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 오웬 니켈슨 (1838 ~ 1900)

〔영〕Denny, Owen Nick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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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이 유리창으로 장식된 데니의 저택. 오른쪽이 데니.

전면이 유리창으로 장식된 데니의 저택. 오른쪽이 데니.

고종(高宗)의 법률 외교 고문. 한국명은 덕니(德尼) 조선에서의 공식적인 직함은 가선대부 협판 내무부사 겸 외아문 장교사당상(嘉善大夫協辦內務府事兼外衙門掌交司堂上)으로서 묄렌도르프(Möllendorf)의 후임자였다.
미국 오하이오 주의 몰간(Morgan) 출신으로, 1838년 9월 4일 크리스챤(Christian)과 엘리자(Eliza) 사이에서 태어난 데니는, 당시 미국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었던 서점운동(西漸運動, Westernward Movement)의 영향을 받아 1852년 부모를 따라 다섯 형제 자매와 함께 서부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오리건 주의 린(Linn)에 정착한 후, 부친이 곧 사망하여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레바논 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오리건 주의 수도인 살렘에 있는 월마트 대학에서 법률학을 전공, 1862년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법률가로서의 첫 활동을 더댈리스에서 시작한 데니는, 오리건 주지사 깁스(A.C. Gibbs)에 의해 공석중인 와스코의 판사직에 임명되어 1868년까지 봉직하였다. 1868년 12월 23일 화이트(G.H. White)와 결혼하여 잠시 산 호세(San Jose)에 거주하던 중 1870년 포틀랜드 즉심 법원 판사로 선출되었다. 1874년 그란트(Ulysses S.Grant) 대통령에 의해 오리건 · 알래스카 내국세 징세관에 임명되어 3년 동안 봉직하였다. 그 사이 아모이 또는 중국 주재 미국 영사로 추천되었으나 이를 수락하지 않던 중, 1877년 5월 23일 중국의 천진 주재 미국 영사로 임명되어 9월 20일 부임하였다.
천진의 영사직은 상해 다음가는 요직이었는데 데니는 외교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 지식으로 치외법권에서 발생되는 미국인의 형사 · 민사 사건을 능숙하게 처리하였다. 또 천진은 청(淸)의 정치 외교를 총지휘하고 있는 북양 대신 직예 총독(北洋大臣直隸總督) 이홍장(李鴻章)의 정치 무대였으므로 데니는 그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는 서양의 기술을 이용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정치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자강 운동(自强運動)의 중심 인물이 이홍장임을 깨닫고 당시 북경 주재 미국 공사인 조지 시워드(G. Seward)에게 '이곳 영사직은 다른 곳보다 정치적인 곳 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는 다른 많은 서양인들처럼 중국의 관료주의적 행정에 번번히 좌절을 느끼게 되었으나, 이홍장의 막강한 정치적 세력을 믿고 특히 산업 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다. 한편 자국의 공화당과도 긴밀한 유대를 갖고있던 데니는, 하야한 그란트 대통령이 1879년 동북 아시아 여행을 계획하자 즉시 그를 천진으로 초청, 이홍장과의 회담을 직접 주선함으로써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 회담에서는 주로 류큐(琉球) 열도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이를 위해 데니는 1879년 8월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의 일본에서의 외교 활동이 중국에 큰 이익이 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홍장의 신뢰를 더욱 굳어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1880년 3월 23일에는 상해 총영사로 승진되었다.
한편 당시 중국에 와 있던 미국 외교관들 사이에는 경제적 이권을 남용하는 독직(瀆職)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독직자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전(前) 국무 장관 월리엄 시워드(W.H. Seward)의 조카로서 일찍 중국에 정치적 기반을 마련한 조지 시워드와 데니의 의견이 대립되어 결국 타협할 수 없는 불화 관계로 발전되었다. 이로 인해 데니는 1880년부터 3년 동안 근무해 온 상해 총영사직을 그만두고 1884년 3월 고향 포틀랜드로 돌아갔다. 데니는 7년 간의 중국에서의 외교관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으나 천진 · 상해에서의 활동으로 동아시아 외교 문제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을 얻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실력자 이홍장과의 친분은 큰 수확이었다.
이홍장과의 교분으로 데니는 1884년 9월 이홍장에 의해 해임 · 소환된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고종의 제2대 고문에 추천되었다. 즉 1885년 7월 이홍장은 고향에 가있던 데니에게 전보를 쳐 조선 정부의 고문직을 요청하였다. 이를 수락한 데니는 그 해 12월 29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요코하마와 천진을 거쳐 1886년 3월 28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1890년 4월 15일까지 4년간 법률 · 외교 고문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정치 · 외교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며, 1891년 1월 22일 조선을 떠나 같은 해 6월 미국 고향에 도착하여 1900년 사망할때까지 포틀랜드 은행의 임원으로, 1892~1896년에는 주의원을 지냈다.
〔한국에서의 활동〕 데니가 조선에 부임하였을 때 조선은 청 · 일 · 러의 이권 쟁탈장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과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부심(腐心)하던 이홍장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국인 총세무사 하트(R. Hart)의 충고를 받아들여, 중국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미국인 고문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청국 총세무사로 일하고 있는 22세의 미국인 청년 메릴(H.F. Merril)을 1885년 10월 14일 판리조선 해관 세무사(辦理朝鮮海關稅務司)에 임명하였고, 필렌도르프의 후임으로는 오랫동안 사귀어 오던 데니를 파견하였던 것이다.
1886년 4월 2일 이홍장의 신임장을 바탕으로 데니에게 부여된 직위는 외부(外部)의 고문으로만 활동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으며, 그 직책은 당시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있던 원세개(袁世凱)의 지배 아래 종속된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홍장과 교섭할 때 데니의 역할은 결코 외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전반적 고문직으로 청국 대표 원세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이홍장과 원세개는 데니를 청국측의 요구에 따라 쉽게 조종될 인물이 아니라고 간주하여, 철저히 친청적(親淸的)인 김윤식(金允植)의 외부에 소속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자신의 세력이 분명히 미치는 내부(內部)에 데니를 임명하려는 계획으로, 4월 7일 협판 내무부사 겸 외아문 장교사당상직에 임명하였다. 이후 고종을 보필하는 과정에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데니는, 조선이 청 · 일 · 러의 틈바구니에서 존립조차도 절박한 상황임을 목격하고 조선의 정치적 독립과 경제 개발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시 조선의 최대 현안 중의 하나는 한불 조약 체결 문제였다. 1882년 한미 조약을 필두로 영국 · 독일 · 러시아 등이 모두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프랑스와는 종교의 자유 문제로 교섭이 지연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선교사의 보호와 신앙의 자유를 반드시 조약문에 삽입하려고 하여, 이를 반대하는 조선측과 팽팽히 대립하였다. 1885년 코고르당(G.Cogordan)을 전권 대신으로 임명한 프랑스 정부는, 이홍장의 협조를 얻어 조약 체결을 추진시키고 있었다. 1886년 5월 11~12일 외무 독판 김윤식과 코고르당의 1차 협상이 별성과 없이 끝나자, 5월 25일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김만식(金晚植)을 전권 대사로 한 2차 협상이 재개되었다. 여기에 참여하게 된 데니는, 종교 자유의 조항과 함께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라는 조건을 명시할 것을 요구한 청국측의 입장이 반영된 프랑스측의 제안이 조선의 거부로 계속 난관에 부딪히자, 고종에게 이로 인해 생길지도 모를 정치적 결과를 제시하였다. 이에 비로소 고종 자신도 진퇴양난의 입장을 깨닫고 데니의 타협안을 수용하였다. 어떤 특별한 조항을 삽입하여 선교의 자유를 명시하는 대신에 조선과 체결한 기존의 수호 통상 조약 가운데 한 조항을 수정하여 선교의 자유를 암시하는 데 그치자는 것이었다. 즉, 한영 조약의 제9조에 "양국민이 왕래하며 언어 · 문자 · 격치(格致) · 율례(律例) · 기예(技藝) 등을 학습하는 데 상호 보조와 편의가 제공될 것이다"라고 한 표현 가운데 학습이란 말 다음에 '혹교회' (或敎誨)라는 세 자를 추가하여 한불 조약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 '교회' 라는 어휘가 다소 모호하기는 하였으나, 결국 조선에서의 신앙의 자유를 합법화하는 기초가 되었다. 6월 2일 관세 협정이 합의되고 마침내 6월 4일 조선의 전권 대사 김만식과 데니, 그리고 프랑스 전권 대사 코고르당이 한불 수호 통상 조규에 공식적으로 조인함으로써 1개월에 걸친 험난한 한불 회담은 끝이 났다. 한 나라의 대외 조약 체결에 있어 데니와 같은 외국인이 서명한 예는 한불 조약 이외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다.
또 데니는 재임 중 원세개의 내정 간섭에 반발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주장하였고, 조선 최초의 구미 사절단 파견에도 깊이 관여하여 1887년 8월 18일 박정양(朴定陽)을 주미 전국 공사로, 심상학(沈相學)을 러시아 · 영국 . 독일 · 프랑스 · 이탈리아 겸직 특별 공사로 파견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저 서〕 데니의 저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고종의 고문으로 재임하던 당시 조선을 둘러싼 청 · 일 · 러의 복잡한 세력 다툼 속에서 청 · 한 간의 관계를 조명한 《중국과 한국》(China and Korea)은 그의 해박한 국제법적지식으로 청국의 야욕을 비판한 유명한 논문이다. (→ 묄렌도르프 ; 한불 수호 통상 조약)
※ 참고문헌  R.R. Swartout, Owen Nickerson Denry and the Inter-national Rivalries in Korea, 1885~1890, Ph D. diss., Washington State Univ., 1978/ A.C. Nam ed., The United States and Korea : American-Korean Relations, 1866~1976, Western Michigan Univ., 1979/ 崔奭祐, 〈韓佛條約과 信教自由〉, 《史學研究》 21호, 1969/ 崔鍾庫, 《法史와 法思想》, 博英社, 1980/ 洪淳鎬, 《韓國國際關係史理論》, 大旺社, 1993/ O.N. Denny, China and Korea, Shanghai, Kelly & Walsh, 1887(金源模역, 〈清韓論〉, 《東洋學》 10집, 단국대학교 부설 東洋學研究所, 1980). 〔洪淳鎬〕