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 면속구 소속이던 교구 신학교. 주보는 성 빌리브로르도(Willibrordous). 1921년 11월 서울 백동(柏洞, 현 惠化洞)의 베네딕도 수도원 구내에 설립된 소신학교로 시작되었고, 1927년 12월에 함경남도 덕원군 북성면 어운리(北城面 於雲里)로 이전 개교하였다가 1949년 5월 공산당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1929년 대신학교가 병설되었고, 교장은 로머(Anselm Romer, 盧炳朝) 신부가 처음부터 폐쇄될 때까지 맡았다.
〔설립과 이전〕 서울 백동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1920년 8월 5일, 원산 대목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그 사목을 담당하게 되면서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초대 교구장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는 1921년 11월 1일, 서울 수도원 구내에 소신학교를 설립하고, 그 초대 교장으로 수도원 원장이며 부주교인 로머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때 신학교의 사감으로는 부원장인 다베르나스(Leopold d'Avernas 羅碧宰) 신부가 임명되었다가 1926년에 슈넬(Sebastian Schnell, 成來純) 신부로 바뀌었다. 학교 건물로는 기존의 숭공학교(崇工學校) 교사가 이용되었으며, 교과목은 라틴어와 교리를 위주로 하고, 그 밖에 물리학 과학 · 기술 등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학생 모집은 격년제였고, 과정 연한은 예비과 2년, 중학교 6년, 철학반 2년, 신학반 4년 등 14년이
었으며, 한 학년도는 9월 1일부터 이듬해 7월 10일까지였다. 입학생들은 대부분 원산과 내평, 간도 지역에서 왔으며, 처음 입학생은 모두 33명이었다. 그러나 도중에 4명이 포기한 결과 1925년의 현황을 출신지별로 살펴보면 원산 1명, 내평 3명, 삼원봉 2명, 용정 11명, 팔도구 11명, 훈춘 1명 등 모두 29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8명은 3학년, 나머지 21명은 1학년이었다.
1925년 말이 되면서 학생수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신학교에서는 이를 모두 3학급으로 편성하게 되었다. 이 3개 학급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준비과에 18명, 라틴어과에 17명, 3학년 7명 등이었다. 교수로는 교장인 로머 신부, 다베르나스 신부, 엑카르트(Andreas Eckhardt, 玉樂安) 신부가 있었고, 이 밖에 각 전공 과목 교사들이 조선어 · 일본어 · 한문 · 산수 · 지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 산수와 지리는 2명의 조선인이 담당하였다. 한편 고학년 신학생들에게는 따로 피정도 하였으며, 기말 고사를 끝낸 뒤에는 성체 거동도 실시하였다.
이후 백동의 신학교는 1927년 11월 17일, 수도원과 함께 원산 대목구의 중심지인 덕원의 어운리로 이전되었다.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학교 건물은 1926년 말 수도원 공사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는데, 대부분 성 베드로 사업의 기금으로 이루어졌다. 학교의 형태는 2층으로, 중앙 건물과 2개의 측랑 건물로 이루어진 U자형이었고, 덕원 이전 후인 1927년 12월 1일에 완공되어 낙성식 겸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당시 사우어 주교는 건축 기금의 기부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학교 주보를 '성 빌리브로르도' 로 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덕원 신학교는 일명 '성 빌리브로르도 신학교' 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신학교 소성당은 2년 뒤에 완공되었고, 1929년 11월 7일에 축성되었다.
〔성장과 변모〕 덕원 이전 뒤에도 신학교에서는 격년제로 신입생을 입학시켰다. 그러다가 평양 대목구 출신들이 늘어나고, 원산 · 연길 출신도 점차 증가하면서 1941년부터는 매년 입학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과정 연한은 서울에서와 같이 14년이었으며, 1928년 9월에 새 학기를 시작하였을 때는 7학급 5명, 5학급 12명, 2학급 19명, 예비과 27명 등으로 소신학생만 63명이었다. 그후 신학교에서는 1929년 9월에 중학교를 졸업한 상급반 4명에게 최초로 철학반 즉 대신학교(大神學校)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들 첫 철학반 학생들은 1931년 6월 28일에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졸업식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준성(李俊成, 시몬), 최병권(崔炳權, 마티아), 김충무(金忠務, 글레멘스),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등 4명이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신학반을 구성하여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한편 학생들의 모임은 덕원 이전 후 자발적으로 발족되었다. 우선 1928년 1월에는 '덕원 신학교 학우회' 가 창립되었으며, 이들은 회지로서 월간 《등대》(燈臺)를 발간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부터 학생들을 중심으로 신학교 도서관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고, 1933년에는 교지 《신우》(神友)가 창간되어 3월 17일에 창간호를 발간한 뒤 약 6년 간 지속되다가 1939년에 폐간되었다.
덕원 신학교에서는 5명의 신부가 철학 · 물리학 · 라틴어 · 교리 · 교회사를 가르쳤고, 2명의 한국인이 조선어와 한문 · 동양사를 담당하였으며, 1명의 일본인이 일본어와 수학을 가르쳤는데, 교수진은 매년 약간씩 변동이 있었다. 1937년에는 사감이던 슈넬 신부가 치료를 위해 독일로 귀국하면서 비테를리(Timotheus Bitterli, 李聖道) 신부가 신학교 사감 겸 교수로 임명되었다. 특히 1931년부터는 피셔(Wolfram Fischer, 許) 신부가 음악과 함께 관현악단(管絃樂團)을 지도하였으며, 1938년 8월에는 그 활동이 수도원 경리인 노이기르크(Placius Neugirg, 俞順和 신부에게 위임되었다. 1931년 9월부터 신학반이 생기면서 교리 신학과 성서는 쉴라이허(Armuf Schleicher, 安世明) 신부가, 윤리 신학은 로트(Lucius Roth, 洪泰華) 수도원장 신부가, 교회법과 사목 신학은 브란들(Alexsius Brandl, 張仁德) 신부가, 전례학과 교부학은 밀레만(Honorat Millemann) 신부가 담당하였다. 그 후 교리 교수법과 설교학이 첨가되었는데 이것은 원산 본당에 있던담(Fabian Damm, 卓世榮) 신부와 콜러(Eligius Kohler, 景道範) 신부가 신학교를 왕래하면서 각각 담당하였다. 당시까지 신학교는 정식으로 설립 인가를 받지 않았었다. 이에 신학교에서는 인가 준비를 갖추어 1935년 2월 10일 함흥 도청으로부터 공적 인가를 받아 5월 14일에 다시 개교식을 가졌다. 인가 당시의 학제는 5년의 중학 과정, 2년의 고등학교 과정, 2년의 철학과, 4년의 신학과였다.
덕원 신학교에서 최초로 사제를 탄생시킨 것은 서울 소신학교가 설립된 지 14년 6개월 만인 1936년 성삼 주일(현 삼위 일체 대축일)이었다. 이 해 2월 23일에 부제품을 받은 김충무와 한윤승 부제가 사우어 주교로부터 서품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두 명은 연길교구 출신이었다. 원산교구 출신으로 가장 먼저 덕원 신학교에서 서품을 받게 된 경우는 두 번째 서품식 때였다. 1937년 9월 26일에 부제품을 받은 임화길(林和吉, 안드레아) 부제와 12월 8일에 부제품을 받은 김보용(金寶容, 루도비코) 부제, 그리고 연길교구 소속인 신윤철(申允鐵, 베드로)이 1938년 3월 21일에 사제로 서품된 것이다. 김 루도비코와 함께 부제품을 받았던 덕원 출신 최병권은 병 때문에 4월 초에 따로 서품식을 갖게 되었다.
〔수난과 폐쇄〕 1938년 9월 23일, 덕원 신학교는 화재로 전소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화재 당시 사우어 주교가 독일 여행 중이었으므로 로트 원장 신부가 재건 사업을 맡아 재건립에 착수하였다. 이때 평양교구의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우선 착수금을 빌려 주었고, 네덜란드의 보험 회사에서도 16만 마르크의 보험료를 지불해 주었다. 새 건물 설계가 인가되고 복구 작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0월에 이르러서였는데, 새 건물은 기존 건물보다 한 층이 더해져 3층으로 설계되었으며, 성탄 전날 완공되어 12월 26일에 입주식을 갖게 되었다.
1940년 이후 신학교 교과 과정에는 약간 변동이 있었다. 이에 따라 1940년부터 조르거(Gregorius Sorger) 신부가 영어를 담당했으며, 1941년부터 밀레만 신부가 세계사를, 람로트(Odilo Ramroth) 신부가 성서 주해를, 최병권신부가 교회사를 강의하였다. 그러나 이 해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 총독부에서는 모든 단체와 집회를
단속하기 시작하였고, 1942년 2월 16일에는 제10대 서울 대목구장인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에게 정식인가를 받지 않은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를 폐교하도록 하였다.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 또한 이듬해에 폐교되었다. 그 결과 이 두 신학교의 학생들이 모두 정식 인가를 받은 덕원 신학교에서 위탁 교육을 받게 됨으로써 신학생수가 모두 1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후 1945년 5월 무렵, 신학교 건물이 일본군에게 징발되었으나 곧 해방이 되면서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1946년 여름 초에는 식량난으로 어쩔 수 없이 방학을 하였고, 그해 가을 이북에 있는 학생 약 40명을 모아서 다시 개학하게 되었다. 이때 남한의 신학생들은 모두 남하한 상태였다.
신학교의 수난은 북한 교회와 마찬가지로 1945년 8월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학교는 계속 운영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49년 5월 9일, 북한 공산당에 의해 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수도원 식구들이 체포되고, 이어 5월 11일에 교수 신부들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같은 날 신학교 건물이 몰수됨으로써 덕원으로 이전된지 22년 만에 신학교는 폐쇄되었다. 이때 신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본가로 귀가하였고, 그중 일부 신학생들은 남하하여 혜화동의 '천주공교신학교' (天主公敎神學校)로 편입하였다가 훗날 사제로 서품되었다. (→ 덕원 성베네딕도 수도원 ; 베네딕도회)
※ 참고문헌 Frumentius Renner, Die Berufung der Benediktiner nach Korea und Manchukuo, Der Fünfamige Leuchter I , EOS Verlag Erzabtei St. Ottilien, 1971(<원산교구사>, 《교회와 역사》 제53~60호, 1980. 1~8)/ A. Kaspar & P. Berger, HWAN GAB(還甲), Miinster Schwarzach, 1973/ 崔奭祐, 〈韓國 芬道會의 初期 修道生活과 教育事業〉, 《韓國教會史探究》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車基眞〕
덕원 신학교
德源神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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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거행한 개교식 모습(1935년 5월 14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