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전

大聖殿

〔라 · 영〕basi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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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라-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사가 성당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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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라-에우로포스에서 발견된 사가 성당의 구조.

교황에 의해 특전이 부여되어 있는 역사적, 예술적, 신앙적인 면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는성당에 붙여진 칭호.
바실리카는 원래 그리스어 바실레이오스(Βασίλειος) 혹은 바실리코스(Βασιλικός)에서 유래된 용어로서, 고대 로마 시대에 재판과 집회 및 상업 거래를 위해 기둥으로 받친 큰 지붕이 덮인 장방형 평면의 공공 건축물을 가리켰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교회는 기존의 바실리카를 개조하여 성당으로 쓰거나 바실리카를 본뜬 성당을 건축하였다. 4세기 이후 로마의 바실리카 형식과 구조를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된 바실리카는 후에 특별한 지역의 종교 생활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바실리카의 구조는 입구에서 제단을 향해 곧바로 나아가고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어서 교회 건축 양식의 기초와 원형이 되었다.
〔역 사〕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활과 최후의 만찬, 부활후에도 제자들과 식사를 즐겨 나누었다. 이층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였던 그리스도를 본받아(마르 14, 15; 루가 22, 12),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들과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고(사도 1, 13-14), 그리스도인들은 일반 가정 집에 모여서 말씀의 전례와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식을 가졌다(사도 20, 7-9).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 나왔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밤에 모여 기도하는 마르코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으며(사도 12, 12-17), 바오로는 여러 번 그가 복음을 선포하고 기도하는 개인적인 집들을 언급하였다(로마 16, 3. 5 ; 1고린 16, 19 : 골로 4, 15 ; 필레 1, 2-3). 1세기 말에 《디다케》에는 개인적인 집에서 거행하는 성만찬과 세례 준비 및 그에 따르는 주의 사항이 기술되어 있다(4, 14 : 14, 1). 이와 같이 사가 성당(私家聖堂, domus ecclesia)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모여 전례를 거행하던 보편적인 장소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경신(敬神) 예배를 위한 특정한 건물이나 장소를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박해받던 시대에는 교회 건축은 물론이고 공공의 장소에서 모임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들은 가정 집의 넓은 방을 이용하거나 때로는 산하 계곡, 심지어 카타콤바라는 지하 공동 묘소에서 예배를 위한 모임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느님의 살아 있는 성전, 영적인 집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영적 결합이 강조되었다.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곳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시는 영적인 장소로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이나 회당에서 더 이상 경배할 수 없을 때 그들은 수년 동안 개인적인 집에서 만났다. 로마의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더 넓은 집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만났고 그 집들은 박해받는 교회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점차 많아지자 개인 집은 너무 작아 더 이상 이용하기 어렵게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만의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를 '바실리카' 라고 불렀다. 신전이나 회당이란 단어는 이방 의식이나 유대 의식에 너무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했다.
이러한 사실은 1932년에 유프라테스강 서안에 있는 두라-에우로포스(Dura-Europos) 유적에서 발굴된 사가 성당의 내부 구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원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임을 위해 세우지 않았지만 내부 벽 일부를 제거하여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큰방으로 개조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4세기 초에 지어진 시리아의 퀴르크 베진(Qirq-Bezin)은 아트리움(atrium : 각방으로 통하는 거실)이 있어 전례를 행할 수 있는 방과 유물 전시실, 주교좌, 순교자 유물실 등을 갖추어 후기 시리아식 바실리카의 기본 형태를 나타낸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초기 사가 성당의 특징은 말씀의 전례, 성찬식, 세례식 등에 따른 공간이 구분되어 나중에 건물의 기능 구분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박해가 격심하였던 로마에서는 지상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카타콤바에는 곳곳에 작은 방들이 있고 그중에는 모임이 가능한 넓은 방도 발견되고 있다. 박해 시대부터 순교자에 대한 존경심이 열렬해지자 순교자의 묘 위에서 미사를 거행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제대를 만들고 성인의 유물을 제대안에 두는 관습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 대성전이 있었다는 증거는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발견되었지만, 최초의 확실한 그리스도교 대성전 형태의 건축물은 콘스탄틴 대제 때에 지어졌다고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는 라테란(Laterano)에 있는 궁전을 교황 멜키아데스(310~314)에게 교황궁으로 사용하도록 주어, 나중에 성요한 라테란 대성전을 건축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어머니 성녀 헬레나(Helena)가 십자가 유품을 보관해 둔 세소리아나(Sessoriana) 궁전의 방 하나를 바실리카식 교회로 개조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콘스탄틴 대제는 바티칸(Vatican)의 성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였으며, 팔레스티나의 나자렛에 성모 영보의 대성전, 베들레헴에 예수 성탄 대성전, 그리고 예루살렘에 주의 무덤 대성전 등을 짓게 하였다. 또한 4세기에 아프리카와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도 대성전들이 지어졌다. 그리스 데살로니카에 있는 5세기의 성 데메트리우스(Demetius) 성당과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6세기의 아폴리나리우스 누보(Apollinarius Nubo) 성당, 아폴리나리우스 인 클라세(Apollinarius in Classe) 성당은 특히 주목할 만한 대성전이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의해 방사상 형태로 설계되어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전을 분기점으로 해서 바실리카 형식은 점차 동방 교회 안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바실리카의 신랑(身廊), 측랑(側廊), 그리고 후진(後陣)과 함께 바실리카 설계 양식은 서방 교회에서 지속되어 아직까지 모든 교회 건축물을 짓는 데 기준으로 남아 있다.
〔전례와 교회법적 의미〕 오늘날 대성전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서 교회법에 따라 특정한 특권을 지닌 성당에 붙이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쓰인다. 특히 특별한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성당이나 오래된 역사, 위대한 성인, 중요한 사건과 그리스 정교회 안에서 특정한 총대주교와 관련이 있는 국제적인 예배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성당에 붙이는데 대 · 소로 나뉜다. 대성전이라는 이름이 붙는 교회는 특별한 권한을 가지며 특히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가 사용하는 대제대가 있고 특별 사면권을 지니고 있다. 16세기에 교황은 특정한 교회를 대성전으로 높여 부르게 하였다. 그 후 1918년 《교회법전》에서 "사도좌의 허락이나 오랜 관습을 따르는 경우 외에는 어떤 교회에도 대성전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일 수 없다"(180조)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983년에 발표된 《교회법전》에는 이에 대한 규정이 삭제되었다.
대 바실리카(major basilica) : 대 바실리카에서는 교황의 직무에 관련된 축일이나 역사적인 기념일에 다른 교회보다 더욱 장엄하게 전례를 거행한다. 그러므로 대 바실리카는 전례 집전의 원형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순례하는 신앙의 중심지로 볼 수 있다. 로마에는 처음에 교황청이 있었던 라테란 대성전, 지금의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오스티아 가(街)의 성 바오로 대성전, 그리고 성모 마리아 대성전(Santa Maria Maggiore)등 모두 4개의 대주교좌 대성전이 있다. 이 4개의 대성전에는 교황만이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제대가 있다.
라테란 대성전은 그리스도 교회의 최초의 공식적이고 대표적인 교회로서 전통적으로 서방 교회의 총대주교로서 교황이 거주하던 주교좌 성당이었다. 베드로 대성전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좌 성당이었으며 교황의 프랑스 아비뇽 유폐기 이후에 황폐해진 라테란 대성전에서 새롭게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교황청을 옮겼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성당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는 이전에 라테란 대성전에서 거행하였던 교황 즉위식이나 시복식, 시성식 등을 거행하게 되었다. 성 바오로 대성전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주교좌 성당으로 성바오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성모 마리아 대성전은 콘스탄틴 황제 때인 352년에 세워졌고 유럽에서 최초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으로 처음에는 성모 설지전(聖母雪地殿) 성당이라고도 불렸다. 이 대성전은 교황 식스토 3세(432~440)가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천주의 모친' (Θεοτόκος)으로 선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확장 · 개축되었다. 마리아는 그 생애의 대부분을 안티오키아에서 보낸 것으로 전승되어 이성당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 성당으로도 불린다.
이 4개의 대 바실리카 외에도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는 대교구에 예루살렘의 이름을 붙이는 문제가 제기되어, 성 계단(Scala Santa) 대성전이라고도 부르는 성 라우렌시오의 순교지에 세워진 성 라우렌시오 소 바실리카를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좌 대성전으로 높였다. 순례하는 로마의 대성전을 일곱으로 채우기 위해 5개의 총대주교좌 바실리카에 덧붙여서 세소리아나 바실리카로 불리기도 하였던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전과 성 세바스티아노(St. Sebastianus) 대성전을 넣었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첫 저녁 기도에서 다음날 일몰까지 이 일곱 개의 대성전을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전대사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라테란 대성전의 축성 기념일은 11월 9일, 성 베
드로와 성 바오로 대성전은 11월 18일, 성모 마리아 대성전은 8월 5일이다.
소 바실리카(minor bacilica) : 교황이 대 바실리카의 일부 특전을 부여한 성당을 소 바실리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 있는 소 바실리카로는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대성전,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를 기념하는 카타콤바의 성 세바스티아노 대성전, 트란스테베레(Transtevere)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 처음에 사도 필립보와 야고보에게 봉헌되었던 열두 사도의 유품이 보존되어 있는 12사도 대성전, 로마에서 성 베드로가 묶였던 사슬이 보존되어 있는 빈콜리(Vincol)의 성 베드로 대성전,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Santa Maria degli Angeli) 대성전등이 있다. 그 외에 로마 밖의 많은 교회에도 소 바실리카라는 호칭이 부여되었다. 독일에는 동방 박사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쾰른 대성전(Kölner Dom)과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입었던 성의(聖衣)가 보관되어 있는 트리어 대성전(Trierer Dom), 그리고 밤베르크 대성전(Bamberger Kaiserdom)이 있다. 또한 아일랜드에는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기념하여 1974년 6월 6일에 교황 바오로 6세의 축성으로 초석을 놓은 성모 대성전(Our Lady of
Knock)이 있고, 프랑스 루르드에는 마리아의 발현을 기념하는 성모 마리아 대성전과 리지외(Lisieux)의 소화 데레사를 기념하여 세운 성녀 데레사 대성전이 있다. 스페인에는 성 야고보 사도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전(Santiago de Compostela)과 아빌라(Avila)에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3남매의 순교 장소에 세워진 성 빈천시오대성전(Basilica de San Vicente)이 있으며, 포르투갈 파티마에는 성모 발현 대성전이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치스코에는 미시온 돌로레스(Mission Dololes) 대성전과 인디아나 주의 노트르 담(Notre Dome) 대학에 있는 예수 성심(Sacred Heart) 대성전이 있으며, 캐나다에는 오타와(Ottawa)와 퀘벡(Quebec)에 있는 노트르 담 대성전이 있다. (→ 가톨릭 건축 ; 바실리카 양식)
※ 참고문헌  M.C. Hilferty, 《NCE》 2, pp. 154~160/ Pierre Gros, 《EU》 3, pp. 873~874/Theodore Cunnion S.J., 《CE》 1, p. 604/ J.G. Davies, (ER) 2, pp. 71~78/J Lahey, The Harpercolins Encyclopedia of Catholicism, p.144/ L. Voelk · A.P. Frutaz, 《LThK》 2, pp. 40~45/ Denis-Boulet · Robert Lesage · Dom Gazeau, 《Cath》 3, pp. 1290~1301/ F.L. Cross, 《ODCC》, p.141. 〔孫淑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