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법적으로 부당하게 교황직을 주장하거나 행사한 자. 교회 통치를 위한 합법적인 사명이 위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찬탈함으로써 대립 교황이 되었는데, 선의로 그러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신자들과 교회를 분열시키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립 교황이란 용어는 중세 시대 말기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횡령자(invasor)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뒤센(L. Duchesne)이 편찬한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ialis)에서는 '사도좌(使徒座)의 횡령자'라고 표현하였고, 다른 사가는 '탈취자' 라는 용어도 사용하였다. 6세기 초 요한 부제는 라우렌시오에 대하여 '로마 교회의 침략자요 이교인(離敎人)'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어떤 사가들은 대립 교황이라는 표현보다는 '대립 추기경' (anticardinales), '경쟁자', '위(僞) 교황', '위조된 교황' 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
대립 교황의 역사는 교리적인 동기로 갈리스도 교황과 대립하였다가 후에 교회와 화해하고 235년 본시아노 교황과 함께 순교한 로마의 사제인 히폴리토 성인(217~235)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1439년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던 이들에 의해 선출되었다가 10년 후 경쟁을 포기하고 물러난 대립 교황 펠릭스 5세(1439~1449)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대립 교황 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들은 정치적인 배경에서 황제나 귀족 등 세속 권력의 부당한 간섭이 대부분이었으며, 개인적인 감정도 많이 개입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고유한 사명에 대한 평신도의 간섭과 사대주의나 야망을 가진 일부 성직자들의 야심도 대립 교황이 출현하는 데 한몫을 하였다.
어떤 교황 선거는 아주 복잡하게 파당적으로 얽혀 있어 큰 혼란을 초래하였는데 이중 선거(二重選擧)로 인한 혼란은 당시 사람들도 누가 합법적인 참된 교황인지 식별할 수 없어 성인들까지도 각기 다른 교황을 지지할 정도로 아주 심각하였다. 우르바노 6세 교황(1378~1389)과 글레멘스 7세 교황(1378~1394)의 대립 관계가 그 예이다. 즉 그레고리오 11세 교황(1370~1378)이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1347?~1380)와 스웨덴의 브리짓다 성녀(+1378)의 예언적 위협에 감동되어 아비농에서 로마로 돌아왔다가 교황령의 혼란한 상태에 실망하여 아비뇽으로 다시 돌아가려다가 별세하자 선거법에 따라 로마에서 교황 선거(conclave)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교황 선거에 참여하는 16명의 추기경 중 11명이 프랑스인이었으므로 그들이 다시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선출할 것이 우려되어 로마인들은 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선출할 것을 협박하였다. 그 결과 바리(Bar)의 대주교가 교황으로 선출되어 우르바노 6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였다. 선거 후 로마를 떠난 프랑스 추기경들은 협박에 의한 교황 선출을 무효로 선언하고 다시 프랑스인을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는데, 그가 글레멘스 7세 교황이다. 이로 인해 교회는 소위 두 개의 지지파로 분열되어 서로를 파문하면서 서방 교회가 이후 40여 년 동안 분열되어 '서구 대이교' (西歐大離敎, 1378~1417)로 불리는 불행한 교회 역사로 기록되었다.
합법적인 교황과 대립 교황을 구별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째, 만일 교황이 별세하거나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로 사퇴하여 사도좌가 공석이 된다면, 이 경우가 사도좌의 공석이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상황이다. 둘째, 합법적인 교황 선거인들이 자유롭게 자신들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 혹은 비질리오 교황(Vigilius, 537~555)의 경우처럼 적어도 교회법적으로 결격 사유가 있거나 어떤 혐의가 있던 교황 선거를 그 이후의 공적 기록으로 유효화하였는지 확인해야 한다. 셋째, 각각의 선거들을 위한 교회법적인 당시의 규정들이 준수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대립 교황의 진위를 제대로 식별하기 위해서는 교황 선거의 단계적 발전 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즉 초기에는 498년과 499년의 로마 교회 회의에서 주교들의 선출을 위해 통용되던 교황 심마코(Simmachus, 498~514)의 규정들을 따랐었다. 교황 스테파노 3세의 769년 교회회의, 교황 니콜라오 2세의 1059년 교회 회의, 교황 알렉산델 3세의 1179년 공의회,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1274년의 공의회 등 여러 단계를 거쳤다. 위에 열거된 회의들은 대립 교황들과 그 추종자들에게 엄격한 벌로 위협하였다. 최근의 교황 선거 방식은 교황 식스토 5세의 1586년 규정을 기준으로 하여 교황 비오 12세, 교황 요한 23세의 규정들과 함께 교황 바오로 6세의 규정으로 확정되었다.
대립 교황의 정확한 숫자를 헤아린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는 대립 교황으로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프로테스탄트 사가들은 정치적인 동기로 합법적인 교황 폐위에 대립 교황의 기준을 적용하는 데 비해 가톨릭측에서는 이러한 기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관련 자료의 부족과 부분적인 자료에 한정되어 정확한 숫자 파악조차 어렵다. (→ 교황 ; 교황 선거)
※ 참고문헌 최석우, 《敎皇, 그는 누구인가》,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Ammuario Pontificio per l'anno 1995, Citttá del Vaticano, 1995, pp.7~13/ H.G.J. Beck, 《NCE》 1, pp. 632~633/ K. Bihlmeyer · H. Tüchle, Storia della Chiesa, I ~ Ⅳ, Morcelliana, 1973/ A.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 Herder, 1976(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1988/ A.Mercati, 《EC》 1, pp. 1483~1489/ G. Moroni, Antipapi, Dizionario di erudizione storica ecclesiastica V, Venezia, 1840, pp. 181~215/ Ludovico Silvani, Storia degli antipapi, Milano, 1971. 〔金喜中〕
대립 교황
對立敎皇
〔라〕antipapa · 〔영〕antipope
글자 크기
3권

최초의 대립 교황이었던 성 히폴리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