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 본당

德源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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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바라본 덕원 수도원 겸 덕원 본당.

뒤에서 바라본 덕원 수도원 겸 덕원 본당.

덕원 면속구 소속 본당. 1927년에 함경남도 덕원군 북성면 어운리(北城面 於雲里)의 베네딕도 수도원 안에 설립되었다가 1949년에 폐쇄된 침묵의 본당. 주보는 성베네딕도. 설립 당시 원산 대목구의 소속이었으나 1940년 1월 12일에 원산 대목구가 덕원 수도원을 중심으로한 덕원 면속구와 함흥 대목구로 분리 개칭되면서부터 덕원 면속구 소속이 되었다. 관할 구역은 덕원, 문천, 고원, 영흥, 정평 등 5개 군(郡)이다. 〔교 세〕 1928년 380명, 1930년 686명, 1931년 1,063명, 1934년 1,211명, 1938년 1,331명. 〔역대 신부〕 초대 다베르나스(L.d'Avernas, 羅碧宰) 레오폴드(1927. 11~ 1944. 12), 2대 지베르츠(E. Siebertz, 池仁洙) 에른스트(1944. 12~ 1949. 5)
〔설립과 발전〕 원산 대목구가 설정된 후 회령(會寧) · 청진(淸津) · 함흥(咸興) 본당에 이어 네 번째로 설립된 덕원 본당은, 1927년 11월경 서울 베네딕도 수도원의 덕원 이전과 함께 수도원 소속 본당으로 시작되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다베르나스 신부는 성공적인 전교 성과를 거두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성직자의 공소 방문, 유능한 전교 회장의 육성과 파견, 야학의 설립 및 운영이라는 세 가지 선교 정책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사목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본당 설립 이듬해인 1928년 5월 1일에는 신자수 380명, 예비자 19명, 공소 7개소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교세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1929년 11월에 성당 건립 공사에 착공하여 1931년 12월 24일에 완공, 축성하였다. 성당이 완공됨으로써 미사 때 신자들을 수용하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본당 설립 초기부터 다베르나스 신부는 보좌인 담(F. Damm, 卓世榮) 신부, 요셉 그라하머(Joseph Grahamer, 咸要變) 수사, 오병직(吳秉稷) 전교 회장 등과 함께 관할 공소를 거의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그 후 덕원 본당에서는 계속적인 교세의 확장으로 1931년에 영흥(永興) 본당을, 1933년에 고원(高原) 본당을 차례로 분리하였다. 그러나 교우수가 계속 증가한 반면에 1932년 무렵부터는 제한된 성직자와 본당 시설의 부족으로 전교 활동에 많은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일은 거의 각 공소마다 강당과 야학교(夜學校)를 설립하여 전교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해 나간 것이었다. 야학교의 설립을 통한 선교사들의 교육 활동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달하고, '복음 선포' 와 '신앙 공동체 건설' 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4년 12월에 다베르나스 신부가 사망하면서 지베르츠 신부가 2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이후 덕원 본당은 일제와 공산당의 탄압으로 많은 수난을 겪다가 1949년 5월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과 함께 폐쇄되었다. (→ 침묵의 교회 ; 덕원 면속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