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구 주교좌 본당. 대전시 중구 대흥1동 189 소재. 1919년 11월 대전시 목동(牧洞)에 설립된 대전(大田) 본당이 1945년에 현 소재지로 이전하면서 대흥동 본당으로 개칭되었으며, 주보는 노동자 성 요셉. 1948년 5월 8일, 충청남도 지역이 독립 포교지로 설정됨과 동시에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대흥동에 거처를 정하면서 충청남도 포교의 중심 본당이 되었다가 1958년 6월 23일 '대전 대목구' 가 설정됨과 동시에 주교좌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관할 구역은 대흥1~3동, 원동, 은행동, 중동. 〔교 세〕 1920년 1,512명, 1921년 829명, 1949년 1,308명, 1954년 2,645명, 1965년 6,560명, 1975년 4,316명, 1980년 2,530명, 1985년 2,520명, 1990년 3,080명, 1992년 5,141명, 1994년 5,297명. 〔역대 신부〕 초대 이종순(李鍾順) 요셉(1919. 11~1923. 5), 2대루블레(H.P. Rouvelet, 黃惠中) 헨리코(1923. 5~1927. 10), 3대 폴리(D. Polly, 沈應榮) 데시데리오(1927~1930) , 4대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1930~1932), 5대 콜라르(R. Collard, 갈성렬) 라파엘(1932~1934) 6대 멜리장(P. Mélizan, 梅履霜) 베드로(1934~1939), 7대 코르미에(P.Comier, 高) 베드로(1939~1941), , 8대 김유룡(金裕龍) 필립보(1941~1944), 9대 오기선(吳基先) 요셉(1944. 12~1965. 6), 10대 이인하(李寅夏) 베네딕도(1965. 6~1970), 11대 김영환(金英煥) 타대오(1970~1975. 9), 12대 유인성(劉寅成) 프란치스코(1975. 9~1977. 10), 13대 손만재(孫萬宰) 요한(1977. 10~1982. 9), 14대 올리비에(J. Ollivier, 오일복) 요한(1982. 9~1983. 5), 임시 유흥식(俞興植) 라자로(1983. 5~1984. 3), 15대 조성옥(趙成玉) 요한(1984. 3~1985. 9), 16대 백남익(白南翼) 디오니시오(1985. 9~1989. 8), 17대 윤영균(尹英均) 미카엘(1989. 8~1994. 8) 18대 김병재(金丙宰) 바오로(1994. 8~현재).
〔본당 설립과 초기 현황〕 대전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913년 이전이었다. 이 공동체는 옥천(沃川) 본당 소속이었는데, 옥천 본당의 제2대 주임 이종순(요셉)신부가 1913년 성탄 때 대전 신자들의 방문을 받음으로써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본래 옥천 본당은 공주본당의 공소로 있다가 1906년에 옥천 · 보은 · 영동 지역과 장호원(현 감곡) 본당 관할이던 괴산 · 청주 · 연기의 일부 지역을 분할받아 설립되었으며, 1914년 비룡(飛龍, 현 충북 청원군 남이면 비룡리)으로 본당으로 이전할 때까지 두 명의 한국인 신부를 본당 신부로 맞이하였다. 초대는 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였고, 2대는 바로 이종순 신부였다. 이종순 신부는 대전의 신자 공동체를 알게 되자마자 앞으로 크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대전 지역에 공소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고, 대전의 신자들은 이 신부의 의견에 따라 1915년 가을에 공소 집을 마련함으로써 대전 공소가 설립되었다. 당시 대전 공소의 신자들은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신자수는 1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1916년에는 85명, 1917년에는 105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옥천 본당이 비룡으로 이전된 지 얼마 안되어 이 신부는 다시 대전으로 본당을 옮길 계획을 세우고, 1919년 초부터 9천여 평 가량되는 대지를 매입하였다. 그리고 1919년 11월 12일, 마침내 비룡을 떠나 대전으로 이전함으로써 '대전 본당' 을 설립하였으며, 이에 따라 옥천과 비룡은 대전 본당의 공소로 격하되었다.
이종순 신부가 정착한 곳은 대전군 외남면 방축리(方丑里)의 생곡(生谷, 현 대전시 목동) 마을이었다. 그는 이전 후 이미 매입해 놓은 대지 안에 있던 한옥을 임시 거처로 삼았는데, 공소 강당으로 사용하던 집은 사제관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1920년 초부터 성당 10칸, 사무실 6칸, 거실 4칸의 규모로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5월 이전에 완공하고, 그에 딸린 거실로 사제관을 이전하였다. 당시 대전 본당의 관할 구역은 대전을 비롯하여 충남 대덕군(大德郡), 연기군(燕岐郡), 충북의 청주, 영동군(永同郡), 보은군(報恩郡), 옥천군(沃川郡), 괴산군(槐山郡) 일원으로, 1920년의 신자수는 1,512명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충북 괴산에 고마리(叩馬里) 본당이 설립되고 괴산군 · 보은군 · 청주 일대가 새 본당으로 이관되면서 1921년의 신자수가 829명으로 감소하였고, 이것이 1923년에 918명으로 약간 증가하였다. 이 해 대전 시내 지역만의 신자수는 약 40명이었다. 이어 이 신부는 1921년에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1923년부터는 성당을 대전 시내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25년 독약을 먹은 한 여성 신자를 방문하였다가 누명을 쓸 것이 두려워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이임을 요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925년 6월 27일 강원도 평강의 솔모루(즉 文山里)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성장과 변모〕 이종순 신부에 이어 대전 본당의 제2대 주임으로 임명된 사람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있던 루블레(헨리코) 신부였다. 그는 본당 부임 이듬해, 기존의 작은 성당으로는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새 성당 건립에 착수하여 1927년 3월에 이를 완공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러 해 동안 앓아 온 지병이 있었으므로 이 해 10월 30일 상해로 건너가 병을 치료하던 중 이듬해 선종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부여 본당의 보좌로 있던 김인상(金寅相, 야고보)신부가 임시로 신자들을 돌보다가 1927년에 폴리(데시데리오)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3년 후인 1930년에 그가 수원 본당으로 이임하면서 박일규(안드레아) 신부가 제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본당주임은 5대 콜라르, 6대 멜리장 신부가 잠시 동안 맡았는데, 1937년 9월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대전에 진출하면서 대흥동과 본당 이웃의 목동 부지를 매입하였다. 1939년 제7대 주임으로 부임한 코르미에 신부는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에 의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대신 김유룡(필립보) 신부가 제8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코르미에 신부는 해방 후 석방되었다.
본당이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1944년 12월 제9대 주임으로 오기선(요셉) 신부가 부임하면서였다. 그는 우선 해방 후인 1945년 10월 초,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협의하여 목동 성당을 수도회에 인계하는 대신 동 수도회에서 매입해 놓았던 대흥동의 임시 성당으로 본당을 이전하였고, 10월 7일자로 본당 주보를 '성녀 소화 데레사' 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대전 본당은 '대흥동 본당' 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목동은 정식 본당이 아니라 수도회 소속의 준본당으로 변모하였다. 목동 본당이 다시 정식 본당이 된 것은 1958년이었다. 오기선 신부는 이때부터 교리 경시 대회와 교리 강좌 등을 통해 학생들의 신앙 생활을 활성화하는 데 노력하는 한편, 1947년 7월 9일에는 도(道)로부터 '충남 애육원' 을 인수받아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수녀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던 중 1948년 5월 8일, 충청남도 지역이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독립 포교지로 설정되었는데, 그 책임자로 임명된 라리보 주교가 본당 이웃에 있는 적산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거주하면서 대흥동 본당은 충청남도 포교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6 · 25 동란으로 인해 모든 활동이 일시 정지되기에 이르렀고, 특히 전란 중에 성당이 파괴되었으므로 수복후에는 노천에서 미사를 드려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인 1950년 7월 말에서 8월부터는 충청도 서산 본당의 콜랭(J. Colin, 高) 신부를 비롯하여 외국인 신부 9명과 홍성 본당의 강만수(姜晩秀, 요셉) 신부가 체포된 뒤 대전으로 옮겨져 이 가운데 7명이 9월 23일에서 26일 사이에 피살되었다.
〔주교좌 본당 설정과 발전〕 오기선 신부는 먼저 1952년 10월, 성당 신축에 착수하여 1953년 12월 14일 라리보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충청남도 사회 사업 연합회' 회장(1952~1963)을 맡아보는 동시에 1954년에는 목동 수도원 구내에 있는 전란시의 희생자 묘지에 추모비를 건립하였고, 1954년 11월에는 미군 군사 물자 원조처(A.F.A.K.)의 협조를 얻어 애육원 별관을 증축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6년에는 대덕군 산내면(大德郡 山內面)에 본당 묘지를 조성하였고, 1957년 8월 20일에는 소화유치원 설립 인가를 받아 운영하였으며, 같은 해 9월 8일에 다시 애육원사를 증축하여 축성식을 가졌다. 그러던 중 1958년 6월 23일 충청남도 지역이 마침내 '대전 대목구' 로 설정되고 라리보 주교가 이듬해 1월 11일 착좌식을 갖게 되면서 대흥동 본당은 주교좌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앞서 1958년 5월에는 목동 본당이 다시 부활됨과 동시에 대전역과 도청을 기점으로 북쪽은 목동 본당 관할 지역으로, 남쪽은 대전 본당 관할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당의 신자수는 4,20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시내의 신자수만도 3,6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성당 신축이 불가피하게 되자 신자들은 오기선 신부를 중심으로 신축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기금을 모아 1960년 3월 24일 성당 기공식을 가졌으나 아직 사회가 안정되지 않고 신자들의 생활도 어려운 형편이었으
므로 완공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다. 이에 신자들은 우선 1960년에 지하 성당을 완공한 다음, 다시 기금을 마련하여 1962년 3월 10일 지상 성당을 착공하고, 9월 8일에 상량식을 가졌으며, 12월 24일에는 마침내 이를 완공하여 강복식을 갖게 되었다. 새 성당의 건평은 523.7평으로,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조각한 14처상이 안치되었고, 제대 좌우에 성모상과 소화 데레사상이, 성당 입구 전면에 12사도상이, 성가대석에는 하몬드 오르간이 구비되어 있었다. 이후 본당에서는 1963년 3월 10일 한 신자 부부가 기증한 대 · 중 · 소의 종을 축성하였고, 라리보 주교가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1963년 5월 1일에 성당 축성식 겸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본당의 주보가 성녀 소화 데레사에서 '노동자의 성 요셉' 으로 변경되었다.
이와 같이 약 20년 동안 본당에 재임하면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놓은 오기선 신부는 1965년 6월에 대방동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이어 이인하(베네딕도) 신부가 제10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8월 10일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의 수녀들을 초청하였다. 이 신부는 1969년에 사제관 · 수녀원 · 유치원 신축 기공식을 가진 뒤 이듬해 천안 본당으로 전임되었고, 김영환(타대오) 신부가 부임하여 1971년 10월 28일에 이를 완공하고 축성식을 가졌다. 이 무렵 본당의 신자수는 1964년에 5,567명, 1965년에 6,796명으로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고, 관할 구역 또한 1958년에 확정된 그대로였다. 그러므로 본당 분할이 논의되기 시작하여 1966년 3월에 최초로 성남동 본당과 문창동 본당이 분리되었고, 9월에 대동 본당이, 1971년 7월에 신탄진 본당과 정동(현 삼성동) 본당이, 1972년 2월에 유천동 본당이, 1977년 10월에 선화동 본당이, 1980년 9월에 대사동 본당이 각각 분리되었다. 한편 1984년 3월에 제15대 주임으로 부임한 조성옥(요한)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성당 보수 공사를 실행하였으며, 제16대 백남익(디오니시오) 신부는 1986년 5월 17일 성당 제단 공사를 마치고, 이듬해 12월 11일에는 옛 교리실을 수녀원으로 개축하였으며, 1988년 2월 15일에는 교리실 개축공사를 완공하였다.
본당이 발전해 오는 동안 평신도 사도직 단체도 계속 활성화되어 왔다. 이미 초창기 때부터 부인회와 청년회등이 설립되어 신심 활동, 나눔 운동에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평신도 단체에 소속된 신자가 전 신자의 36%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많은 수가 레지오 마리애에 소속되어 냉담자 권면 및 주일미사 안내 등에 앞장서고 있고, 울뜨레아는 개인 성화 및 신앙심을 고취하는 모임을 갖고 있으며, 본당 활동과 개인 신심을 도모하는 단체로서 부인회 · 대건회 · 안나회가 활동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선교 활동에 있어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회와 자모회, 예비자를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는 청년회, 상가 돕기 및 유가족을 교회로 인도하는 연도회, 불우 이웃을 돕고 갖가지 활동을 전개하려는 취지로 결성된 콜베회와 나눔의 회, 전례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전례위원회와 복사회, 어머니 성가대와 청년 성가대 등이 있다. (⇦ 대전 본당 ; → 대전교구; 목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대전교구 편, 《대전교구 30년》, 대전교구 홍보국, 1988/ 한국교회사연구소 . 대전교구 홍보국역편,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 천주교 대전교구, 1990/ 一, 《대전교구 교세 통계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0/ 한국교회사연구소 · 대전교구 홍보국 역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5. 〔車基眞〕
대흥동 본당
大興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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