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진출한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 (Congregation of St. Ottillien O.S.B.)가 1927년 함경남도 덕원군 북성면 어운리(北城面 於雲里)에 건립한 대수도원(abbatia). 주보는 성 베네딕도. 1920년 말 서울 백동(柏洞, 현 惠化洞)에 건립된 수도원을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1949년 5월 공산당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대원장(abbas)은 원산 대목구의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였고, 초대 원장은 슈미트(C. Schmid, 金時練) 신부가 맡았다가 1930년 6월 로트(L. Roth, 洪泰華) 신부가 2대 원장에 임명되었다.
〔한국 진출과 서울 수도원〕 1909년 2월 25일, 최초로 한국에 입국한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의 사우어 원장과 엔쇼프(D. Enschoff) 신부는 가장 먼저 수도원을 건립할 부지를 물색하였다. 그 결과 1909년 7월 말에 서울 동소문(東小門) 근처의 백동에서 넓고 위치가 좋은 대지를 발견하고 이를 매입한 뒤, 9월 4일부터 정지 작업을 시작하여 12월 6일에는 임시 수도원 건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독일 모원에서는 8월에 엔쇼프 신부를 귀국토록 하는 대신 12월에는 2명의 신부와 4명의 수사를 1차 증파하였다. 이렇게 서울 수도원 설립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교황청에서는 베네딕도회의 청원을 받아들여 12월 13일자로 '서울 수도원' 을 정식으로 인가하면서 사우어 신부를 그 초대 원장으로 임명했다.
서울 수도원은 이후 순조롭게 정착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선 1910년 1월 8일에는 교황청의 인가 공문을 받자마자 지원자를 받아들일 계획을 세웠고, 다음해 2월 모원으로부터 2차 증원이 있은 뒤에는 수도원 증축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때 수도원은 1909년에 건립한 분관(分館)과 1910년 7월 정초식을 거행하여 그 해 말에 완공한 2층 본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증축 신관은 백동 언덕의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지게 되었다. 신관 공사는 1911년 봄에 착수되어 7월에는 먼저 성당이 완공되었고, 이어 9월 14일에는 성당과 연결된 3층의 새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리고 1913년 5월 15일에는 마침내 서울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대수도원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사우어 원장이 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12년 한국을 떠나 이듬해 6월 8일 성 오틸리엔의 모원에서 성성식을 가진 뒤 12월 초에 돌아왔다.
그들은 한국 진출 당시 서울 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와 약속한 대로 교육 사업을 전개하기 위하여 1910년에 우선 4년제 실업 학교인 숭공학교(崇工學校)를 개교하였고, 1911년 9월 16일에는 2년제 사범 학교인 승신학교(崇信學校)를 개교하였다. 그중에서 숭공학교는 제법 인기가 있었지만, 승신학교는 1913년 1회 졸업생만을 배출한 뒤 폐교되었다. 이와 함께 시작된 수도 성소 계몽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에는 이미 1914년에 황(黃) 보니파시오와 김(金) 플라치도 2명의 지원자가 있었고, 이들이 1923년 6월 9일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첫 서원을 하였다. 그 동안 서울 수도원은 모원에서의 증파가 계속되면서 회원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으며, 따라서 사우어 대원장은 1922년에 신학교 교수이던 슈미트 신부를 초대 원장으로, 슈넬(S.Schnell, 成來純) 신부를 부원장으로 임명하였다가, 이듬해 로머(A. Romer, 盧炳朝) 신부를 2대 원장으로, 다베르나스(L. d'Avernas, 羅碧宰) 신부를 부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덕원 수도원의 건립과 이전〕 서울 수도원은 1920년 8월 5일, 함경도와 북간도(北間島), 의란(依蘭)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원산 대목구' (元山代牧區)로 설정됨과 동시에 베네딕도회에 위임되면서 큰 변화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새 포교지로 즉시 서울 수도원을 옮길 수는 없었다. 이에 사우어주교는 먼저 1921년 5월부터 본당을 인수하고 수도원 이전 계획을 수립한 끝에 되도록 교통이 편리한 원산 근처에 새 수도원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베네딕도회가 원산 대목구의 관리를 맡게 되면서 회원들의 서울 · 원산간 왕래가 빈번해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차츰 서울과 함경도와의 거리나 시간 등이 그들의 사목 활동에 커다란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대지 물색에서부터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 마침내 원산 이웃에 있는 덕원(德源)의 어운리를 최적의 장소로 선택하게 되었다.
덕원의 수도원 부지 매입은 엑카르트(A. Eckhardt, 玉樂安) 신부가 1922년 어운리에 매입해 놓은 가옥과 부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부지 매입은 서울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던 슈미트 신부가 1923년 원산본당의 제12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는 이 매입 작업을 1927년까지 계속하였다. 한편 수도원의 설계(성당 제외)는 건축 기사인 피어하우스(K.Vierhaus, 河) 신부가 맡았다. 그는 중세의 독일 수도원 '히르사우' (Hirsau)를 모델로 하여 4층으로 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세 건축물이 'U' 자형을 이루도록 설계하였는데, 그 중앙부의 공간에는 장차 성당이 들어서도록 계획되었다. 이 설계에 따라 게르네(Petus Gernet) 수사가 정지 작업을 맡아 1926년 후반까지 계속하였으며, 12월부터 기초 공사가 시작되어 1927년 7월에는 골조와 지붕 공사가, 10월에는 1층이 거의 완공되었다. 이에 수도원에서는 10월 10일부터 이전 작업을 시작하여 1927년 11월 17일에는 이전을 마무리함으로써 마침내 덕원 수도원' 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그 이웃의 신학교 건물은 1927년 12월 1일에 낙성식 겸 개교식을 가졌으며, 중앙부의 수도원 성당 겸 덕원 본당의 성당은 1929년에 착공되어 1931년 성탄 전날에 축성식을 가졌다.
〔덕원 수도원의 생활〕 사우어 주교는 덕원 이전 즉시 수도원 안에 '덕원 본당' 을 설립하였고, 1927년 11월에는 원산 본당에 있던 슈미트 신부를 덕원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슈미트 원장은 1930년 6월 독일 오틸리엔 모원의 보좌 원장으로 임명되어 한국을 떠나게 되었고, 로트 신부가 제2대 수도원장 겸 부감목의 직책을 이어받아 수도자 양성과 수도 생활, 수도원의 일상 생활과 고유한 업무 등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한편 수도원 부원장은 덕원 이전 후에도 다베르나스 신부가 계속 담당하였는데, 그는 수도원 본당 즉 덕원 본당의 주임도 겸하였다. 훗날 부원장은 1944년 12월에 다베르나스 신부가 사망하면서, 쉴라이허(A. Schleicher, 安世明) 신부가 이어받았다. 또 수도원의 경제 살림을 꾸려 나가는 당가 신부 겸 주교 비서는 1929년 후반부터 노이기르크(P.Neugirg, 兪順和 신부가 맡았다가 1935년 초에는 엔크(D. Enk, 嚴光豪) 신부가, 1937년 후반에는 파렌코프(W.Farrenkopf, 朴偉明) 신부가, 이 해 10월 15일부터는 모르(L. Mohr) 신부가 담당하였다.
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전되고, 또 1928년에 '연길 지목구 가 설정되면서 독일 모원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회원들을 증파하였다. 또 1937년 10월 28일에는 7명의 독일 대신학생이 덕원 신학교로 전입해 오게 되었다. 이처럼 독일에서 수도 회원이 증원되는 가운데 한국인 수도자 양성 사업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속되고 있었다. 1928년 초에는 한국인 허원자가 5명, 수련자가 1명, 청원자가 1명이었으며, 이후에도 수사를 지망하는 수련자들은 비록 많은 수는 아니었을지라도 끊임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수사들의 활동 가운데에서도 특기할 만한 활동은 의료, 농공, 출판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의료 활동' 은 덕원 이전 후 가장 두드러진 역할 중의 하나였다. 이를 담당한 사람은 그라하머(J.Grahamer, 咸要燮) 수사와 김재환(플라치도) 수사였으며, 그들은 의료 활동을 통해 훌륭한 전교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그라하머수사는 1928년 5월 정식으로 일제 당국의 인가를 얻어 의원을 개설한 뒤, 서울 국립 병원 원장의 추천을 얻어 3년 동안 의사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교부받았다. 그는 이미 서울 수도원 시절에 10년 동안 공립 병원과 대학 병원에서 많은 수술을 도운 적이 있었으므로 이 자격증을 얻게 되었다. 의원 개설 후 그는 1929년 5월까지 1년 동안 약 18,880명의 환자들을 치료하였는데, 그중 14,350명은 내과 환자들이었고, 4,530명은 외과 환자들이었다. 처음 의원에서는 극빈자들에게는 무료로 약을 주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원가만을 지불하도록 하였지만, 약값을 감당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점차 무료 진료를 축소하고 약값을 올려받지 않을 수 없었다. 1929년 여름에 수도원에서는 작은 병원을 건립하였으며 1933년과 1934년에는 다시 이를 증축하였다.
다음으로 '농공 활동' 은 가장 눈부신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이미 서울에 있을 당시에 기초를 닦았던 목공장, 철공장(대장간), 농장(목축 포함) 등은 덕원으로 이전되면서 그대로 유지되었고, 이 밖에도 농장이 확대되면서 제분소가 건립되었으며, 육림 · 원예 · 양봉(養蜂) 사업이나 자물쇠 공장, 칠 공장도 새로 운영되었다. 이 중에서 목공장, 철공장 담당자들은 계속되는 성당과 여타의 건축 사업으로 언제나 바쁜 일정을 보냈으며, 농장 경영과 건축 사업은 가난한 신자들의 구빈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베네딕도회의 농공 활동, 특히 수도원 안의 공장들은 1936년 1월 21일과 이듬해 5월 7일 등 두차례에 걸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일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세 번째로 출판 · 인쇄 활동은 1927년의 인쇄소 설립에서 시작되었으며, 1930년에는 출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쇄소 책임자는 피셔(L. Fischer, 裵) 수사였다. 여기에서의 첫 결실은 용정 본당의 아펠만(B. Appelmann, 裵) 신부가 저술하여 1933년에 간행된 한글판 《미사 규식》이었고, 1934년에는 로트 원장 신부가 등사판으로 간행되어 오던 한글판 《주일 미사 경본》(450쪽)과 《성인 미사경본》을 인쇄 · 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6년에는 한글판 《미사 경본》과 《봉재 때 미사 경본》, 그리고 담(F.Damm, 卓世榮) 신부의 《아해의 미사》 등이 발간되었다. 이 밖에도 덕원 인쇄소에서는 피셔(W. Fisher, 陳道光) 신부의 《가톨릭 성가》를 1938년에 간행하였으며, 성사 안내서, 성무 일도, 기도서, 교리서, 신심서, 교리 교재, 교양 서적 등도 간행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널리 이용된 기도서인 《천주 성교 공과》(天主聖敎功課)는 서울교구에서 발행해 오던 것을 복제 허가를 얻어 발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덕원 수도원의 활동은 여러 방면에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수도원의 재정은 언제나 어려웠다. 외국에서의 원조가 줄어든 데도 원인이 있지만, 새성당과 사제관 건립, 본당의 운영비가 늘어난 때문이기도 했다. 또 1936년과 1937년의 수도원 화재, 1938년의 신학교 화재도 재정을 어렵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에 따른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사우어 주교는 1938년과 이듬해에 걸쳐 유럽 각국을 순방하여 기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이르러 신자들에 대한 수탈이 계속되면서 경제적 궁핍이 가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1940년 1월 13일에 덕원 면속구와 함흥 대목구가 분리되고, 얼마 안되어 일제가 태평양 전쟁의 발발을 기도하면서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여행이 제한되었고, 따라서 전교 활동을 하는 경우에도 경찰서에 신고하고 여행증을 받아야만 했다. 또 수도원 안에 살고 있는 독일사람과 한국 사람들은 매주 일요일 및 국공일에는 일본천황을 숭배하는 축제에 참여하도록 강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안에서의 전례는 여전히 엄숙하게 치러졌고, 농공 · 의료 · 출판 활동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수도원의 수난과 폐쇄〕 1942년 이후에는 서울과 대구 신학교의 폐쇄로 신학생들이 덕원 신학교로 편입하면서 학생들의 거주가 큰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1945년 5월, 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징발되면서 수도원 건물이 학교 겸 숙소로 이용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맞이한 8 · 15 해방과 소련군의 진주는 더 큰 수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덕원 수도원은 북한에서 가장 큰 공동체로 한국인과 독일인 성직자 · 수도자 · 신자 등 100여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도원 안에 정미소, 포도주 양조장, 인쇄소 등을 운영하는 한편, 수도원 소유지를 경작하여 식생활을 자체 내에서 해결하였으며, 함경도 천주교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소련군 그리고 그 후에 수립된 북한 공산 정권은 이러한 덕원 수도원을 적대시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토지개혁령을 이유로 농지와 전답들을 몰수하였다. 그리고 1948년에 들어와 마침내 정치 보위부에 명하여 덕원 수도원을 폐쇄하도록 하였다. 이때 먼저 수도원의 경리 책임자인 엔크 신부가 포도주 불법 제조와 탈세의 명목으로 12월 1일에 체포되었다. 이어 1949년 3월 24일에는 해성학교의 오병주(吳秉珠, 요셉) 부교장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며, 4월 28일에는 덕원 인쇄소의 책임자인 피셔 수사가 불온물 인쇄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난의 서곡에 불과하였다. 본격적으로 성직자 · 수도자들이 체포된 것은 1949년 5월 9일 밤이었다. 이날 10시에 덕원 수도원 앞 뜰에 수십 명의 정치보위부원들을 실은 트럭 한 대가 도착하였다. 대수도원은 순식간에 그들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그들은 즉시 사우어 주교와 로트 원장 신부, 쉴라이허 부원장 신부, 신학교의 클링사이즈(R. Klingseis, 吉世東) 신부 등 4명을 체포하여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하였다. 이튿날 정치 보위부원들은 다시 수도원에 침입하여 신학교의 로머교장 신부 등 독일인 신부 8명, 수사 22명, 한국인 성직자 4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을 합친 99명을 학교에서 내쫓고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하였다. 이로써 22년 간 함경도 천주교회의 중심 역할을 해오던 덕원 수도원과 덕원 신학교는 완전히 폐쇄되었다.
그 후 6 · 25 동란의 와중에서 덕원 수도원은 완전히 전소되었고, 그 안에 있던 많은 도서와 문화재, 귀중품등은 소실되었다. 한편 체포된 수도원 가족들은 교화소에 감금되어 있다가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전쟁 발발과 함께 '죽음의 행진' 을 겪은 뒤 1954년 1월 8일 독일로 송환되었다. 그 동안 사우어 주교를 비롯하여 25명이 희생되었고, 송환자는 42명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는 장차 덕원 수도원이 재건될 것이라 믿고, 1952년에 비테를리(T.Bitterli, 李聖道) 신부를 한국 수도 공동체의 새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휴전과 더불어 덕원 수도원 재건의 꿈이 사라지면서 베네딕도회 회원들은 왜관에 새 정착지를 마련하게 되었으며, 1955년 7월 3일에는 이곳에서 새로 건립한 수도원을 낙성하였다. (→ 덕원 면속구 ; 베네딕도회 ; 원산 대목구 ; 함흥 대목구)
※ 참고문헌 Frumentius Renner, Die Berufung der Benediktiner nach Korea und Manchukuo, Der Fünfarmige Leuchter II, EOS Verlag Erzabtei St. Ottilien, 1971(<원산교구사>, 《교회와 역사》 제53~60호, 1980. 1~8)/ A. Kaspar &P. Berger, HWANGAB(還甲), Miinster Schwarzach, 1973/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옛 등걸에 새순이》, 분도인쇄소, 1985/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사》, 분도인쇄소, 1988/ 崔奭祐, 〈韓國 芬道會의 初期 修道生活과 教育事業〉, 《韓國敎會史의 探究》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車基眞〕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德源 聖 - 修道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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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백동에 건립된 베네딕도 수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