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덕

對神德

〔라〕virtus theologica · 〔영〕theological vir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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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믿음을 드러내고, 기도하고, 신앙을 깨닫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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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믿음을 드러내고, 기도하고, 신앙을 깨닫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요구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기본 덕.
〔의 미〕 종교 생활의 내적 원리 : 모든 인간은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 하느님께 흠숭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이런 경신례 안에서 신앙 행위와 예배 행위의 내적인 근거를 대신덕이라 한다. 하느님은 세상 전체를 창조하고,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셨다.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이 창조된 모습 그대로 머물기를 바라지 않으시고 자기 창조의 지속을 원하시고 인간에게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선사하셨다(창세 1-2장). 곧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초대받았다. 이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인간은 대신덕을 통하여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인간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덕 : 이 하느님과의 일치로써 구원이 실현된다고 할 때, 대신덕은 구원을 향한 인간의 필수적인 덕이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사랑의 능력을 허락하실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며, 인간이 자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하느님의 사랑에 상응하는 사랑의 배후에 머물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사랑은 단순히 자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하나의 응답이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자신을 개방할 때 삶의 완성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신의 내적인 의도가 선하게 드러나는 곳에서만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기본덕 : 인간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내재하는 관계는 역사적으로 중재되기 마련이고,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자유와 신앙에 대해 모험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인간은 삶,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해서 은총과 신앙,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응답을 중재받게 된다. 하느님은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시기 위하여, 또 당신과 함께하는 공동체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체험할 수 있으며, 하느님을 신뢰하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대신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성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며, 하느님의 구원 말씀을 이해하게 한다. 인간은 대신덕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도 생활과 하느님과 함께하는 성사 생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이 주는 은총에 기인 : 대신덕은 인간이 단순히 자신이 노력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총에 기인된다. 인간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지 못한다. 구원은 행위의 합법성의 결과에 따라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인간은 자연 질서의 외적인 준수만으로 자기 삶의 의미와 완성을 이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행하느냐에 달린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만족 안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행복과 이웃의 복락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성취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얻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대신덕을 통해 은총의 초대로 나타난다.
대신덕은 믿음 · 희망 · 사랑 세 가지이다(로마 5, 1-5).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자유로이 개방하며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믿음은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하느님의 의미 내용을 인정하는 것을 뜻하며, 희망은 하느님의 선한 미래와 구원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랑은 하느님을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의 삶의 의미를 신앙하게 되며, 모든 절망을 되받아 희망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게 된다. 따라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은 서로 상이한 형태가 아니라 단일적이고 인격적인 성취와 구원의 차원이다. 그러나 인격적 성취와 구원의 차원은 인간 행위 안에서 개별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과 의미를 수반하는 삶의 역사의 진행에 따라 드러나기 때문에 상이하게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다양한 인격 성취의 모습 안에서 각별하게 살펴보아야 하며 나아가 인간이 대신덕을 거스르는 행위 즉 죄의 본질에 대해서도 알아보아야 한다.
〔신앙의 덕(信德)〕 삶의 방향에 대한 근본 결단으로서의 신앙 : 신앙은 하나의 본질적인 행위로, 인간 삶의 방향에 있어서 하나의 근본 결단이자 정향이다. 그리고 신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이다. 이 신앙은 단순히 어떤 사물, 신조 또는 형식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이다. 신앙은 자기의 전 존재에 바탕을 두고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막연한 추정이나 추측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타인으로부터 제공되는 정보나 의견에 대한 단순한 인정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인격 전체의 결단에 앞서 인간은 항상 올바른 선택을 요구하는데, 올바른 선택이란 인간이 선택해야 할 다양한 선한 가치 가운데 높은 서열의 가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다양한 악한 가치 가운데 덜 나쁜 서열의 가치를 선택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선택에 있어서 '어떠한 결단을 내리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경우 항상 어떠한 것이 가장 높은 서열의 가치를 소유하는가를 검토하게 되며 선택하는 당사자는 자신이 실현시킬 수 있는 가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결단은 항상 하나의 일정한 가치 순위와 하나의 일정한 최고 가치를 전제하고 동시에 태도를 표명하여야 한다.
인간이 다양한 가치 가운데 하나의 가치를 선택하고 결단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가치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이 최고 가치를 토대로 해서 다른 가치들을 중간 가치 또는 최종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평가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자신만의 행복 추구에서 찾을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행복도 함께 추구함으로써 찾을 것인지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또한 이러한 행복을 현세적인 향유를 통해 내재적으로 이해할 것인지 영원한 구원을 신앙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인간의 모든 자유 실현에는 하나의 결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와 행위의 최종적인 목표를 내재적인 가치를 통해 찾으려 한다. 건강, 사회적 인정 소유 그리고 예술 등과 같은 유한한 가치의 실현을 삶의 목표로 삼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행위는 합목적적일 수는 있어도 윤리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인간 행위의 결과는 자연적 여건, 외부 상황, 예기치 못한 인연 등 일련의 외적인 여건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끝내 일종의 체념 · 광신주의 · 숙명론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외적인 대상이 아니라, 내재적인 가치를 잠정적으로 이해하고, 총체적인 삶의 설계에 따른 목표를 설정하고, 이 목표에 대한 방향을 추구할 수 있는 하나의 실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이러한 인간 실존의 최종 목표와 부합할 때 윤리적 행위가 된다. 이 최종 목표는 단순히 자연과의 일치 또는 자연적 행복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개별적인 자연 법칙 안에 한계지워지지도 않는다. 인간은 윤리적 행위를 통해 목표에 대한 방향을 추구하며 이 목표로부터 자신의 삶의 마지막 의미가 성취되기를 희망한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신앙 : 인간은 외적인 여건과 상황의 객관성 안에서 처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인정해야 하며 미래를 희망하고, 감사와 참회로 자신의 과거에 대한 태도를 표명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의 삶은 하느님과 관계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헌신을 통해서만이 자아를 발견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적 행위의 직접적인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대신 인간은 오로지 신앙을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신앙은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와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근거지어지고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사랑 · 은총 · 하느님의 용서를 중재해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구원의 근거를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체험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인간의 신앙 행위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그 신비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인간을 위하여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다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는 보편적인 통용성에 대하여, 또한 인간의 최종적인 목표와 관련하여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인간은 최종적인 의미가 과연 존재하는지, 조건 없이 인간을 인정하는 사랑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 하는지, 그 결과 사랑과 선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구한다. 따라서 신앙의 진리와 관련하여 한 분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이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는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는지, 인간에게 영원한 구원을 약속해 주는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인류가 관심을 보이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와, 전통을 통한 계시의 해석이 신앙 안에서 진리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믿는다. 신앙은 이성적 의미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 타인의 개방에 대하여 응답하는 인격적 행위이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개방시킨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절정에 도달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탁월한 방법으로 계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신앙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신앙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죄를 용서하고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로 인간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성부께서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고,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인류 구원을 위한 그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받아들인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진리의 말씀으로 고백하며 실천하고, 복음의 수호자인 교회에 입교하여 성사 생활과 기도 생활에 충실한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으로서의 신앙 :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며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인격적 일치이다. 신앙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으며,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고 구원을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하느님이 당신 사랑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성부께 대한 그리스도의 내적 태도를 본받는 것이다. 이렇듯 신앙을 통해 인간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 안에서 실제로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 따라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이 요구하는 정도와 당위성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하느님 은총을 향해 자신을 개방시키는 정도에 일치하여 드러난다. 또한 신앙의 덕은 단 한 번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하느님께 충실히 헌신하고 노력하여 키워 나가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신앙을 드러내야 하고 성숙시키기 위하여 기도하고 신앙의 진리를 더 깊게 깨우치기 위해 정진하여야 한다.
구원 가능성의 개방 : 한편 기도와 성사 생활 같은 의식적인 신앙 행위 없이 예수와 관계하지 않는 비그리스도교인도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며, 그 인식에 부합하여 행동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의 채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에 심어진 신적 계시에 따라 행동해야 할 필연성에 직면한다.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자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주어지는 인간 삶의 의미를 예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견에 의하여 인간은 어느 정도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며 실천적인 힘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 삶의 최종적인 의미는 객관적인 사실 인식만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신앙의 결단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인격적인 태도 표명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자신의 고유한 본성이나 노력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느님에 의한 구원을 통해 실현되어질 수 있는것이며,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를 배제하고서는 의미 체험, 사랑과 용서의 체험 그리고 희망 체험의 정당한 근거를 찾지 못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비그리스도교인들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을 위한 구원의 중재 자이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개방되어 있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예수는 하느님의 뜻과 영원한 구원을 위한 인간의 삶 · 행위를 분명하게 밝혀 주었다는 것을 함께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인간 자신의 힘이나 자아 완성에 두지 않고 하느님 은총에 대한 개방에 기인함을 알려 주었으며, 예수 자신의 가르침과 삶, 죽음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신앙인으로서 인간 실존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드러냈다. 예수는 신앙의 표징이며 증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이다.
〔희망의 덕(望德)〕 미래에 대한 희망 : 인간은 누구나 미래를 동경하고, 보다 나은 자기 자신과 더 완전한 삶을 추구하며, 자아 완성을 소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인간다움은 희망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 시간에 대한 인간만의 독특한 행위와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에 대한 의식을 통해 자신과 자기 이외의 대상에 대하여 간격을 유지할 수 있다. 인간에게 하나의 대상은 단순히 순간적인 감각의 인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인식을 통해 대상과 세계와 관련된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확대시키는 새로운 체험을 향해 개방되어 있다.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 자기 자신과도 간격을 둘 수 있는 인간은 단순히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만 반응하지 않으며, 개별적인 상황 안에서 지나간 과거의 개별적인 체험에 대해 숙고하고, 그 속에서 교훈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즉 시간을 통해 인간적 인격 자체에 대한 거리감 유지가 가능하게 된다. 공간적 차원이 인간의 육체성과 한계성으로 규정지어져 있는 반면 시간의 차원은 초월성으로 인간을 개방시켜 준다.
따라서 사물이나 동물과 다른 인간의 결정적인 특징은 무한한 미래에 대한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과거를 회상하며 과거의 지나간 개별적 체험에대해 숙고하고, 그 체험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이러한 계획을 통해 자신의 행위를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할 자유가 마련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유롭기 때문에 현재 이루어지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전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인간의 인격적인 자유가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 미규정성 또는 순수한 창조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지니고 있는 규정되어 있지 않음을 규정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은 미래를 인식하고 미래를 향해 의식적으로 방향을 잡음으로써 미래의 개방성을 인식한다. 하지만 인간은 미래를 향한 계획이 어느 정도 분명하게 나타나는지를, 그리고 그 계획된 미래의 결과를 체험하게 될지를 아직 알지 못한다. 인간의 미래는 자신의 행위가 추구하는 목적이 실제로 성취될 수 있다는 확실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미래에 대한 인식은 단지 변화에 대하여 예측되어질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낄 수 있으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이 아니라 희망이다. 과거는 벌써 지나가 버렸고 인간은 과거를 망각하거나 기억에 담아둘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과거보다 미래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인간은 미래에 자신의 삶이 계속 성취되기를 기대하고 더 나은 생활, 더 완전한 삶을 갖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현재에 대해 거리감을 갖고 과거보다 더 많은 것을 미래가 가져다 주기를 희망한다. 미래란 인간에게 모호하고 희미한 영역이 아니라 인간이 갈망하는 삶의 목표이며, 희망이 되는것이다.
구원에 대한 희망 : 인간이 미래를 희망한다는 사실은 현재가 인간의 기대를 완전하게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항상 더 큰 행복을 기대하고 희망한다. 이러한 인간의 기대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 자신의 삶에 연속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사람은 물질의 소유, 명예, 교육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생산적 활동을 통해 시간을 연장시키는 가치를 창조해 내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로써 인간은 순간의 무상함을 극복하지는 못한다. 이미 성취한 것은 자명한 것으로 여기며 권태로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만족이라는 행복한 시간 이후에는 다시 무엇이 다가올까라는 새로운 기대를 희망한다. 인간은 현재 안에서 순수하게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자신의 행위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내재적 가치를 실현시키느냐에 달려 있다고 여긴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이 내포하고 있는 무상함에 대한 물음과 직면하게 된다. 희망이란 단순히 어떤 물질적인 선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에 대한 관계라는 의미에서의 희망을 의미한다. 즉 인간이 미래에 선한 존재가 되리라는 사실에 대한 신뢰와 그리고 이웃이 필요로 하는 현재의 욕구에만 도움을 제공하지 아니하고 미래에도 도움을 제공하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인간의 희망은 최종적으로 신앙 안에서만 규정된다. 인간이 구원을 신앙하지 않고 불신앙 안에서 살아간다면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목표는 끝내 실망만을 안겨 주며, 인격적 자아 실현도 무력하게 되어 소멸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현세의 삶 안에서 유한한 존재이며, 인간은 현재의 생활 안에서 결코 완전하고 충족된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식 안에서 죽음을 예감할 수 있고, 죽음을 통하여 현세 안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최종적인 구원을 신앙한다면 삶의 끝에 직면하여서도 구원의 의미를 가질 수 있고, 따라서 내재적 가치 역시 희망의 상징으로 깊은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인간은 죽음을 넘어서는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해 희망한다. 그리스도인은 인간 희망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인물의 부활에서 찾았다고 믿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희망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신 하느님 사랑의 계시에 둔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근거는 현세적 삶에 대한 불만에 기인하지 않고, 무상함에 대한 체험과 불멸에 대한 염원에 기초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희망의 정당성은 예수가 영원부터 개입하여 인간을 영원한 구원으로 초대하였다는 신앙의 진리에 기초한다. 그리스도의 강생 · 생애 · 구원적 수난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나타내는 것이며 특히 그의 부활은 하느님의 전능과 확고한 신앙에 대한 최고의 보증이다. 따라서 희망의 근거는 죽음에서 살아난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를 살리는 하느님의 권능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믿음 안에서 죽음은 구원의 사건으로 변화한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구원을 기다리며 죽음을 극복할 수 있고, 죽음의 극복을 통해 구원을 기다린다. 그러나 인간이 희망하는 것은 단순히 죽음 이후, 자신을 위한 구원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역사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밝히는 구원이다. 진정한 의미의 희망이란 인간 삶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행위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포함한 인간의 전 인격적 역사의 구원됨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하느님의 주권 안에서 자신의 회개와 이웃과의 화해 그리고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은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이며,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구현시키는 실재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개인을 포함한 전체 인류의 구원이며 마지막으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신적 사랑의 덕(愛德)〕 인간의 사랑 : 인간은 자신의 기본적인 삶의 욕구에 의해 자아 보존과 유지를 원한다. 이 욕구는 감각적이며 감정적으로 드러나고, 경험을 전제로 하여 자신의 태도로 표명된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인격을 통하여 의식적인 형성과 조절이 용이하게 접근하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설정한다. 인간의 인격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인간 상호간의 만남에 의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인간의 욕구는 물질적 의미 안에서만 이해되지 않는다. 인간은 물질적인 것보다 더 높은 차원에 속하는 욕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성공과 안정, 행복과 용기 등을 갈망하며 진정으로 어떤 사람에게 선을 행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하고 명성을 얻으려 하며 사랑받고 싶은 자연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홀로 자족할 수 없는 존재이며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은 사랑을 통해 '너' 라는 상대방과 관계를 맺으며 동시에 '고유한 자아' 와도 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긍정할 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며, 또한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사람을 긍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기 위하여 사랑을 필요로 한다. 물론 사랑은 마치 기계적인 작용과 같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을 받음으로써 삶의 의미를 체험하고, 자기 스스로 이 의미에 맞게 결단하는 힘을 찾게 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통해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으며 더욱더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꾸어 나간다.
인간 관계에 있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만나게 될 때에 자기 이해가 가능하며 인격체로서 상호 통교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인격적 만남이 진정으로 발생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건네오는 말을 경청해야 한다. 여기서 '말' 이란 단순히 언어만이 아니라 상대방이 드러내는 인격 전체를 말한다. 상대방을 경청한다는 것은 나의 인격 깊은 곳에서 상대방을 만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아낌없이 개방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너를 만나고 있는 나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인격적 사랑이 이루어지고, 나는 너에게 나 자신을 선사한다.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들의 관심이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대상에서 벗어나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실재 전체를 지향할 때 인간은 지고한 삶의 의미와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또 인간은 사랑을 통하여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며, 사랑 안에서 서로 일체감을 갖는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체험에 의존하고 있는 관계가 나름대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순간적으로 철저하게 행복감을 체험할 수 있지만, 인간은 희망의 성취를 현재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서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 할수록 서로간의 요구는 더 클 수밖에 없고, 자신의 관심사를 실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헌신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이 심화되고 성숙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변화를 거쳐야 한다. 더욱이 하나의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자신의 자아를 의탁하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인간은 인간 상호 관계 안에서는 자기 존재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결코 완전하고 총체적인 사랑의 의미를 체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국 무제한적인 사랑을 하느님 안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사랑 : 사랑의 결정적인 주도권은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사랑하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자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이미 은총의 결과이다. 은총은 구원의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며 인간은 자기의 완성을 하느님으로부터 얻는다. 사랑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투쟁해서 강제적으로 쟁취할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 19)라는 응답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절대적 완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유롭게 초대하는 하느님으로 흠숭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1요한 4, 16). "인간의 모든 선행은 이 사랑에서부터 나와야 하며, 사랑이 없으면 선행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고린 13장). 인간이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임을 인정할 때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고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 신적인 생명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존속시켜 주시며, 구원으로 이끄신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께 마음을 바쳐야 하며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 그분 안에 마음을 집중시켜 머물러야 한다.
인간에게 선물로서 다가오는 하느님의 사랑은 인류 역사 안에 발생하는 하느님의 자아 전달을 통해 드러난다. 자신을 전달하시는 하느님은 인간과 깊은 일치를 이루신다. 이 일치는 인간의 삶 안에서 시작하고 인간의 죽음과 영원한 구원 안에서 완성된다.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이 계약을 통해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을 선사하시고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에 응답할 것을 요구하신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구원의 역사를 통해 중재되고, 이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확연히 알려진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육화 사건을 통하여 가장 깊은 실재성을 띠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 사랑이 실현되었음을 알려 준다. 하느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죄의 용서와 화해 안에서 인간을 당신 신비에 동참하게 하시고 인간을 상호 일치하게 하셨다. 하느님은 역사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며 이러한 체험으로부터 인간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간을 구원에로 부르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하느님께 동의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용서와 구원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희망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 사랑을 수용하고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 인간은 성부의 뜻에 귀의하는 예수의 태도와 인간을 위해 헌신하는 예수의 태도,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예수의 태도를 자신의 삶을 위한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예수의 태도를 닮아가려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 사랑은 그 자체로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예수를 통하여 영원한 구원의 초대로 사랑의 의미를 제시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웃 사랑이라는 상징의 형태로 응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단지 관념의 대상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현실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치 하나의 사물의 경우처럼 하느님에 대해서 직접적인 태도를 표명할 수 없고 그 대신 내재적인 관계의 중재를 통해서, 특히 이웃에 대한 인격적 관계의 중재를 통해서 태도를 표명해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웃에 대한 조건 없는 긍정과 봉사로 드러내야 한다. 설령 물질적 가치와 내재적 행복이 이웃에 대한 사랑안에서 보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고유한 업적의 결과나 이웃의 선물로서 희망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일치로부터 자신의 구원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은총이 배타적으로 어느 한 개인만을 위해 주어지지 않고 항상 모든 이를 위하여 주어지는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기심을 극복하고 이웃에게 자신을 개방하며 구체적인 행위 안에서 이웃과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대신덕을 거스르는 행위〕 인간은 대신덕을 존중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동시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대신덕은 하느님을 직접적이고 객관적인 대상의 본성 안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의 자유 안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목적 가운데서 하나의 목적을 선택함으로써 야기되는 차이가 아니다. 대신덕을 거부하는 행위는, 자연 또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지니고 있는 일정한 특성과의 불일치에 있지 않고 인간이 자신의 내적인 지향과 양심을 통해 하느님의 요구를 거부할 때 생기는 윤리적인 책임에 있다. 이에 대한 판단 기준은 행위의 외적인 결과 또는 사회적 영향력이 아니라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대신덕의 거부는 단순히 실수가 아니라 죄이다. 죄는 자신을 인간에게 전달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는 데 있다. 이는 단지 외적으로 무엇이 발생하였는가 하는 것 만이 아니라, 동시에 행위자가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리고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하느님과 어떻게 관련시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즉 인간의 구체적인 행위 안에 신앙 · 희망 · 사랑에 대한 거부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가에 달려 있다. 대신덕을 거스르는 행위는 인간 인격의 자아 실현을 거스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교를 파괴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모욕으로 드러나며 결국 인간은 구원의 초대에 배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을 거스르는 죄 : 신앙을 거부하는 행위는 적극적으로 볼 때 불신앙이다. 신앙을 거부하는 행위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개방시킨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인간의 실존적인 태도를 배제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용서를 희망하지 않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거절하면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다. 신앙을 거부하는 데 있어서 신앙의 진리가 합리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재적 가치를 절대화시키며, 부분적인 욕구의 충족을 더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삶의 마지막 목표로의 전향을 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신앙을 거스르는 죄는 하느님의 존재가 자기의 자율성에 방해되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해 버리는 행위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신앙을 알고, 고백하고, 전파하고, 수호해야 할 의무와 자기 능력에 따라 신앙의 일치를 촉진시켜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그는 그 소홀함의 정도만큼 신앙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교만이나 불신을 포함, 이단(異端) 열교(裂敎), 배교(背敎) 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스르는 죄에 해당한다.
희망을 거스르는 죄 : 희망을 거부하는 행위는 인간이 행하는 선이 하느님과의 일치 안에 의미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이 하느님과의 일치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거부하며 그러한 방법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영원한 구원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고 억측하거나,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을 잃고 절망하거나, 자신의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고 체념한다. 이와 함께 인간은 하느님 대신에 타인에 대해 감정적으로 집착하거나, 타인에 대한 신뢰를 거절하면서 그의 미래 개방성을 거부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희망을 거부함으로써 허무성과 유한성 그리고 부당한 고통에 대하여 위협당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마지막 날 계시될 사랑의 절대적 의미를 향해 전향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 잠정적이고 현세적인 가치에 머무르는 피동적인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거스르는 죄 : 사랑을 거부하는 행위는 이웃과 하느님과의 일치를 거역하는 것으로 무관심과 증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랑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자세가 표현될 수 있도록 삶의 구체적인 가능성과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사랑이 없는 행동이란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는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타인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이기적으로 머물고 타인을 위해 살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실존만을 절대화시켜 타인과 하느님에 대한 봉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웃을 모욕함으로써, 이웃에게 고통과 불의를 가함으로써 하느님까지도 모욕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모든 비참한 아픔과 고통, 그리고 불안을 조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게 되며 이는 미움으로 나타날 수 있다. 미움은 일차적으로 자아의 위협에 대한 심리적인 반응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미움은 자기 사랑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자연 발생적이고 심리적인 감정으로서의 미움이 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이나 증오가 의식적이고 자의적으로 사로잡혀 적극적인 개선을 거부할 때 악한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거부하는 행위는 구원의 역사와 이웃의 중재를 통해 하느님이 각자에게 선사하는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또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반면 흠승, 묵상, 기도, 예배, 형재애에 바탕을 둔 활동과 사업 등은 신적 사랑의 표현으로, 그 사랑을 촉진시키고 심화시킨다.
(⇦ 신덕 ; 망덕 ; 애덕 ; → 사랑 ; 완덕)
※ 참고문헌  H. Rotter · G. Virt hrsg., Neues Lexikon der Christlichen Moral, Innsbruck, 1990/ P. Eicher hrsg., Neues Handbuch Theologischer Grundbergriffe, Kösel, 1984/ H. Rotter, Grundlagen der Moral, Zürich, 1975(안명옥 역, 《윤리의 기초》, 분도출판사, 1993)/ → Christliches Handeln, Graz, 1977(안명옥 역, 《그리 스도교 윤리》, 분도출판사, 1987)/ 一, Grundgebot Liebe, Innsbruck, 1983(안명옥역, 《사랑의 기본 계명》, 분도출판사, 1989)/ K.H. Peschke, Christian Ethics, vol. 2, C. Goodliffe Neale, 1986(김 창훈 역,《그리스도교 윤리학》2, 분도출판사, 1992)/ 최 창무, 《윤리 신학》2, 가톨릭대학 출판부, 1989. 〔李承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