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대화 2리 951-1 소재. 1931년 5월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녀 소화 데레사. 관할 구역은 대화면과 방림면. 〔교 세〕 1937년 437명, 1964년 900명, 1993년 367명. 〔역대신부〕 초대 윤예원(尹禮源) 토마스(1929~1953), 2대 백응복(白應福) 스테파노(1953~1954) , 3대 조응환(曹應煥) 타데오(1954~1964), , 4대 유영구(柳永求) 베드로(1993. 3~현재).
〔설립과 폐쇄〕 1866년 병인박해 때 수원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이 이곳 평창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 후 1890년대에 평창군의 서내, 향교리, 하일, 산너머, 대화, 고인돌(일명 괴돌이), 물푸레 등이 풍수원(豊水院) 본당의 관할 공소로 설립되었다. 뮈텔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으로 서임되기 전인 1882년에 이 지역을 순방한 바 있으며, 교구장이 된 후인 1900년 11월 14~23일 원주 용소막 본당을 거쳐 평창군의 공소들을 사목 방문하였다. 이들 공소들은 1912년에 원주 본당, 1921년에 강릉 본당, 1923년에 주문진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으며, 교세가 점차 신장되었다. 1929년 윤예원 신부가 평창군 대화면 대화리에 부임한 후 1931년 5월에 대화 공소는 분리 · 독립되어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나머지 공소들은 대화 본당의 관할이 되었다. 윤예원 신부는 처음 얼마간 대화 신리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상(上)대화리에 한옥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하였으나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1933년에 하(下)대화리에 있던 옛 공립 보통 학교 관사를 매입하여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날로 발전하던 대화 본당은 6 · 25 한국 전쟁으로 성당이 파괴되고 신자들은 흩어져 사목 활동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 1954년에 조응환 신부가 부임하여 복구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다시 신자수가 증가되었다. 1964년 12월 29일 조응환 신부는 당시 춘천교구장 대리 스튜어드(T. Stewart, 박 토마스) 신부의 승락으로 군청 소재지인 평창읍 중리 355-5번지의 세무서 자리 762평을 매입하였다. 이듬해 10월 머라이(B. Murray, 함)신부가 평창으로 부임하게 되어 자연히 대화에서 평창으로 성당을 옮기면서 대화 본당은 평창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69년 5월 1일에 평창군은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재설립〕 1973년 3월 27일 현 소재지의 부지 338평을 매입하였고, 블록 슬레이트 지붕에 건평 61평의 본건물과 부속 건물을 신축하였다. 오랫동안 평창 본당 관할 공소로 있었던 대화 공소는 마침내 1993년에 본당으로 재설립되었다. 원주교구는 지역 사회의 변화로 더 이상 본당으로서의 역할 수행이 어려운 강원도 영월의 상동 본당을 폐쇄하고 그 관할 구역을 황지 본당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 대신 새로 본당을 신설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에 따라 평창 본당에서 대화 공소가 독립 · 분리되어 본당으로 재설립된 것이다. 사제관이 없어 부득이 아파트를 전세내어 사용하고 있으나, 대화 본당 신자들은 본당 재설정을 간절히 원해 왔었으므로 우선 사제관과 교육관, 그리고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평신도 단체로서 2개의 레지오 마리애와 성우회, 성모회, 하상회 등이 있다.
(→ 원주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김창문 · 정재선 공저, 《한국 가톨릭 어제와 오늘》, 가톨릭 코리아사, 1963. 〔편찬실〕
대화 본당
大和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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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