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 협동 조합은 협동 조합의 한 형태로서 분류 기준으로 볼 때 경제적 기능에 기초해서 분류된 것이다. 프란츠 헬름(Franz C. Helm)의 분류에 의하면 그것은 경제적 기능, 법적인 지위, 지역적 특성(도시, 농촌) 및 조합원의 경제적 특성(소비자, 생산자, 노동자)에 따라 분류된다. 경제적 기능에 따른 분류는 생산 기능과 보조 기능으로 나눠지는데 신용 협동 조합은 보조 기능에 속한 협동 조합이다. 신용 협동 조합이란 동일한 공동 유대에 소속한 서로 잘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모여 그들이 처한 사회 ·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즉 계속적인 저축으로 자금을 조성하고 돈이 필요할 때 공정한 이자로 대부를 받아 이용하며, 조합원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교육하는 신용 협동 조합법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운영되는 비영리 법인이다.
〔역 사〕 협동의 역사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필요로 느끼는 그 순간, 즉 태고 때부터 시작되었다. 또 중세 초기의 베네딕도 수도회의 사상은 협동으로 사회를 이룩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협동 조합의 사상은 산업혁명 이후부터이다. 공업화는 대량 생산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으나 저임금과 부당 임금으로 굶주리는 층을 만들어 냈고, 농촌에 있던 사람들은 도시의 한 모퉁이에서 협소하고 어둠침침한 생활을 해야만 하는 예기치 않았던 현상으로 번져 당시의 사회 · 경제적 질서를 무너 뜨렸다. 협동 조합 사상은 이렇게 갑자기 생긴 어렵고 어지러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나타난 것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영국에서 협동 조합이 먼저 시작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협동 조합의 선조는 로버트 오웬(R. Owen, 1771~1858)이다. 그러나 영국의 소비자 협동 조합에 영향을 준 사람은 월리엄 킹(Dr. William King)이다. 인격은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믿었던 오웬의 사회 이론은 하층 계급의 도덕적 정신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경제 이념으로서 교환 과정에서 잃는 손해를 막아야 하고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고전 국민 경제학파의 이론을 지지하였다. 그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뉴 하모니(New Harmony)라는 협동 사상촌을 이루었으나 실패했다. 월리엄은 실천 가능한 방안을 연구했다. 그의 이론은 협동 조합은 빈곤을 타파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지만 그 방안의 성공 여부는 완전히 노동자에게 달려 있으며, 단결과 저축으로 자본을 형성해야 하며 이를 위한 협동 조합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협동 조합에서는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그리스도교의 계명을 도덕적 · 종교적 원칙으로 정하여, 혁명과 계급 투쟁을 반대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독일 등지에도 협동 조합 사상가들이 많이 나타났다.
신용 협동 조합은 사회 변동과 자연 환경으로 인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제도로 그 역사는 1849년 독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인 1900년에 캐나다의 퀘벡을 중심으로 북미에서 성장하였고, 다시 그곳에서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었으며 한국에서도 1960년 처음으로 신용 협동 조합이 시작되었다. 신용 협동 조합의 창시자 라이파이젠(F.W. Raiffeisen, 1818~1888)은 농민들을 대상으로 신용 협동 조합을 조직하였는데, 그 동기는 그리스도교 윤리에 의한 형제애와 사회 평화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독일의 슐체 델리취(Schultze Delitzsch, 1808~1883)는 도시의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자조와 자립에 기초한 신용 협동 조합 활동을 하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 ·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자선에 중점을 두고 시작 · 운영하였으나 경험을 하고 난 후에는 모두 자조 · 자립을 강조하는 협동 조합으로의 특성을 공고히 했다. 이로부터 거의 반세기 후에 시작한 알퐁스 데쟈르댕(A. Desjardins, 1854~1920)은 그 자신이 실무에 참가하면서 유럽의 신용 협동 조합을 연구하고 그 제도를 그가 속한 공동체에 맞추어 발전시켜 갔다.
미국에서는 1909년에 처음으로 신협이 조직되었고, 1921년 전국 신용 협동 조합 지도부가 설립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이 지도부 설립에는 파이린(E.A. Filene, 1860~1937)과 버진그린(Roy F. Bergengren, 1880~1950)의 기여가 컸다. 그 후 미국은 전국 연합회를 조직했고, 1954년에는 세계 교도부를 설치하여 공식적으로 세계 각국에 교도 사업 활동을 하게 되었다. 현재 발전 도상국의 신용 협동 조합은 그 자체의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성직자들에 의하여 전파되었고 제도적인 뒷받침은 미국 연합회의 협조를 얻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아시아 등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역사〕 우리 나라에서는 일제의 수탈에 의한 농민 몰락과 3 · 1 운동 이후의 민족 해방 운동을 배경으로 일본 유학생, 천도교,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민간 협동 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제의 정책과 배치되는 것이어서 탄압을 받다가 1931년 강제 해산당하였다. 결국 해방과 함께 물려받은 것은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협동 조합이 아니고 그때까지 계속되었던 한국 농민 착취용의 관제적 기구인 금융 조합이었다. 해방 이후 농민들과 정부의 국회 일각에서 일제의 잔재인 관제 금융 조합으로부터 탈피한 자율적이고 순수한 협동 조합을 다시 출범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친일파와 금융 조합 임원 출신자들과 이들의 동조자들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1958년에 금융 조합이 농업 협동 조합으로 변신했으나, 이내 자유당의 예속물로 정치 도구가 됨으로써, 전신인 금융 조합과 같이 정부의 어용 기관이 되고 말았다.
〔가톨릭 교회와 신용 협동 조합의 출현〕 해방 당시, 우리 민족의 과제는 식민지적 유산을 청산하고 새로운 생산 기반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북 분단으로 말미암은 자원 분단은 산업 구조의 파행성을 더욱 심화시켰고 경제를 더욱 파국으로 몰아갔다. 1950년대의 한국 사회 경제는 근대적 공업 부문과 전근대적 농업 부문이라는 이중 구조 아래에서 한편으로는 임금 노동자 계층과 다른 한편으로는 소농, 중소 상공업자 층을 병존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협 운동은 시작되었다.
한국의 신협 운동은 메리놀 외방전교수녀회의 메리 가별(Mary Gabriella Mulnerini) 수녀와 장대익(張大翼, 루도비코)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부산 메리놀 병원에서 주로 전쟁 미망인들을 위한 구호 활동에 종사했던 가별 수녀는 미국 자원 봉사단 한국 협의회(Korean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y) 이사직을 겸하고 있었다. 1957년 11월 뉴욕에서 개최된 자원 봉사단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막대한 원조 방법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우리 나라에 투입된 많은 원조가 자립적이고 협동적으로 사용되지 못하였으니 원조를 계속하는 것보다는 협동 자립 정신을 심어 주는 것이 장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가별 수녀는 1957년 12월 협동 교육의 고장이라 할 수 있는 캐나다 노바스코시아 주재 성 프란치스코 가톨릭대학 부설 협동 연구원(Extension Department=Coady Institute)에 들어가 신협은 물론 소비자 협동 조합과 생산자 협동 조합 등 협동 조합에 대한 전반적인 학습을 하고 1958년 1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신용 협동 조합 조직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부산 메리놀 병원 직원들, 성 베네딕도 병원의 직원들, 가톨릭 구제회(N.C.W.C.) 직원들이 연구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신자, 불교 신자, 또 다른 종교에 속한 신자들도 있었다.
1960년 3월 19일 신협 창설을 위한 강습회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마다 6주 간의 교육을 마치고 5월 1일 저녁 우리 나라의 제1호 신용 협동 조합인 '성가 신용 조합' (Holy Family Credit Union)이 창설되었다. 조합원들은 메리놀 병원의 직원들과 가톨릭 구제회의 직원들 그리고 부산 중앙 성당 신자들로 구성되었다. 성가 조합이 창립되고 2개월이 지난 후 서울 시내 천주교회들의 유대로 '가톨릭 중앙 신용 조합' 이 조직되었는데 서울대교구 장대익 신부가 조합 조직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장대익 신부는 1955년에 코디 연구원에서 신용 협동 조합에 대한 연구를 수료했었다.
성가 조합과 가톨릭 중앙 조합은 지도자들과 임원들과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발전을 거듭하였다. 새로운 조합 조직을 위해 각 조합의 교도 위원들과 메리놀 수녀회의 협동 조합 봉사회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부산 메리놀 수녀원 나자렛 집에 위치한 협동 조합 교도 봉사회는 신협 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초대 원장은 가별 수녀였으며 독일 가톨릭 주교단 직속 원조단인 미세리오르(Miserior)와 다른 은인들의 원조로 운영되었다. 제1차 지도자 강습회는 1962년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나자렛 집에서 행해졌는데 각계 각층의 인사들 27명이 참석하였다.
1963년 7월 1일, 서울 가톨릭 의대 내로 사무실을 옮긴 교도 봉사회는 협동 교육 연구원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다시 1964년 마포구 동교동의 현 위치로 사무실을 이전하였다. 한편 1964년 1월 서울 신용 조합 지부 월례 회의에서 가별 수녀의 제의로 전국 연합회 설립을 위한 발기 위원이 위촉되었다. 13명의 발기 위원들은 중앙 신용 조합 회의실에서 준비 위원회를 개최하고 1964년 4월 26일 서강대학에서 연합회 창립 총회를 개최함으로써 전국 연합회를 조직했다. 당시 전국 조합원수는 8천 명이었고 총 자산은 2,704,785원이었다.
1972년 8월 1일, 제18차 국회 회의에 신용 협동 조합법 제정이 제안된 후 8년 만에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신협 운동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고 법적 보호도 받게 되었다. 한편 신용 협동 조합의 발전에 가장 중요시되는 교육을 담당하게 될 연수원 건립을 계획하여 독일 미세리오르와 은인들의 원조로 대전 유성구 덕명동에 연건평 1,037평의 건물을 신축, 개관하였다.
34년 동안의 신용 협동 운동은 1993년 12월 말 현재 1,555개의 조합과 324만 7천여 명의 조합원, 약 8조 5천억 원의 자산 규모로 성장하였다.
신용 협동 조합은 정부나 어느 기관이나 종교 단체에 예속되거나 간섭받아서 안되는 중립적이고 비영리적인 조직이다. 가톨릭은 신용 협동 조합의 창립과 발전에 봉사할 뿐 어떤 권리도 행사하지 않는다. 다만 이웃에 대한 사랑, 복음 정신으로 상부상조하고 봉사하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이므로 힘껏 협력하는 것이다. (⇦ 신용 협동 조합 운동)
※ 참고문헌 강승희, 《협동 운동과 신협 운동》, 신협도서 출판부, 197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장상환, 《농협의 역사와 현실》, 관악서당, 1979/ 신용협동조합 중앙회, 《信協運動三十年史》, 1991/ 조명제, 《전남 신협 20년》, 1982. 〔卞甲善〕
가톨릭 신용 협동 조합 운동
信用協同組合運動
〔영〕Catholic Credit 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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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가별 수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