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자 본당

大拉子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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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23일, 대립자 본당을 방문한 라리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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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23일, 대립자 본당을 방문한 라리보 주교.

연길교구 소속 본당. 1909년 5월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수호 천사. 간도에서 가장 오래된 본당으로 만주의 간도성 화룡현 영암촌(英岩村)에서 '삼원봉(三元峰) 본당' 으로 설립되었다가 1931년 화룡현 대립자시(大拉子市)로 이전하면서 '대립자 본당'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설립 당시 서울교구 소속이었으나, 1920년 8월 5일 원산교구 소속이 되었다가 1928년 7월 19일 연길교구로 변경되었으며, 1946년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교 세〕 1909년 1,279명, 1936년 727명. 〔역대 신부〕 초대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아드리아노(1909.5~1914.9), 2대 페랭(P. Perrin, 白文弼) 필립보(1919. 9~1921), 3대 다베르나스(K. d'Avernas, 羅國宰) 카누트(1921~1922. 7), 임시 브레허(T. Breher, 白化東) 테오도로(1922. 7~11), 4대 자일라이스(V.Zeileis, 徐) 빅토리노(1922. 11~1925. 10), 5대 에베를(H. Eberl, 吳) 하르트만(1925. 10~1946).
〔공소와 본당의 설립〕 '간도의 사도' 로 불린 김영렬(金英烈, 요한)의 전교로 회령에서 생활하던 유패룡(劉覇龍, 라우렌시오)과 김성준(金成俊, 안토니오)이 1897년 봄에 원산 본당 5대 주임인 베르모렐(Vemorel, 張若瑟)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 화룡현 중앙촌(中央村)에 정착함으로써 간도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우선 공소 집을 마련하여 원산 본당 6대 주임인 브레(Bret, 白類斯) 신부를 맞이하려 하였으나 외교인들의 난동으로 인해 공소 집이 파괴되자 사가(私家)에서 공소를 치르게 되었다. 이후 늘어나는 신자수에 비해 공소의 협소함을 느낀 김성준은 1908년 화룡현 영암촌에 있는 새 집을 사들여 주일에는 공소로, 평일에는 이를 학교로 사용하였다. 이 학교가 바로 화룡서숙(和龍書塾)이다. 화룡서숙은 왕심학교(王心學校)로도 불렸으며, 훗날에는 덕흥학교(德興學校)로 발전했다. 이처럼 교세가 늘어나자 서울교구의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는 1909년 5월 삼원봉 본당을 설립하고 원산 본당 7대 주임 라리보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성장 과정과 폐쇄〕 기존의 작은 강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느낀 라리보 신부는 삼원봉 본당에 부임한 뒤 우선 성당 건축에 노력하였다. 이때 열심한 신자들은 모금을 통해 건축비의 반을 건립 기금으로 내놓았으며, 1912년 10월 30일 마침내 새 성당을 봉헌할 수 있었다. 그 후 라리보 신부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제수가 부족하게 되자 1914년 9월 충청도로 이임하였고, 용정(龍井) 본당의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신부가 삼원봉 본당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페랭 신부가 삼원봉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1920년 원산교구가 설정되면서 이듬해 5월 베네딕도 수도회의 다베르나스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가 원산 본당의 보좌 신부로 전임되면서 다시 공석이 되었고, 브레허 신부가 임시로 삼원봉 본당을 맡아 약 5개월 동안 사목한 뒤 1922년 11월 연길의 새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삼원봉 본당은 1922년 자일라이스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협소한 성당을 개축하고, 공소 전교에 노력하는 한편 기존의 덕흥학교에 여학생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25년 10월 자일라이스 신부가 팔도구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팔지 본당의 보좌로 있던 에베를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이 무렵 간도 지역은 마적들의 습격 등으로 여전히 어려움을 겪기는 하였지만, 삼원봉 본당의 교세는 계속 확장되었다. 한편 1928년 7월 19일 중국 교회에 속해 있던 간도 지역의 정치적 위기를 고려하여 원산교구의 사우어(Sauer, 辛) 주교는 연길교구(정식 명칭은 연길 지목구)를 분리 설정하였다.
이후 공산당의 침략과 협박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본 삼원봉 본당에서는 1931년, 먼저 덕흥학교를 화룡현 대립자시로 옮기고, 이어 사제관과 성당을 옮김으로써 '대립자 본당'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 무렵 베네딕도회에서 교구 내의 모든 학교 이름을 '해성학교' (海星學校)로 통일시킴에 따라 덕흥학교도 '대립자 해성학교' 로 개칭하는 동시에 6년제 보통 학교로 개편하였고, 용정의 삼애학교(三愛學校)와 더불어 간도 천주교회의 중요한 교육기관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본당은 꾸준히 성장하여 1936년에는 총 신자수 727명, 공소 5개소, 해성학교의 교사 3인, 학생 101명에 이르게 되었고, 이후에도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을 비롯한 교회 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고 말았다. (⇦ 삼원봉 본당 ; →연길교구 ; 침묵의 교회)
※ 참고문헌  《가톨릭 청년》 41호(1936. 10)/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편, 《은혜의 60년》, 199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金成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