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를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교구.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1948년 5월 8일 서울 대목구 소속의 독립 포교지로 설정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가 1958년 6월 23일 대전 대목구로 설정되었다. 이후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립되면서 정식 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서울 · 춘천 · 인천 등과 함께 서울 관구를 형성하였다. 〔역대 교구장〕 초대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주교(1958. 6. 23~1964. 3.4), 2대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주교(1965. 4. 3~1984. 2.13), 3대 경갑룡(景甲龍, 요셉) 주교(1984. 7. 12~현재). 〔관할 구역〕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전 지역. 〔교 세〕 1958년 39,528명, 1961년 45,017명, 1971년 64,182명, 1981년 79,531명, 1984년 96,698명, 1993년 154, 608명.
I . 내포 교회와 순교자의 탄생
〔내포 교회와 복음의 확대〕 충청남도의 서해안인 내포(內浦) 지역은 경기도 양근(楊根) 지역과 함께 일찍부터 복음이 전파된 곳으로, 박해가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신앙의 터전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한국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된 것은 1784년(정조 8) 무렵,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新宗里) 출신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이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고향 인근 지역에 이를 전파하면서였다. 이때부터 천주교 신앙은 천안 · 면천 · 공주 · 한산 등으로 전파되었고,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를 겪으면서 청양 · 논산 지역과 전라도 · 충청북도 · 경상도 지역에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 박해로 충청도에서는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과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등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훗날 모두 순교하였다. 한편 이존창은 1791년 공주 감영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홍산, 금산, 전라도 고산(高山) 등으로 이주해 다니면서 전교 활동을 하였으며, 1795년에는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와 함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순방한 뒤 다시 체포되어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초기 교회사에서 유명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토마) 신부의 집안 또한 이존창과 인척간으로 내포 지역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후 내포 교회는 언제나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서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1868년의 무진박해(戊辰迫害) 때까지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이 지역의 신자들이 전라도 북부, 경기도, 충청도 북부,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복음이 확대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31년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1836년부터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내포 지역은 이들의 순방을 받게 되었다. 그중에서 이 지역을 가장 먼저 담당한 성직자는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였고, 1845년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高)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 1849년에 귀국한 최양업 신부도 내포 지방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또 1861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전국을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누면서 다블뤼 주교가 상부 내포(홍주 지역)를, 랑드르(Landre, 洪) 신부가 하부 내포(서부 충청도 지역)를, 죠안노(Joamo, 吳) 신부가 공주 지역을,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진밭(현 공주군 사곡면 新永里) 일대의 전교를 담당하였다. 이로써 내포 교회는 크게 4개의 본당 구역으로 나뉘게 되었으나, 1866
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다블뤼 주교가 신리(현 당진군 합덕읍 新里)에서, 위앵(Huin, 闕) 신부가 쇠재(현 예산군 봉산면 金峙里)에서, 오메트르(Aumaire, 吳) 신부가 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上宮里)에서 각각 체포되어 순교함으로써 일시 침체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순교자와 사적지〕 그 동안 충청도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주로 공주 감영, 해미 진영, 홍주 진영에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주로 충청도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순교하거나 희생된 사람들이지만(다음의 표에서 A형의 순교자), 이 밖에도 다른 지역 출신이 충청도로 이주하여 거주하다가 순교한 경우도 있고(B형의 순교자), 혹은 충청도 출신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뒤에 순교한 사람들도 많았다(C형의 순교자).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들을 토대로 한다면, 이들 순교자들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때까지 약 72명,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부터 1846년의 병오박해(丙午迫害) 때까지 약 33명, 1866년 병인박해 이후가 약551명 등 모두 656명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을 포함한다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질 것이 틀림없다.
이처럼 박해 때마다 많은 순교자와 희생자들을 탄생시킨 결과 충청도 지역에는 현재 많은 순교 사적지들이 남아 있게 되었다. 우선 초기의 사적지로는 성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솔뫼(당진군 우강면),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최양업 신부 부자가 태어난 새터(청양군 화성면), 새터인근의 다락골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줄무덤, 이존창 이래로 수많은 신자들의 처형지가 된 공주의 황새바위, 초기 박해 때부터 신자들이 문초를 당하고 숨져간 홍성의 관아와 옥터 등이 있다. 그리고 순교자 인은민(마르티노)이 태어난 덕산의 주래(삽교면 용동리), 신유박해 이후 1868년의 무진박해(戊辰迫害) 때까지 가장 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해미 읍성과 생매장터, 홍주·예산 일대의 신자들이 압송되던 한티 고개(덕산면과 해미면의 접경), 1866년 성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 등이 순교한 영보리의 갈매못(보령군 오천면), 성 다블뤼 주교가 체포된 신리 공소(합덕읍 신리)도 유명한 사적지가 되었다. 반면에 훗날 발견된 사적지로는 맹고개(인주면 해암리)의 형제 순교자 무덤(1988년 공세리 성당 구내로 이장), 상홍리(서산군 음암면)의 병인박해 순교자 무덤(1995년 해미로 이장), 원머리(당진군 신평면)의 순교자 박선진(마르코)과 박 마티아의 무덤(1989년 신평 성당으로 이장), 납안리(천안군 북면)의 순교자 묘 등을 들 수 있다.
II . 공소의 부활과 본당의 확대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건〕 박해가 끝나자 내포 지역에는 다시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0년대 초에 이미 약 1천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881년부터 이 지역을 담당하게된 두세(Doucet, 丁力巧爾) 신부는 이 공동체들을 방문한 뒤 각처에 공소를 설립하고, 이후 7~8년 동안 이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매년 성사를 주었다. 이때의 공소들이 훗날 본당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공주의 서재(현 유구면 명곡리), 강경리(현 논산군 강경읍), 부여의 온탑이(현 은산면 나마리), 당진의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 아산의 공세리(현 인주면 공세리), 예산의 간양골(현 예산읍 간량리)과 양촌(현 고덕면 상궁리), 서산의 쇠길리(현 팔봉면 금학리), 서천의 독뫼(현 문산면 수암리), 천안의 서덕골(현 목천면 송전리) 등이 가장 먼저 설립된 공소들이었는데, 이것으로 볼 때 박해를 겪는 동안 천주교 신앙이 충청남도 전 지역으로 퍼져 갔음을 알 수 있다. 이에 1890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의 사망으로 임시 교구장을 맡게 된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는 두세 신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 지역에 본당 중심지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코스트 신부는 1890년 8월, 전해 6월 21일에 입국한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신부와 10월 3일에 입국한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를 내포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이로써 내포 지역에는 1866년 이래 24년 만에 다시 2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때 퀴를리에 신부는 양촌에 거처하면서 충청도의 남쪽과 동쪽을 관할하였고, 파스키에 신부는 간양골에 거처하면서 북쪽과 서쪽을 관할하였다. 이 중 구합덕 본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양촌 본당' (陽村本堂)의 퀴를리에 신부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인해 '간양골 본당' 이 폐지되면서 이 지역을 통합 · 관할하게 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충청도 지역의 본당들을 분리해 나갔다. 당시 가장 먼저 분리된 본당은 1895년 6월에 설립된 아산의 '공세리 본당' (貢稅里本堂)과 이듬해 이 본당에서 분리된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의 '공주 본당' (公州本堂)이었다. 퀴를리에 신부는 그 후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한 끝에 1898년 합덕지(合德池) 이웃의 창말(倉里, 현 구합덕 성당 자리)에 있는 언덕을 매입하여 이듬해 한옥의 사제관 겸 성당을 완공함과 동시에 본당을 이전하고 그 명칭을 '합덕 본당' 으로 개칭하였다.
〔교세와 본당의 확대〕 이후에도 내포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였다. 1901년에는 합덕 본당에서 부여의 '금사리 본당' (金寺里本堂)이 분리되면서 공베르(J. Gombert, 孔安世) 신부가 부임하였고, 1908년에는 폴리(Polly, 沈應榮) 신부가 결성(結城)의 '수곡 본당' (水谷本堂, 1916년에 서산 금학리로 이전)을 신설하였으며, 1906년에는 공주본당 지역의 일부가 충북 '옥천 본당' (沃川本堂)으로 분리되면서 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가 이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1919년 11월 12일에는 비룡(飛龍, 현 청원군 남이면) 본당에 있던 이종순(李鍾順, 요셉) 신부가 대전 방축리(方丑里, 현 대전시 목동)로 이주함으로써 '대전본당' (大田本堂, 현 대흥동 · 목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후에도 1921년 전북 나바위 본당에서 논산(현 부창동) 본당이, 1927년 구합덕 본당에서 예산(현 오리동) 본당이, 1936년 4월 금사리 본당에서 서천 본당이, 1939년 5월 구합덕 본당에서 당진 본당이, 같은 시기에 안성 본당에서 천안(현 오룡동)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1943년 12월에 서천 본당(1967년 재설립)이 장항 본당으로 이전되었고, 1945년 논산 본당에서 강경 본당이 분리 · 설정됨으로써 해방 당시 충청도 지역에는 모두 12개 본당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37년 4월에는 캐나다의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라리보 주교로부터 수도원 설립 허가를 받고, 이해 9월부터 대전에 진출하여 활동하면서 1938년에는 대흥동에 부지(현 주교좌 성당 부지)를 매입 하는 한편 목동에 수도원 건물을 신축하였다.
한편 대전 본당은 1945년 목동에서 대흥동(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유지)으로 이전하면서 1927년에 건립된 목동 성당을 프란치스코회에 인계하였다. 이에 따라 목동은 정식 본당이 아니라 수도회 소속의 준본당으로 변모하였으며, 1958년에 이르러 다시 정식 본당이 되었다. 당시 대흥동 본당의 제10대 주임으로 활동하던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는 성당 이전 후인 1947년에 '충남 애육원'을 도(道)로부터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그리고 논산 본당의 제6대 주임 조인원(趙仁元, 빈천시오) 신부는 1945년 10월에 대건중등강습소를 설립한 뒤 1947년 2월에는 이를 3년제 초급 중학교로 승격 인가받았고, 1948년에는 '논산 천주교회 양로원' (현 쌘뽈 양로원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대건중학교에서는 그 후 1951년에 대건고등학교를 병설, 인가받게 되었다.
Ⅲ . 대전 대목구의 설정과 성장
〔독립 포교지 설정〕 1948년 6월 서울 대목구의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와 주한 교황 사절의 청원을 받아들여 충청남도 지역이 포교성성 장관에 의해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된 독립 포교지(missio indepens)로 인정되는 동시에 은퇴한 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거처하던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그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에서 이를 건의하고 또 포교성에서 이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1942년에 서울 대목구가, 1946년에 대구 대목구가 방인 교구로 변경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새 사목 지역을 필요로 한 때문이었으며, 장차 이 지역을 대목구로 승격시키기 위한 사전 조치가 필요한 때문이었다. 라리보 주교는 이때 일본인들의 신사(神社)가 있던 대흥동의 적산(敵産) 가옥을 매입, 주교관과 숙소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1948년 말 충청남도 지역의 교세는 이해 7월에 신설된 온양(현 온천동) 본당을 포함하여 13개 본당, 신자수 18,000여 명, 공소수 127개소, 공소 강당을 포함한 성당수가 36개소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복음의 뿌리가 깊었던 탓에 구교우들과 오래된 교우촌, 사적지 등이 많았다.
독립 포교지가 되면서 충청남도 지역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지만, 1950년의 6 · 25 동란으로 인해 아무런 결실을 맺지도 못한 채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해에 설립된 홍성 본당도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지 못한 채 사목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인 1950년 7월 말에서 8월부터는 충청도 서산 본당의 콜랭(J. Colin, 高) 신부를 비롯하여 외국인 신부 9명과 홍성본당의 강만수(姜晚秀, 요셉) 신부가 체포된 뒤 대전으로 옮겨져 이 중 7명이 9월 23~26일 사이에 피살되었다.
전후 다시 안정을 찾게 되면서 대전 독립 포교지에서는 하나 둘씩 새로운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우선 1953년 10월에는 당진 본당의 유인성(劉寅成, 프란치스코)신부가 주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베풀고자 '소화의원' (현 당진 성모 의원의 전신)을 설립하였고, 1955년 9월에는 규암 본당의 김영환(金英煥, 타대오) 신부가 성당 구내에 '성 요셉 의원' (부여 성 요셉 병원으로 성장하였으나 후에 폐쇄됨)을 개원한 뒤 1957년에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1956년 8월에는 라리보 주교가 교구청 옆의 일본 가옥에 '희망의원' (현 대전 성모병원의 전신)을 개원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2년 6월 예산군 덕산면에 전쟁 고아들을 위한 덕산 신생원' 이 설립되었는데,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가 이를 1962년에 인수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57년 12월에는 논산 본당의 평신도들이 생제(Singer, 成載德) 신부의 후원을 얻어 음성 나환자들을 위한 '양생원' (현 성광원의 전신)을 광석면에 설립하였다.
이와 함께 라리보 주교는 지방의 교육 사업을 위해 1958년 2월에 '대철중학교' 를 인가받아 서산군 운산면에서 개교토록 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사업이 전개되는 가운데 교세 확대와 본당 신설을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 1955년에 조치원 본당과 부여의 규암 본당이 신설되었다. 그 결과 1957년 말에는 16개 본당에 충청남도의 총 신자수가 35,410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앞서 라리보주교는 1956년 4월 28일, 그 동안의 업적을 인정받아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로마 교황 탑전시종(榻前侍從)의 영예직을 수여받았으며, 1957년 3월 10일에 사제 서품 금경축을 맞이하였다. 또 1957년 3월에는 논산 부창동 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한 뒤 이 운동이 전 포교지로 확대되어 나갔고, 각 본당에서 평신도 사도직 단체의 결성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대전 대목구의 설립과 정착〕 이처럼 포교지의 모든 활동이 활발해지고, 아울러 교세가 확대되면서 노기남주교는 포교지를 대목구로 승격시켜 주도록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1958년 6월 23일에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마침내 충청남도 지역이 '대전 대목구' 로 승격되었으며, 동시에 충청북도 지역도 '청주 대목구' 로 설정되어 메리놀회에 위임되었다. 이에 따라 라리보 주교는 이듬해 1월 11일 대흥동 주교좌 성당에서 착좌식을 갖게 되었다. 대목구 설정 이후인 1961년에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서 천안에 복자여자중학교를 설립 · 개교하였으며, 이어 1963년에 복자여자고등학교를 병설 · 개교하였다. 또 1961년 12월에는 논산 본당의 생제 신부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협조를 얻어 논산 혜성여자중고등학교를 인가받고, 이듬해 이를 개교하면서 쌘뽈여자중고등학교로 개칭하였다. 이 학교들은 대건중고등학교, 대철중학교 등과 함께 1964년 4월 25일 학교 법인 천주교 대전교구 '대지 학원' 으로 편입되었다. 이무렵에 신설된 본당들로는 홍산 연무 · 성환 · 신합덕 · 대천 본당 등이 있으며, 1964년 11월에는 부산에 있던 '거룩한 말씀의 시녀회' (현 '거룩한 말씀의 회' 의 전신)가 대전으로 본원을 이전하였다.
1962년은 한국 교회 모두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된 해였다. 전후 오랫동안의 노력으로 교세가 크게 발전하면서 이해 3월 24일자로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한국에 정식으로 교계 제도(敎階制度)가 설정된 것이다. 이에 따라 종전의 대전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었고, 라리보 주교는 1962년 7월 24일 새로 완공된 대흥동 주교좌 성당에서 새로 착좌식을 갖고 정식 대전 주교로 착좌하였다. 대흥동 새 성당은 이듬해 5월 1일, 라리보 주교에 의해 축성되었다. 그러나 라리보 주교는 고령으로 인해 성무 집행에 어려움이 있자 1964년 3월 4일에 교구장을 사임하고 9월 23일 프랑스로 돌아감에 따라, 보드뱅(Beaudevin, 丁道平) 신부가 임시 교구 관리자로 임
명되어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대전교구의 성장〕 라리보 주교가 대전을 떠난 뒤인 1965년 1월 22에는 대전교구 천주교 유지 재단' 이 인가되었다. 그러던 중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 3월 22일의 친서를 통해 4월 3일자로 성신대학장을 지낸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신부를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황 신부는 1965년 5월 31일 주교 성성식 및 교구장 착좌식을 갖고 성무를 시작하였으며, 이로써 대전교구는 한국 교회의 일곱 번째 방인 교구(邦人敎區)가 되었다. 이때 황 주교가 내세운 교구장 문장의 표어는 "당신 이름의 거룩하심이 나타나소서"였다.
이해는 1962년에 개최되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면서 제도 교회가 아닌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강조되고, 아울러 전례나 제도적 측면에서 여러 가지 쇄신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대전교구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우선 1965년 1월 1일부터 우리말 미사 경본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교회 일치 운동이 전개되어 나갔으며, 1966년부터는 평신도 사도직 활동이 강화되면서 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발족을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6년 9월 22일 황민성 주교는 교구 평의회를 재조직하였으며, 1968년 1월 9일 효율적인 사목을 위해 교구 전 지역을 6개의 사목구로 분할하였다. 1966년 10월 2일에는 교구 교리 경시 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되었고, 1969년 11월 30일부터는 새 미사 통상문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1970년 8월 남성 제1차 꾸르실료 수강이 완료되면서 울뜨레아가 도입되었고, 1979년 3월에는 교구 성령 쇄신 봉사회가 발족되었다. 이와 함께 교구에서는 1970년 5월 15일, 성남동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지부 건물을 인수받아 사용해 오다가 1977년 5월 11일에 이를 가톨릭 교육 회관으로 개조하였으며, 1969년 8월에는 대흥동에 가톨릭 문화 회관을 착공하여 1971년 10월 28일에 축성식을 갖고 개관하였다. 그리고 대전 시내 6개 본당을 중심으로 1972년 1월에 <대전 주보>를 창간했다.
1965년에는 동정 성모회가 대전에 진출하여 성모국민학교와 성모여자중학교의 설립을 인가받은 뒤 대전교구청과 인접한 대흥동 520번지에 교사(校舍)를 건축하고 1966년 3월 12일에 성모국민학교를, 3월 14일에 성모여자중학교를 개교하였다. 이로부터 3년 뒤 중학교 졸업생들이 나오게 되자 학교 법인 동정 성모 학원에서는 1969년 3월 5일 성모여자고등학교를 개교하였으나, 여자중학교는 1978년 2월 18일, 고교 평준화 시책에 따른 고등학교 학급수의 조정으로 인해 10회 졸업생(총 1,521명)을 마지막으로 폐교되었다. 한편 대전 성모 의원은 1969년 11월 6일에 '대전 성모병원' 으로 개칭하여 개설 인가를 받은 뒤 현대화 작업에 노력하여 1975년에 1차 증축을 마치고 축성식 및 개원식을 가졌다. 또 이해 9월 6일에는 당진 성모병원이 신축 개원하였고, 이듬해 10월에는 부여의 성 요셉 병원이 부여읍의 현 위치로 병원을 신축 이전하였다. 그리고 1976년 9월 30일에 새교구청사(대흥동 520번지)가 완공 · 축성되었다.\
황민성 주교는 1973년에 '화해의 성년' 을 맞이하여 대흥동 성당과 신합덕 성당을 전대사 순례 성당으로 지정하였고, 1974년에는 시국 사건과 관련하여 인권 회복기도회를 전 교구적으로 개최하였는데, 이것은 대전교구의 전 신자들이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구 단위 및 전국 행사로 1978년에 교구 성체 대회가 성모여고에서 열려 교구 신자 1만 5천여 명이 참가하였고, 1979년에 전국 울뜨레아가 충무 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1975년 9월 갈매못 순교 사적지에 순교비가 건립되었고, 1975년 10월 24일에는 해미 순교 사적지에 순교 현양탑이 건립되었으며, 1983년 12월 해미 생매장지가 확보되었다. 1982년에는 청양 본당에서 다락골 줄무덤에 무명 순교자비를 건립한 뒤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이와 함께 교구 신앙 대회가 1981년 10월 1일, 솔뫼에서 열렸는데, 이때 피정의 집 기공식도 있었다. '솔뫼 피정의 집' 은 신자들의 성금과 교구 보조로 1983년에 완공되었다. 또 1983년 5월 5일에는 제4차 전국 민족 복음화 대회가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되었고, 9월에는 가톨릭 교육 회관이 증축 개관되었다.
황민성 주교 재임시에 가장 활발하였던 것은 전교 활동이었다. 황 주교는 성성식 직후부터 의욕적으로 교세 확장과 본당 증설에 치중하여 1965년 6월 유성 본당을 설립한 이래 약 19년 간 27개 본당을 증설하였다. 그 결과 1965년 말 25개 본당, 244개 공소에 신자수 5만 2천여 명이던 교세가 1983년 말에는 53개 본당, 270개 공소에 신자수 8만 8천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 평신도 활동도 점차 활성화되어 갔다. 이처럼 일생을 대전교구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던 황 주교는 1984년 2월 13일 대전 성모병원에서 선종하여 모든 신자들의 애도 속에 산내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IV . 체제 정비와 교구의 발전
〔교구 체제의 정비와 변모〕 1984년 2월 15일 교구장 대리에 김영환(타대오) 신부가 임명되었다. 이때 교황청에서는 같은 해 7월 12일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요 총대리로 재임 중인 경갑룡(景甲龍, 요셉) 주교를 제3대 대전교구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경 주교는 1984년 8월 29일, 대흥동 주교좌 성당에서 착좌식을 갖고 '회개를 통한 본래의 사명감 회복' 과 '희망찬 교회 건설' 을 모토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 교구 체제를 정비하여 1984년 9월에는 교구청의 직제를 현재와 같은 조직 체제로 개편함과 동시에 부교구장제를 사무처장제로 변경하고, 기존의 사목국 · 관리국 외에 교육국 · 홍보국을 신설하여 1처 4국으로 운영하였다. 다음으로 1985년 초에는 사목 협의회, 전례위원회, 성지보존위원회, 건축위원회 등 교구장 아래에 특수 위원회를 둠과 동시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여러 위원회로 분리하고, 1986년 4월 14일에는 교구 '선교 사목 연구위원회' 를 발족시켰다. 이 중에서 교구의 특수 위원회는 사제들의 재능에 따라 교회에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각 위원회로 나눈 이유도 평신도들이 전문적이며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경갑룡 주교는 교구 재정의 완전 자립, 신심 함양과 전교의 활성화, 사적지 개발 등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고 지역 사회의 복음화를 위해 새 본당들을 신설했고, 소외되어 있는 농촌 사목을 위해 공소 지도자 학교도 개설하였다. 1985년 12월 19일에는 대전 성모병원이 2차 증축 공사에 들어가 축성식을 거쳐 지하 1층, 지상 9층의 현대식 장비를 갖추고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1986년 3월에는 가톨릭 교육 회관이 신관 4층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1985년에 태평동 본당을 비롯하여 5개 본당이, 1986년에 대화동 본당을 비롯하여 5개 본당이 신설되었고, 교구의 총 신자수도 1985년에 93,300여 명이던 것이 1987년에는 105,900여 명으로 마침내 10만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적지 개발과 순교자 현양 운동이 계속되면서 1985년 4월, 해미 본당의 설립을 계기로 성지 가꾸기 운동이 전개됨과 동시에 6월 15일에는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 가 발족을 보았다. 1986년 5월 16일에는 솔뫼에서 약 7,000명의 레지오 단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꼬미시움 설립 2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고, 10월 1일에는 병인 순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해미에서 2만여 명의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교구 신앙 대회가 개최되었다. 1987년 11월 1일에는 신례원 본당에서 이존창 생가 유적지 축성 및 비석 제막식을 가졌으며, 이듬해 9월 20일에는 공세리 본당에서 맹고개 순교자의 유해를 발굴하여 성당 구내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경갑룡 주교가 이 무렵부터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무엇보다도 성소 계발과 육성 사업이었다. 이에 따라 각 본당에는 성소 후원회가 구성되었고, 성소의 현저한 증가와 후원 성금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되었으며, 특히 1986년 교구 10개년 계획안의 일환으로 교구 신학교건립 계획이 수립되면서 전 신자들이 여기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교구 차원의 나눔 운동으로 1987년에는 수재민을 위한 구호 활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으며, 1988년 10월 17일에는 '한국 성체 대회'가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되어 교구의 발전을 한국교회 전체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 이해에 맞이한 교구 설립 30주년을 기념하여 1988년 12월에 《대전교구 30년》이 출간되었고, 교구사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과 자료집 발간이 함께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교구 30주년을 맞이한 1988년 6월, 대전교구는 8개 지구에 68개 본당, 259개 공소, 사제 114명, 신자수 11만여 명이라는 교세 현황을 기록하였다.
〔교구의 발전과 현재〕 교구 설립 30주년 이듬해인 1989년부터 대전교구에서는 새 교구청사의 마련, 사회와 함께하는 교회상 확립, 가톨릭 대학교 설립 등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우선 1989년 10월 4일에 개최된 '서울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 에 전 신자들이 동참하면서 본당별 성체 대회와 한마음 한 몸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그 해 12월 16일에는 용전동에 마련된 부지에서 새 교구청사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중 청사 건립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991년 7월 8일에는 대흥동 구청사에서 신청사로 이전이 이루어졌고, 8월 5일에는 경 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1991년 11월 28일에는 농촌 돕기 차원에서 이루어진 '우리 밀 살리기 운동 본부' 가 발족된 것을 계기로 이 운동이 전 교구 차원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1994년 8월 29일에는 대전교구의 '우리 농산물 유통 센터' 가 대덕구 오정동에서 기공식을 갖고 12월 7일에는 그 축성식 및 개장식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대전교구의 교세는 1994년 말 현재 77개 본당, 공소 179개소, 성직자 160명, 총 신자수 154,452명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93년 3월 2일,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온 숙원 사업인 '대전 가톨릭대학교 가 정식 인가를 받고 연기군 전의면에서 개교하였으며, 1995년 10월 3일 교구 신앙 대회를 겸하여 증축 완공된 가톨릭 대학교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9월 20일에는 서산 상홍리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유해 일부가 본래 순교지였던 해미로 이장되었다. 또 1994년 12월 10일에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대전 성모병원이 설립 25주년을 계기로 3차 증축을 완공하고 축성식을 가졌으며, 교구에서는 1995년의 가톨릭 대학교 봉헌식을 계기로 2000년대의 복음화를 위해 신자 배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8년에 맞이하는 교구 설립 40주년을 기해 교구사 편찬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신앙의 못자리가 되어 온 교구 지역의 교회사 자료관 겸 박물관 설립도 계획하고 있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가톨릭 사전》 천주교 대전교구 편, 《대전교구 30년》, 대전교구 홍보국, 1988/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구합덕 본당 100년사 자료집》, 천주교 구합덕 교회, 1990/ 한국교회사 연구소 · 대전교구 홍보국 역편,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 천주교 대전교구, 1990/ 一, 《대전교구 교세 통계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0/ 一, 《순교자들의 전기》, 천주교 대전교구, 1991/ 車基眞, <충청도 교회와 본당 廢置에 대한 연구>, 《韓國 가톨릭 文化 活動과教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대전 성모병원 25년사 편 찬위원회, 《대전 성모병원 25년사》, 대전 성모병원, 1994/ 한국교회사연구소 · 대전교구 홍보국 역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5. 〔車基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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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본당의 분리 계통도(1890~1945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