국인 사제 56명, 외국인 사제 20명, 본당 45개, 신자수 62,473명 이었다. 서 주교는 그 후 서울의 성신대학 확장 사업과 군종 사제 후원 사업 등에 적극 동참하도록 하는 한편, 1957년 2월 2일에는 공한을 통해 상주의 황 데레사 사 건에 대해 엄한 판정을 내려 교류를 금지하였다. 상주 사 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도중 1957년 1월 21일 교황 비오 12세는 경남 감목 대리구를 '부산 대목구 로 설정 하는 동시에 전주와 광주 지목구를 각각 대목구로 승격 시켰다. 이에 따라 경상남도 지역은 대구 대목구에서 완 전히 분리되었다. 이어 서 주교는 1958년 6월 2일, 경 상북도 북동부 지역의 사목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 여 '안동 감목 대리구' 로 설정함과 동시에 알레르(F. Haller) 신부를 초대 감목 대리로 임명하였다. 한편 1957 년 1월에는 왜관 본당에서 교구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가 발족되었고, 1961년 4월에는 칠곡에 가톨릭 피부과 병 원이 개설되었다. 〔대교구 승격과 성장〕 1962년은 한국 교회 모두가 새 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시기였다. 전후 오랫동안의 노 력으로 교세가 크게 발전하면서 이해 3월 24일자로 교 황 요한 23세에 의해 한국에 정식으로 교계 제도(敎階制 度)가 설정된 것이다. 이에 따라 종전의 대구 대목구가 대구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부산교구 · 청주교구를 포함하는 대구 관구의 중심이 되었고, 서정길 주교가 대 주교로 승품되었다. 또 이해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어 교구 신자들이 그 성공을 위해 기원한 해이기 도 하였다. 이 공의회가 1965년에 끝나면서 제도 교회 가 아닌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가 강조되고, 아울 러 전례나 제도적인 측면에서 여러 가지 쇄신 운동이 일 어나면서 대구대교구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선 1965년 1월 1일부터 우리말 미사 경본이 사용되기 시작 하였고, 교회 쇄신과 일치 운동이 전개되어 나갔다. 이듬 해 3월 10일에는 서 대주교가 특별 성년 교서를 발표함 과 동시에 계산동 본당 등 7개 본당이 성년 순례 기념 성 당으로 지정되었으며 1967년 교구 가톨릭 액션 단체 협의회가 결성됨으로써 평신도 사도직 활동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9년 11월 30일부터는 새 미사 통상문이 사용되었다. 그러는 동안 1962년 8월 22일에 대구 파티마 병원이 종합 병원으로 승격 인가되었고, 9월에는 교구 최초로 대명동 본당에서 신용 협동 조합을 설립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매일신문사 사내에서 교구 가톨릭 센터가 개원 하였고, 12월 24일에는 경주 근화여자고등학교가 신설 인가되었으며, 1964년 2월 17일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 원이 대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1965년 11월 23일에는 하양읍에 무학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어 1966년 1월 에는 선목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운영상의 난점으로 인해 1970년에 대건중고등학교로 편입되었다. 1967년 3월 21일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분 원이 대구 관구로 승격되었고, 1968년 병인 순교자 24 위의 시복식을 계기로 10월 13일 교구 경축 행사가 개 최되었으며, 1969년 5월에는 가톨릭 신학원이 설립되었 고, 6월에는 꾸르실료 운동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1972 년 9월 19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이문희(바오로) 신부를 보좌 주교로 임명함으로써 11월 30일에는 주교 성성식 과 축하식이 거행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구대교구의 성장은 날로 두드러지게 되었다. 교구 신자수는 1975년 10만 명을 넘어선 이래 1985년까지 10년 동안 18만여 명으로 증 가하였고, 본당수는 80여 개로 증가하였으며, 평신도 사 도직 단체의 활동이 각 본당별로 크게 활성화되었다. 또 1974년에 가톨릭 회관 개관과 효성 인쇄소 설립, 1976 년 대구 결핵 요양원 인수, 1976년 5월 포항 성모병원 개원, 7월에 신나무골 사적 기념비 건립, 1980년 대구 시립 희망원 인수, 대구 가톨릭 의료원 개원 등이 이루어 졌으며, 그 해 10월에는 효성여자대학이 종합 대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81년 11월에는 대구매일신문사 에서 매일 빌딩을 신축하였고, 12월 26일 오랜 교구의 숙원이던 선목신학대학이 설립 인가되어 이듬해 3월에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1984년 10월에 대구 가톨릭대학 으로 개명하였다. 1980년 10월에는 《대구교구 총람》이 발간되었고, 1983년 3월에는 교구사 편찬위원회가 발족 되었다. 또 같은 해 9월 1일부터 교구에서는 한국 천주 교회 103위 성인 시성식을 위해 103일 기도를 시작하였 고, 1984년 5월 5일에는 시성식을 위해 방한한 요한 바 오로 2세가 계산동 본당을 방문했으며, 또 1986년 3월 1일에는 왜관 감목 대리구가 교구 직할구로 편입되었다. 그러던 중 서정길 대주교는 1986년 초 은퇴를 공식 표명하고 동명 성가양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987년 4월 7일에 선종하였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에 앞서 1985년 1월 5일자로 이문희 보좌 주교를 계승 권 있는 부대주교로 임명하였고, 따라서 이 대주교는 서 대주교의 은퇴와 동시에 제8대 교구장을 이어받아 1986 년 7월 5일에 착좌식을 갖게 되었다. 이문희 대주교는 착좌식 직후 교구 내 본당을 사목 순방하였고, 1987년 1월 21일에는 대구 지역 출신 순교자인 성 이윤일(요 한)을 교구의 제2 수호자로 반포하고, 12월 21일에는 그 유해를 미리내에서 발굴하여 대구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하였다. 또 1987년과 1988년에 걸쳐 교구 성체 대 회와 순교자 현양 대회를 개최하고, 한티의 무명 순교자 무덤을 발굴하는 등 신나무골과 한티 사적지의 조성에도 노력하였다. 이후 1991년 1월 20일에는 관덕정 천주교 순교자 기념관이 완공되면서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다시 관덕정으로 옮겨져 봉안되었다. 그 동안 계산동 본당에서는 1986년 11월 1일부터 본 당 설립 10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그 기념 사 업의 일환으로 12월에 《대구 본당 100년사》를 발간하였 다. 1990년 10월 대구 가톨릭대학에 의예과가 신설되었 고, 다음해 6월 1일에는 신축 교사가 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는 1995년 3월 1일 효성여자대학교와 통 합하여 대구 효성 가톨릭대학교로 개칭되면서 새로운 발 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993년에는 기존의 효 성 인쇄소와 1984년에 설립된 대건 출판사가 병합, 대 건 인쇄 출판사로 변경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4년 2월 3일 서정덕(알렉산델) 신부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대구대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됨으로써 교구의 새 로운 도약을 위한 박차를 준비하고 있다. 교구의 교세는 1994년 말 현재 총 신자수가 30만 6,159명으로 증가하 였고, 본당은 100개, 공소 121개, 주교 2명, 몬시놀 4 명, 성직자 258명, 수도 단체 24개에 이르게 되었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상 · 중 . 하/ 崔正福 編著, 《大邱天主 敎會史》, 大邱桂山洞敎會, 1952/ 金九鼎 編著, 《嶺南殉教史》, 大建出 版社, 1966/ 김구정 지음, 《천주교 경남 발전사》, 天主教 釜山教區, 1967/ 天主教倭館敎會, 《倭館半世紀》, 芬道印刷出版社, 1978/ 天主 教釜山教區, 《教區年報》, 韓國敎會史研究所, 1984/ 천주교 대구대 교구 교구사 편찬위원회, 《교구사 연대표》, 천주교 대구대교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서 울教區年報》 I, 明洞天主敎會, 1984/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 총람》,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天主教大邱大教區史 編纂委員會 편, 《大邱本堂 百年 史》, 대건출판 사, 1986/ 마백락, 《경상도 교회의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天主 敎 釜山教區 편, 《釜山教區三十年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0/ 최 석우, 大邱 본당의 설립과 정착 과정>, 《神父全達出會長 華甲紀念 論叢》, 每 日 新聞社, 1992/ Compte-Rendu de la Société des M.E.P., 1911~1940.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