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철학에서의 대화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간에 말을 주고받는 것. 대화는 말을 걸어 오는 것과 그에 대한 대꾸에 의해 물음과 응답, 주장과 논쟁, 증명과 반박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물음과 응답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고, 주장과 논쟁은 판단을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증명과 반박은 추론 방식을 열어 놓기 위한 것이다.
〔역사적 고찰〕 대화는 서양의 고대와 중세에서 주로 문학적인 유(類)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철학에서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처음으로 대화의 형식이 언급되었다. 플라톤에게서 대화는 자기 자신과 영혼이 말하는 것이며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변증법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대화의 철학은 사람들의 견해를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정치적 협상이나 타협을 서로 전달하거나 상대방에게 자기의 의견을 설득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화하려는 의욕으로 인하여 표명된 확실한 방향 상실의 원인에 대해서 반성을 시도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방향 상실의 회복 가능성에 대해서 반성을 시도하는 것이다. 현대 철학에서는 대화를 담화(談話), 화용(話用) 또는 논의라고도 표현한다.
대화 철학은 플라톤 이래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치체로(Cicero)와 세네카(Seneca)에 이르러 교부 철학과 연결된다. 교부 철학자들의 대화의 내용은 성서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토론이었고, 그들의 논의는 성서의 적절한 인용이었다. 예컨대 펠릭스(Minucius Felix), 아우구스티노,대 그레고리오, 생 빅토르의 후고(Hugo von St. Viktor), 아벨라르(P. Abélard) 등이 그러하다. 중세의 지배적인 대화형태는 일종의 변론 내지 논쟁시(論爭詩)였다. 예를 들어 페트라르카(Petarca), 갈릴레이(G. Galilei),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 등이 그러하다. 유럽의 계몽 시대에서 대화는 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정신적 토론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예컨대, 말브랑쉬(N. Malebranche), 디드로(D. Diderot) 버클리(G. Berkeley), , 흄(D. Hume), 갈리아니(F. Galiani) 멘델스존(M. Mendelssohn), 렛싱(G.E.Lessing) 등이 그러하다. 근세에서도 대화의 전통은 문학사와 정신사의 일반적 발전과 병행한다. 질풍노도의 사상 교환과 병존하면서 고전주의의 신중한 대화의 자세가 피히테(J.G. Fichte)에 의해 표명되기도 하지만, 낭만주의 시대의 대화는 지나친 열광적인 자세로 말미암아 그 신중함을 잃고 말았다. 예컨대, 슐레겔(F. Schlegel, 셀링(F.W.J. Schelling), 졸거(K.W.F. Solger) 등이 그러하다. 19세기에 대화 문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와 독일에서 산문의 옷을 입고 대화는 다시 부활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지드(A. Gide), 발레리(P. Valéry), 클로델(P. Claudel) 등은 프랑스에서, 보르샤르트(R. Borchardt), 에른스트(P. Ernst), 호프만스탈(H. v. Hofmannstahl), 카쓰너(R. Kassner) 등은 독일에서 그러하였다.
문학적인 형태로부터 벗어나 철학적인 내용의 의미를 담은 본격적인 대화 철학은 하만(J.G. Hamann)과 야코비(F.H. Jacobi)에 의해 발의되었고, 코헨(H. Cohen), 에브너(F. Ebner), 로젠츠바이크(F. Rosenzweig), 부버(M. Buber), 마르셀(G. Marcel) 등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에 의하면, 대화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성질이며, 타자 즉 너를 인격으로 대우하며 결코 도구화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짓을 하지 않는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논리학과 학문론에서 대화는 논증 이론의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언어 행위론(즉 화용론)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하버마스(J. Habermas)는 대화를 논의(Diskus)로 사용하면서 의사소통론을 전개시켜 합의론을 도출해 냈다. 언표를 논리적 관계로만 보고 논증 이론에만 국한시키면 대화의 개념은 형식 논리학만을 허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 논리학에서 대화란 논증 규칙에 따르는 대화 유희의 일부분이 될 뿐이다.
〔의 미〕 상호 소통의 진리로서의 대화 : 진리가 독백적인 사고로 전락되지 않으려면 대화를 통한 의사 소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야스퍼스(K. Jaspers)는 "진리는 진리에 의한 상호 소통으로 마침내 실현되며 상호 소통 자체에서 발생하며 상호 소통에 대하여 가시적으로 된다. 그러므로 진리는 상호 소통하기 이전에 확정되어 여기에 이미 존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진리는 상호 소통 없이는 전달되지도 않고 그 자체로 보편 타당한 목표가 될 수도 없다. 오히려 진리 자체는 상호 소통을 통한 인간의 상호 공동 존재 속에 있으며, 그러한 상호 소통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나아가서 "참된 철학은 오직 공동체에서만 현존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자의 상호 소통의 상실은 비진리의 사고의 척도가 된다"라고도 말하였다. 대화 속에서 생기는 진리는 어떤 한편에만 편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떤 '결과' 로서 확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드러내 주는 대화 자체 속에서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이러한 대화의 가장 완벽한 예가 될 것이다. 대화의 진리는 오로지 서로가 말하고 있는 과정 속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기에 결과로서는 해결될 수 없으며 그 이상 분명하게 전달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대화의 한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대화의 전제 조건 : 진리는 인간 상호간의 대화에서 비로소 발생할 수 있다면, 그러한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먼저, 인간 상호간의 의사 소통 수단인 언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진정한 대화를 방해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 표현의 형식들이 단순하고 그러한 형식들은 인간 생활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때그때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란 그 자체가 역사적이며 해석적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파악하기 위하여 시도하는 모든 대화는 잡담과는 다른 것이어야 하며, 인간에게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긴장을 요구하고 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대화를 '사랑하는 싸움' 이라고 표현하였다. 서로가 진리를 얻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서로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들의 사상을 첨예한 시험장으로 끌어넣는다. 타자가 언제나 찬성만 하거나 반대만 하는 곳에서는 어떠한 진지한 대화도 성립될 수 없다. 반문이나 모순의 지적이 토론을 위한 토론이 되어서는 안됨은 물론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러한 싸움이다. 그러한 싸움에서는 상대자의 파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서로 승인하는 가운데 원칙적인 동등권의 의식에서 공동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싸움은 서로 대립하는 두 실존간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공동적인 싸움이며 진리에 대한 싸움일 따름이다. 진정한 대화가 성공하기 위해서 대화자는 첫째로 '말할 수 있는 능력' 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며, 둘째로 '들을 수 있는 능력' 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① 말할 수 있는 능력 :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려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한 인간이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끼거나 생각한 것을 일종의 고백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표현한다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말이란 때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과 표현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애써 이끌어 내어져야 한다.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상대방에게 굴복하게 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그 내용을 상대방이 어떻게 정확히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말은 일종의 고백이자 자기 토로이다. 이러한 말은 빈 공간 속으로 퍼져 나간다. 그러다가 그 말이 수용되는 곳에서, 즉 응답이 있는 곳에서 비로소 그 말은 안전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응답이 있는 경우에도 그 응답이 기만일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어떤 대화를 받아들이고자 시도한다면 나는 먼저 인간적인 관계를 찾게 될 것이고, 인간적인 관계가 거부되면 대화는 성립될 수 없게 되어 속수무책으로 있게 될 것이다. 또 나의 말이 미숙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러면 나의 말은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대답에서 내가 시험삼아 표현한 말이 어느 정도 옳은가가 결정될 수도 있다.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는 이를 두고 두 사람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진리를 생산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특히 정치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침묵하지 않고 말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는 "용기란 존재하는 그대로 스스로를 내보이는 것을 말하며 하찮은 멸시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며, 또 "용기는 아주 진실하고 올바르며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일컫는다" 고 하였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불안에서나 부끄러움이나 어떤 방해로부터 발생하는 자연적인 안전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안전을 포기하지 않고는 어떠한 진지한 대화도 불가능하며 어떠한 진리도 획득할 수가 없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친구들간에 신뢰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쉽다. 그러나 미리부터 부정적이고 대립적인 견해가 예상되는 곳에서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공동 생활을 위협하는 분쟁 문제를 이성적으로 조정하려고 한다면 대화는 필수적이며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② 들을 수 있는 능력 : 대화의 두 번째 전제인 '들을 수 있는 능력' 은 '말할 수 있는 능력' 과 실제로 연관되어 있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이란 내가 다른 사람의 말을 그의 뜻에 따라 이해한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의 말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말이 내 자신의 생각과는 모순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 말을 간단히 일축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인 자세로 청취하고 자기 자신의 연구 방법을 바꿀 수도 있다는 자세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대화에 참여할 때 어디서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자기가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확신하고 있었던 것과 아주 상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이 옳고 자기 생각은 오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론 사람들을 무척이나 난처하게 하며 지금까지 유지해온 자신의 확실성을 뒤흔들어 버린다. 이러한 확실성을 상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분명한 어떤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대화의 상대자에 대해 무조건 들을 수 있는 준비 상태에서 스스로를 개방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위험성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개방적인 준비 상태에서 전제조건 없이 혼신을 다하는 진지한 대화만이 우리가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진리의 필수 불가결한 전제이다. 진리란 결코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언제나 개방되어 있으며, 이성적인 대화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비교적(秘敎的)인 진리란 존재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대화 상대자의 원칙적인 동등 권리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이나 지식 그리고 사회적 질서의 실재적 신분 구별이 있는 곳에서 권위를 포기하기를 요구하고 원칙적인 동등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과 아이의 대화 속에서도 신분 구별이 사실상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 설사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진정한 대화가 이성적으로 진행되는 대화라고 말할 때, '이성적' 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이성 역시 한 사람이 강요할 수 있는 권위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일종의 태도 방식이며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양식이다. 볼노브(O.F. Bollnow)는 "대화에서 요구되는 이성은 하나의 형식적인 능력이고··· 자신의 권위에 의하여 절대적인 장소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새로운 것에서 논의되도록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성의 진리는 현실적으로 타당하기 위해서 대화 속에서 확증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대화는 부정적으로 보면, '특정한 입장을 절대화하는 것' 을 포기하는 일이며, "진지하게 듣고 단순히 인정하고 넘어간다는 차원을 포기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무조건 요청한다는 것은 대화를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대화를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을 그 자신의 자유에서 인정할 것을 무조건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큄멜(F. Kümmel)에 의하면, 열려 있는 대화에 대한 준비는 인간에게서 제기되는 최고의 윤리적인 요청이다. 그래서 그는 "만일 우리가 이미 최고의 도덕 원리를 설정하려고 한다면, 대화의 준비성과 대화의 태도가 바로 그 자체로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대화의 본질에 내포되어 있는 그러한 요청은 때로는 무리한 요청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열려 있는 대화는 상대방을 어느 정도까지는 덤으로 따르게 할 수도 있고 거부까지도 할 수 있는 신뢰를 주고 있기 때문에 모든 열려 있는 대화는 하나의 모험이다. 모든 권위적인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상대방이 원칙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로서 만날 수 있는 내적 자유는 공용할 수 있는 진리를 획득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전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신뢰하는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는 저절로 주어질 수 있지만 철학적 대화를 넘어선 절대적인 종교적 가르침에서는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계와 과제〕 개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피하기 어려운 이해 관계의 대립으로 충돌이 발생할 때, 이러한 충돌을 폭력에 의하지 않고 끝내려고 한다면 이성적으로 상호간의 대화를 통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여기서 '이성적' 이라고 말하는 것은 선동적인 정열을 버릴 수 있고 맹목적인 정열에 사로잡히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대화는 협상이나 타협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의 협상이란, 예컨대 평화 협상, 임금 협상, 법원에서의 변론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협상은 대화와는 달리 일종의 투쟁이다. 협상은 때로는 술수와 흥정을 필요로 한다. 타협은 순수한 사려를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진리이거나 책임 있게 최종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진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으로부터 주어지고 힘의 상관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협은 언제나 잠정적일 뿐이며, 힘의 역학 관계가 바뀌면 다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대화는 윤리적이지만, 협상이나 타협은 비윤리적일 수 있다.
현대의 의사 소통 이론이나 합의 이론은 진정한 대화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론들은 극단적인 갈등이나 분쟁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는 있겠으나 언제나 개운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부버에 의하면, 진정한 대화는 상대자를 인격으로, 나와 똑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확신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대화는 '너' 를 진정으로 들으려고 하는 '나' 와 '너' 의 인격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대화를 하는자는 상호성을 철저히 신뢰하며 받아들이는 자이다. 그러나 '나' 와 '너' 의 올바른 관계를 이룩한다는 것은 신적(神的)인 믿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대화의 윤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섭리를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철학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현대의 다원 사회에서 대화의 철학은 참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적으로 구현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남아 있다. 특히 유물론자나 무신론자들,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인격적인 대화를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대화 철학의 과제이자 한계이다.
※ 참고문헌 O.F. Bollnow, Das Doppelgesicht der Wahrheit, Stuttgart, 1975/ F. Kiimmel, Die Einsicht in das Gute als Aufgabe einer sittlichen Erziehung, Essen, 1968/ B. Casper, Das dialogische Denken. Eine Untersuchung der religionsphilosophischen Bedeutung Franz Rosenzweigs, Ferdinand Ebners und Martin Bubers, Freiburg-Basel-Wien, 1967/ K.Gaiser, Protreptik und Parcinese bei Platon. Untersuchungen zur Fom des platonischen D.s, Stuttgart, 1959/ P. Lorenzen K. Lorenz, Dialogische Logik, Darmstadt, 1978/ H. Schnädelbach, Reflexion und Diskurs. Fragen einer Logik der Philosophie, Frankfurt, 19771 H.H. Schrey, Dialogisches Denken, Darmstadt, 1970/ R. Wildbolz, Der philosophische D. als literarisches Kunstwerk. Untersuchungen iiber Solgers 'Philosophische Gespräche' ", Bern · Stuttgart, 1952/ H. Rahner, 《LThK》 3, pp. 339~340.
〔秦敎勳〕
II . 종교간의 대화
〔종교의 본질인 대화〕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의 진리와 각 종교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이 본질이다. 대화가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은 '종교' 가 처음부터 관계적 개념이라는 데서 알 수 있으며, 이는 또한 종교에서 신앙되는 신(神)이 관계적(대화적) 존재라는 데 근거한다. 신이 세상과 무관한 존재일 수 없고 종교가 신을 추구하고 신앙하는 한, 종교는 처음부터 '관계' 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는 신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대화를 모르는 배타적 종교란 그 자체로 모순이 된다. 종교는 대화적이어서 참 종교이든지,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거짓종교(사이비 종교) 또는 비종교이든지 둘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기에 다른 종교와의 만남은 그 자체로 스스로의 종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본질적인 것이 되며, 이런 면에서 대화는 상호 교류를 위한 수단을 넘어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된다. 종교가 대화를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것은 세계 종교의 형성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볼 때도 입증이 된다. 모든 세계 종교는 홀로 존재해 본 적이 없다. 어떤 종교이든 발생과 함께 그곳 문화 및 다른 종교와 관계를 맺고 있고, 그런 가운데 자기 자신일 수 있고 또 자기 자신의 종교성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구약에서 유대교가 주변 문화국의 여러 종교와의 만남에서 자기 종교를 만났고, 인도에서는 힌두교가, 근동에서는 이슬람교가, 그리고 한국에서는 유 · 불 · 선(儒佛仙)이 그러하였다. 이런 종교들은 어떤 지역의 문화와 풍습을 수용하고 인정하고 대화하는 가운데에서 그곳에 토착화될 수 있었고 또 종교일 수 있었다. 다양한 문화 가운데 각 종교가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자기 문화권 안에 존재하는 세계관적 구상과 사고의 다양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된다. 다른 종교와 문화, 다른 언어와 풍습은 점점 더 자신의 삶의 세계를
밝혀 주는 내용이 되며 우리 삶의 자리(텍스트)에서 함께 생각해야 하는 맥락(콘텍스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 · 힌두교 같은 아시아의 종교가 타종교(다른 문화)와의 만남에 비교적 순응적이고 평화로웠던데 비하여, 유대교 · 이슬람교 · 그리스도교와 같이 근동에서 발생하여 서구의 영향권에서 성장한 유일신을 신앙하는 종교들은 대체적으로 배타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전까지만 해도 타종교와의 대화가 거의 성립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 신학적 반성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또 설사 타종교가 알려져 있다 해도 그리스도교의 배타성 때문에 학문의 대상은 되었지만 대화의 상대자로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종교간의 대화는 각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요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내놓은 문헌들 가운데 종교간의 대화를 장려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사목 헌장>, <교의 헌장>,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등이 있다. 특히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은 비그리스도교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종교들 안에 있는 '옳고 성스러운 것' 을 존중하도록 촉구하고(2항) 상호 이해하는 마음을 닦고(3항), 타종교 신봉자들에게도 형제적 사랑을 갖도록(5항) 촉구한다. 또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에서는 종교가 갖고 있는 자유는 사상의 교류와 대화의 도움으로 촉구될 수 있다고 하면서, 대화에서 대화 상대자들은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서로의 발견을 상대에게 설명해 줄 것(3항)을 요구한다. 공의회가 이처럼 종교간의 대화가 필요함을 인정한 것은 모든 종교는 공통된 질문과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인간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인생의 숨은 수수께끼들의 해답을 여러 가지 종교에서 찾고 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의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이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가? 진실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죽은 후의 심판과 판결은 어떨 것인가? 마침내 우리 자신의 기원이자 종착역이며 우리의 실존을 에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마지막 신비는 과연 무엇인가"(1항).
〔종교간 대화의 자세〕 각 종교는 다른 종교와 만나면서 종교가 자기의 자아 이해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는 다만 부분적으로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각 종교가 그만큼 자기를 '대화' 의 실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실천하고 있지도 못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종교 신봉자들이 서로 대화하기 위해서는 각 종교가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과 타종교가 자기 종교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을 구분해야 한다. 즉 자기 해석과 타자 해석이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타자 해석을 위해서 자기 해석을 충분히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대화 상대자가 그들의 신앙 안에 확고히 머물러 있을 때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진지하게 대할수 있음을 의미하며, 대화란 자기 신앙을 상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상대방의 신앙을 자기 종교쪽으로 이르는 중간 과정이나 또는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종교간의 대화가 타종교를 자기 종교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된다면, 그 대화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아무런 가치 없는 토론 정도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간 대화의 관심은 더 나은 상호 이해와 상호 인정을 전제해야 하며, 상대의 마음속에 들어가 처음부터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상대의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종교를 어떤 일정한 교리적 틀에 고정시키는데서부터 그리고 배타주의적 호교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교리나 확신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다른 전통에 살고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인정하며 상대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개방함을 의미한다. 상대의 신앙과 그들의 확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들을 진지하게 대해야 하며 그들과 같이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타종교의 대화 상대자를 그들의 신앙 고백이나 외적 형태로부터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원천, 그들의 영혼으로부터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간의 대화에서 해석학적 문제는 근원적이다. 대화 상대자를 그렇게 내면적으로 만나 이해한다는 것은 그에게로 '건너가는 것' , '도약하는 것' 이며, 그런 건너감과 도약에서 적어도 실험적으로 그리고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상대자의 위치에 서서 그들의 눈으로 세계와 종교적 표현과 자기 종교에 대한 경이로움을 들여다보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이해의 건너감은 한 종교에서 타종교로 건너감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즉 개종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전제해야 한다. 이렇게 상호 인정과 건너감의 지평에서 대화가 이루어질 때, 종교간 대화의 목적은 모든 대화 상대자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원천을 더 잘, 더 순수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그리스도인이 되고, 불교인들은 더욱더 불교인이, 이슬람교도는 더욱더 이슬람교도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언뜻 각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자기 종교를 상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대화가 종교의 본질이고 종교가 대화의 내용임을 인정한다면, 이 말은 모든 종교는 더욱더 종교적이어야 한다는 말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런 대화와 함께 종교는 진정 자기 자신(종교)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첫걸음을 내닫게 되는 것이다. 종교간의 대화가 종교의 상대화가 아니라 더욱더 자기 종교에로 이르게 하는 것이기에 종교간의 대화를 통하여 대화자는 자기 신앙 세계에 더욱더 충실히 머물러 자기 원천으로부터 스스로 정화되고, 변화되고, 폭 넓어지고, 해방되고 그리고 분명하게 되며, 모두는 자기의 원천에서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간의 대화는 평화와 일치를 추구한다. 종교간의 대화는 결코 각자의 교의적 설명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교의 내용은 전체적 삶의 형태로 경험되며 대화는 만남의 실천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한 종교가 타종교와 만난다면 전체적 삶의 방식과 태도가 서로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화하는 종교 신봉자들이 그들 종교 안에서 어떻게 살며 어떻게 죽는지도 보아야 한다. 종교 대화자들은 경쟁(concurrentia, 같이 달림) 가운데 만나며, 그런 가운데 신(神) 체험과 인간 문제를 교환할 수 있다.
〔아시아에서의 종교간의 대화〕 종교간의 대화는 한 민족 안에 여러 종교가 공존해 있는 아시아에서 활발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종교간의 대화가 그리스도교와 불교, 그리스도교와 유교 등의 단순히 다른 종교와의 만남만이 아니라 그 지방의 고유한 문화와 사상의 복잡한 관계까지도 주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종교는 종교간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들이 지닌 의미와 감정을 잃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자의식을 찾아야 한다. 이런 주장은 최근 아시아 그리스도교 일각에서 강하게 일고 있다. 유구한 역사적 경험 위에서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들 종교의 위치를 하느님의 계획에서 찾고자 한다. 즉 그들이 아시아 전통을 버리고 이른바 서구화된 그리스도교로 회개해야 한다면, 그래서 지금 그들이 처한 문화와 전통과 종교가 서구화된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언젠가는 버려야 하는 것이라
면,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주장하듯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은 왜 처음부터 그들 민족을 세례 주어 창조하지 않으시고 한낱 극복되어야 할 문화와 전통 속에서 창조하신 것인가라는 하느님에 대한 도전적 물음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그들 문화를 처음부터 인정한 것이라면, 그 문화는 그리스도교로 극복될 문화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복음화를 천지 창조 때부터 그들 문화 안에 작용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선교는 민족의 종교와 전통 속에 민족의 혼, 하느님이 심어 주신 영혼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전통과 종교를 서구화된 그리스도교로 전향시키도록 하는 것이 아니며, 아시아에서의 그리스도 발견이 꼭 유럽식으로 전개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1980년 방콕에서 열렸던 아시아 주교 회의는 다음과 같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한 몇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하였다. ①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하느님은 우리들 민족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하였으며, 이 민족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 가운데 작용하시는 성령에 답변하면서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왔다. 그들의 사회적 · 역사적 · 종교적 역사를 볼 때 그들은 이 신앙을 살았고 경험하였고 또 거행하였다. 우리는 이를 인정한다. ② 아시아 민족들은 이런 신앙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인간적이며 종교적인 민족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들의 이 상속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고집을 떠나 이 공동체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③ 우리는 마지막 목적지를 향한 공동의 순례에서 이 신앙의 공동체에 가담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절대자와 진리를 무한히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 경청하고 서로를 전달하는 데에서 가능해진다. 즉 공동의 가치를 살고 촉구하는 가운데에서, 종교적 가치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데에서, 사회 · 경제 · 정치 · 문화 · 종교적 공동 기획으로 공동 작업을 하는 가운데에서, 우리의 만남에서 도전하고 회개와 변화를 부르는 성령에 공동으로 답변하는 가운데에서, 그리고 이런 대화가 모든 백성과 종교들을 위한 그리스도교의 현주소라는 것을 느낌과 실천 면에서 확신하는 가운데에서 아시아 신앙의 공동체에 가담할 수 있게 된다. ④ 우리의 이중 소속-우리 문화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서로 평행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존재의 내면에 우리 영성과 신학, 우리의 기도 생활과 생활 양식 속에 생동감있게 결합되어 있다.
궁극적으로 아시아에는 신앙의 공동체만이 건설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는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 포기할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아시아 종교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보고 있다. 그들은 성령이 모든 창조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며, 창조를 보존하고 모든 인간을 위한 인간 실존의 조건과 모든 인간의 근본적 일치를 개혁할 공동책임을 종교가 가지고 있으며, 그러기에 사회 정의 · 인권 · 정치 · 경제 · 폭력의 문제 등 모든 것이 종교간 대화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신학적이고 영적인 물음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종교의 물음이며 또 종교의 내용이다.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us), 양적 팽창만을 기하려는 태도, 타종교에 대한 거만함과 무지, 대화를 빙자한 개종주의(proselytismus) 등은 대화에 방해되는 요소이다. 종교들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는 하느님 때문에 자기의 벽을 헐고, 모든 것, 모든종교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종교가 삶에 대한 대화와 삶을 위한 대화를 전제로 하기에, 대화는 무엇보다 자기 종교 안에서 먼저 일어나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종교간 대화와 선교는 근본적 인간 가치의 보증을 위한 공동 작업에 기여할 수 있다.
〔대화와 선교〕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배가됨에 따라 그리스도교 선교 임무와 관련된 질문이 던져진다. 그러면 선교는 어떻게 되는가? 대화는 선교의 방해 요소인가? 만일 대화가 퉁명스러운 토론이거나 끝내 자기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한 이론적 실랑이가 아니라 새롭고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길을 포함하는 과정으로 인정된다면 대화와 선교는 더욱 밀접한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왜냐하면 선교의 목적이 복음화이고 복음화의 근본 원리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대화와 봉사라는 점을 생각할 때 대화는 곧 선교의 내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와 대화는 서로 배제하는 관계에 있지 않다. 선교는 각 종교가 자기들의 고유한 구원을 제공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목적은 자기 종교의 선교 임무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그들 종교로부터도 이야기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종교의 절대성이 아니라 다른 세계 종교의 절대성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 임무의 실현은 대화라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결실을 볼 수 없다. "타종교와의 대화는 교회의 복음 선포 사명의 일부이다. 이 대화가 상호 인식과 상호 기여의 길이요 도구라고 생각한다면, 외방 선교에 배치되지 않을 뿐더러 선교와 특수한 관련이 있고 선교의 한 모습일 수 있다" (교회의 선교사명 55항).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가 선교를 대신한다거나, "인간은 어떤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될 수 있다"는 무원칙적인 종교 다원주의의 선교 무용론, 또는 선교의 강조로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교의 타종교와의 대화] 종교간의 참된 대화를 위해서는 유대교 · 이슬람교 · 그리스도교를 계시 종교로, 그리고 불교 등을 자연 종교 내지 비계시 종교로 보는 편협적인 견해부터 수정되어야 한다. 아시아의 여러 종교에서도 절대와 상대, 초월과 범주, 성과 속의 관계 등 계시의 내용이 종교의 주제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 이들 종교 안에 있는 진리를 인정하며 이들과의 대화를 적극 장려하였다. 그리스도교와 타종교의 대화 가능성에 대하여 살펴보면 첫째,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점이 다르지만(예를 들면, 유대교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점, 유일신론의 차이점 등),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많은 점에서 공동 유산을 가지고 있기에 공동 연구와 협력이 요구된다. 유대교와 관계없이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이슬람교의 근본 신앙 고백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예언자에 대한 고백이다(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이다). 무함마드에게 있어 알라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이다. 이슬람교는 예수를 예언자로 모신다. 그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부인하지만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을 믿는다. 동정 성모도공경하며 심판날을 기다린다(비그리스도교 3항).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가능성은 두 종교가 모두 신을 우주 천지의 창조자, 종말의 심판자, 모든 것을 규정하고 주재하는 분으로 믿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실재가 예수 안에서, 이슬람교 신자는 코란에서 충만하게 밝혀진다고 본다는 점과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이해 등에서 대화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셋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힌두교인에 대해서 "신의 비밀을 탐구하며··인생고에서의 해탈을 찾아 수덕 생활이나 깊은 관상이나 신비와 사랑으로 신에게 도피하고 있다" (동 2항)고 하였다. 힌두교의 윤회에 관한 믿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세계의 구원으로 보는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과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힌두교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리스도교 신비 신학의 발전 가능성을 볼 수 있다. 넷째, 불교는 그리스도교와 전혀 다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신이 무(無)와 공(空)으로 불리는 것부터가 생소하다. 그러나 상반된 종교일 수는 없다. 불교의 무 · 공(無空) 개념은 대상화될 수 없는 신의 신비를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격신을 신비의 차원에서 이해하게 해주는 근본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깨달음과 신앙의 관계도 대화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보게 해준다. 그 밖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른 종교들(동 2항)뿐만 아니라 무신론(사목 19~22항)과의 대화도 장려한다. (→ 교회 일치 운동 ; 교회와 타종교 ;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 참고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4/ <현대의 복음 선교>/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교회의 선교 사명>/ Bernhard Welte, Christentum und Religionen der Wellt, Christicher Glaube in moderner Gesellschaft 26, Freiburg · Basel · Wien, 1981, pp. 39~126/ Hans Waldenfels, Begegmung der Religionen, Bonn, 1990/ 一, Kontextuelle Furdamentaltheologie, Paderborn, 1985/ Theseson Interreligious Dialogue, 《FABCC Papers》, Hong Kong O.J., no. 48/ H. Dumoulin, Begegmmg mit dem Buddhismus, Freiburg · Basel · Wien, 1978/ R. Panikkar, The Intrareligious Dialogue, New York, 1978(김승철 역 , 《종교간의 대화》, 서광사, 1992)/ H.R. Schlette, Die Religionen als Themader Theologie. Überlegung zu einer Theologie der Religionen, Freiburg·Basel · Wien, 1963(정 은순 역, 《신학적 주체로서의 종교-종교 신학의정립을 위하여》, 분도출판사, 1984). 〔李濟民〕
대화
對話
〔라〕dialogus · 〔영〕dia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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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자기의 의견 주장은 대화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