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virtus · 〔영〕vir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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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윤리 신학에서의 덕
'선(善)을 사랑하는 습성' 을 지닌 인간의 지성과 의지의 능력이 온전하게 발전된 상태 덕의 대상은 선(善) 자체이며, 덕이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생을 감수하며 내적 · 외적 장애물들을 거슬러 적극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올바른 것을 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의미한다. 이선을 향하는 습성과 힘은 인간이 자연적으로 완전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 안에 심어진 능력으로 덕을 습득해 가야 한다. 이러한 덕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완성을 의미한다.
성서는 이러한 완전한 인간상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묘사한다. 따라서 성서적인 의미의 덕이란 바로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라고 볼 수 있다. 성서에서, 완전한 인간이란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사람 그리고 하느님을 찾아내기 위하여 하느님이 그에게 지시해 주는 길을 따르는 사람이다. 오로지 이 길을 따라가야만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킬 수 있고,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덕이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키는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고, 항상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원천과 구분〕 덕의 원천은, 선 자체인 하느님이다. 즉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신뢰를 두는 것이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협조하도록 초대받은 인간의 책임을 수행하게 하는 힘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하느님께 대한 최고의 사랑"인 것이다. 덕은 그 출발점, 내용, 목적 등에 따라 자연적인 습득덕(習得德)과 초자연적인 주입덕(注入德, 또는 주부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초자연덕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직접 연관되는 믿음〔信〕, 희망〔望〕, 사랑〔愛〕의 대신덕(對神德, 또는 향주 삼덕)과 인간 서로간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현명〔智〕, 정의〔義〕, 절제〔節〕, 용기〔勇〕의 윤리덕(倫理德, 또는 사추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연덕(自然德)은 인간이 일반적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선행의 능력이다. 즉 반복되는 행습(行習)으로 얻어지는 하나의 숙달이며 일정한 선행을 기꺼이 또 쉽게 하게 만든다. 그 예로 오랫동안의 행습으로 판단력을 키우면 상황에 따라 쉽게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초자연덕은 인간이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초월자 하느님이 무상으로 베푸는 덕을 의미하며 이는 인간이 타고난 자질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거기서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바라고 초자연적 행위를 할 능력을 얻는다. 이는 하느님이 세례성사 때 주입해 주는 것이기에 주부덕(注賦德)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본 성〕 덕은 윤리적으로 선한 일을 쉽게 행할 수 있는 경향과 능력을 제공해 주는 습성이다. 윤리적 가치에 기울어지고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덕의 가장 본질적이고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그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의 정신적, 감각적 본성과 감정을 제어함으로써 자기가 존중하고 사랑하는 선을 쉽게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순수한 덕은 올바른 근본 선택(fundamental option)에서 나온다. 즉, 덕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류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실현이라는 최고 목적을 향한 명확하고 확실한 방향 설정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덕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이 방향 설정은 영신 생활 전체에 질서를 놓아 준다. 모든 개별 덕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흔들림 없는 사랑에 바탕을 둔 올바른 선택과 실존적 선택에 기초를 두는 것이라야 진실한 것이 될 수 있다.
자연덕과 초자연덕의 차이 : 자연덕과 초자연덕은 형상적 대상에 따라 구분된다. 자연덕은 인간 이성의 빛에 따라 선을 위해 활동하게 하고, 초자연덕은 신앙의 빛으로 조명된 이성에 따라 선을 위해 활동한다. 자연덕은 인간의 본성 심층에 뿌리내리고 있는 덕을 의미하며, 끊임없는 훈련에 의해 더욱 발전된다. 이러한 훈련은 개인의 인격을 완성시키고, 본능에 의한 충동이나, 사리사욕에 지배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성품을 단련시킬 수 있다. 자연덕은 그것을 습득한 방법과 똑같이 행위를 반복함으로 증가된다. 어느 한 가지 덕이 증가됨으로써 그것과 연관을 갖게 되는 다른 덕들도 동시에 증가될 수 있다. 자연덕은 인간의 고유한 행위로 습득되지만, 초자연덕은 성화 은총(sanctifying grace)과 함께 하느님이 주입한다. 그러므로 자연덕이 비록 영웅적이고 완전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초자연의 형상적 대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연덕은 단순한 자연적 습성이지만, 초자연덕은 능력에 더해진 습성이므로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능력까지 끌어 올려 초자연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자연덕의 승화를 위한 초자연덕 : 자연 본성의 생활이 은총의 생활로 승화되듯이 선한 자연적 성향과 능력도 초자연적 주입덕들에 의하여 승화된다. 이것이 교회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의화(義化)에 필요한 믿음, 희망, 사랑을 하느님에 의한 주입덕들이라고 말한다(DS 1530). 공의회는 사랑에 대해서만 무류적인 정의(定義)로 발표하였지만(DS 1561), 믿음과 희망에 대해서도 신앙으로 믿어야 할 교리로 가르치고 있다. 일반적 의견에 따르면 윤리덕도 하느님이 주입해 준 덕으로서(DS 904) 성화 은총과 함께 주입된다. 인간을 초자연적 지위에 들어올리고 초자연적 목적을 향하도록 의무가 부여되었다면 초자연적 능력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영혼과 그 능력이 자연적 능력에 속한다면 성화 은총과 주입덕들은 초자연적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덕이 주입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자연적 성향과 능력에 조화를 이루는 초자연적 성향과 능력이 주입되는 것이다. 그러한 성향과 능력 자체는 행동을 용이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초자연적으로나 자연적으로도 실천을 통하여 더 개발되어야 하며 덕으로서의 특성인 용이성을 획득해야 한다.
초자연덕과 성화 은총 : 하느님의 성화 은총에 의해 주입되는 덕인 초자연덕에서, 주입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인간이 먼저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거나, 어떤 책임을 져야 한다는 조건이 따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궁극 목적인 하느님과의 일치 또는 지복 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으로부터 성화 은총과 초자연덕을 받아야 한다. 주입되는 초자연덕의 존재와 필요성은 성화 은총의 본질상 당연하지만, 초자연덕은 사실상 성화 은총과는 구별된다. 성화 은총은 영혼의 본질 속으로 주입된 존재적 습성이고, 초자연덕은 신앙에 의해 조명된 이성의 빛에 따라 영혼이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느님이 영혼 안에 주입한 작용 습성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화 은총은 인간의 지성과 자유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향해 변화시키므로, 이 성화 은총을 받을 때 인간 존재 안에 하느님이 심어 주는 초자연덕은 이미 인간의 윤리적 삶과 종교적 생활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적 생명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준다. 성화 은총에 의해 자유로워진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이에 복종하며 사랑으로 인간 지성의 능력을 초월해 들어올려지는 것이다. 초자연덕은 영혼의 기능을 은총 질서로 상승시킴으로써 그 기능을 초자연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적 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한다.
초자연덕은 그 발생과 동일한 방법으로 증가되지는 않는다. 초자연덕은 성화 자체로써 하느님이 직접 영혼 안에 주입하지만 이 덕들의 증가는 은총의 상태에서 이루어진 초자연적 선행에 의해서, 즉 행위자의 행위에 따라(ex opere operantis) 증가되기도 하고, 성사의 힘으로(exopere operato) 증가되기도 한다. 초자연덕은 단지 주입된 습성만이 아니고, 초자연적 습성에 의해서 완성된 자연적 능력의 행동이기도 하다. 초자연덕은 대신덕과 윤리덕으로 구분된다. 윤리덕은 수단이란 관점에서 인간을 완성하는 자연 질서의 습득덕과도 관계가 있다.
〔평 가〕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통하여 구원되었고 초자연적인 질서에 들어섰기 때문에, 실제로 인간 전 존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또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협력자로서의 초자연적 생활을 위한 새로운 방향과 자격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칼 라너(Karl Rahner)가 아주 적절히 말한 것처럼,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윤리학은 자연덕과 초자연덕의 구별에 있어서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미의 실제적 질서에서 볼 때 자연덕은 초자연적 목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자연적 주입덕에 관한 교리는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덕은 인간에 있어 중심이 되지 않으며, 자기 완성을 윤리적 노력의 최후 목적으로 삼는 어떤 윤리학과도 엄밀히 구별된다. 그리스도교적 덕은 그리스도 안에 그 원천을 두며, 그리스도를 그 완성과 목표로 바라본다. 특히, 주입된 윤리덕에 대한 교리는 그리스도교적 덕의 원천과 목적을 분명히 제시한다. 즉, 그 원천은 변화 은총을 지닌 성령이며, 그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교적 덕은 주관적 형식만이 아니고 그의 소재 또는 대상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도록 우리를 재촉한다는 의미로 그리스도론적 측면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의 모범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고, 인간에게 주입되는 모든 초자연덕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갖고 있는 초자연덕의 충만성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 (⇦ 덕행 ; → 대신덕 ; 윤리덕)
※ 참고문헌  K. Rahner, Encyclopedia of Theology : The Concise Sacramentum Mundi, New York : Crossroad, 1975/ 유봉준, 《기초 윤리신학》, 가톨릭출판사, 1979/ J. Aumann, 이홍근 역, 《영성 신학》, 분도출판사, 1987/ K.H. Peschke, 김창훈 역, 《그리스도교 윤리학》 1, 분도출판사, 1991. 〔沈鍾赫〕
II . 동양 철학에서의 덕
일반적으로 인간의 훌륭한 품성, 바람직한 인격, 또는 그 발현 능력이나 발현의 결과를 말한다. 예를 들어 덕이 있다' 는 표현은 그 바람직한 인격을 말하며, 은덕 · 공덕 · 덕택 따위는 밖으로 드러난 결과를 뜻한다. '덕'이란 예법을 실천할 수 있는 기초, 곧 인간다워질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 또는 도덕성을 지칭하며 자기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기도 한다.
'덕' 의 원래 글자는 덕(惠)으로 직(直)과 심(心)으로 이루어진 형성 문자이다. 이것은 본성 그대로의 솔직한 마음이란 뜻인데, 뒤에 '彳 ' 을 더하여 솔직한 본성(양심)에 근거하는 행위를 뜻하는 지금의 '덕' (德)자로 바뀌었다. 《예기》(禮記)에서는 '덕' 은 같은 음인 득(得)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언어에서 '덕' 자가 '득' 자와 서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후대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중국 최초의 자전인 《설문 해자》(說文解字)에는 덕(惠)을 "밖으로는 남에게서 얻고 안으로는 자신에게서 얻는다" 라고 하였다. 주준성(朱駿聲)은 《설문 통훈 정성》(說文通訓定聲)에서 "밖으로는 남에게 얻는다는 것은 은혜의 덕을 말하며, 안으로는 나에게 얻는다는 것은 도덕의 덕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후한(後漢)의 유희(劉熙)가 편저한 《석명》(釋名)에서는 "덕은 득으로 일이 마땅함〔事誼〕을 얻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위(魏)의 장집(張揖)의 《광아》(廣雅)에서도 덕(德)을 득(得)으로 설명하였다. 이들은 모두 덕을 득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득' 의 의미는 반드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사상적 변천〕 유가(儒家) : 주(周)나라 초기의 문헌에 보이는 덕 자는 구체적 행위를 가리킬 뿐이고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의미는 없었다. 즉 길덕(吉德) · 흉덕(凶德)이라는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나라 초기의 문헌에서는 '덕' 자 앞에 '경' (苟)자나 '명' (明)자가 덧붙여져 좋은 의미를 나타냈고, 뒤에 와서야 '덕' 자 하나만으로 좋은 행위를 뜻하게 되었고 남에게 은혜를 주는 행위로 쓰이게 되었다. 유가 사상에서 '덕'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상서》(尙書)에서부터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왕이 삼가 행해야 할 책무는 덕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경덕(敬德)을 강조한다. 은(殷)대에는 덕을 의미하는 글자가 보이지 않다가 주(周)대에 이르러 덕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왕의 지위가 천제(天帝)의 일방적인 의지만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행동에 따라 천명(天命)이 바뀔 수 있다는 관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주대의 사람들은 천명을 받을 수 있는 능력과 자격으로서의 재능을 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덕은 하늘에 대한 종교적인 의미인 동시에 백성에 대한 인륜적인 의미를 포함한 전인격적인 정치적 재능을 뜻하였다. 여기에서도 '몸소 얻는다' 는 체득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경》에서는 덕을 위의(威儀)와 같은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덕은 의례(儀禮)로 표현된 용모나 동작 자체와 합치된다. 시경에서 "아름다운 위의는 덕의 길"이라 한 것처럼 용모 · 거동으로서의 위의를 덕과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다.
주대의 '덕' 개념은 공자에 이르러 차츰 '덕성' (德性)의 의미로 발전하였다. 공자는 천(天)을 인류의 행위와 활동의 준칙이 되는 보편적 도덕 원칙으로 보고, 그것을 실현하는 모습으로서 덕을 제시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낳아 주셨다"는 그의 말은 하늘의 덕성이 인간의 심성 속에 있으며, 인간은 하늘의 덕을 나누어 받아 자신의 근본적인 덕성으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를 떠나서는 덕을 말할 수 없다. 도는 밖에 있으므로[外在] 객관성을 가지며, 덕은 안에 있으므로〔內在〕 주관성을 가진다. 덕은 반드시 개인이 도를 행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것이니 개인의 주관적인 체득으로부터 객관성의 도에 이르며 이때 객관성의 도는 바로 주관성의 덕이 된다. 이는 덕이 각 사물에 주어진 천부적인 성격으로 지칭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자는 모든 사물에는 덕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때의 덕이란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논어》에서 "덕을 닦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내가 우려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듯이, 덕이란 완성된 상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을 키워 나갈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강조하였다. 공자는 덕이 온전하게 된 상태를 인(仁)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하면, 공자는 사물마다에 내재되어 있는 그것이 그것이도록 하는 근원적인 힘을 덕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특히 그는 인간 안에 주어져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끔 하는 덕을 인이라 하였다. 효(孝) · 제(悌) · 충(忠) · 신(信) · 공(恭) · 관(寬) · 민(敏) · 혜(惠) · 예(禮) · 의(義) · 염(廉) · 치(恥) 등의 덕목들이 모두 인에 포함된다. 군자는 천부적인 덕을 일상 생활 속에서 잘 닦아서 온전하게 성취시킨 인격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되기 위한 수기(修己)의 시작은 숭덕(崇德)에 있다. 공자는 덕이 내심의 수양을 통해 발양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덕을 기르지 않음, 학문을 연마하지 않음, 의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음, 선(善)하지 못함을 고치지 않음이 내가 두려워하는 바이다" 라고 했다. 공자에 이르러서 비로소 원시 종교적 성격의 덕이 윤리적 · 정치적인 측면의 덕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공자의 덕 개념은 맹자(孟子)의 성(性)과 연결된다. 맹자는 모든 사람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을 지닌 선한 본성이 주어졌다고 말하며, 인간이 모두 덕을 승상하여 닦을 수 있으며 또 닦아야만 된다고 하였다. 맹자는 인(仁)의 단서로서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것이라는 성선설(性善說)을 제기하여 덕의 근거를 천(天)과 결부시킨 고대와는 달리 인간의 마음 가운데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맹자에게서 덕은 성(性)과 일치한다. 명(命)이란 인간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되는 부분을 지칭하고, 성이나 덕은 인간이 닦고 키워야 될 부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공자가 덕이라고 불렀던 도덕성, 곧 닦아서 완성되어야 할 인간성을 맹자는 성이라 한 것이다. 덕은 보통 시작보다는 완성을 지칭하기 때문에 공자의 덕 개념에는 함축적으로만 제시되어 있던 도덕의 보편성을 성으로 표현함으로써 명확하게 드러내었던 것이다. 결국 맹자가 정의한 성의 개념은 축소된 협의의 것으로서 그는 인간 안에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배제한 인간 고유의 도덕성만을 성이라고 부른다고 명시한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도덕 의식이 사람의 도덕 행위를 구성하는 필요한 조건이라고 했다. 이러한 덕에 관한 인식을 계승한 송 · 명(宋明) 학자들은 덕보다는 성리(性理), 심리(心理) 등의 개념을 사용했다. 주자(朱子)는 《논어 집주》(論語集註)에서 "덕을 지킨다"는 구절을 "덕이란 얻음이다. 마음속에 도를 얻어 그것을 잃지 않음이다" 라고 해석했다. 그는 <대학》의 명덕(明德)을 성이라고 하였다. 명덕은 인의예지라는 도덕적 내용을 가진다. 사람이 받는 것을 명덕이라 하는데 덕성은 하늘에서 받은 바른 이치이기 때문에 명덕이라 한 것이다. 육상산(陸象山)은 《논어설》(論語說)에서 "도에 뜻을 두고 덕을 지킨다"는 구절을 "도란 천하 만세의 공리(公理)로서 모든 사람이 제각기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군주는 군주의 도리가 있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가 있으며 ··· 만약 그 성질 가운데 약간의 선함과 아름다움이 있어 선택하여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역시 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에 의거하여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또한 하루하루 쌓이고 발전하고 나날이 드러나고 번성하고 날로 광대해질 것이다"라고 해석하여 주자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한국 유학의 덕 개념도 중국 유학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덕을 인간의 보편적인 품성으로 보아 성과같은 의미로 본다. 이황(李滉)은 "덕' 자는 행(行)과 직(直)과 심(心)으로 이루어졌으니 곧은 마음을 행한다는 말이다" 라고 하고, 명덕의 가장 중요한 방법은 성(誠)이라고 하였다. 그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방법 중에서 학문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황의 학문이란 바로 '도덕' 이며 그 말은 '도를 얻었다' 는 뜻이다. 이것은 선험적인 존재의 질서를 후천적 노력으로 인간 생활에 내면화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덕은 공경(恭敬)을 주로 하고 인의(仁義)를 실천하여 성현의 중화(中和)의 경지에 들어가면 성립된다. 덕을 닦는다는 것은 모든 일을 정성껏 한다는 것이다. 진지(眞知)와 실천으로 공경과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힘써 꾸준히 학습하여 익숙한 뒤에, 이치가 몸에 배어 밖으로 나타나서 좌우에서 모두 그 이치의 본원을 만나게 되면, 이것이 "힘써 궁행하고 마음에 터득하여 도에 스스로 밝다"는 것이고 "덕을 밝혔다"는 것이다. 정치의 근본도 여기에 있으니 도를 얻어서 임금의 덕이 성립되면 나라가 잘 다스려져 덕치에 성공하며, 그 덕을 얻는 것은 공경에 있다고 한다. 이이(李珥)는 덕과 뜻〔意〕에 대해서 "덕이라는 것은 성(性)의 실마리이며, 뜻이라는 것은 실마리가 처음 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덕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성은 그 덕의 근본이며, 뜻은 이 마음의 가는 바이기 때문에 실마리가 처음발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덕이 온전한 것을 인(仁)이라 하는데, 인은 사람마다 그 차등이 없으나 사람의 조예가 얕고 깊음에 따라 치우침과 온전함의 차이가 있다.
도가(道家) : 노장(老莊)에서 덕은 도(道)의 본성을 표현하는 범주이다. 덕은 만물이 도에서 얻은 특수한 법칙으로, 만물은 도에서 얻어진 것이라야 비로소 자신의 속성을 형성할 수 있다. 따라서 덕은 개개 만물의 본성이고 만물 발전의 근거이다. 이것은 유가의 정의와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가에서의 도가 노장에서의 도와는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덕의 내용 또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노자(老子)는 "도는 낳는다" (道生之, 만물이 도로부터 나온다)고 하였고 "덕은 기른다”(德畜之)라고 하였다. 이는 만물이 생성된 뒤에 자신의 본성에 따라 길러지고 성장한다는 뜻이다. 노장은 윤리적인 인위(人爲) 도덕이 사람의 본성을 침식하고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소요(逍遙)의 절대 자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을 학문의 종지(宗旨)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사물의 덕이 그 사물로 하여금 생(生)을 시작하게 하고 성장·성숙하게 하는 생성(生成)의 기능을 가지고 있고, 덕에 의해 개별 사물들이 조화와 평형을 이루는 기능을 가진다고 본다. 따라서 사람의 덕도 무위(無爲)이며, 인간이 단지 무위의 일을 당하여 말로써 하지 않은 가르침을 해야 비로소 도에 합치된다는 것이다. 노장의 덕은 형이상(形而上)의 도가 천지 만물과 사회 인생 안으로 구체적으로 내려온 것이다. 도가 천지 만물을 낳을 때 덕은 만물 속에 내재되어 만물을 함양하고 빨리 성장하게 한다. 덕은 만물이 저절로 생식하게 하는 것이다. 덕은 도를 드러내고 만물을 자라게 하면서도 스스로 소유하지 않으며, 만물을 함양하면서도 스스로의 능력을 뽐내지 않는다. 덕은 만물을 성취하면서도 주재(主宰)하지 않는다. 덕은 만물에 대한 양육 작용을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덕의 특징이다. 요컨대 노장에서의 덕은 바로 완전하게 도의 자연 본성을 체현한 것이다.
유가와 도가는 덕을 주로 만물의 근원인 도로부터 만물에 부여된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유가는 덕이 정치적 · 윤리적 성격을 지닌 사회적 · 도덕적 능력과 그 기능이라고 받아들였으며, 도가는 무위자연의 성격을 갖는 덕의 특징을 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 현〕 덕은 도덕성이라고 할 수 있다. 덕은 스스로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덕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노력하지 않으면 차층 상실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덕을 길러야 하는데, 덕을 기르는 방법 가운데의 하나가 덕이 있는 사람의 실천 형태를 의식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며, 또한 학문을 통하여 덕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예를 따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학에서는 덕을 가장 잘 체득한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 군자는 인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군자의 마음가짐은 항상 덕을 숭상한다. 군자와 덕의 관계를 살펴보면, 군자는 덕을 마음에 품고 매일 이를 실천하여 고귀한 인품을 갖게 되고, 소인(小人)은 이익을 따름으로써 마침내는 비천한 품성을 갖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도달하는 모습이 달라지게 된다.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도 덕은 근본이 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을 바르게 해야 아랫사람이 그 말을 따르게 되어 남을 바로잡을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이것은 덕치(德治)인데, 덕을 가지고 정치를 하면 모든 별들이 북극성으로 향하듯이 사람들이 그에게로 모일 것이다. 공자는 "임금이 덕으로 백성을 이끌고 예로 가지런히 하는 법을 가르치면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또한 스스로 바르게될 것"이라고 하였다. 덕을 실천하는 방법은 말에서는 정성스러움〔忠〕과 믿음〔信〕을 지키고 행동에서는 의로움〔義〕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실천은 인간 생활의 바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 사이의 다양한 관계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것을 적당하게 표현하는 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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