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

代贖

〔라〕redemptio, satisfactio · 〔영〕redemption, aton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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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제사는 속죄 · 대속의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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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제사는 속죄 · 대속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만민의 죄를 대신 속죄(贖罪, atonement, expiation)하였음을 의미하는 신학 용어. 이 말은 예수가 우리의 구원주(속량주)이고 구세주임을 신앙으로 선포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종종 같은 구원 사건에 대해 신학적으로 어떤 측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용어들이 달리 사용되듯이,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대속이란 말은, 결국 '속량'(贖良)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의 한 측면을 나타낸다. 따라서 '속죄' , '화해' (reconcilation) , '구원' (salvation) 등과 같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신학적으로 약간씩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개념들과 밀접하게 결부된 용어이다.
〔성서에서의 대속〕 구약성서 : 구약성서에서 대속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상은 '속죄의 희생 제사' 와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에 관한 사상이라 하겠다. 성서는 대체로 인간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려면 어떤 '속죄적 행위' 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인간은 불순종의 범죄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시켰으므로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하느님은 피해자가 되었고 인간은 가해자가 되었다. 원래 화해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속죄의 희생 제사' 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죄에 대한 보상이나 보속을 위해 바쳐졌다. 이 행위를 통하여 가해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해자가 된 하느님과의 친교를 복구시킨다고 여겼다. 이는 하느님 편에서는 자비의 처사였고, 인간 편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하느님에 의해 정해진 규정을 채우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에서 속죄의 희생 제사가 지니는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원래 이 제사는 하느님과의 '화목' (和睦)과 속죄를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화목은 하느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 하느님을 달랜다는 의미를 암시하며, 속죄는 죄로 인한 하느님과의 친교의 방해물을 제거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후기에 접어들면서 차츰 화목의 의미는 약해지고 죄를 없앤다는 '속죄'의 의미가 더욱 더 강하게 부각되었다. 이는 유배 이후의 시대에 와서 희생 제사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기보다 죄로 인해 하느님과의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속죄의 의식(儀式)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희생 제사를 단순한 인간적인 창안(創案)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이를 제정한 분은 하느님이다. 이는 하느님이 용서하기를 꺼렸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스스로 자신의 용서함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을 그렇게 마련하였음을 말한다.
범죄한 사람의 생명 대신에 하느님이 요구할 수 있는 보상을 대리자나 대용물을 통하여 제공하기 위해 속죄의 희생 제물을 바쳤다. 예를 들어 레위기 17장 11절에서 이러한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생물의 목숨은 그 피에 있는 것이다. 그 피는 너희 자신의 죄를 벗는 제물로서 제단에 바치라고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이다. 이 피야말로 생명을 쏟아 죄를 벗겨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을 담기 위해 구약성서에서는 '키퍼' (כָּפַר)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이 동사의 어원은 주로 '덮다' , '지우다' , '몸값을 치르다' 등을 의미하지만, 제관계 사료들에서는 주로 "속죄 의식으로써 죄를 속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레위 4, 31-35 : 6, 17-23) .
그러한 사상은 이사야 예언자의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의 대속 사상에서 절정에 달한다. 하느님의 종은 무죄하지만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을 당한다(이사 53, 4. 6. 10-12). 죄는 생명으로 즉 속죄 제물로 바쳐진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의 생명으로 속죄된다. 이 무죄한 중재자의 인격적 행위들은 죄인들을 대신한다. 그가 죄인들을 위해 고통을 겪음으로써 죄인들을 가없이 여기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성취시킨다. 이 종은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다른 이들의 죄를 속죄할 뿐만 아니라, 그의 고통은 속죄하는 그 이상의 효과를 이루어 준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이사 53, 5).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은 메시아나 다윗의 왕위와 동일시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명이 "자신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고··· 주님의 뜻이 그를 통하여 성취될 것"(이사 53, 10)이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탁월한 의미에서 메시아적이고 구원적인 것이다.
신약성서 : 신약에서의 대속 사상은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구약의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의 사명과 결부시킨점에서 잘 나타난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예수의 자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대목은 마르코 복음 10장 45절과 마태오 복음 20장 28절이다. "사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르 10, 45). 예수에게 적용시킨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의 대목(이사 53, 12)은 그를 죄 많은 인류와 연관시킨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사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그는 무법자들과 함께 해아려졌다' 고 한 기록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실 나에 관한 기록은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루가 22, 37).
성서 전반에 깔려 있는 대속 사상은 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서 출발한다. 죄는 하느님을 거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를 파괴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의 모든 선(善)은 하느님께 속해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막아 버린다. 이렇게 인간 본성 자체가 타락하는 것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죄의 결과이며, 이러한 타락한 인간의 조건 때문에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한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 죄이기 때문에 구원은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러나 죄로 상처받은 인간은 더 이상 완전해질 수가 없었다.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은 성자의 강생을 통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구출될 수 없는 인간을 구하기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에 예수는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성부의 뜻에 따라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불순종에서 기인된 무질서를 바로잡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수의 희생 죽음은 대속적인 성격을 지녔음이 명백하다.
예수의 죽음이 대속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은 최후 만찬의 기사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는 내 계약의 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것입니다"(마르 14,24). 이 말은 시나이 계약에서 있었던 희생 제물의 피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신학적으로 살펴보면 역시 새로운 계약과 연관된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의 희생과도 결부된다. 희생은 피흘림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피흘림을 통하여 생명을 온전히 바치는데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참된 의미에서 희생은 자신을 내어 주는 것, 즉 자아 봉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구약의 희생 제물은 하느님께 드리는 자아 봉헌이라는 희생의 본질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무죄한 자신이 성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일이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악마에게 속전을 바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부의 뜻에 순종하고 모든 인간들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쳤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생명이 몸값으로 하느님께 바쳐졌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으로 해석하는 신약성서의 대목은 아주 풍부하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모든 이를위한 대속물로 내주셨습니다"(1디모 2, 6). "한 사람이 모든 이를 위해서 죽었고, 그래서 모든 이가 죽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좨칩니다" (2고린 5, 14).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는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2고린 5, 21). "흠 없고 티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속량된 것입니다"(1베드 1, 19). 그 외에도 로마서 3장 25절, 갈라디아서 3장 13절, 에페소서 1장 7절, 디도서 2장 14절등의 대목과 히브리서 대부분이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강조하고 있다.
〔교부들의 사상〕 교부들은 신앙의 불변 요소에 속하는 주제들을 발굴하여 자신들이 몸담고 있던 문화나 사상의 틀을 이용하여 가르치려 하였다. 교부 신학의 배경이 되는 외적 요소들이 다양하였기 때문에 교부들의 구원론에도 다채로운 특징들이 등장한다. 큰 윤곽을 살펴본다면, 동방 교회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생애 안에서 구원 행위의 결정적인 순간을 때로는 강생, 때로는 죽음, 때로는 생애 전체에 두는 데 비해, 서방 교회 신학에서는 두드러지게 수난과 죽음에 둔다. 이러한 결과는 구원 신학의 출발점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구원을, 동방 교부들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이 행한 하강적인 측면으로 본 데 비해, 서방 교부들은 인간인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신해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 상승적 측면에서 보았다. 이러한 서방 교부들의 사상은 차츰 교환 정의(交換正義)에 따라 대속 신학을 고찰하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는 죄 많은 인류를 위하여 성부께로부터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희생적 죽음 사건을 통해 성부께 사랑의 순종으로 자신의 인성을 바쳤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식의 설명에는 마치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류 구원이 맞바꾸어진 교환처럼 보인다. 이러한 그리스도 구원의 교환 정의 개념은 대속 사상을 중세의 대리 보상(代理補償, satisfaction vicaria) 사상으로 변천시킨다.
〔신학사에서의 대속〕 중세 신학 : 대속의 개념을 한층 더 법적인 대리보상 개념으로 설명한 신학자는 켄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모(Anselmus, 1033~1109)였다. 그는 《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라는 저술을 통해, 강생의 신비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면서 '보상' 이란 개념을 당시의 법률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써 하느님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죄를 범한 자는 인간이기때문에 손상된 하느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 주는 것은 인간 편에서 인간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손상된 하느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무한한 분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능력은 무한한 하느님 자신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손상된 하느님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하느님도 필요하고 인간도 필요하다. 그래서 천주 성자가 강생하여 인간이 되었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 안에서 신적(神的) 정의가 요구하는 보상을 바쳤던 것이다. 따라서 안셀모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대속은 법률 개념에 바탕을 둔 신학 해석 쪽으로 치우쳤고, 구원론은 '대리 보상'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안셀모의 대속 이론을 수정하여 후대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이다. 토마스는 '도덕적 대리 보상' (vicarious moral satisfaction)이라 할 수 있는 이론을 주창하였다. 이 이론은 왜 하느님이 죄인을 사랑하고 죄를 용서해 주고 은총을 복구시켜 주는지를 이론의 주제로 삼는다. 죄악은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상호 인격적 관계를 파괴시키면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토마스의 가르침은 인간을 죄에서 구출하고 은총 속에 새롭게 결합시키는 원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순종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하느님께 자신의 사랑과 순종을 드렸다. 토마스는 안셀모가 보상 개념에 근거하여 강생의 필연성(보상의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강조한 것을 수정하여 십자가 상의 죽음은 사랑으로 행해진 예수의 믿음과 순종을 표현하는 사랑의 표징이라 하였다. 토마스는 또한 보상 개념 자체를 수정한다. 적절한 의미에서 어떤 이가 자기가 범한 죄를 미워하는 것만큼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이 피해자를 사랑할 때 보상은 이루어진다. 이러한 보상개념으로 볼 때 그리스도는 수난을 통하여 어떠한 보상보다도 더 큰 보상을 하느님께 바쳤다. 또한 신비체의 머리로서 행한 그리스도의 이러한 행위는 신비체 전체에 속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과 자신의 신비체 구성원을 위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넘치는 사랑 때문에 예수는 자신과 결합된 모든이들을 위한 구원의 공로를 세웠다.
종교 개혁자 : '그리스도의 보상의 전가(轉嫁) (impu-tatio satisfactionis Christ)라는 개념으로 개조하여 안셀모의 이론을 수용하였다. 즉 신앙을 통한 은총으로 의화된다는 그들의 사상으로 안셀모의 사상을 변형시킨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이자 영원히 인류의 죄과와 죄책을 짊어짐으로써 인간을 더 이상 죄의 단죄와 형벌에 얽매이지 않게 하였다. 죄에 대한 심판으로부터 해방된 인간들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그리스도의 죽음 덕택에 의로움을 전가받게 되었다. 결국 그리스도가 치른 죄값은 자기 스스로 죄 값을 치를 수 없는 인간들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구원관은, 보상을 강조하던 중세의 사상에 비하여, 그리스도의 대신 역할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러한 이론에 제기되는 물음은 만일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한 보상을 치렀다면, 인간은 더이상 보상을 치를 필요가 없느냐 하는 것이며, 여기서 제기된 인간의 역할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로마 가톨릭과 종교 개혁자들 사이에 중대한 논쟁점이 되었다.
인간들이 형벌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이 그 형벌을 짊어졌다는 주장이나, 그리스도가 보상을 지불함으로써 인간이 보상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는 주장은 신학적으로 논거가 충분하지가 않았다. 또한 그 이론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소개되는데, 만일 죄악과 그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겼다면, 이는 폭력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가톨릭 신학은 토마스의 이론에 근거하여 이러한 종교 개혁자의 '대신형벌 속죄' (substitutional penal expiation) 이론을 반대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 14세기부터 교회의 공식 문헌들 안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공로(功勞)의 개념으로 등장한다(DS 1027, 1347).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이러한 사상을 교리적으로 발전시켰다. 원죄에 관한 이단적인 요소가 담긴 주장들을 다루면서, 공의회는 죄의 용서를 공로의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 "...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이 죄가, '우리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성화와 속량이 되신 분' (1고린 1, 30)이 되어 당신의 피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준 유일한 중재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이외의 다른 어떤 처방이나 인간 본성의 능력으로써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단죄될 것이다" (DS 1513). 또한 인간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보상 개념을 공로 개념에 결부시킨다. "...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이던 때' (로마 5, 10),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에페 2, 4)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그 숭고한 수난을 통해 우리의 의화를 위한 공로를 마련하셨고, 또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보속하셨던 것이다" (DS 1529). 공의회는 고해성사를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수난은 하느님께 바쳐진 죄에 대한 보상이라고 설명한다(DS 1689~1690, 1713). 이렇게 트리엔트 공의회가 대속의 개념을 보상과 공로의 사상으로 설명함으로써 당시 신학계에서 유통되던 사상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결과가 되었으며, 이러한 사상은 20세기 초까지 가톨릭 교회 구원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현대의 가톨릭 신학 : 현대의 다양한 철학 사조와 신학사조에 직면하여 최근의 가톨릭 신학 역시 다양한 측면에서 구원론을 고찰한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성서적이고 전통적인 주제가 현대 가톨릭 신학 안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현대 가톨릭 신학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의미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우선 성서에 나타난 희생 제사의 사상을 재조명한다. 희생 제사는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께 헌신함을 드러내는 의식적(儀式的) 표현이다. 희생 제사에서 제물을 희생하는 행위는 그 제물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행위의 목적은 한 실존의 형태를 끝마치게 하는 데 있다. 이는 봉헌되는 제물이 하느님께 가납(嘉納)되기 위해서 신성해져야 하며, 이를 위해 그 제물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실존 형태를 파괴시키고 종결시키는 것이다. 결국 희생 행위는 속(俗)되고 인간적인 어떤 것을 하느님의 소유로 전향시키는 행위이다. 봉헌자들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바쳐진 그 제물을 하느님이 받아들여 자신의 소유로 전향시켜서 그 안에 자신의 신성을 충만케 함으로써 그 의식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신적 성성(聖性)을 나누어 받고 하느님과 친교를 갖는다고 여겼다. 희생 제사에 대한 성서적인 사상을 요약해 보면 두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순간은 제물이 희생의 행위에 의해 속(俗)의 영역에서 신적 영역으로 전환되는 순간이고, 둘째 순간은 제물이 하느님에 의해 가납됨으로써 축성되어지는 순간이다. 이러한 성서적인 사상에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도출된 대속 신학도 재해석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됨으로써
인간의 인성을 성스러운 인성으로 전환시켰고, 또한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켜 그의 인성이 변화되어 충만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고 성령의 완전한 소유에 참여케 하였다.
〔과 제〕 예수의 대속적 죽음과 각 개인의 구원과의 관계는 여전히 가톨릭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논쟁점으로 남아 있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학에 따르면, 모든 죄인들의 이름으로 봉헌된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은 객관적으로 보아 총체적인 보상과 구원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죄인 각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데 있어서는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은 죄에 대한 통회와 보상을 기꺼이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에 자진해서 참여해야 한다. 즉 예수의 희생을 자신의 희생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각자는 하느님께 대한 예수의 완전한 순종,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순종을 행해야 한다(필립 2, 5-8 ; 2고린 5, 14-15).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께 맞갖은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시오"(로마 12, 1)라고 하면서 그것만이 그리스도인들이 바치는 진정한 예배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예수가 자신의 희생을 인간들의 희생이 되도록한 의도는 성체성사 설정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떼어 나누어지는 빵은 살해된 자신의 몸이고 잔은 많은 이를 위해 흘려진' 자신의 피라고 하였다(마르 14, 22-24).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도록 초대한다는 것은 각자가 예수의 희생에 참여하도록 초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분의 죽음이 가져다 준 구원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진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협력 부분을 약화시키면서,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짐으로써 인간은 더 이상 죄의 단죄와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그리스도의 대신 역할만을 강조하던 초기 개혁자들의 노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 사이의 이러한 견해 차이는 '성체성사의 희생 제사적 성격' 에 관한 신학적 해석에서 그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가톨릭 신학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참여함을 강조하는 반면,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그리스도의 유일회적 십자가 희생만 강조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각 개인의 구원과의 관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져 있다.
(→ 구원 ; 보상)
※ 참고문헌  F.S. Fiorenza, 《NDT》I E.L. Peterman, 《NCE》 12/ K.F.Dougherty, Atonement, 《NCE》 1/ X. Leon-Dufour, Sacrifice, 《DBT》 . 〔河星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