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고종 5) 독일 상인 오페르트(Emst J. Oppert, 載拔)가 충청남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함으로써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하여금 쇄국 정책과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더욱 확대시키도록 한 사건. 일명 '남연군 묘 도굴 사건' (南延君墓盜掘事件) 또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 이라고도 불린다.
〔발단과 전개 과정]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전국 각처에서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할 무렵, 1854년부터 중국 상해(上海)에 거처를 두고 일본을 왕래하던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1866년 3월 24일(음 2월 8일), 모리슨(J.Morrison)이 선장으로 있던 영국 상선 로나(Romna)호를 타고 통상을 이유로 아산만에 정박하였으나, 해미 현감 김응수(金膺洙)에게 상륙을 거절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상해로 돌아가 영국 윤선(輪船) 엠퍼러(Emperor)호를 매입하여 모리슨을 선장으로 삼고, 8월 5일에 재차 아산만까지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해미 현감의 거부로 상륙하지 못하고 몇 날을 정박해 있던 중 조선 신자 몇몇을 만나고, 제천의 배론[舟論] 신학당 출신인 신학생 박(朴) 필립보로부터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의 서한을 받게 되었다. 당시 리델 신부는 이미 중국으로 피신한 뒤였다. 그 후 오페르트는 배를 돌려 한강 입구를 정탐하고 일시 강화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8월 29일에 상해로 철수하였다. 이 무렵 미국 상선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감사 박규수(朴珪壽)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소각되고, 이어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Roze)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두 차례에 걸쳐 한강과 강화도를 원정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가열되었다. 그러는 동안 조선에 남아 있던 페롱(Féron, 權)과 칼래(Calais, 姜)신부는 어렵게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상해로 돌아갔던 오페르트는 이후에도 계속 조선 원정을 노리던 중 페롱 신부와 조선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그들로부터 덕산에 있는 흥선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를 도굴하여 그 부장품을 가지고 협상을 하면 통상이 가능할 것' 이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오페르트는 1868년 5월에 독일인 될러(Möller)를 선장으로 삼아 기선 차이나(China)호와 소선그레타(Greta)호를 이끌고 세 번째로 조선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두 배에는 페롱 신부, 상해 영사관 통역관 출신이자 후원자인 미국인 젠킨스(F.B. Jenkins), 안내를 맡은 최지혁(崔智爀, 요한) 등 조선 신자들, 선원, 호위병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들러 무기와 도굴 장비를 구입한 뒤, 5월 9일(음 4월 17일) 아산만에 도착하여 그레타호로 갈아타고 이튿날 구만포(九萬浦)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일행은 조선인들에게 러시아군이라고 속이고 곧 덕산 관아로 달려가 습격한 뒤 군기를 탈취하고 군수 이종신(李鍾信)을 위협하여 따라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남연군 묘가 있던 덕산군 현내면 가야동(伽倻洞, 현 上伽里의 가야산)으로 달려가 묘를 도굴하고자 하였으나, 묘광이 견고한 탓에 실패하고 5월 11일 다시 구만포를 거쳐 퇴각하던 중 하리후포(下里後浦)에서 민가를 습격하였다.
〔결과와 영향〕 이 무렵 오페르트 일행의 굴총 기도 사실을 알게 된 충청 감사 민치상(閔致庠)은 즉시 별초군(別抄軍)을 조직하여 덕산으로 달려갔지만, 그들은 이미 덕산을 떠난 뒤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아산만을 출발하여 이튿날 인천 영종도 부근의 동검도(東檢島) 앞바다에 머무르며 프랑스 제독 알르마뉴(Alemagne, 亞里莽)의 명의로 된 통상 교섭 서한을 영종 첨사 신효철(申孝哲)에게 주어 흥선 대원군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경기 감사 이의익(李宜翼)을 통해 통상 거부를 표시함과 동시에 첨사 신효철로 하여금 굴총 기도 행위를 꾸짖도록 한 다음 공격하여 퇴각시켰다. 그 결과 오페르트 일행은 3차 원정 9일 만인 5월 18일에 상해로 돌아가게됨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젠킨스는 미국인에 의해 고발되었고, 페롱 신부는 프랑스로 소환되었다가 1870년에 인도의 풍디세리로 전임되었다. 반면에 영종 첨사 신효철은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조선의 쇄국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조선 사회에서는 조상의 묘에 대해 강한 숭배 사상을 갖고 있었으므로, 대원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천주교 박해를 더욱 확대하여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자들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처단하였고, 배교한 경우라도 유배형에 처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포도청과 각 도의 감영에 명하여 신자들을 수색, 체포토록 함으로써 굴총 사건이 일어난 충청도 덕산과 해미 일대는 물론 강화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일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교수형이나 참수형, 또는 타살이나 생매장 등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이 무렵 중국에 있던 리델 신부는 다시 한번 조선에 잠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도 박해는 187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내침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인해 다시 한번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 남연군 묘 도굴 사건)
※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龍湖閒錄》/ 《달레 교회사》下/ E. Oppert, A Forbidden Land, Voyage to the Corea, 1880/ 柳洪烈, 《高宗治下 西學受難의 研究》, 乙酉文化社, 1962. 〔車基真〕
덕산 굴총 사건 德山掘塚事件
德山掘塚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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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