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교구 소속 본당. 1926년 6월 말, 팔도구(八道溝)본당에서 분리되어 만주의 간도성 연길현 대령동(大嶺洞)에 설립되었다가, 1935년 연길현 다조구로 이전됨과 동시에 '다조구 본당' (茶條溝本堂)으로 개칭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원산교구 소속이었으나 1928년 7월 19일 연길교구 소속이 되었으며, 주보는 성 세자 요한. 〔교세〕 1926년 1,500여 명, 1936년 965명. 〔역대 신부〕 임시 엠머링(P. Emmerling, 嚴) 비오(1926~1927), 초대 랍(C. Rapp, 朴) 콘라도(1927~1930), 2대 아쇼프(S. Aschoff, 安) 실베스텔(1930~1932), 3대 콜러(S. Koller, 李) 살바도르(1934~1946).
〔설립과 초기 현황] 대령동 본당은 1910년에 팔도구 본당 소속 공소로 설립되었다가 1926년 6월 말에 준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팔도구 본당 보좌였던 엠머링 신부가 임시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이듬해 5월 시국이 불안해지자 다시 팔도구로 돌아갔고, 이에 따라 대령동 본당은 다시 팔도구 본당의 공소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연길 본당의 보좌로 있던 랍 신부가 임시로 신자들을 돌보게 되었고, 1928년 5월에는 그가 정식 주임 신부로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승격되어 10여 개의 공소를 관할하게 되었다. 랍 신부는 처음부터 매우 의욕적으로 활동하여 3년 동안 성당, 사제관, 사무실을 건축하고 청년회와 소년회를 조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0년부터 명월구(明月溝)에 본당 설립을 준비하면서 그곳 신자들을 돌보다가 이를 본당으로 승격시킨 뒤 용정(龍井)본당으로 전임되었고, 동시에 2대 주임 아쇼프 신부와 초대 보좌 뮐러(E. Müller, 穆)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들은 간도 가톨릭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전 연길교구 소년회 연합 총회를 대령동에서 개최하였으며,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성가를 가르쳐 성가대를 조직하는 등 본당 활성화에 노력하였으나 1932년에 전염병으로 함께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대령동 본당에는 일시 본당 신부가 부재 상태에 있게 되었고, 명월구 본당의 슈레플(Schräfl, 周) 신부가 주일마다 내왕하며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본당 이전과 폐쇄〕 본당에 다시 신부가 부임한 것은 1934년이었다. 이때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콜러 신부는 본당의 안정에 노력하였으나, 이듬해 3월 공산당의 방화로 성당과 부속 건물이 전소되는 참화를 입고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본당을 가까운 다조구로 이전시키는 동시에 이름을 '다조구 본당' 으로 개칭하였다. 이후에도 콜러 신부는 공산군과 마적의 습격, 그리고 본당 이전의 악조건 속에서도 신자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교세 확대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다조구 본당은 1년 후인 1936년부터 다시 옛 상태를 회복하여 8개의 공소를 갖게 되었지만,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을 비롯한 모든 교회 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현재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게 되었다. 폐쇄될 당시 본당 내의 신심 단체로는 청년회, 소년회 등을 포함한 7개의 단체가 있었고, 그 밖에도 해성학교, 야학 등의 교육 기관이 있었다. (⇦ 다조구 본당 ; → 연길교구 ; 간도 교회)
※ 참고문헌 《가톨릭 청년》 41호(1936. 10)/ 한국교회사연구소편,《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車基眞〕
대령동 본당
大嶺洞本堂
글자 크기
3권

1 / 3
공산당의 방화로 전소된 대령동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